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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 어사, 조선을 뒤흔들다!-174화 (174/298)

174화. 감도는 전운

“칙쇼! 그 많은 세키부네를 가라앉히고 혼자 돌아와서 하는 말이, 뭐라? 류큐를 해방시키고, 그 귀한 도자기를 만들어내는 도공들을 돌려달라? 거기에 조선에서 입조까지 요구했다고?”

“하지만 도노사마! 그들의 배는 뛰어납니다! 만약 그들의 함대가 대규모로 공격해온다면 어찌하시려고요?”

“빠가야로! 그 좁은 쓰시마 해협도 날이 좋아야 겨우 건너는 조선이 어떻게 여기까지 온단 말이냐? 놈들이 제주에 새 항구를 열었다 하니 그곳에만 접근하지 않으면 될 일이다!”

“명국과의 관계는 어찌하려고 그러십니까? 조선의 제안을 듣지 않으면 우리 사쓰마 번의 수입이…….”

“에잇! 내가 알아서 하겠다! 류큐의 이름을 빌려 조공을 보낼 때 남경에 끈 하나 만들어두지 않았을 것 같으냐? 조선 같은 허수아비의 말을 듣느니 명 본국을 상대하겠다!”

***

예상대로였다.

꽤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사쓰마 번주가 입조하겠다는 소식은 날아들지 않았다. 다만 놓아준 왜장 사다아키가 사죄를 표하는 서찰을 대마도주를 통해 예조로 보내긴 했다. 형인 미쓰히사에게 설득이 통하지 않았다는 내용이었다.

조선을 떠날 때 국서를 수령해갔다는 수결과 손바닥 도장을 남기고 갔던 놈이라 몸이 달아있었던 걸까. 사죄의 내용은 꽤나 구체적이고 진심이 담겨 있었으나 조정에서 내린 결정이 바뀔 일은 없었다.

황제의 요청을 받아 명의 번국을 구원한다는 명분에, 실질적으로 조선의 경제를 이끌어가고 있는 대외 무역로를 안정시킨다는 실리까지 전부 챙긴 결정이었다.

감히 어느 신하가 이 결정을 반대하겠는가.

특히 교역을 통해 생긴 이득이 한양부터 시작해 조선을 살찌우기 시작하면서 슬슬 조정 내에서 상업을 바라보는 시선 또한 바뀌고 있던 참이었다. 이미 상행위는 폭발적으로 늘어났고, 그에 발맞춰 발행한 화폐가 든든히 그것을 뒷받침해주고 있었으니.

“부국(富國)은 이제 어느 정도 진행되었다 봐야겠지. 남은 건 강병(强兵)이로구나.”

“이 계획을 승인하신다면 저 또한 당분간 승정원을 자주 비우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전하께서도 알고 계시겠지요. 이 계획을 추진할 적임자가 저라는 것을 말입니다.”

“어찌 보면 심양에서 네가 이미 성공했던 일이지 않느냐. 원양수사와 협력하면 분명 좋은 결과가 있을 것이다. 믿는다, 한수야.”

임금에게 원양수군 확충 계획을 담은 보고서를 올렸을 때는 이미 어느 정도 준비가 끝난 상태였다. 전국에 뿌려진 격문과 신보에 대한 반응이 생각보다 뜨거웠기 때문이었다.

「주상 전하께서 너희를 부르신다. 조선은 너희를 필요로 한다.

이 격문을 보고 피 끓는 자, 누구든 좋으니 한양으로 모이라.

너희의 피와 땀에 대한 보상으로 무엇보다 값진 것을 준비했나니.」

격문 한 가운데에 새빨갛게 찍힌 옥새가 꽤 많은 사내들의 심장을 자극한 모양이었다. 왜구 소탕에 공을 세운 수군들이 큰 상을 하사받았다는 신보의 기사가 뒤를 받쳐 주었을 것이다.

국초부터 찍어눌린 한이었을까. 생각보다 더 많은 수의 서얼들이 한양에 모여들었다. 아마 같은 서얼인 신무가 왜구 소탕에서 세운 공으로 차별의 꼬리표를 잘라냈다는 기사가 큰 도움이 된 것 같았다.

“사하보의 찬바람이 얼굴에 스치는 것 같지 않은가, 김 갑사.”

“그러게 옛날 생각이 납니다요, 안 자의님.”

서로를 예전의 호칭으로 부르는 이유가 있었다. 원양수영의 신입들을 앞에 두고 단상에 올라 있자니, 심양에서 맨손으로 호포대를 키워냈던 그 시절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단 오십 명만이 수확이 끝난 밭에 옹기종기 서 있었던 그때와는 달리, 지금은 족히 일천은 될 장정들이 오와 열을 맞춰 내 앞에 서 있다.

보기만 해도 절로 가슴이 웅장해지는 광경이었다.

“왜적에게 맞서 조선의 바다를 수호할 용맹한 수군이 되고자 하는 장정들은 내 말에 주목하라!”

숨을 크게 내뱉었다. 목소리는 연병장을 쩌렁쩌렁 울렸다.

“나는 승정원 도승지 겸 원양수군첨사 안한수다! 앞으로 너희의 땀을 흘리게 할 교관이며, 너희의 의식주를 책임질 후원자이며, 전장에서 너희와 함께할 장수이기도 하다!”

웅성거리는 소리가 군데군데에서 들려왔다. 한양 백성 중에 내 이름을 모르는 자는 없으니 당연할 것이다. 다급하게 내 정체를 묻는 지방 출신 장정도 여럿 보였다.

“아니, 저분이 그 유명한…….”

“도승지쯤 되는 분이 왜 전쟁터로 나가신다는 거야? 평소에는 붓을 드시는 분 아니신가?”

“에이! 자네는 ‘안선비전’도 안 읽어봤나? 조선 최고의 정예부대 총통위를 키워내신 장군이 저분 아닌가!”

그러나 소란은 오래 이어지지 않았다. 장정들을 둘러싸고 서 있는 총통위 병사들이 장정들을 진정시켰기 때문이었다.

얼굴에 덮은 짐승 가죽과 야구 배트를 닮은 몽둥이, 그리운 모습이었다.

“그래, 너희가 방금까지 입에 올린 그 사람이 나다. 하지만 이제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

“나라고 날 때부터 도승지로 태어났겠느냐. 나 또한 몇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너희와 별다른 처지도 아닌 잔반이었다.”

겨우 진정시켜놓았더니, 다시 장정들 사이에서 웅성거림이 퍼져나갔다. 전라도 산골에 처박혀 있던 시절의 ‘나’는 과거 응시 자격만 있었을 뿐, 여기 있는 대다수 서얼의 삶보다도 못한 상황이었던 것이 사실이니까.

“허나 이제 너희도 나처럼 될 수 있다.”

“그 무슨…….”

“전하께서는 이번 정벌이 성공하면, 너희가 지고 있던 굴레를 벗겨줄 생각이시다. 너희뿐만 아니라 조선 팔도 서얼의 처지를 타고난 자들의 굴레 전부를 말이다.”

방금 내가 뱉은 말이 그리도 충격이었는지, 웅성거리던 장정들은 찬물을 뒤집어쓴 듯이 조용해졌다. 그들이 기대했던 것은 개인에게 내려질 포상이었지, 서얼 차별을 철폐하겠다는 폭탄 선언은 아니었을 테니까.

“하지만 그것은 쉽지만은 않을 것이다. 몇 백 년을 이어 내려온 차별이다. 조정에도 반대하는 자들이 수두룩할 테지.”

“그렇다면 저희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 방도를 알려주십시오!”

앞줄에서 웬 질문 하나가 튀어나온 것은 그때였다. 질문한 자도 어지간히 갑작스러웠는지 통성명 따위는 잊은 듯했다.

“정녕 알고 싶은 게냐?”

“예! 도승지 영감! 가슴에 품었던 꿈을 단지 꿈으로 남겨야만 하는 인생이 얼마나 서럽겠습니까! 뭐든지 하겠습니다!”

“어렵지 않다. 반대하는 자들의 입을, 너희가 세운 군공으로 막아버려라.”

방금 전까지 흩날리던 먼지까지 바닥에 달라붙은 듯, 연병장이 고요해졌다. 침 삼키는 소리까지 들릴 지경이었다.

“전하의 뜻이 너희와 함께할 것이다. 너희의 곁에는 언제나 내가 있을 것이다.”

“…….”

“너희가 세운 군공이, 조정에서 전하께서 휘두르실 칼날이 될 것이다. 군공이 크면 클수록, 전하의 칼날은 더 예리하고 날카로워지겠지.”

“그 말씀은…….”

“지옥 같은 훈련을 견뎌내고, 전장에 나아가 적을 한 명이라도 더 쏘아넘겨라. 너희가 흘린 땀과 적으로부터 취한 피로, 지금까지 짊어졌던 굴레를 벗어던져라.”

수많은 눈동자가 나를 향해 쏠렸다. 그들의 눈빛에는 그동안 당해온 서러움들이 짙게 묻어나고 있었다.

“……그리하면 너희 서얼들이 잃을 것은 족쇄뿐이요, 얻을 것은 미래가 될 것이다.”

“……!”

“너희 또한 조선의 백성이라면, 전하의 믿음에 응답하라! 너희가 조선에 필요한 이들이라는 것을 스스로의 힘으로 증명하라!”

말이 끝나기 무섭게 함성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 그것은 곧 떠들썩한 물결이 되어 온 연병장을 덮쳤다.

***

연설이 효과가 있었는지, 훈련병들은 훈련을 꽤나 잘 버텨주었다. 사실 훈련을 받는 동안 반 정도는 나가떨어질 거라 생각했는데 말이다.

“찬바람도 불지 않는데 네놈의 몸은 벌써 얼어붙은 게냐? 고작 이 정도 힘도 못 쓰면 바다에 빠졌을 때 어찌 전선으로 복귀할 수 있겠나!”

“더 세게 당겨라! 이 밧줄이 풀려나가면 네놈뿐만 아니라 다른 동료들의 목숨까지 위험해진다!”

“화포조차 제대로 다루지 못하면서 어찌 왜적을 쳐부수겠다는 게냐! 네놈 말고도 훈련을 받고 싶다는 사람은 차고 넘칠 것이다! 정신 똑바로 차리지 못할까!”

산전수전을 다 겪은 호포대 대원들이 신병들을 허술히 훈련시킬 리 없었다. 그들은 가장 먼저 라위터르에게 훈련을 받은 병사들이었는데, 입을 벌릴 때마다 악다구니가 뿜어져 나오는 듯했다. 선상 훈련 중에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나는 라위터르의 훈련을 참관하고서야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그 사이 지방에서 골라 뽑은 수군들이 한양에 도착해 총통위에서 차출된 병력과 함께 훈련을 받는 모습을 보러 갔을 때였다.

“조선 최고의 정예병이라더니 고작 이 정도인가? 충무공 휘하의 수군에 비하면 어린아이 수준이 아닌가!”

라위터르에게 새로 번역한 책을 건네준 것이 조금 후회됐을 정도로, 그의 훈련은 엄하고 거칠었다. 생각해보니 그가 본받고자 하는 분부터가 병사들을 엄히 다스렸던 분이었는데.

함께 상경한 각 수영의 무관들도 정신을 차리지 못할 정도로 라위터르의 훈련은 서릿발 같았다. 벌써부터 병사들 사이에서 왜구보다 신임 삼도수군통제사가 더 무섭다는 소문이 돌 정도였으니.

이미 원양수군의 병사들은 라위터르의 명령을 충실히 수행하는 수족과 같았다. 그리고 새로 합류한 병사들 역시 강도 높은 훈련을 거듭해서 받을수록 그 경지에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평소 같았으면 아마 중도 포기자가 속출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하지만 이들에게 약속한 포상과, 훈련이 진행되며 점차 퍼져나가기 시작한 소문이 훈련병들의 의지를 더 단단하게 다져준 듯했다.

“뭐? 이번에 정벌하는 곳이 왜나라라니, 사실인가?”

“쉿, 나도 들은 얘기일세. 확실치 않으니 목소리를 낮추게.”

“그래서 통제사또 나리가 그렇게 귀신처럼 훈련에 임하셨구먼? 암, 임진년의 원수는 갚아야지!”

“왜놈들의 피로 치욕을 씻고 놈들의 물건을 전리품으로 받는다……. 이만큼 통쾌한 일도 없을 것이고 주머니도 두둑해질 테니, 최고 아닌가?”

원양수군이 획득한 전리품은 전부 전공에 따라 분배할 것이라는 공지가 내려졌다. 얻는 것 없이 고된 수군 일에 종사하던 병사들에게는 파격적인 특혜였다.

이번 한 번으로 그치는 특혜도 아니었다. 해적으로부터 우리 교역선을 보호하고 밀수선을 단속하면서 얻는 전리품 역시 분배가 될 것이다. 청나라에서 배워온 방법은 분명 효과가 뛰어났다.

게다가 병사들은 이번 원정이 실패할 것이라는 생각은 추호도 하지 않고 있었다. 라위터르가 전선 다섯 척으로 왜선 스무 척을 분쇄했다는 이야기를 모르는 자가 없었을 뿐더러, 점점 각지의 조선소에서 새 전선들이 만들어져 벽란항으로 보내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걸로 전선 스무 척이 모두 채워졌군. 먼저 바다로 나간 교역선단은 언제 벽란항으로 돌아옵니까, 도승지?”

“어디 보자, 무리 지어 남경으로 출발한 지 시일이 꽤 지났으니, 칠 일 안에는 돌아올 것입니다. 슬슬 원정 준비를 마무리 지어야겠군요, 통상 영감.”

“그 정도면 바다 위에서 놈들의 함대를 부수는 데는 차고도 넘칠 것입니다. 이제 육지에서 싸움이 문제겠군요.”

“많은 병력을 데려갈 수는 없으나, 분명 이번에 선발한 총통위 병력은 정예 중의 정예입니다. 바다에서 제때 도움만 주신다면, 상대의 오합지졸들은 상대가 되지 않겠지요.”

“정말 기대가 됩니다. 이 장검을 휘둘러 놈들의 피로 강산을 물들이는 날이.”

***

그로부터 한 달쯤 후, 드디어 임금에게서 사쓰마 원정 명령이 떨어졌다.

그동안의 공을 사 나는 정2품 우참찬으로 승진해 대감 소리를 듣게 되었다. 물론 도승지 직은 그대로 겸직이었지만, 어차피 그동안 국정에 손을 대온 것을 생각하면 업무가 변하지는 않을 터였다.

“전하, 이것은 전례를 찾아볼 수 없는 승진이옵니다! 이제 갓 서른이 된 신료를 정2품 고관에 봉하다니요! 통촉하여주시옵소서!”

“신 사헌부 장령 김좌명 아뢰옵니다! 방금 의견을 낸 사간의 말은 옳지 않사옵니다! 이미 비변사에서 대부분의 국정을 논하는 상황인데 무엇이 문제겠사옵니까? 그동안 도승지가 세운 공을 생각하면 가한 줄로 아뢰옵니다!”

나이에 걸맞지 않은 승진 탓에 조정에 잠시 소란이 벌어지긴 했다. 아주 잠시 말이다.

“전하,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총통위의 정예 병력을 다루는 일에는 도승지만한 사람이 조선에 없는 것으로 사료되나이다. 왜구의 소굴을 정벌하는데 총통위를 보내신다면 반드시 도승지를 우두머리로 삼으셔야 하옵니다.”

“…….”

“그리고 반대 의견을 드는 신료들에게 묻겠습니다. 허면 이번 정벌에 총통위의 우두머리로 임명하기에 도승지만큼 적합한 이가 그 외에 또 있단 말입니까?”

송시열의 지원사격도 든든했다. 거기에 더해 좌명의 말대로 의정부 참찬이란 자리가 지금은 비변사에 밀려 명예직에 가까운 상태였기 때문에, 문제없이 내 승진은 확정될 수 있었다.

게다가 임금이 이렇게 품계를 올려준 이유가 있었다. 이 정도 규모의 군으로 원정을 보내려면 사령관의 직위 역시 격에 맞아야한다는 이유였다. 대마도 정벌이라는 선례가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고.

“부디 무사히 다녀오거라. 한양에서 건투를 빌고 있겠다.”

“달라진 조선의 모습을 그들의 눈에 확실히 새겨 주고 오겠습니다, 전하.”

그렇게 나를 삼군도절제사로, 삼도수군통제사 겸 원양수사 라위터르를 삼도도통사로 삼은 원정군은 길일을 잡아 벽란항을 떠났다. 모두 합쳐 사십 척이나 되는 함대를 거느린 채였다.

마침 바람 또한 우리 편이었다.

임금이 벽란선이라 이름붙인 전선 스무 척, 예성선이라 이름붙인 교역선 스무 척으로 구성된 함대는 보름도 되지 않아 규슈의 남단, 가고시마 앞바다에 이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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