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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 어사, 조선을 뒤흔들다!-179화 (179/298)
  • 179화. 볼멘 소리

    며칠 후 벽란항과 멀지 않은 교하에서 귀국 포로들을 위한 조촐한 잔치가 벌어졌다. 교하에 정착한 사람들 역시 청나라에 끌려갔다 돌아온 속환인들이었기에, 잔치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이어졌다.

    임금 역시 당일치기로 파주행궁에 나와 돌아온 조선인들을 격려했다. 게다가, 오십 년 만에 자신들을 구하러온 임금의 용안을 보고 감격에 겨워 눈물 흘리던 포로들에게 주어진 선물은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그것이 정말이시지라……?”

    “고향인 남원으로 돌아가려거든 보내주겠다. 그러나 너희가 여기 교하나 광주에 남는 것을 선택한다면 살마주에 있던 시절처럼 도자기를 구울 수 있는 가마와 거주할 집을 지어줄 것이다.”

    “고국으로 데려와주신 것도 감사한디, 이런 큰 은혜까지……. 성은이 망극하당게요!”

    포로들을 대표해 임금 앞에 섰던 심도길이 넙죽 엎드려 감사를 표할 정도로 파격적인 선물이었다. 사실 그들도 가고시마에 일구어놓았던 모든 것을 정리하고 오로지 고향만을 생각하며 돌아온 처지였으니, 이 정도 선물은 결코 지나치지 않았다.

    임금의 선물 덕일까, 며칠 간의 고민 끝에 귀국 포로 대다수는 경기도 광주로 가는 것을 택했다. 다만 어린 시절에 끌려온 노인을 포함한 몇 가구만이 고향인 남원으로 향했다.

    “그래, 조선 생활은 조금 익숙해졌는가?”

    “아무렴요. 한양에서 식량도 넉넉히 보내주시고, 무엇보다 주변에는 말이 통하는 조선 사람들 밖에 없응게요. 다이묘가 지나간다고 저희들을 끌어다 조선 노래를 부르게 시키는 일도 없지라.”

    “다행이구만. 자네들이 오고 나서 도자기 생산이 눈에 띄게 늘어 전하께서도 기뻐하시고 계신다네.”

    “당연하당게요. 원수의 도자기를 굽다 나랏님의 도자기를 굽게 되었으니 그 무엇보다 영광이 아니겠어라. 그러니 다들 일에 몰두할 수밖에요.”

    나중에 일이 있어 방문한 광주의 왕실 도자기 공방에서 나를 맞은 심도길은 이렇게 말했다. 얼굴 가득 행복한 미소를 띤 채였다.

    하지만 그 미소의 원인은 조선으로 돌아와 받은 융숭한 대우 탓만은 아닐 것이었다. 내가 전해준 책자를 읽어본 심도길은 가슴에 손을 쓰다듬으며 속이 뻥 뚫린 표정을 지었다. 나가사키에서 흘러들어온 책자였다.

    “머리가 요괴, 몸은 사람인 수인들과 그들을 지휘하는 화란 출신 장수의 이야기요? 이거, 왜놈들이 그날 당한 일이 뼛속 깊이 박히긴 한 모양이랑게요.”

    “장기에서 얼마 전부터 상영되기 시작한 연극이라는군. 살마주에서 일어난 일이 그곳까지 흘러들어간 모양이야. 물론 내용은 우리 조선군을 무찌르는 내용이라지만 말일세.”

    “아무렴요. 반백 년 동안 묵은 한이 씻겨 내려갈 정도로 압도적인 승리였으니 놈들 입장에서는 새겨진 공포를 그렇게라도 풀었어야 했겠지라. 헌데, 여기 화란 장수는 통제사님일 거고, 여기 이상한 몽둥이를 멘 요괴는 누구랑게요?”

    심도길의 손끝은 조선군의 두정갑을 입은 라위터르를 묘사한 삽화를 가리키다 그 옆의 그림을 향했다. 그 요괴의 정체를 얼버무리느라 나는 진땀을 흘려야만 했다.

    책의 삽화에는 갓을 쓰고 도포를 입은 채 다이묘의 차림을 한 자에게 몽둥이를 휘두르는 요괴가 그려져 있었다.

    요괴의 대가리는 웬 이상한 해태 같은 생물로 묘사되어 있었는데, 일본에는 호랑이가 없으니 이따위로 그린 건가?

    그 책자를 처음 받아 보았을 때, 에도 막부에 압력을 넣을까 순간 고민했을 정도로 괴이한 그림이었다.

    이딴 모습으로 역사에 남고 싶지는 않았는데……. 망할.

    ***

    한편 파주 행궁에서 귀국 포로들을 격려한 다음날, 임금의 행차는 다시 한양을 향해 돌아갔다. 그 뒤를 원양수군의 병사들이 승전보를 알리며 뒤따르고 있었다.

    그들이 가고시마에서 싸워 가져온 전리품과 류큐에서 보내온 선물들도 수레에 가득히 실려 뒤를 따랐다. 개선하는 병사들을 맞아들이는 한양 백성들 사이에서 놀라움이 가득한 대화들이 계속해서 오갔다.

    “전하! 성은이 망극하옵나이다!”

    “성은이 망극하옵나이다!”

    임금은 약속을 지켰다. 이번 원정에 참전해 공을 세운 서얼들은 한 명도 빠짐없이 과거 응시자격을 얻었으며, 이날로부터 백 일 후에는 승전을 기념하는 증광시를 열기로 했다.

    “……그뿐만이 아니다. 이번 토벌에서 공을 세운 군사들 중에 원하는 이는 전원 신설될 군관도감(軍官都監)에 입학을 허하라며 상감마마께서 어명을 내리셨다.”

    “……?”

    “육군과 수군을 아우르는 정예부대의 무관이 될 이들을 군관도감에서 양성할 것이다. 그리고 배움을 마치는 즉시 육군을 지망하는 이는 총통위로, 수군을 지망하는 이는 원양수영으로 벼슬을 받고 배치될 것이다.”

    사쓰마 토벌에서 세운 군공 덕에 창덕궁에 입궐하게 된 병사들 사이에서 웅성거림이 퍼져나갔다. 무과를 치르지 않고도 벼슬을 할 수 있는 일종의 특채가 선언되었으니 당연했다.

    특히 군관도감 입학 건은 서얼들 사이에서 반응이 좋아보였다. 원래 수군이던 병사들은 단순히 하사받은 전리품에 만족하고 있었으나, 서얼들은 명예욕에 굶주려 있을 테니까.

    서얼에게도 무과 응시는 허락되었다 하나 지금 같은 기회는 흔한 것이 아니었다. 조선 최고의 정예부대에 배치된다는 것은 군공을 쌓아 위로 올라가기 수월하다는 것과 동일한 뜻이니까.

    ‘그것 참 좋은 생각이로구나. 명의 함대와 맞서 이길 함대를 육성하려면 군관 또한 많이 필요할 터.’

    ‘이번에 수군으로 복무한 서얼들이 꽤 쓸 만한 전력이었다는 것은 둘째 치고, 전하께서 그들의 굴레를 벗겨주신다면 서얼들은 호포대의 충성심만큼이나 강렬한 충성을 전하께 바칠 것입니다. 그것 또한 큰 이점입니다.’

    ‘지금까지 무관들 사이에서 알음알음 전수되어오던 병법 지식을 한 가지로 일통하는 것 역시 큰 도움이 되겠지. 지금까지 무과에 응시하던 장정들이 체계적인 교육을 받았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다.’

    ‘다만…… 나라에서 전담해 무관을 육성하는 방식은 상당한 비용이 들어갈 것입니다. 호조에서 지출하기에는 아직 부담이 큰 규모기도 하고요. 아마도 이만큼의 은을 소모하지 않을지…….’

    ‘이 정도 은자라면 내탕금으로 부담 못할 규모는 아니되…… 중전과 상의가 조금 필요하겠구나. 큰 액수임은 분명하니.’

    임금이 나랏일에 몰두하는 사이 내수사 운영은 거의 중전이 도맡고 있었던 터라 어쩔 수 없었다. 그만큼 큰 규모의 지출이 필요하기도 했고.

    하지만 사관학교의 설립은 분명 그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었다. 양질의 장교가 공급되면 군대의 전투력은 크게 올라가는 것은 당연하다. 원 역사에서도 대략 오십 년 후에 첫 사관학교가 세워졌던가.

    아마 이 군관도감은 최초의 사관학교이자, 최초의 해군사관학교로 역사에 남을 것이다. 해군과 해병대를 동시에 육성하는 선진적인 시스템과 함께 말이다.

    “다만 이것을 단순한 출세의 길로 생각하지 말라. 군관도감의 일원이 되더라도 무관으로 특채되기까지 너희가 견뎌내야 할 훈련은 지금까지의 것보다 훨씬 엄격할 터이니.”

    “……!”

    “총통위는 내가, 원양수영은 통제사가 맡아 너희가 훈련받을 내용을 마련할 것이다. 또한 총통위와 원양수영의 정예 군관을 선발해 군관도감의 교관으로 삼을 것이다.”

    “그 말씀은…….”

    단순히 특채를 노리고 지원한 자는 견디지 못할 것이다. 군관도감은 죽을 각오를 한 자만이 버텨낼 수 있는 곳이 될 것이다.

    “조선제일군에는 개인의 영달보다 나라의 영예를 꿈꾸는 자가 필요하다. 고난을 견뎌내고 영광을 움켜쥐고 싶은 자, 나와 함께하라!”

    “우와아아!”

    “너희가 먹고 마시고 입을 것은 모두 상감마마께서 지원하실 것이다! 전하께서 내리신 성은에 너희의 피와 땀으로 보답하라!”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이번 일을 계기로 일정 기간 이상 군에 복무한 서얼의 차별을 철폐한다는 어명이 내려졌다.

    직접 피와 땀을 흘려 적과 싸운 자들에게 신분의 구별이 필요하냐는 임금의 일갈에 반대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그런 파격적인 면천(免賤)에도 불구하고, 논공행상이 이뤄지고 있는 창덕궁 인정전 앞은 온통 군관도감 이야기로 웅성거렸다.

    본래 문관 지망이라던 신무도 나중에 요운을 통해 내게 상담을 요청해 왔을 정도였다. 보장된 벼슬자리가 서얼들에게 꽤나 매력적으로 다가온 걸지도.

    다만 이 자리에 딱 하나, 지금 상황이 탐탁지 않은 사람이 있었다.

    ‘후……. 나는 정말로 알아서 일을 버는 스타일이었구나.’

    나는 도대체 누구를 닮은 것인지.

    이렇게 되면 군관도감이 첫걸음을 떼기 전까지 커리큘럼을 정립하고 교과서도 작성해야 한다. 병조에 떠넘길 부분은 최대한 떠넘기겠지만 호포대를 키우던 시절부터 적용한 현대식 교습법은 나 말고 저술할 사람이 없었다.

    그나마 수군 쪽은 혼자 들떠 몇십 권이고 충무공 찬미가를 작성해 주실 분이 계셔서 다행이었다. 그분 역시 세계 최고를 다투는 명제독 중 한 분이니 더욱 믿음직했다.

    ***

    “입조한 살마주 번주는 주상 전하께 예를 갖추시오! 국궁(鞠躬)!”

    사쓰마 다이묘 시마즈 미쓰히사와 그의 차남 히사야스(久定)는 창덕궁까지 끌려왔다. 통역을 통해 임금에게 올리는 예인 국궁사배를 올리라는 말을 듣고 잠시 눈썹을 꿈틀거리던 미쓰히사는, 내가 곧바로 눈빛을 쏘아대자 꼬리를 내리고 이마를 땅에 박아댔다.

    말을 진작 잘 들었어야지.

    마음 같아서는 다이묘 자리도 갈아치우고 싶었지만, 견제 세력을 사쓰마에 박아 넣는 정도로 봐 줬으면 감사하게 여겨야 되는 것 아닌가.

    “신임 녹아도(鹿兒島, 가고시마) 만호(萬戶)는 전하께 예를 갖추시오!”

    “하잇!”

    예복을 차려입고 기세등등해진 이세 사다아키가 머리를 박았다.

    한 번 뜨거운 맛을 본 이 자가 내통해온 덕분에, 사쓰마 정벌이 더 쉽게 피해 없이 일단락된 공을 인정해 사다아키에게 내려진 상이었다.

    다이묘 가문에서 쫓겨나 가신의 가문을 잇게 된 놈이라 평소에 시마즈 가문과 당주인 미쓰히사에게 쌓인 한이 많았다고 했다. 적당한 힘만 쥐어주면 알아서 제 형을 견제할 것이다.

    “신임 만호는 살마주에 내려질 주상 전하의 은덕을 총괄할 것이오. 때문에 지금부터 조선에서 살마주로 향하는 모든 식량의 분배는 여기 녹아도 만호를 통하게 될 것이오.”

    “…….”

    “살마주에서 조선에 공급할 특산물의 가격 역시 우리 조정과 녹아도 만호가 정할 것이오. 살마주에서 온 이들은 모두 숙지하길 바라오.”

    쇼군에게 분명 약속했었다. ‘사쓰마 번’을 신하로 삼지 않을 것이라고.

    나는 약속을 어기지 않았다.

    새로 신설한 가고시마 만호는 어쨌건 사쓰마를 직접적으로 지배하는 형태는 아니니까. 그저 현지인 하나에게 조선의 관직을 내려준 것뿐이었다.

    예조의 대리자 겸 현지의 무역 중개인 정도라 할까.

    “조선에 모든 협조를 다하겠습니다! 전하!”

    이세 사다아키 입장에서는 과분한 출세였다. 본가에서 쫓겨나 가신의 가문이나 이어야 하는 처지에서, 사쓰마 번과 상국 사이의 유일한 통로를 맡게 된 것이 아닌가.

    나는 사쓰마 번의 해적질을 엄히 금하는 대신, 어느 정도 식량을 팔아주면서 놈들을 제어할 생각이었다. 당연히 류큐처럼 자유롭게 놔둘 생각은 추호도 없었고.

    상황이 안정되면 가고시마의 화산토에서 키울 수 있는 특용작물을 키워 조선에 공급시킬 생각도 있지만, 지금은 시기상조일 것이다. 적어도 몇십 년은 지나야 하지 않을까.

    “살마주 번주와 녹아도 만호는 서로 협력해 왜구들을 제어하고 백성들이 굶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도록 하시오. 조선에서 전달되는 주상 전하의 은혜가 끊어지지 않도록 말이오.”

    말이 끝나기 무섭게 미쓰히사와 사다아키의 눈빛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불꽃이 튀는 걸 보니 지금까지 쌓인 감정이 한두 가지가 아니지 싶었다.

    이미 그것을 알고 이 구도를 만든 것이지만.

    자고로 적의 힘을 꺾어놓는 데는 갈라치기만큼 효과적인 책략이 없었다. 때문에 전대 다이묘의 떨거지 아들에게 권력을 주고, 에도에 있는 다이묘의 첫째 대신 여기 둘째를 볼모로 잡아온 것이다.

    이 책략을 내게 뼛속 깊이 아로새겨준 사람의 얼굴이 떠올라 입가에 절로 쓴웃음이 지어졌다. 최근에 건강을 꽤 상한 그분은, 아직도 임금의 문안만을 받으며 경희궁에 칩거하고 계신다.

    “다음으로 살마주 번주의 차자, 도진구정(島津久定, 시마즈 히사야스). 전방을 향해 고개를 들라.”

    “…….”

    “너는 단순한 볼모살이 대신, 주상 전하의 은혜로 한동안 이 한양에서 유학을 배우게 될 것이다. 전하께 감사를 표하도록.”

    “하, 하이…….”

    이제 열 살도 안 된 꼬마를 창살 없는 감옥에 가둬 놓을 생각은 없었다. 어차피 사쓰마 번으로 돌아갈 놈이라면, 그리고 혹여나 차기 다이묘가 될지도 모르는 놈이라면 미리 영향력을 뻗쳐놓는 것이 낫다.

    “공자께서도 덕으로 감화시켜 다스려야 백성들이 스스로 바르게 한다 하셨다. 네가 올바른 학문을 배우고 닦아 살마주 백성들에게도 덕치(德治)를 베풀길 바란다는 전하의 뜻이시다.”

    타국의 근엄한 자리에 끌려와 사시나무처럼 몸을 떨어대던 아이의 반응이 조금 잦아들었다. 사실상 볼모가 아니라 유학생 대접을 하겠다는 뜻이었으니, 공포가 조금 사그라들만했다.

    ***

    개선식이 끝나고 이어서 원양수군을 위한 연회가 궁에서 거하게 치러졌다. 잠시 연회 자리에 머물며 병사들을 격려한 임금과 나는 곧 자리를 떠야만 했다.

    사쓰마 원정에 대한 보고를 올려야 했기 때문이었다.

    “잘했다. 네가 데려온 우리 백성들이 내 가슴을 이리 아프게 할 줄은 몰랐다.”

    “살마주에서 일이 잘 풀려 다행이었습니다. 군사들의 희생도 최소한으로 줄었고요.”

    “나는 무엇보다 네가 무사히 돌아온 것이 기쁘도다. 어쨌거나, 결국은 유구국이 우리 세력권으로 들어온 셈이구나.”

    편전에서 주위를 물리고 정리된 보고서를 읽던 임금의 입에서 칭찬이 떨어졌다. 출진 전 계획했던 목표를 모두 달성했으니 임금의 눈에서 기쁨이 넘쳐흐르고 있었다.

    국초에 대마도를 정벌했을 때 큰 군사적 성과를 거두지 못했던 것을 생각하면, 사실상 이번 정벌은 바다를 건넌 원정 중 유일한 성공 사례였다. 연락선이 먼저 닿아 승전보를 전했을 때, 조정 분위기는 명절을 방불케 했다며 임금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예, 전하와 계획했던 대로 그들에게 은혜를 베풀자, 유구국 중산왕이 스스로 조선에 입조하겠다 먼저 말을 꺼내더군요.”

    “이걸로 명국에도 체면이 섰다. 마침 대만 섬에 있는 하란타의 거점에서 사자가 왔었는데, 해적의 소굴을 소탕하고 유구국이 해방되었다는 소식에 기쁨을 감추지 못하더구나.”

    “대만 섬에서 조선까지 오려면 해류를 타고 유구국을 거칠 수밖에 없었으니 더욱 그렇겠지요. 교역로를 위협하던 왜구가 씨가 마른 것도 기쁠 터이고요. 헌데…….”

    “갑자기 하란타의 거점에서 소식이 온 이유가 궁금하겠지. 안 그래도 그 이야기를 하려던 참이었다.”

    방금까지 환희에 가득 차 있던 임금이 표정을 굳혔다. 네덜란드에서 온 사자가 무언가 중대한 이야기라도 들고 왔지 싶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저번에 조선을 방문한 특사가 본국에 도착한 후에 보낸 사신은 아니더구나. 날짜를 계산해보아도 그렇게 단기간에 왕복하기는 불가능하고.”

    “그렇다면 하란타 본국에서 특사를 보낸 이후에 무언가 추가로 사람을 보낼 이유가 생겼다는 뜻이군요.”

    “그래, 사람을 보낸 것은 아니고 교역선 편에 국서를 추가로 보낸 것이지만 말이다. 읽어보겠느냐.”

    의견을 말해달라며 임금이 내 앞에 네덜란드어로 적힌 국서를 밀어놓았다. 대만에서 덧붙인 한문 번역이 첨부되어 있었으나, 나는 왜곡되지 않은 원문의 내용에 집중했다.

    “대가는 무엇이든 좋으니 군사적인 협력을 부탁한다고 적혀있군요. 이 군사적인 협력이라는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리키는 것일까요.”

    “그 먼 곳까지 우리 군사 다수를 파견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 아마 그들이 들고 간 호총만으로는 모자랄지도 모른다 생각하는 모양이더구나. 양국의 군사 교관끼리 교류도 요청한다고 적혀 있던데, 맞느냐?”

    “예. 그곳에도 선대 하란타 공이 고안한 훌륭한 조총수 전술이 있다는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최대한 빠르게 사절단을 파견해 달라……. 어째서 이런 요청을 추가로 보냈을까요.”

    “일본의 대군이 조선통신사를 요청하듯, 비슷한 맥락이 아니겠느냐. 먼 이국의 사절단이 누군가의 입지를 강화시켜줄지도 모르는 일이지.”

    반드시 조선의 왕족을 사절단으로 보내주었으면 한다며, 양국의 친선을 위해 깊이 고려해주었으면 좋겠다는 문장으로 시선이 옮겨갔다. 이 시절의 네덜란드면 왕당파와 공화파 사이의 갈등이 슬슬 표면으로 드러날 때였던가.

    “그럼 이번에도 봉림대군을 보내실 생각이십니까?”

    “그래. 이미 아우도 먼 길을 다녀오겠다는 결심을 내게 먼저 보였다. 헌데 그 아랫줄에 적힌 것을 읽어 보거라. 그것이 가장 큰 문제니까.”

    다음 문장은 한 줄 자리를 건너뛰고 적혀 있었다. 강조의 표시를 알리는 듯이 굵은 펜으로 적힌 네덜란드어 문장을 해석하자마자, 나는 임금의 표정에서 기쁨이 사라진 이유를 바로 알 수 있었다.

    「페킹(북경)에서 동인도회사와 최초로 접촉했던 조선의 신하가 반드시 네덜란드에 방문해주셨으면 합니다. 이 일은 네덜란드와 조선의 친선에 크나큰 보탬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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