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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 어사, 조선을 뒤흔들다!-184화 (184/298)
  • 184화. 귀향

    그러나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선물은 그리 쉽게 우리 곁에 찾아오지 않았다. 다시 나날이 생기를 잃어가는 하연의 모습을 보며,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어 마음만 계속 아파올 뿐이었다.

    사쓰마 원정의 뒤처리 때문에 나랏일이 또다시 산처럼 쌓여있음에도, 나는 이를 악물고 야근을 하지 않으려 애를 썼다.

    네덜란드로 떠나기까지 분명 시간은 한정되어 있었고, 그 안에는 최선을 다해야 했으니까.

    임금의 인사이동 역시 제때 시행되었다.

    장인어른 김육이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자리에 오르고, 나는 예정되었던 예조판서 자리로 이동했다. 거기에 감투 하나가 더해졌으나 그것은 아직 사용하기에는 조금 이른 감투였다.

    “축하하네, 성근! 아, 이제 예판 대감이라 불러야 하나? 우리가 첫 등청하던 날처럼 궐내에서는 위아래를 구분하라며 또 일침을 놓을 텐가?”

    “일정, 그걸 아직까지 쌓아놓고 있었는가? 자네도 참 대단하구만.”

    이제 송시열의 마수에서 벗어난 좌명이 찾아와 내게 축하를 전했다. 놈의 얼굴은 펴져 있지만 글쎄, 얼마 안 있어 승정원 업무를 본격적으로 시작해보면 생각이 달라질 것이다.

    “암, 대단하고말고. 이립(而立, 30세)가 되기 전에 판서를 단 자의 벗이니, 나를 대단하지 않다 말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오늘 축하의 반주 한 잔 할 텐가? 승지들이 자리를 만들자 하던데.”

    “마음은 고맙지만 사양해야겠네. 하란타로 출발하기 전까지는 그럴 시간이 없다네.”

    “그런 게 어디 있나! 위아래를 잠시 잊고 전 상관을 손볼 수 있는 날인데! 성근 자네, 승지들의 작은 기쁨을 그렇게 앗아갈 텐가? 매정한 사람 같으니라고.”

    좌명의 제안을 가볍게 흘려냈다. 술도 못 먹는 놈이 또 남한테 술을 먹이려고. 사실 그동안 내가 승정원에서 승지들을 갈궈댄 것을 생각하면 좋은 꼴을 볼 리가 없기도 했다.

    “자꾸 그러면 자네도 하란타로 끌고 가 버리는 수가 있다네. 아마 그렇게 되면 아주머님 손에 자네 목숨이 안 남아날 텐데?”

    “내 동생 눈에 눈물이 나게 만든 사내가 말은 잘하는구만. 됐네, 됐어. 선진만 여기 있었어도 자네를 강제로 술자리에 끌고 갈 수 있었을 텐데, 아쉽게 됐네 그려.”

    “대놓고 장인어른의 하수인이 되어 이번에는 의정부로 끌려갔으니 우리를 만나러 올 여유가 있겠는가. 하하. 나는 장인어른께서 그렇게 사형 같은 망나니를 잘 다루실 줄 몰랐다네.”

    충신은 목줄이 채워진 채 영의정이 수장으로 있는 의정부로 끌려갔다. 말이야 영전이지, 김육의 노예 처지인 것은 달라지지 않을 터였다.

    그래도 전직인 호조 별제에 비하면 훨씬 명예로운 자리다.

    대신의 추천이 없으면 임명될 수 없고, 깨끗하고 화려하다는 평가를 받는 자리가 충신이 임명된 의정부 검상(檢詳)인 것이다.

    충신이 조회에 참석하던 첫날 얼굴을 잔뜩 구기고 인정전에 나타난 것이 떠올랐다. 정오품관들이 서는 저 끝자리가 아닌, 영의정 근처 가장 좋은 자리에서 임금을 알현하면서도 똥 씹은 표정은 그대로였던 충신이었다.

    “그렇게 온갖 일을 다 맡으며 뼈를 갈아 정오품 청요직을 받았다면 괜찮지 아니한가. 물론 선진은 어떻게든 아버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 애를 쓰고 있는 것 같지만 말일세.”

    “안 그래도 이번에 한 번은 자유를 찾게 될 걸세. 사형이 원하는 남경은 아니겠지만 적어도 한양에서는 당분간 벗어날 수 있겠지.”

    “한양을 벗어나? 아, 설마.”

    “내가 도승지 자리에서 마지막으로 처리한 업무가 마패 발급이었다네. 그것도 두 개나. 무슨 뜻인지 알겠는가?”

    원래 마패는 승정원에서 발급하는 것이고, 어사 파견은 임금의 의지로 이루어지는 것이니 나만 알 수밖에 없는 정보였다. 잔뜩 낮아진 내 목소리를 듣자마자 좌명의 입이 딱 다물어졌다.

    안 그래도 좌명은 승지로 공식 부임하기 전 순찰어사 겸 독운어사로 지방에 파견될 것이라는 통보가 내려간 상태였다. 내 암행 이후로 어사가 청요직 신하들이 통과하게 될 일종의 의례가 되었으니 정해진 순서기도 했다.

    “아니, 설마 나는 순찰어사로 보내면서 누구는 암행을 보내는 것은 아니겠지? 이건 불공평한 처사일세! 나도 자네처럼 관아 문을 박차고 ‘암행어사 출두야!’를 외치고 싶었단 말일세!”

    “그러기에 누가 얼굴에 그리 귀티를 달고 태어나라고 했는가? 이건 전하의 결정이기도 하니 입 다물고 따르기나 하게.”

    “허어, 암행을 못 나간다는 이야기에 안사람이 실망을 많이 했단 말일세. 어떻게 지금이라도 전하의 마음을 돌릴 수는 없겠는가? 자네라면 가능한 일이 아닌가!”

    “암행이 가능해야 암행을 보낼 것이 아닌가! 세상 어느 누가 자네를 지나가는 선비로 볼 것인가? 쓸 데 없는 생각 말고 영남 백성들 사정을 살피고 대동미 수송을 감독할 계획이나 짜게.”

    징징대기 시작한 좌명 때문에 머리가 아파오기 시작했다. 충신이 암행을 나가기로 결정되었다는 소리에 그리도 배가 아팠나.

    꼬우면 그렇게 눈에 띄게 잘생기질 말았어야지. 어느 누가 봐도 귀한 댁 서방님인데 지방에 좌명 같은 선비가 나타났다가는 바로 소문이 돌기 마련일 것이다. 일반인 행세가 불가했던 송시열 역시 그래서 암행을 나가지 못했었지, 아마.

    그에 비하면 성균관 시절부터 유생보다 망나니 그 자체였던 충신은 최고의 암행어사감이다. 상인과 일꾼들과 자주 부대낀 덕분에 위장도 능숙할 것이고, 몸도 잘 쓸뿐더러 방자로 쓸 총통위 병사들과도 심양시절부터 친분이 두터웠으니.

    ‘강 별제가 암행어사라……. 그 결과가 꽤나 기대되는구나. 그동안 암행을 다녀왔던 신료들 중 너만한 결과를 들고 온 이는 역시 찾아볼 수 없었는데, 이번에는 기대를 걸어 봐도 되겠느냐.’

    ‘형님도 그를 암행어사로 삼으려 마음먹으신 것은 꽤 오래된 일이 아닙니까. 사실 저도 꽤 훌륭한 결과가 나오리라 예상하고 있습니다만.’

    ‘네 장인, 영의정이 강 별제를 잠시도 놓아주지 않으려 내게 어찌나 강짜를 놓아댔는지 아느냐. 이번에 외관직이나 어사를 보내지 않으면 그를 의정부 검상으로 보낼 수 없다 엄포를 놓고서야 가능했던 일이다.’

    아마 충신이 그렇게 미치도록 갈린 것은 김육뿐만이 아니라 내수사를 운영하며 충신의 힘을 자주 빌리는 중전마마 탓도 있지 않았나? 시치미를 뚝 떼고 충신에게도 상세한 보고를 반드시 올리게 하겠다 다짐하는 임금의 얼굴에는 묘한 미소가 떠 있었다.

    중궁전 옆에 새로 지어진 중전마마의 서고에 이번에도 신간이 하나 더 꽂히겠구만. 임금 부부가 반드시 필요한 나랏일에서 취미를 찾는 것을 칭찬해야 하나, 나랏일에 사적인 감정을 개입시키는 것을 비판해야 하나, 이거 참.

    ***

    예조판서가 되어 처음 맞이한 조회에 대해 한 줄로 감상을 표하자면, 정신이 없었다.

    평소와 달리 큰 건이 여럿 논해지긴 했다.

    가장 먼저 일본 에도에 드디어 교역선이 들어가 첫 공식 무역을 마무리 짓고 귀환한 건에 대한 사후평가가 조정에서 벌어졌다. 사쓰마 정벌 덕분인지, 조선의 교역함대가 세토 내해를 통해 에도까지 왕복하는 동안 해적은 한 놈도 보이지 않았다고 했다.

    임금이 예물로 보낸 호피에 쇼군은 금박 병풍을 보내 답해왔다. 정작 휘황찬란한 병풍을 열 개나 수령한 임금은 이럴 돈으로 구리나 더 보내는 게 나았다며 퉁명스레 중얼거렸지만 말이다.

    막부에서는 통신사가 방문했을 때 인기였던 도화서의 화원(畵員)을 몇 파견해달라 요청해오기도 했다. 그 건은 왜란 때 일본에 잡혀간 조선인들의 후손을 돌려보내는 일에 관한 협상이 마무리 되는대로 다시 논의하기로 매듭지었다.

    “전하, 그 말씀은…….”

    “신료들은 듣지 못하였는가? 세자를 하란타 사절단에 포함시키겠다고 했느니.”

    두 번째 논의는 네덜란드 사절단에 세자를 포함시키는 건에 대한 논쟁이었다.

    어찌 국본을 먼 땅으로 보낼 수 있냐는 반대가 꽤 거세긴 했다. 다만 한당과 산당 모두 전현직 영수의 손자들이 세자를 궁에서 탈출시키는 사고를 친 바람에 기세가 한풀 꺾인 상태라 다행이었다. 이렇게 되면 녀석들이 사고를 친 일에 감사해야 하나.

    하지만 세자를 국외로 보내는 일이 혹여나 나쁜 전례를 남길 수도 있다는 주장만은 꺾기 어려웠다. 이번에 대사헌으로 승진한 송시열이 직접 들고 나온 반론이었다.

    “저하의 하란타 방문이 볼모를 바치는 것으로 비칠 수 있다?”

    “그렇소, 예판. 전례가 없던 일을 시행하려면 미래도 고려해야 하는 법이오. 혹여나 훗날 이번 일을 핑계로 들어 국본을 제 나라로 요구하는 사례가 없다고 어찌 장담할 수 있겠소.”

    “흐음…….”

    “물론 하란타와의 친선을 위해서는 대군 대감보다는 세자 저하를 보내는 것이 효과가 좋을 것이라는 예판의 주장에도 일리가 있소. 허나 득과 실을 따졌을 때 실이 더 크다는 것이 내 판단이오.”

    하긴 지금 임금부터가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갔다 귀국한 세자 출신이니 송시열의 염려도 이해가 가는 상황이다. 그 때문일까, 송시열의 강력한 주장은 조정의 나머지 자잘한 반대여론을 모조리 잠재우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이 상황은 이미 송시열과 사전에 이야기가 된 것이었다. 물론 아주 계획된 쇼는 아니고, 송시열이 자신의 질문에 답안지를 준비하라 미리 넌지시 찔러준 것에 불과하지만 말이다.

    제대로 된 명분을 준비하지 못하면 자신도 반대를 거두지 않을 것이라며 송시열은 엄포를 놓았었다. 물론 그 엄포는 단순히 나를 향한 것이 아니라 조정의 원활한 운영을 위함이라는 것을 나 역시 잘 알고 있다.

    “온당한 지적이오. 허나 대사헌이 간과한 것이 하나 있소.”

    “간과한 것이라니, 그것이 무엇이오?”

    “저하께서 사절단에 들어가시게 된 이유는 단순히 하란타와의 우호를 위해서만은 아니오. 그분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 하란타에 있기 때문이기도 하오.”

    “저하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라. 저하께서 가능한 일이라면 보통은 봉림대군께서도 가능한 일이 아니오?”

    송시열의 눈이 가늘게 변했다. 꽤나 내 답변이 기대가 되는 모양이었다.

    “대사헌, 전하께서 직접 내탕금을 하란타의 동인도회사에 출재하신 일은 대사헌도 잘 알고 있지 않소? 앞으로 보위를 이으실 저하께서 그 실상을 시찰하실 필요는 반드시 있을 터.”

    “아아……. 하긴 내수사와 내탕금은 전하께서만 관리하실 수 있는 것이긴 하구려.”

    “오히려 지금이 아니면 어려울 일이기도 하오. 저하께서 더 장성하시면 학문을 익히고 나랏일을 배우시는 데도 시간이 모자라지 않겠소?”

    임금이 지난번 조선을 방문한 특사에게 현물로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에 엄청난 양을 투자한 일을 모르는 조정 신료는 없을 것이다. 지금이 아니면 투자된 것이 어떻게 굴러가는지 세자가 직접 볼 기회가 없으리라는 내 항변은 꽤 효과가 뛰어났다.

    결국 송시열이 제시한 가장 강력한 반론을 꺾은 덕분에 세자를 네덜란드로 보내는 일은 약간의 진통을 남기고 무사히 마무리되었다. 세자를 탈출시킨 벌로 석주와 만중 역시 네덜란드로 가게 되었음은 물론이다.

    ***

    “그것이…… 그것이 정말이오, 선생?”

    “예. 가시죠, 고향으로.”

    세자와 봉림대군이 네덜란드의 사절단으로 파견되는 것이 결정된 날 저녁, 나는 요안이를 데리고 박연의 집으로 향했다. 당연히 사절단의 첫 일원은 이 사람이어야 했으니까.

    “아버지! 괜찮으세요?”

    “요안아, 가만히 있거라.”

    딸의 염려에도 불구하고 잠시 나간 박연의 넋은 쉽사리 돌아오지 않았다.

    늘 자신이 조선인이라 강변하던 박연이었지만, 고향을 다시 볼 수 있게 되었으니 그 마음이 오죽하겠는가.

    그것도 단순한 귀향이 아닌, 수십 년 만의 귀향이다.

    “미안하오, 선생. 내가 추태를 부렸구려.”

    “괜찮습니다. 판관 어른의 마음은 저도 충분히 이해하고 있습니다.”

    아직도 눈가가 파르르 떨리는 박연은 애써 내게 사과를 전했다. 하지만 박연의 기분은, 지금 조선에 있는 사람들 중에는 내가 가장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고향으로 절대 돌아갈 수 없을 처지였던 것은 박연과 내가 다르지 않았으니까.

    박연은 숨을 크게 호흡해가며 정신을 가다듬으려 애썼지만 그리 쉽지 않은 모양이었다. 금발벽안의 판관은 결국 평상심을 유지할 수 없다고 생각했는지 내게 양해를 구하고 잠시 바람을 쐬러 방문을 나섰다.

    방 안에 단둘만 남게 되자, 자리에는 묘한 침묵이 감돌았다. 하지만 나는 이 녀석에게도 할 말이 남아 있었다.

    “……너 역시도 마찬가지다, 요안아.”

    사절단에 필요한 사람은 박연뿐만이 아니다. 당연히 이번 하란타 방문에는 하란타말을 가장 유창하게 구사하는 사람이 여럿 필요하다. 이 녀석을 어찌 최우선 순위에 꼽지 않을 수 있을까.

    “선생님, 그 말씀은…….”

    “그래. 오랜 약속이었지. 약속은 지켰다.”

    나를 멍하니 바라보던 요안의 바다를 닮은 눈동자에 파도가 일기 시작했다. 녀석이 머리에 먹물을 끼얹던 날을 나는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아버지가 그러셨잖아요. 저 강 너머 바다 너머에는 더 넓은 세상이 있다고. 아버지가 태어나신 곳에 언젠간 데려가주신다고 약속하셨잖아요!’

    ‘……약속하마. 내가 네 눈이 되어주고, 네 귀가 되어주마.’

    그때 녀석을 만나지 못했더라면, 지금의 나도 없지 않았을까.

    북촌과 반촌 사이에서 빨래바구니를 들고 있던 어린 요안을 마주했던 순간부터 지금까지 일어난 일들이 주마등처럼 눈앞을 스쳐갔다. 아마 지금 코끝이 빨개져 떨고 있는 녀석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어, 어?”

    먹물 향기가 나를 풍성히 감쌌다. 갑작스러운 접촉 탓에 당황해 올라갔던 손은, 내 뒷덜미를 흥건히 적시는 따스한 눈물 탓에 도로 제자리로 향했다.

    마음을 정리한 아비가 자리로 돌아올 때까지, 녀석은 그리도 오래오래 나를 끌어안고 있었다.

    소리죽여 흘리는 녀석의 눈물에 내 몸 속까지 젖어든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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