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화. 뜻밖의 난관
“페킹, 그러니까 북경에서 동인도회사와 최초로 접촉한 신하를 하란타에 보내 달라. 이거, 제 얘기군요, 전하.”
“미안하구나. 내가 보위에 오르고 나서, 널 쉴 틈도 없이 이곳저곳에 보내지 않았더냐. 헌데 이번은 지금까지 다녀온 곳들에 비하지도 못할 정도로 먼 곳이거늘.”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하란타는 조선에게 중요한 나라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하란타 본국에 대해 아는 사람이라고는 박 판관 정도가 다인 상황에서, 고관을 사신으로 보내야 한다면 알맞은 사람은 저밖에 없는 것이 사실이지요.”
실은 갑작스러운 이야기도 아니었다. 이미 네덜란드에서 특사가 왔을 때도 마음속으로는 각오를 하고 있던 일이다. 다만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네덜란드에서 사절단을 보내달라는 요청이 빨리 왔을 뿐.
이렇게 급하게 군사적 교류를 요청하는 것을 보면 네덜란드에서도 몇 년 후 일어날 영란전쟁을 예상하고 있는 것인가. 그렇다면 납득이 가는 상황이었다.
“전하, 전하는 제 주군이십니다. 이럴 때는 단호하게 명령을 내리셔야지요.”
“주군이기 이전에 우리는 바닥부터 고난을 헤쳐온 동료이자 동지지. 그렇지 않느냐, 아우야.”
순간 이곳이 파주 행궁이 아니라, 임금과 암행을 나갔던 한양 바닥이라 착각할 뻔했다. 피맛골 뒷골목에서 형님이라 부르라며 능글거리던 임금의 얼굴이 떠올랐다.
“하……. 이런 식으로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을 하시는 겁니까. 어찌 보면 제 스승보다 전하께서 더하실 때가 있는 것 같습니다.”
“방금 나는 너를 아우라 불렀거늘, 너는 나를 전하라 부를 셈이냐. 정말로 미안한 일을 시키면서 고작 이 정도밖에 허락하지 못하는 이 형을 용서하거라.”
“전하…….”
“어허, 한수야. 내가 방금 무엇이라 했더냐. 벌써 잊어버린 게냐.”
아무리 그래도 임금은 임금이고 신하는 신하인 법. 하지만 그 호칭마저 걷어내고 내게 가까이 다가오려는 임금에게서는 미안한 감정이 생생하게 전해져왔다.
사절단을 네덜란드로 보내기까지는 시간이 조금 걸릴 테고, 나를 바로 보내겠다는 말도 아니겠지. 하지만 왕복만 일 년 가량이 걸릴 길에 또다시 나를 밀어 넣게 된 것이 임금은 그리도 미안한 모양이었다.
“……형님.”
“그래, 아우야. 한 번 해 보니 쉽지 않느냐. 사실 내 심양에서부터 이런 날을 바라왔었다.”
“…….”
어쩔 수 없었다. 이미 한양 암행길에 한 번 해본 일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기쁨을 숨기지 않는 임금의 표정이 내 입술을 강제로 비틀어 열고 있었다.
망할 형님 같으니라고, 이런 모습을 보여주면 어찌 따르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지만 전하, 아니 형님. 아직 이 나라에는 제가 해야 할 일이 산처럼 쌓여있습니다. 제 자리를 그토록 오래 비우기는 어렵지 않겠습니까.”
“네가 염려하는 바가 무엇인지 나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거사를 일으키고 나라를 바꿔 놓은 지도 꽤 시간이 흐르지 않았더냐.”
“많은 시간이 지나가긴 했습니다. 그러고 보니 벌써 세월이 이렇게…….”
“단시간에 모든 것을 바꾸긴 어려웠지만, 그렇다고 바꿔놓은 것이 적지도 않다. 내게 올라오는 모든 정보를 접하는 도승지 자리에 있는 네가 더 잘 알고 있겠지.”
틀린 말은 아니다. 처음에는 나와 김육이 끌고 가다시피 하던 조선 조정은, 어느새 한 몸이 되어 같은 방향을 바라보는 집단이 되어 있었다.
물론 그 과정에서 반대나 잡음이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임금의 즉위 이후 우리가 낸 성과는 반대파들의 기를 시작부터 꺾어놓고 있었다. 게다가 송시열을 필두로 한 예전 산당의 협조도 꽤나 쏠쏠했고.
이제 좌의정 김육을 중심으로 조정의 구도가 안정기에 접어들었고, 당분간은 큰 정책 변화 없이 내실을 다질 때라며 임금이 가벼운 미소를 지었다.
“다만, 형님. 정말로 제가 없더라도 조정이 잘 돌아갈 수 있겠습니까.”
“섭섭하게 생각하지 말거라. 네가 늘 그러했듯이 만일의 사태는 늘 대비해야하는 법이 아니더냐. 게다가 나는 네가 하란타를 상대로 한 외교에서 활약할 때마다 이런 날이 올 거라고 이미 짐작을 하고 있었다.”
“제가 그때 지나치게 도를 넘었던 것입니까. 이제 와서 생각하니 조금 후회가 되기도 합니다.”
“아니, 후회하지 말거라. 그 행동이 지금의 조선을 만든 것과 다름이 없지 않느냐. 하란타 역시 예전 나처럼 네 정체가 궁금할 뿐이겠지. 아니면 그곳도 네 도움이 필요할지도.”
벌써 인사 계획까지 미리 짜 놓은 것을 보니, 임금은 나를 네덜란드로 보내기로 작정한 모양이었다.
그 계획에는 별 문제가 없어 보이긴 했다. 임금은 승정원에서는 송준길을 도승지로 승진시키고 좌명을 사헌부에서 불러들여 새 승지로 삼을 셈인 듯했다.
‘어차피 내가 자리를 비웠을 때는 송준길이 훌륭히 도승지 자리를 대리해왔으니 문제는 없겠지. 다만 조금 걱정되는 것은…….’
걱정되는 것은 윤휴였다. 그는 사헌부로 이동해 송시열 아래로 들어가게 되었다. 송시열과 윤휴가 함께 일하는 사헌부, 내가 아무리 둘 사이를 봉합해 놓은 상태라지만 정말 괜찮을까.
그러고 보니 임금이 즉위한 이후로 조정 안정을 핑계대고 대규모 인사이동이 없긴 했다. 그동안 신하들이 세운 공을 감안해 자리를 바꿔 줄 필요가 있으니, 임금의 인사이동 제안은 적절한 타이밍이었다.
“마침 영의정 김집이 칠순이 훌쩍 넘었다는 이유로 병을 칭해 은퇴를 청했으니, 그 자리를 네 장인에게 넘길까 한다. 나머지 정승 두 자리는 이시백이나 정태화를 믿어볼 것이고.”
“당파에 구애받지 않고 두루 친목을 유지한 중신들을 정승에 올리실 생각이시군요. 그럼 판서 두 자리가 비는데…….”
“그래, 예조, 병조의 자리가 비게 된다. 그중 예판 자리에 너를 올릴 생각이다.”
외교부 장관 자리에 나를 올린다고?
이미 내 품계는 사쓰마 정벌을 위해 승진해 정이품이었으나, 같은 품계라도 명예직이 아닌 실권직을 받는 것은 차원이 달랐다.
“하지만 형님, 제가 하란타로 가게 된다면 예판 자리를 너무나 오래 비우게 됩니다.”
“어차피 그동안 사신으로 예판을 보내는 일은 흔하지 않았더냐. 너를 보조할 참판 자리에 그만한 인재를 임명할 생각이니 걱정은 하지 않아도 좋다.”
“하지만…….”
“잠시 일을 내려놓을 수 있을 때 내려놓도록 해라. 문과에 장원급제한 이후로 너무도 쉼 없이 달려오지 않았더냐. 이번 기회에 너 외의 다른 신료들도 믿어 보도록 하고.”
폐주 시절에는 젊은 문신들을 사가독서(賜暇讀書)라 하여 벼슬은 그대로 두고 학문을 닦도록 한 경우도 있다며 임금이 덧붙였다. 네덜란드로 단기유학이라도 떠나 난학(蘭學)이라도 닦아오라는 소리인가.
어차피 네덜란드에 가더라도 일을 사서 할 녀석이니 그것이 걱정이 된다며 놀린 임금은, 금세 표정에서 장난기를 거두고 나를 바라보았다. 이어진 말은 폭탄선언이었다.
“그리고, 너를 하란타로 보내는 이유는 또 하나가 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같이 보내는 사람이 한수 너 정도는 되어야…… 세자를 믿고 맡길 수 있을 테니까.”
“……예? 제가 지금 잘못 들은 게 아니라면…….”
“그래. 세자 또한 하란타에 다녀오도록 할 것이다. 녀석은 보위에 오르기 전 넓은 세상을 보고 와야 한다. 우리가 심양과 북경에서 접했던 것들이 지금 조선의 밑거름이 되었듯이 말이다.”
임금이 열린 시선을 갖게 된 것이 심양에서의 볼모 생활부터였긴 했다. 새로이 개발한 물건과 외국에서 받아들인 문물이 심양관을 바꿔놓는 것을 보면서, 임금은 지금 조선의 모습을 꿈꿨을 테니까.
그래서 임금은 세자를 먼 네덜란드로 보내려는 것인가.
사자는 자식을 강하게 키운다더니, 임금 역시 같은 생각일지도 모르겠다. 이제 십대 중반에 접어든 세자에게 긴 항해는 절대 쉬운 일이 아닐 텐데.
“너와 내가 바꿀 나라를 세자가 이어가려면 세자 역시 넓은 시야를 가지고 있어야겠지. 조선에만 박혀있다가는 그런 시야를 가질 수 없겠지. 지금이 오히려 기회다.”
“틀린 말씀은 아닙니다. 얼마 안 있어 영길리와 하란타 사이에서는 큰 전쟁이 벌어질 테니까요. 당분간은 하란타로 사신을 보내기 어려울 것입니다. 허나…….”
“알고 있다. 하란타로 향하는 길이 결코 안전하지만은 않다는 것을. 하지만 그만한 가치가 있는 일임은 분명하다. 그리고…….”
“또 무슨 이유가 있단 말씀이십니까?”
임금의 얼굴에서 긴장이 사라졌다. 지금 임금은 제왕의 얼굴이 아닌, 한 사내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사실 내가 지금 보위에 올라있는 상황이 이토록 싫었던 적은 처음이니라. 아버님이 그날 하신 말씀이 이토록 와닿는 것 역시 처음이고. 임금의 무게라는 것이 이토록 무거울 줄이야.”
“아니, 전하……!”
“차라리 지금 내가 세자였으면 좋았을 것을. 봉림 대신에 내가 사신으로 다녀왔으면 좋았지 않았겠느냐. 거사가 후회되는 것은 오늘이 처음이구나.”
분명 볼멘소리에 불과한 농담이었지만, 한 번 바깥바람을 쐬고 나니 임금의 마음속에도 헛바람이 잔뜩 들어찬 모양이었다. 전해지는 감정에는 꽤 뼈가 들어있었으니까.
음, 설마 사쓰마 정벌을 다녀온 사이 중전마마와 금슬이 틀어진 것은 아닐 테지. 하지만 그런 소식은 아내에게서 들은 적이 없었을 뿐더러, 원양함대에 종군시킨 사관의 기록을 임금이 잊지 않고 챙기는 것을 보면 그 추측은 틀린 것 같았다.
“다만, 나를 무겁게 짓누르고 있는 것은 익선관의 무게뿐만이 아니다. 나와 오래 떨어져 있기는 죽어도 싫어할 사람이 중궁전에 있으니 함부로 갈 수도 없는 노릇이고.”
“…….”
“마음 같아서는 네 아내도 함께 하란타로 보내주고 싶으나, 숙부인의 몸 상태가 오랜 항해를 견뎌낼 만한 상태는 또 아니지 않느냐.”
속이 착잡했다. 임금의 말을 들으니 내 눈앞에 한 사람의 얼굴이 선명히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심양에 한 번 다녀온 것도 하연에게 몹쓸 짓이었는데, 고무신을 두 번 신게 하다니.
나를 말없이 지켜보던 임금은 내 어깨에 손을 올려 위로를 전하고는, 내게 웬 물건 하나를 쥐어주었다. 내가 남경에서 가져왔던 작은 함이었다.
“이것은…….”
“사실 더 일찍 전해주려 하였으나, 그동안 사정이 닿지 않아 이제야 전해주는구나.”
“안사람도 그동안 궁을 드나들며 중전마마를 보필하느라 바빴으니, 아이가 들어섰으면 곤란했겠군요.”
“내의원에서 말하길 복용했을 때 신체에 문제가 되는 환약은 아니라 하였다. 다만…… 아니다. 별 문제는 없을 것이다.”
임금이 말꼬리를 흐린 것이 무언가 수상쩍긴 했지만, 나는 순순히 환약을 받아들었다.
그 사이 또 훌쩍 큰 길산이를 보며 희미하게 미소 짓는 하연을 보면 무슨 수라도 모두 끌어다 써야 했으니까. 풋풋했던 십대 시절에 만났던 우리의 나이도 어느새 서른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들을 낳으면 세자의 든든한 오른팔이 될 것이고, 딸을 낳으면…… 아쉽도다. 간택령을 내릴 날이 머지않았으니 세자빈으로는 조금 어렵겠구나. 대군부부인은 어떻겠느냐.”
“벌써부터 그렇게 김칫국을 잡수시면 안 됩니다, 형님. 약효가 반드시 든다는 보장도 없지 않습니까.”
“그래도 너와 정부인(貞夫人)은 이 나라를 위해서 미뤄두었던 것들이 워낙 많지 않느냐. 이번 일로 또다시 너희의 행복을 내 손으로 빼앗게 생겼으니, 이 정도 약속을 남기는 것쯤은 내 가벼운 사과로 여기려무나.”
임금은 왕권을 동원해서라도 내 아이의 앞날을 밝게 해 주겠다며 애써 웃음을 지었다. 정말로 내게 진 마음의 빚이 무거운 듯했다.
“하온데 형님. 그런 가벼운 이야기를 나누기에 앞서 논의해야 했던 사항이 있습니다. 완전히 잊고 있었군요.”
“무엇이냐? 갑자기 얼굴을 굳히는 걸 보니 예사 이야기는 아니지 싶은데.”
“방금 말씀드렸다시피 하란타는 곧 전쟁에 휘말리게 될 것입니다. 대규모 해전이 나라의 운명을 가르게 될, 그런 거대한 전쟁입니다.”
“해전이라…….”
임금은 말을 마무리 짓지 못했다. 아마 그의 머릿속에도 나와 같은 인물이 떠올랐을 터였다.
“통제사 이야기구나. 통제사가 구주(歐洲, 유럽) 바다를 호령하는 맹장이 된다는 이야기는 그가 조선에 도착하기 전부터 줄기차게 들었었지.”
“엄밀히 따지면 잠시 하란타로부터 빌려온 사람입니다. 통제사가 없으면 아마 하란타는 영길리에 밀려 국력을 크게 상실할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 조선에도 곤란하지. 그런 희대의 명장을 내 밑에 계속 두지 못하는 것이 아쉽긴 하나, 어쩔 수 없는 모양이구나.”
몇 년 안에 네덜란드와 영국 사이에 커다란 전쟁이 터진다.
3차에 걸쳐 일어나는 영란전쟁이다.
그 전쟁은 라위터르의 활약이 없었다면 네덜란드의 일방적인 패전이 되었을 것이라 평가될 정도로 네덜란드에게 불리한 전쟁이었다.
거의 조선의 동맹국이 되기 일보 직전인 네덜란드를 살리려면 라위터르를 이제는 네덜란드로 돌려보내야 한다. 함대를 더 성장시켜 정성공의 함대마저 처리한 후 네덜란드로 돌려보내기엔 남은 시간이 너무 부족하다.
어차피 장강과 근해에 최적화된 명나라의 정크선 함대는 조선의 원양함대가 머릿수만 어느 정도 갖춰지면 상대가 안 될 것이기도 하고.
“……참으로 기묘하구나. 네 말대로라면 하란타 역시 임진년(1652년)에 전쟁이 불붙는다……. 아직 여유가 꽤 있긴 하나, 네가 하란타에 다녀오고 나서 통제사를 돌려보내면 너무 늦겠구나.”
“예, 이번에 사절단을 보내며 통제사를 고향으로 돌려보내야 합니다. 그것이 사실상 마지막 기회일 테니까요. 아직 우리 조선이 단 한 사람을 위해 하란타로 배를 띄울 형편은 아니지 않습니까.”
“너무나 탐나는 사람이지만…… 네 말대로라면 어쩔 도리가 없구나. 헌데, 한수야. 네가 잊고 있는 것이 하나 있다.”
체념의 한숨을 희미하게 내쉰 임금이 눈썹 사이를 찡그렸다. 무언가 생각지도 못한 문제가 생긴 듯했다.
“박 판관이 내게 따로 보고하길, 통제사가 조선에 정착할 생각을 하고 상담을 요청했다고 하였다. 너는 들은 적이 있느냐.”
“금시초문입니다, 전하. 그 말씀은…….”
“혹여나 통제사가 하란타로의 귀국을 거부할지도 모르겠구나. 너도 오늘 하사품을 내려받는 그의 모습을 보았을 테지. 무슨 일이 있는지, 평소와는 다른 모습이었다.”
충무공의 장계를 모은 장계별책의 번역본과, 충무공의 유품을 복제한 요대를 하사받으며 아주 잠시 기쁨을 표했을 뿐, 담담한 모습을 보이던 라위터르가 떠올랐다.
어째서 그 충무공 매니아가 반응을 보인 것일까.
만약 평소와 다른 라위터르의 모습이 그를 네덜란드로 돌려보내는 일과 관련이 있다면, 생각보다 큰 문제가 될지도 몰랐다. 임금이야 내가 털어놓는 미래지식을 순순히 받아들인다지만, 라위터르에게는 그럴 수도 없으니까.
라위터르를 고향으로 돌려보내는 일에 생각지도 못한 먹구름이 끼었을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