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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 어사, 조선을 뒤흔들다!-177화 (177/298)
  • 177화. 독 안에 든 쥐

    가고시마 앞바다를 봉쇄당한 사쓰마 번은 아무런 힘을 쓰지 못했다. 그들의 병력은 조선 수군에 의해 육군과 수군이 분리당한 상태였고, 더구나 긴 사정거리를 가진 조선의 무기에 일방적으로 얻어맞기 일쑤였다.

    “잠시 대기! 이 자리에서 아군의 지원 포격을 기다린다!”

    “신호연을 올려라!”

    적의 심장부, 가고시마 성까지는 장애물이 가로막고 있었다. 아무래도 사쓰마 번의 중심지다보니 질서정연하게 가옥들이 늘어선 구역이 존재했던 것이다.

    그 때문에 바다 위에서 지형을 살펴보고는 시가전까지도 각오했던 바다. 하지만 라위터르가 빠르게 가고시마 앞바다를 제압하자, 총통위 병력들의 진격은 생각보다 쉽게 풀려나갔다.

    “으아악!”

    “나니?”

    “복병이다! 복병이 있다!”

    적에게 친숙한 복잡한 지형에 들어가면 불리하다 병법에 적혀있긴 했으나, 혹여나 있을 복병을 치워줄 수단이 있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바다 위의 전선에서 쏘아대는 천자총통은 아군 병력의 전방을 지속적으로 청소해주었다.

    아무리 담장과 골목에 병사를 숨겨놓더라도, 그럴만한 위치마다 포탄이 날아온다면 매복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 포격으로 복병을 전부 제거할 정도로 천자총통의 파괴력이 높은 편은 아니었지만, 복병을 간파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큰 도움이 되는 것이다.

    “도쓰게키(突撃)!”

    “적이 돌격해온다! 사격 개시!”

    “격발!”

    신호연으로 아군 위치를 유추한 것인지, 가끔 웬 얼빠진 사무라이들이 돌격해오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그런 만용은 진형을 잡고 대기 중이던 총통위의 한 끼 식사가 될 뿐이었다.

    가끔 아군을 향해 날아들던 화살 역시 전열에 세운 등패수들에 의해 막혔다. 단발권총과 창으로 무장한 등패수들은 웬만한 적병들의 접근조차 허용하지 않았다.

    “도절제사 대감! 날이 밝아옵니다!”

    “이제 가고시마 성이 가깝구나! 정신을 흐트러뜨리지 마라!”

    그렇게 아군 포격지원을 받아 정지와 전진을 반복하다보니 어느새 총통위 부대는 주거지대를 돌파해 가고시마 성에 근접해 있었다. 총통위가 지나온 자리는 부서진 가옥들과 낭자한 선혈이 가득했다.

    꽤 넓은 평지가 앞에 나타나 이제 한숨을 돌릴 수 있다 생각한 순간, 대장선에서 신호연 하나가 더 올랐다. 천자총통의 사정거리를 벗어났다는 신호였다.

    “전군 정지! 여기서부터는 포격 지원이 불가하다! 후방 경계도 소홀하지 말라!”

    “도절제사께서 명하셨다! 대열을 변형한다! 속히 움직여라!”

    그렇다면 이제부터는 사실상 총통위 병력만을 가지고 적군에 맞서야 하는 상황. 방금까지 덤벼들던 왜군은 시간끌기용일지도 몰랐다. 긴장이 목 줄기를 타고 올라오는 것이 느껴졌다.

    지금부터가 진짜다.

    그리고 그 긴장은 단순한 것이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주거지대와 가고시마 성 사이 꽤 넓은 공간에 진입하자마자, 아군을 반기는 한 무리의 병력이 보였다. 왜군이었다.

    “모든 병력을 성 안으로 물렸다 이건가…….”

    “해자를 건너는 다리 앞에 적 병력이 밀집해 있습니다, 대감!”

    “이쪽 성벽 위도 바글바글한 것을 보니 성벽과 해자를 끼고 방어전을 펼치겠다는 속셈이군.”

    적도 나름 생각이 있는 모양이었다. 천자총통의 포격지원 때문에 주거지대에서 전투는 사실상 도리가 없으니, 최후방어선인 가고시마성에 집결해 방어하겠다는 속셈인가.

    쌔애애애액.

    허공을 찢는 소리와 함께 두 발의 포탄이 성벽을 넘어가는 것이 보였다. 계속해서 충무포가 가고시마 성을 때려대고 있었음에도 성벽 위에 모여드는 적군의 수는 늘어나기만 했다.

    “계획대로군.”

    “예? 적이 계속 늘어나고 있는데요?”

    “적장의 눈에는 우리밖에 보이지 않는 모양이다. 아마 이쪽만 막으면 된다고 생각하는 것 같은데, 이걸 어쩌나.”

    이것 말고는 답이 없었겠지.

    적 지상병력은 개전 초반에 각개격파 당해 안 그래도 적은 병력을 꽤나 잃었을 테니까. 적 입장에서도 남은 병력을 몽땅 끌어 모아 해안으로부터 진격해오는 적 병력을 막아내는데 집중하는 것이 최선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상륙한 조선군은 이게 다가 아니다. 김 갑사의 별동대를 미리 남쪽 해안에 상륙시킨 이유가 있었다. 지금쯤이면 그 병력들은 가고시마 성 후방에 위치한 산을 타고 있으려나.

    “총통위! 들리는가!”

    “예! 대감!”

    “놈들이 개미떼처럼 다리와 성벽을 막고 있는 것을 보라! 저들은 우리를 명백히 두려워하고 있다!”

    아무리 작아도 성은 성이다. 내 병력이 정공법으로 공략하면 뚫어내기 어려운 상황이나, 굳이 그런 멍청한 짓을 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어깨 위에 달려있는 물건은 생각하라고 있는 것이 아니던가.

    다행인 것은 적의 성벽 위에 놓여있던 석화시(石火矢), 그러니까 포르투갈에서 수입해온 불랑기포가 놓여있었을 자리가 이미 아군의 포격을 맞아 날아가 있다는 점이었다.

    사정거리가 짧고 위력은 뛰어나지 않은 포지만, 어쨌건 제압 과정에서 아군에게 희생을 강요할 수 있는 놈들이 제거되었다. 희소식이다.

    “우리는 이곳에서 최대한 놈들의 주의를 끌어야 한다! 솜씨 좋은 조총수들을 골라 몸을 드러낸 놈들을 모조리 쏘아 넘어뜨려라!”

    “예!”

    “탄약을 아끼지 마라! 놈들이 고개도 들지 못하도록 매섭게 몰아쳐라!”

    우리의 목적은 이 성문을 뚫어내는 것이 아니다. 시간을 끄는 것이지.

    가고시마 성은 삼면은 해자와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으나, 후방은 시로야마라 불리는 험한 산에 기댄 형세를 취하고 있었다. 해안부터 정면을 향해 진군한 조선군에 적의 주의가 온통 쏠려 있으니, 후방에까지 경계를 돌릴 여유는 없겠지.

    하지만 여기 기준으로는 험한 산이라고는 하나, 맹수들을 벗 삼아 매일같이 계곡과 능선을 누비던 총통위 병사들에게 이 정도의 산이 장애물이 될 리가 없었다.

    김 갑사의 별동대가 적의 심장에 꽂힐 때까지, 내 계산으로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너희가 오늘 쏘는 총탄들은 한 발 한 발이 영원히 역사에 남을 것이다! 나 역시 너희들의 활약을 눈에 새길 것이다!”

    “옛! 대감!”

    “왜놈들에게 조선의 쓴맛을 톡톡히 보여주어라! 오늘 우리는 임진년의 원수를 갚는다!”

    숨을 크게 들이쉬고 앞서서 나아갔다.

    장전된 총을 들어 가슴에 잔숨을 조금 남기고 유난히 화려한 복장의 왜장을 조준했다.

    타앙!

    허공에 붉은 불똥들이 흩뿌려졌다. 저 멀리 성벽 위 역시 마찬가지였다.

    ***

    “……도노사마! 정신이 드십니까? 어서 정신을 차리셔야 합니다!”

    사쓰마 다이묘, 시마즈 미쓰히사의 눈이 번쩍 떠졌다. 가고시마 성의 전면에서 성을 지키는 왜군과 조선군의 전투가 한창 벌어지고 있을 무렵이었다.

    “내…… 내가 얼마나 정신을 잃고 있었느냐?”

    “해가 솟았습니다. 낮으로 치면 한나절 정도 의식을 회복하지 못하셨습니다.”

    가고시마 성은 규모가 그리 크지 않은 성이다. 성문에서 전해지는 화약 터지는 소리가 방까지 선명하게 들리고 있었다.

    쾅.

    포탄이 떨어지는 소리와 함께 방 안이 다시 뒤흔들렸다. 진동이 몸에 전해지자 미쓰히사의 몸 구석구석에서 통증이 함께 깨어났다. 가신의 등에 업혀있다 바닥을 굴렀을 때 입은 타박상 같았다.

    “으…… 으으…….”

    “주군! 조선군의 기세가 만만치 않습니다! 지금은 성곽과 해자를 끼고 단순히 버티고 있지만, 적이 언제 물러날지 장담할 수 없습니다! 더구나……!”

    쾅!

    미쓰히사를 깨운 가신은 말을 채 끝맺지 못하고 바닥에 엎드렸다. 이번엔 조선군이 시간차를 두고 화포를 쏜 것인지, 포탄 한 발이 뒤늦게 떨어진 것이다.

    “성문에서 조선군을 막아낸다 하더라도 가고시마 성내가 안전하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결단을 내려주십시오! 도노사마!”

    “결단을 내리다니? 내 성을 버리고 어디로 가란 말이냐?”

    “도노사마의 영지가 이 가고시마만 있는 것도 아니고, 바다에서 날아오는 적의 포탄을 피하기 위한 산성은 다른 곳에도 있지 않습니까? 어서 결단을 내려주십시오!”

    가고시마 성을 비우고 몸을 피하자는 이야기인가.

    미쓰히사는 포탄 때문에 아직도 징징 울리는 귀를 다스리려 애쓰며 정신을 집중했다. 방 안에 모여 있는 다른 가신들 역시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듯했다.

    조선군의 전력이 압도적인 것은 확실하다. 그러나 그들의 전력은 바다에 맞닿아있는 곳에 한정되어 있다. 육군이 상륙했다고는 하나 얼마나 많겠는가. 넓은 사쓰마의 영지를 전부 점령하기에는 불가능에 가깝다.

    “적이 물러날 때까지 몸을 숨기고 시간을 끌자?”

    “예! 그렇습니다! 적의 포탄과 화약도 무한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지금 외성(外城)으로부터 소식을 받고 달려오는 구원병도 있을 것이고요!”

    “으음…….”

    “부디 가고시마를 잠시 비우고 피신해 주십시오! 도노사마!”

    쾅!

    이번엔 꽤 가까운 곳에 포탄이 떨어졌는지, 먹먹해진 귀에 삐 소리가 가득해졌다. 이제 미쓰히사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은 단 하나뿐이었다.

    “그래! 가자! 오스미(大隅)건 휴가(日向)건 가고시마를 벗어나 구원병과 합류한다면 적이 물러갈 때까지 버틸 수 있을 것이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준비는 미리 마쳤으니 어서 걸음을 옮기시지요!”

    다이묘가 결정을 내리자마자 가신들은 우르르 방 밖으로 나서기 시작했다. 실외에 대기 중이던 병력을 모으는 가신들의 목소리로 방 안은 잠시 시끌시끌해졌다.

    “그렇다면 성 뒤에 있는 시로야마(白山)을 넘을 셈이냐?”

    “예! 그렇습니다! 적은 바다 방면과 정면에서만 공격을 가해오고 있으니, 퇴각로는 안전할 것입니다!”

    “좋다! 가자!”

    그렇게 다이묘 일행은 후문을 열고 가고시마 성을 탈출했다.

    땅거미가 내려앉을 무렵을 틈탄, 백 명도 되지 않는 규모의 은밀한 탈출이었다.

    성을 떠나는 동안 자신의 부하들이 죽어나가는 소리가 계속해서 뒤를 따라왔음에도 미쓰히사의 눈은 깜짝도 하지 않았다. 마치 얼어붙기라도 한 것 같았다.

    “도움 안 되는 놈들 같으니라고. 조선이 바다를 건너지 못한다고 한 놈은 누구였나! 혹여나 건너더라도 충분히 격퇴할 수 있을 거라고 호언장담하던 놈은 누구였나!”

    “…….”

    “밥버러지 같은 놈들! 이 난리가 끝나면 배를 갈라야 할 놈들이 한둘이 아닐 것이다!”

    가고시마 성을 벗어나 산을 타는 내내 미쓰히사는 울화통을 터뜨려댔다. 그가 긴장을 잠시 내려놓고 화를 멈춘 것은 산허리를 타고 한참을 걸어 드디어 돌이 깔려있는 도로가 눈에 들어왔을 때였다.

    규슈 서부를 가로지르는 사쓰마 가도.

    길을 쭉 따라가면 후쿠오카까지 닿을 수 있겠지만, 당장 이웃한 히오키(日置)까지만 가도 조선군의 마수에서 벗어날 수 있다.

    가신들 역시 그것을 깨달은 모양이었다. 그래서인지 가신들도 방금까지 잔뜩 굳어있던 얼굴을 펴고 미쓰히사의 화를 풀기 위해 꾸며낸 웃음을 한껏 눈가에 묻히려던 찰나였다.

    “거기 앞에 접근하는 놈들! 신분을 밝혀라!”

    능선 위에서 웬 벼락같은 소리가 들려왔다. 그 방향을 향해 시선을 돌리자, 일행들의 눈에 저 멀리 줄무늬 갑옷을 걸친 거한 하나가 이상한 모양의 철포를 겨누고 소리치는 것이 보였다.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었다.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은 일본어가 아니었으니까.

    다만 가신 하나는 거한이 몸에 걸친 갑옷의 정체를 깨닫고 얼굴색이 시퍼렇게 변하고 있었다.

    “조선군……! 조선군입니다! 도노사마!”

    “뭐야? 어차피 한 명이 아니냐? 당장 가서 저놈을 베어 넘기고 전진하라!”

    하지만 미쓰히사의 기대는 산산이 부서졌다. 명을 받고 칼을 뽑아든 채 뛰어나간 무사 세 명은 연달아 날아든 총탄을 맞고 절반도 가기 전에 바닥에 엎드려 절명했다.

    한 발은 거한의 철포에서 발사된 것이겠지만, 다른 총격의 출처는 알 길이 없었다. 총탄에 뱃가죽이 뚫린 무사 하나는 마치 할복을 당한 것처럼 바닥에 내용물을 흘리며 처참하게 죽어갔다.

    “아, 아니! 대체!”

    “나는 조선국 주상 전하의 뜻을 받들고 이 땅에 왔다! 삼군도절제사께서 명하시길 이 방향으로 쥐새끼들이 도망칠지도 모른다 하시더니 그대로구나!”

    “뭐야?”

    이번에는 거한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 거한의 옆에 어느새 나타난 병사 한 명이 하카타 억양으로 그의 말을 통역하고 있었으니까.

    “이 건방진 놈! 이분이 누구신지 알고……!”

    “정유년에 우리 백성들을 잡아가 돌려주지 않고, 오히려 조선을 노략질하려 했던 왜구의 두목 아니신가? 나는 전하의 명을 받들어 네놈을 징벌하러 왔도다!”

    “뭐, 뭣이? 저 불경한 자의 목을 당장 베어와라! 저놈의 목을 가져오는 자에게 다이쇼(大將) 자리를 주겠다!”

    이번에는 아시가루 열 명 가량이 거한을 향해 뛰쳐나갔다. 그러나 철포를 든 아시가루들이 조총의 사정거리 안까지 접근하기도 전에 산기슭은 다시 한번 피로 물들고 말았다.

    덤불 사이에서, 나무 뒤에서, 바닥의 구덩이에서 줄무늬 갑옷을 입은 채 기어 나온 짐승들이 총탄을 쏟아냈기 때문이었다. 손에는 괴상한 철포를 들고 짐승 탈을 쓴 군사들은 분명 조선군의 복식을 하고 있었다.

    “도노사마! 저, 저거!”

    “칙…… 칙쇼!”

    자신도 모르게 그 위세에 눌려 한 발 뒤로 물러난 미쓰히사의 몸이 한 바퀴 굴렀다. 다리에 힘이 빠진 것인지, 경사진 곳을 헛밟았기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히…… 히익!”

    조선군의 두정갑을 입은 짐승들이 천천히 포위망을 조여 왔다. 미쓰히사가 겨우 자세를 가다듬고 고개를 들었을 때는, 이미 짐승 무리의 한 가운데에 일행 전부가 포위된 상태였다.

    가신 몇몇도 그 광경을 보고 다리가 풀린 것 같았다. 어디선가 지릿한 냄새가 풍겨와 코에 닿았다.

    “살마국 번주 도진광구(島津光久)! 네 죄를 알렷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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