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화. 명장의 고뇌
편전에서 물러나오자마자, 나는 집으로 돌아가는 대신 연회 자리에 잠시 합류하는 것을 택했다. 방금 부여받은 임무를 도와줄 사람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이윽고 얼마 지나지 않아 병사들 사이에 끼어 아무렇지 않게 술잔을 기울이는 무관 셋을 발견할 수 있었다. 주위는 온통 내가 발언한 군관도감 이야기로 시끌시끌했다.
“아니, 도절제사 대감 아닌가! 이런 술자리엔 웬일이오? 분명 또 칼같이 집으로 돌아갔을 줄만 알았는데?”
“판관, 아니 장인어른. 도와주셔야 할 일이 생겼습니다. 통제사 관련 이야기입니다.”
“뭐, 장인? 안 선생이 어찌 나를……. 아, 혹시 중대한 일이오?”
평소답지 않게 그를 장인으로 부르자, 박연도 무언가 분위기가 바뀐 것을 눈치챈 듯했다. 뒤이어 내가 라위터르를 조용히 불러내달라는 말을 꺼내자, 박연 역시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먼저 자리에서 몸을 빼 도착한 창덕궁 후원의 소요정(逍遙亭)에서 흐르는 냇물을 바라보고 있자니, 멀리서 술기운으로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 라위터르가 접근하는 것이 보였다.
통제사는 옆에 박연을 끼고 네덜란드어로 무어라 한창 대화를 나누며 나를 향해 다가왔다. 라위터르가 접근하자마자 그에게서 짙은 솔향과 알코올 냄새가 훅 풍겨왔다.
“아이고! 우리 총통위 명장 도절제사 아닙니까! 갑자기 나는 왜 찾으셨답니까?”
“통제사, 또 송령주(松鈴酒)를 그렇게 드신 겁니까? 기쁜 날이긴 하나 도가 지나치셨습니다.”
“에이, 쩨쩨하게 그러깁니까, 도승지? 이렇게 기쁜 날이면 마셔야지요. 게다가 럼에 비하면 아주 깨끗하기 이를 데가 없는 술이 아닙니까.”
소나무에서 송, 마령서에서 령을 따온 감자 소주, 송령주에 라위터르는 평소에도 깊이 빠져 있었다. 게다가 옆에 앉아서 술잔을 나눈 사람이 죽이 잘 맞는 원양우후 이완과 박연이었으니 아주 술독에 풍덩 빠져도 이상하지 않을 터.
가끔은 그 도가 지나쳐 충고를 하면 충무공께서도 술로 부하들과 통하셨다며 충무공 방패를 꺼내드니 뭐라고 할 수도 없었다. 다만 이런 걸 보면 네덜란드 특사가 도자기에 담아 가져간 송령주가 잘 팔릴 것 같기도 하고.
“헌데, 갑자기 무슨 일입니까? 여기 얀은 또 왜 같이 부르셨고요? 나는 빨리 술자리에 돌아가야 합니다. 이 우후가 나를 기다리고 있어요.”
“박 판관은 혹여나 제 짧은 하란타어 실력 탓에 의미가 왜곡되어 전달될까 염려되어 동석을 부탁했습니다. 그만큼 진지한 이야기를 하려 합니다.”
“진지한 이야기? 도승지가요?”
조금 놀랐는지, 라위터르의 검은 눈동자가 살짝 흔들리는 것이 보였다. 독주에 절어 흰자위를 시뻘겋게 물들인 채였다. 이 양반, 이렇게 술에 꼴은 모습을 보는 건 처음인데.
박연 역시 예상보다 더 무거운 분위기에 입술에 침을 적셨다.
“방금 전하와 이야기를 나누고 왔습니다. 그 결과, 조만간 저는 하란타로 사신의 임무를 받아 출발하게 되었습니다. 하란타 본국에서 저를 사신으로 요청했다는군요.”
“오오. 축하합니다, 도승지. 홀란드도 좋은 곳입니다. 한 번쯤은 다녀올 가치가 있지요. 나는 이제 이 조선 땅이 더 마음에 들지만 말입니다. 핫핫.”
“그 말씀은…….”
“마침 고민이 깊은 참이었는데, 도승지가 홀란드로 간다니 조만간 마음을 정해야겠군요. 도승지와 동행해 홀란드에 있는 것들을 수습하러 갈지를 말입니다. 핫핫핫.”
임금의 말이 사실이었다.
조선 생활이 그리도 마음에 들었는지, 라위터르는 정말로 네덜란드를 버리고 조선에 정착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 뜻을 숨기지 않는 것을 보니, 이미 속으로는 결정을 내렸을지도.
나도 마음 같아서는 마치 충무공의 군재를 연상케 하는 이 사람을 주저앉히고 싶다. 이 사람만 있으면 더 쉽게 정성공을 무너뜨리고 동아시아의 해상무역을 장악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랬다가는 더 큰 그림이 망가진다.’
라위터르가 이 시점에서 네덜란드에서 이탈하면, 라위터르 이전의 명제독 마르턴 트롬프가 사망한 이후 네덜란드 해군은 걷잡을 수 없이 무너질 것이다. 18세기까지 전 세계를 주름잡던 네덜란드는 원역사와 달리 힘을 잃고 영국 앞에 무릎 꿇게 될지도.
그렇게 된다면 지금 애써 쌓아놓은 네덜란드와의 친선은 순식간에 의미 없는 짓으로 전락할 것이다. 적국에게 제해권을 빼앗긴 나라가 멀리 떨어진 조선에 어떤 이득을 줄 수 있겠는가.
라위터르를 손에 넣고 영국과 손을 잡을까도 고민해봤지만, 놈들이 역사에 남긴 깡패짓을 생각하면 과연 놈들이 동양인을 사람으로 볼 지부터가 의문이었다.
물론 네덜란드도 영국처럼 식민지를 가혹하게 대하긴 했다. 그러나 지금의 네덜란드는 이미 조선과 이해관계로 단단히 묶여있는 상황이다.
한 사람을 탐내다 한 나라를 잃는 것은, 조선의 관료로 절대 해서는 안 되는 행동이 분명했다.
헌데 그 순간, 뜬금없는 말이 내 귀를 때렸다. 얼근하게 취해 라위터르와 함께 나를 찾아온 박연이 하는 말이었다.
“미힐이 같이 남아주면 든든하지. 자네도 여기서 조선 사람을 아내로 맞아 볼 텐가?”
“예? 장인어른,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통제사는 분명 하란타에 두고 온 아내분이…….”
“아, 안 선생, 그것이…….”
“망할 여편네……. 포모사에서 온 배로부터 내가 자리를 비운 사이 여편네가 갑자기 세상을 떴다는 소식을 받았습니다. 얀은 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쩐지 평소보다 라위터르에게서 풍기는 술 냄새가 더 독하더라니. 충무공을 접할 때를 빼면 진지하기 이를 데 없던 사람이 실없이 웃음을 터뜨릴 때부터 알아봐야 했었다.
아내를 거칠게 부르는 모습과는 달리 라위터르는 아내의 부고를 받고 꽤나 상심한 것이 분명했다. 어째서 그의 눈이 그리 벌겋게 물들어 있었는지 이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박연 역시 억지로 실없는 이야기를 꺼내 라위터르를 위로하고 있는 상황이었고.
“조선에서 벌어들인 돈으로 고향에 집을 사서, 여생을 편하게 보내게 해주려 했더니……. 나만 두고 가면 어떡하라고…… 빌어먹을 여편네 같으니…….”
뜻밖의 사태에 당황한 내 귀에 라위터르의 원망어린 중얼거림이 꽂혔다.
그래서 그가 조선에 정착하려는 마음을 품은 것인가.
박연 같은 선례도 있는 데다, 하란타로 돌아갈 이유를 잃어버려서?
“그래, 같이 홀란드로 갑시다. 도승지. 나는 가서 시집간 딸아이 얼굴이나 보고 재산을 정리해 조선으로 돌아와야겠습니다. 요한이 조금 섭섭해하겠지만 별수 없지요. 하,하…….”
“선생, 미힐이 농담처럼 말하고 있지만 그는 진심이오. 이번에 살마주에서 벌어진 해전을 겪고, 군관도감 이야기까지 나오면서 마음이 굳어졌다고 했소.”
“조선만큼 나를 알아주는 곳이 또 있겠습니까? 좋은 친구도 생겼겠다. 새로운 땅에 정착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요. 이 나라의 수군을 내 손으로 전부 충무공의 함대에 비견될 만한 강력한 군대로 만드는 것은 어떻습니까? 핫핫.”
‘요한’은 그의 친구이자 공화파의 우두머리, ‘요한 더 비트’일 것이다.
내가 잠시 말을 잊은 사이, 라위터르는 홀로 속사포처럼 말을 쏘아댔고, 박연은 그런 라위터르에게 안쓰러운 눈빛을 보내며 그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예상치도 못한 당황스러운 상황에, 나는 혼란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라위터르더러 갑자기 네덜란드로 돌아가라고 말할 수 있을 리가.
“아, 새 병서를 집필할 때 필요하니 충무공에 관련된 기록들을 또 번역해주시겠습니까? 즐거운 취미생활이긴 하나 엄연히 나랏일이니 그 정도는 지원해 주시겠지요. 핫핫핫.”
라위터르가 터뜨린 웃음 덕분에 제정신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애써 유쾌함을 가장하고 있었지만 그의 웃음 속에 살짝, 아주 살짝 숨겨진 슬픔이 비어져 나와 내 뺨을 때리는 듯했으니까.
이 사람은 지금 제대로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아무리 말로 네덜란드가 영국과의 전쟁이 코앞에 닥쳐있다고 전해봐야 설득할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았다.
그렇다면 어찌해야 하는가.
“물론입니다, 통제사. 대신 약속 하나만 해 주시겠습니까?”
“약속이오? 도승지가 나오는 소설처럼 충무공전이라도 따로 집필해달라는 요청입니까? 핫핫.”
“아닙니다, 그것이 아니라……. 제가 하란타에 사신으로 갈 때, 어떤 일이 있더라도 함께 동행해 주십시오. 그리고 제가 하란타에서 한 가지 말씀을 드릴 텐데, 그것을 진지하게 들어주셨으면 합니다.”
지금 미래 지식을 라위터르에게 알려준다고 해서 이 사람이 결정을 바꿀 가능성은 낮다. 임금과 아버지에게 그 이야기가 통했던 것은 그들과 내가 오랜 시간 동안 굳건한 관계를 쌓아왔기 때문이었다.
지금 라위터르와의 관계도 나쁘지는 않지만, 임금과 아버지에 비하면 한참 부족한 관계다.
그렇다면 답은 한 가지 뿐이었다.
라위터르와 네덜란드로 함께 가, 나중에라도 현지에서 그를 설득하는 수밖에.
배를 타고 네덜란드에 도착할 때쯤이 되면 현지에도 분명 전운이 감돌고 있을 것이다.
“에이, 도승지! 나는 당신이 하는 말을 허투루 들은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그렇게 말하니 내가 다 섭섭합니다! 핫핫핫.”
“감사합니다. 통제사. 하지만 사내끼리 맺은 약속이니, 반드시 지켜주셔야 합니다.”
“물론입니다! 그럼 도승지의 용건은 여기까지입니까?”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을 본 라위터르는 별 것 아닌 일로 자신을 불러냈다며 가벼운 타박을 전했다. 이완이 술자리에서 자신과 박연을 목이 빠지게 기다리고 있을 거라는 근거 없는 자신감과 함께.
“끄윽……. 그래도 이 궁궐의 정원, 경치가 좋긴 합니다. 취한 머릿속이 맑아지는 것 같습니다. 핫핫. 그나저나, 도승지는 그렇게나 홀란드 여행에 나를 동행시키고 싶으셨던 겁니까?”
“아, 예. 뭐 그렇습니다.”
“도승지도 생각보다 담이 작으시군요! 내가 아니더라도 조선의 배로도 하란타 정도는 안전하게 갈 수 있을 겁니다! 핫핫핫!”
라위터르는 그저 네덜란드까지 사신으로 가는 길에 그의 항해실력이 필요하다 착각한 듯싶었다. 나쁘지 않은 오해였다.
그렇게 슬픔을 눈에 담은 명제독은 내게 인사를 남기고 연회 자리로 멀어져갔다. 비틀거리는 그의 발걸음에서 무언가가 느껴지고 있었다.
그걸 바라보는 내 마음 한구석은 무겁기만 했다. 왜 최고의 제독들은 개인사가 이리 불행해야 하는가. 역사의 아이러니 탓이었다.
충무공도 모친과 맏아들을 동시에 잃었을 때, 결국은 분연히 떨쳐 일어나 나라를 지키러 전장으로 다시 나가셔야 했었지. 우리 통제사 또한 쓸 데 없는 부분까지 충무공을 닮아 있었다.
문득 생각 한 가지가 들었다.
조금 먼 미래의 일이겠지만, 이 순박한 충무공 매니아가 총독의 시기를 받아 죽음의 항해를 나서는 것을 절대 가만둘 수 없다는, 그런 조금은 이기적인 생각이었다.
***
라위터르의 일은 일단은 그렇게 매듭지었다.
물론 네덜란드로 돌아가기로 결정했다고는 하나 우리 통제사 영감은 본인의 임무에 소홀하지 않으셨다. 승전에 흠뻑 취해있던 분위기가 가라앉은 원양수영에는 늘 그랬듯 라위터르가 부하들을 엄격히 쥐어짜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하지만 임금이 내려준 미션은 라위터르의 일이 끝이 아니었다. 우선 네덜란드로 떠나기 전 바뀌게 될 관직들부터가 문제다. 인사이동이 예고된 이상 인수인계도 차질 없이 시행해야 했다.
지금 승정원에서 인수인계를 하는 중임에도 입씨름을 할 수 있는 것도 그 덕분이었다. 사헌부에서 더 입이 독해져 돌아온 내 벗이라는 놈이 후임 승지로 들어왔기 때문이다.
“이야, 축하하네, 성근. 세조 대왕 시절에 서른이 되기 전 판서를 단 분이 계시다던데, 내 벗이 그렇게 될 줄은 정말 몰랐다네.”
“일정, 내 자네가 누구 이야기를 하는지 알고 있네. 그분의 최후가 어땠는지도 알고 있는데, 정녕 나를 순수하게 축하하는 것이 맞는가?”
아니, 아무리 내가 젊은 나이에 예조판서를 달게 되었어도 그렇지, 역적으로 몰려 죽은 남이를 나한테 빗대는 건 그래도 선을 너무 넘은 거 아닌가? 사헌부는 대체 어떤 곳인지 궁금해질 정도로 매콤한 좌명의 공격이었다.
아마 사석이었으면 사실 반정을 일으킨 역적이 맞지 않냐는 이야기까지 나왔을 것이다. 자리에 맞지 않게 농담기를 가득 머금은 좌명이 놈의 눈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어허, 신임 승지. 도승지께 그것이 무슨 말버릇인가?”
기라도 죽이려는 것일까, 지켜보던 후임 도승지 송준길이 보다 못해 사담은 금하라 권해왔다.
허나 놈의 입을 막기에는 그 송준길도 모자랐다.
“송구합니다, 영감. 허나 제가 알기로는 신임 도승지께서도 저기 윤 주서와 승정원에서 꽤나 허물없이 지냈다고 들어서 말입니다. 승정원에서는 이래도 괜찮은 줄만 알았지 뭡니까.”
농담이 반쯤 섞인 말이긴 했지만, 마침 승정원 문을 열고 들어선 윤휴와 송준길의 관계를 예로 들며 좌명이 역으로 송준길을 공격한 것이다. 송준길 역시 윤휴와 공과 사를 잘 구분하지 못한 것을 좌명이 어찌 안 것인지.
이러다 승정원의 수장인 도승지가 말단 승지에게 먹힐지도 몰랐다. 그것이 우려되어 내가 직접 좌명을 끌고 나가 한창 갈굼을 먹이고 나서야 인수인계는 예정대로 흘러갈 수 있었다.
“두괴가 왜 자네 일로 내게 한탄했는지 이제 알겠네. 누가 부제학 영감 제자 아니랄까봐.”
그렇게 빡빡한 인수인계가 끝나고 퇴궐하는 길이었다. 오랜만에 함께 퇴근하는 좌명이 궐문을 벗어나자마자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내게 말을 걸어왔다.
송준길에게 대들지 말라는 뜻을 담아 놈을 너무 굴렸던 건가. 생각해보니 놈도 곧 정삼품 우부승지에 임명받을 터, 엄청나게 빠른 승진 코스에 올라탄 주제에 나를 놀리는 게 괘씸하긴 했다.
“윤 주서가? 내가 뭐 그 사람한테 잘못한 것이 있다던가?”
“언제였었지, 과거급제하고 갓 승정원에 배치되었던 시절, 두괴와 나눈 술자리에서 가끔 승정원이 지옥과도 같다는 소리를 들은 푸념을 들은 적이 있었다네. 그게 다 자네 짓이었다니.”
엥? 내가?
솔직히 말해서 나는 송준길 정도를 제외하면 내 아래에서 일하는 승지들에게서 기대를 반쯤 내려놓은 상태였다. 빡빡하게 굴려도 따라오는 사람이 있고 그렇지 못하는 사람이 있는 것은 이제 어느 정도 보였으니까.
윤휴의 푸념도 따지고 보면 억울했다.
보조직인 주서(注書)를 맡은 윤휴를 제대로 굴려 본 적도 거의 없는데, 저런 소리를 들을 줄이야. 윤휴도 그렇지, 승지 중에 결원이 생길 때나 맛보기로 몇 번 굴린 일에 불과한 것을 좌명에게 가서 꼰질러?
“이해할 수가 없구만. 내가 홍문관에 교리 직을 받고 처음 들어갔을 때도 지금 승지들에 비하면 훨씬 업무가 많았다네. 나 때는 말일세…….”
“그만! 그만하게, 성근! 잠시 자네가 돌아가신 부제학 영감과 겹쳐 보였네!”
“아니, 스승님과 내가 어디가 같아 보인단 말인가? 나는 스승님에 비하면 아직 한참 모자란 터인데.”
“‘나 때는’으로 시작하는 말만 들어도 두드러기가 날 지경이네. 자네, 언제부터 그렇게 타락한 건가? 영감이나 대감 칭호를 달면 다들 그렇게 변하는 건가?”
본인도 정삼품 승지를 달아 곧 영감 소리를 들을 거면서, 좌명은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진저리를 쳐댔다. 내로남불도 유분수지.
게다가 어찌 나를 감히 아버지와 비교한단 말인가. 그분에 비하면 청렴성도, 업무 능력도, 충성심도 나는 한참이 모자랐다. 아, 당연히 아랫사람들 갈아 넣는 능력 역시 마찬가지고.
그런 어처구니없는 말을 꺼낸 좌명이 놈에게 전처럼 팔꿈치를 한 번 쑤실까 했지만, 생각에만 그칠 수밖에 없었다. 안 대감과 김 영감은 이제 길거리에서 장난치기에는 너무 고관대작이 되어 있었으니까.
“참, 우리 부인과 하연이가 얼마 전에 정릉 옆 신흥사(新興寺)에 불공을 드리러 다녀왔던데, 자네는 알고 있었나?”
“정릉이면 혜화문 밖이 아닌가? 도성 밖까지 말인가?”
“도성 안에 사찰이 없으니 먼 길을 갈 수밖에 없는 것이 당연하지. 하연이 녀석이 자네에게는 말을 하지 않고 다녀왔나 보구만. 허허…….”
좌명이 동생을 안타까워하는 이유가 있었다. 나 역시 하연이 도성을 벗어나서까지 불공을 드리러 절에 다녀온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오늘이라도 임금에게 받은 환약을 하연에게 전해야겠다. 그런 다짐을 한창 하고 있던 찰나였다.
“어? 저거 자네 아들 아닌가?”
“석주 말인가? 녀석이 왜 여기……?”
도령 차림을 한 소년 셋과 바지저고리 차림을 한 아이 하나가 일행이 되어 나와 좌명 앞, 운종가로 통하는 길을 걷고 있었다. 그 중 하나는 좌명의 아들, 김석주였다.
“저 옆에 있는 아이는 자네 제자가 아닌가? 길산이라 했던가?”
“길산이 녀석은 총통위와 그 학당을 뻔질나게 드나들었으니 자네 아들과 친분이 있어도 이상하진 않지. 헌데 나머지 둘은?”
“짐작조차 가지 않는구만. 학당에 놓고 온 물건이라도 가지러 가는 겔까?”
“잠깐, 일정. 저 녀석들, 발걸음이 수상하네.”
성균관 망나니 시절의 경험으로 알고 있다. 저 아이들의 발걸음은 어딘가가 수상한 기운을 풍기고 있었다. 아이들 사이에서 무언가를 숨기고 있는 낌새가 스멀스멀 풍겨 나와 내 망나니 레이더에 걸렸다.
나도 모르게 시선이 좌명을 향해 돌아갔다. 좌명 역시 고개를 조용히 끄덕이는 것을 보니, 같은 생각인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