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호랑이 어사, 조선을 뒤흔들다!-167화 (167/298)

167화. 충무공의 현신

미힐 더 라위터르(Michiel de Ruyter).

네덜란드인 치고 이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전쟁사에 관심이 깊은 사람이라면 네덜란드인이 아니라도 알 사람이다.

‘미힐 드…… 뭐? 누군데, 그게? 네덜란드에서 유명한 사람이냐?’

‘아니, 어떻게 라위터르를 모를 수 있어! 너 역사교육과라며?’

내 소논문에 네덜란드의 비중이 컸던 것은 박연의 영향도 있었지만 이놈 탓도 컸다. 현대에서 친분이 있던 네덜란드 유학생 제롬, 아니 요운 그놈.

이국의 위인 전부를 내가 알 수는 없는 노릇이라는 말에, 놈은 화를 숨기지 못했다. 그러나 놈과 헤어져 집에 돌아와 찾아본 자료들은, 내가 오히려 놈에게 실례를 했다는 사실들을 가리키고 있었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 십여 년 후, 저 멀리 지구 반대편 네덜란드에서 태어난 이 사람은 세계사에서 역대 최고의 해군 제독으로 꼽힐 수 있는 사람 중 한 명이었다. 그 정도 위인을 역사전공이라는 사람이 몰라봤으니 놈이 화를 내는 것도 당연했다.

하지만 그것뿐이었다면 내 흥미는 급격하게 식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명장에 대한 자료를 찾아보면 찾아볼수록 나는 이 사람에게서 마음을 울리는 무언가를 계속해서 발견할 수 있었다.

‘아니, 어떻게 이렇게 비슷한 사람이 존재할 수 있는 거지?’

위기에 빠진 나라를 위해 목숨을 걸고 전쟁터로 나간 해군 제독.

이십 년이 넘는 세월 동안 당대 최강인 영국 해군을 상대하며 예측할 수 없는 전술을 즐겨 썼고, 특히 바람을 잘 이용해 불리한 상황에서도 힘써 싸운 장수.

적이 유리한 곳에서는 절대 싸우지 않고, 네덜란드 해안에 위치한 위험한 해안과 여울을 전략적으로 이용하기를 즐긴 장군.

그리고 무엇보다, 그를 시기한 우두머리로부터 사실상 죽으러 가라는 것과 다름없는 명령을 받았음에도, 그 명령을 따라 극도로 불리한 전장에서 싸우다 장렬히 전사한 비운의 사나이.

적들도 죽음을 애도했고, 전사 소식을 들은 국민들이 거리로 나와 흐느끼게 한 성웅(聖雄).

‘도승지, 헌데 한 가지 질문이 있습니다.’

‘물으시지요.’

‘어째서 도승지께서는 한낱 상선 선장을 콕 집어 조선으로 보내 달라 하신 겁니까? 아무리 해군에 복무한 적이 있는 사람이라지만 이제 바다를 떠날 생각까지 하는 사람입니다.’

말문이 트인 후, 엘세라크가 어느 날 내게 던진 질문이었다. 네덜란드 입장에서는 이 사람의 존재를 조선에서 어떻게 알았는지 보다, 어째서 은퇴한 군인 출신 선원을 먼 조선 땅으로 보내달라 요청했는지가 궁금한 모양이었다.

그럴 만했다. 그들은 앞으로 라위터르가 활약할 미래를 모르고 있었으니까.

네덜란드어로 최초로 번역시킨 조선 서적이 하필이면 난중일기인 이유가 있었다.

시공을 뛰어넘어 위대한 해군 제독 두 명이 만나는 장면을, 나는 반드시 보고 싶었다.

***

그날 벽란항에서 왕을 앞에 두고 새로운 조선 수군이 시연한 결과물은 탁월했다. 새 선박의 개발과 함께 설치된 원양수영(遠洋水營) 소속의 수군과 수군절도사의 작품이었다.

기상이 좋지 않아 풍향과 풍속이 꽤 자주 바뀌었음에도, 새 수군절도사의 지시를 받아 돛과 키를 다루는 수군들의 동작은 일사불란하기 이를 데가 없었다. 대장선에서 색색의 깃발이 오를 때마다 전선들은 춤을 추듯 절도 있게 움직였다.

다섯 척의 배가 예정했던 대로 운항하는 것을 지켜보는 임금의 얼굴에 화색이 감돌았다. 판옥선보다 조금 큰 전선(戰船)들이 노 없이 바람의 힘만으로도 자유자재로 움직이는 것이 감탄을 자아낼 만했다.

임금이 품은 기대는 그런 원양수군의 모습을 볼수록 점점 커지는 듯했다. 다음 차례로 예정되어 있던 함포 시연을 앞두고 새 전선(戰船)에 탑승해 직접 그 모습을 보겠다 어명을 내릴 정도였으니.

“전하께서 명을 내리셨다! 대장군전을 방포하라!”

“방포!”

감히 누가 어명을 어기겠는가. 임금을 배에 태운 채로, 대장선에 실려 있는 천자총통이 아가리에서 불을 뿜었다. 미사일을 닮은 대장군전이 천지가 무너지는 소리와 함께 하늘을 갈랐다.

다른 전선보다 돛대 하나가 더 서 있는 대장선도 꽤 흔들렸을 정도로 천자총통의 화력은 대단했다. 아직 주포인 홍이포를 실을 자리는 비어있었으나, 그것만으로도 엄청난 위력임은 분명했다.

“명중! 명중입니다!”

작은 배를 타고 목표에 접근한 수병 하나가 붉은 깃발을 휘둘러 명중을 알려왔다. 사백 보 앞에서 쏜 대장군전 네 발은 단단한 화강암 표면을 그야말로 박살 내 놓았다고 했다.

“……개중 하나는 바위 틈새를 석 자나 뚫고 들어갔다고?”

“예, 원양수사 또한 직접 표적을 명중한 것을 재확인하고 올린 보고라 하옵니다, 전하.”

“하, 하하! 대단하지 않느냐! 정예 수군이 이토록 단기간에 양성되는 것이었다니! 믿을 수 없구나!”

임금은 기쁨을 숨기지 않았다. 곧바로 당번병을 제외한 원양수영의 병사 전원을 미리 파주 행궁에 차려져있던 연회 자리로 초대하라는 어명이 내려졌다.

교하의 왕실 목장에서 바로 도축된 쇠고기가 주린 수군들의 배를 가득 채웠다. 임금이 들어앉은 정청의 술자리에서는 이날의 일등공신들이 포상을 하사받았다.

대장군전을 쏘았던 천자총통을 운용할 수 있도록, 인도에서 초석을 공급해준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를 대표해 엘세라크가 상을 내려 받은 후였다.

드디어 이 자리의 진정한 주인공들이 임금의 앞에 와 섰다.

“원양수영 수군절도사와 우후(虞侯)는 전하께서 내리신 어사주를 받들라!”

“성은이 망큭하옴미다!”

네덜란드인 수군절도사의 입에서 흘러나온 것은 어색한 조선말이었다. 아마 임금과 만나는 이날을 위해 준비했겠지.

상당히 희귀한 장면이었다.

해군사령관인 수군절도사는 검은 머리의 이방인, 그 부장(副將)인 우후는 조선인, 그리고 수군절도사를 보좌하며 벽란항의 모든 시설을 관할하는 판관은 금발 벽안의 이방인.

“우리 유능한 신임 수사를 치하하기에 앞서, 그 아래서 수고를 아끼지 않은 이부터 격려하고자 한다. 신임 수사와는 나눌 이야기가 산처럼 많으나 잠시 미루도록 하자.”

두정갑을 차려입은 장수 하나가 먼저 앞으로 나섰다. 방금 우후라고 불린 장수였다.

아마 그가 없었다면 지금의 원양수영도 없었을 것이다. 아무리 신설 함대의 규모가 작다고는 하나, 조선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장군 혼자서 모든 일을 맡아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니까.

라위터르를 수군절도사까지 올리는 일은 쉽지 않았다. 어찌 이방인을 그리 중요한 관직에 임명하냐는 상소부터, 아무리 소규모라도 외국인이 조선 장병들을 통솔할 수는 없을 것이라는 상소가 줄을 이어 승정원으로 날아들었던 것이다.

“원양수영 우후 이완(李浣), 수고가 많았다. 삼도통어사(三道統禦使, 경기·충청·황해의 수군을 통솔하던 무관직)까지 지낸 이가 품계를 낮춰서까지 원양수군 조직에 온힘을 쏟다니, 앞으로 오랫동안 미담으로 남을 이야기가 아니더냐.”

“과찬이시옵니다, 전하. 신은 전하의 신하로서 할 일을 다한 것뿐이옵니다.”

그 논란을 가라앉힐 수 있었던 것은, 반쯤은 이 장수의 공이었다. 충청 병사로 내정되어있던 사람이 새로운 문물을 배우겠다는 명분으로 라위터르의 아래로 들어가길 자원한 것이다.

최명길이 세상을 뜨기 전, 마지막으로 남겨 준 선물이었다.

이완이 선왕 시절에 잠시 동부승지를 지냈던 일은 최명길의 천거 덕분이라고 했다. 그 인연이 이토록 큰 선물을 남길 줄이야.

그렇게 원래는 북벌을 준비하던 효종에게 특채되어 군사를 키워냈을 장수는, 네덜란드의 해군 명장의 노하우를 전수받아 수병들에게 전하는 징검다리로 다시 태어났다. 사실상 원양수영의 실무는 이 사람이 전부 맡아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리 말하지 말라. 나는 원래 너를 원양수사로 삼고, 여기 원양수사를 우후로 삼을 생각이었다. 어느 누가 자신을 스스로 낮추고 낯선 사람을 위로 올리겠느냐.”

“저도 전하의 명을 따를 생각이었사옵니다. 현 원양수사의 솜씨를 보기 이전까지 말이나이다. 말은 통하지 않아도, 수군에 몸담은 적 있는 장수끼리는 통하는 것이 있었사옵니다.”

“그렇다 하여도 네 통솔 덕분에 원양수군이 빠르게 성장한 것은 누구도 부정하지 못할 것이다. 네 공을 스스로 감추지 말라.”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전하.”

임금의 말이 옳았다. 박연이 라위터르에게 늘 붙어있다고는 하나, 조선인 수병들이 처음부터 낯선 이방인을 순순히 따를 리는 없었다. 이완이 가라앉힌 것은 조정의 불만만이 아니었다.

그렇게 왕은 이완을 가까이 부르더니, 술잔 가득히 술을 부어 직접 그에게 건넸다.

어사주를 받아든 장수의 손이 떨리는 것이 보였다.

그러나 그 떨림은 그저 감동의 표현이었을 뿐, 이완의 심지까지 떨렸던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임금이 내린 술을 쭈욱 들이킨 이완은 고개를 깊이 숙여 곧바로 감사를 표했다.

뒤이어 그에게 포상으로 보검 한 자루가 내려졌다.

“전하, 송구하오나 소신은 이렇게 큰 상을 받을 자격이 없사옵니다. 이 보검은 저기 원양수사에게 내려주시옵소서.”

“원양우후는 어째서 이리 겸손한 것이냐? 고작해야 보검 한 자루다. 그것마저 마다하는 이유가 궁금하구나.”

“조금 허황된 이야기오나…… 신은 원양수사를 보좌하게 된 것만으로도 전하께서 내리신 큰 은혜라 생각하고 있사옵니다. 제 마음에서 우러나 하고 싶은 일을 수행했을 뿐이니, 상을 내리시는 것은 온당치 못한 일이옵니다.”

“여기 라위터르 수사를 보좌하는 것이 원양우후에겐 상이란 이야기더냐? 어째서?”

이완의 눈이 기묘하게 빛나고 있었다. 마치 평생의 소망이라도 이룬 듯한 눈빛이었다.

무언가 이상한 낌새가 느껴졌으나, 임금의 앞에서 사연을 풀어놓기 시작한 공신을 막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소신이 원양수영에 자원한 일을 세간에서는 완성부원군의 제안을 받아 한 일로 알고 있으나, 실은 숨겨진 이야기가 더 있사옵니다.”

“숨겨진 이야기라?”

“부원군의 제안을 받기 전날, 소신이 꾼 꿈이 커다란 계기가 되었나이다. 언젠가 한 번 가본 적이 있던 경상우도의 통제영에서 웬 빛줄기 하나가 솟구치던 꿈이었지요.”

이완은 한산도의 삼도수군통제영 터에서 솟구친 빛줄기가 멀리 서쪽을 향해 날아가는 꿈을 꾸었다 했다. 직전까지 수군절도사 직에 있던 사람이니, 충무공 관련 꿈이라도 꾼 건가.

하지만 이완이 덧붙인 꿈의 후반부는 믿기 어려운 이야기였다. 임금 역시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이완을 바라볼 정도였으니까.

“……헌데, 서쪽을 향해 날아갔던 빛줄기가, 꿈에서 깨어나기 직전에는 천천히 다시 우리 조선을 향해 돌아오고 있었나이다. 그렇게 그 빛줄기가 서해를 거슬러 한양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고 잠에서 깨어났사옵니다.”

“고작 그 꿈 때문에 원양수사를 보좌하려는 마음을 먹었단 말이더냐?”

“아니옵니다. 고작 그것만으로 이방인에게 수군을 맡기는 일을 찬성했겠나이까. 완성부원군의 주선으로 제물포까지 나가 마련한 자리에서, 원양수사가 모는 하란타선에 타자마자 소신은 그가 항해술에 얼마나 뛰어난지를 깨달을 수 있었나이다. 게다가…….”

“게다가?”

“그것뿐이었다면 신이 품계를 낮춰서까지 원양수영에 자원할 생각은 먹지 않았을 것이나이다. 수군절도사 영감, 늘 품고 다니시던 그 책을 전하께 보여주시겠습니까?”

이완의 고개가 옆으로 비켜서있던 라위터르를 향했다. 박연의 통역을 전해 들은 라위터르는 조금 놀란 표정을 짓더니, 이윽고 임금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원양수사의 능력에 남아있던 한 톨의 의심도, 그날 저녁 그와 나눈 대화에서 눈 녹듯 사라지고 말았나이다. 원양수사는 군략을 묻는 제 질문에 한 번도 막힘이 없었고, 무엇보다 대화마다 충무공을 인용하는 것이 조선의 장수보다 더했기 때문이옵니다.”

그렇게 네덜란드인 수군절도사의 소매에서는 책 한 권이 흘러나왔다. 나는 그 책의 정체를 정확히 알고 있었다. 물론 임금 역시 내게 들어 전말을 알고 있는 것은 마찬가지였고.

이완의 말이 마무리되기 무섭게 임금은 시치미를 딱 떼고 책의 정체를 물었다. 당연히 그 책은…….

“어째서 우리 조선의 것으로 보이는 서책에 하란타어가 쓰여 있는 것이냐. 박 판관, 이 책의 표지에 적힌 뜻이 무엇이더냐?”

“오오록스다흐북 판 충무, 충무공의 전쟁기록이라는 뜻이옵니다, 전하.”

“뭣이? 어째서 네가 대답하는 것이냐, 도승지. 설마 이 서책은…….”

“예, 전하. 제가 여기 라위터르 수사에게 전달한 서책입니다. 충무공의 난중일기를 하란타 말로 번역한 결과물입니다.”

그 책은 라위터르가 도착하기 한참 전부터 요안이에게 시켜 번역한 난중일기였다. 어느새 표지가 낡고 손때가 탄 걸 보니 라위터르가 얼마나 이 책을 아끼는지 알 수 있었다. 어찌나 자주 펼쳐 보았는지 책을 묶은 실도 여러 번 교체한 듯했다.

충무공과 난중일기라는 단어가 나오자마자 주위에서 얕은 탄성이 흘러나왔다.

이 중에는 라위터르에게 관직을 내리는 일 자체를 반대한 신하도 있을 터. 저 말을 듣고 조금은 생각이 바뀌었으려나.

“원양수사의 그런 모습을 보고, 어찌 이방인이 다른 마음을 품었다고 의심할 수 있었겠사옵니까. 실제로 지난번 치러진 해상 훈련 도중 들른 한산도에서, 원양수사는 그 어느 때보다 흥분한 기색을 숨기지 못했나이다.”

“판관 박연, 너 역시 원양수사가 가는 곳마다 동행했을 터다. 여기 이 우후의 말이 사실이더냐.”

“한 치도 틀리지 않사옵니다, 전하. 어째서 그렇게 위대한 분의 유적이 방치되어 있냐며, 처음으로 제게 화를 내기도 했었나이다,”

이완이 언급한, 충무공에 대한 라위터르의 이상할 정도의 집착은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 정도였을 줄이야.

한산도의 통제영 터에서 그런 모습을 보였다는 말은 이 자리에서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도승지, 이제 내가 이 나라에서 느끼던 묘한 친밀감의 정체를 알았습니다. 나는 이 사람, 충무공을 만나러 조선에 오게 된 것이 분명합니다.’

난중일기를 하루 만에 독파한 라위터르가 반촌 상관에 방문한 나를 찾아와 건넨 말이었다.

라위터르가 특사를 따라 조선에 도착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그와 처음 만난 자리에서 나는 아무 것도 모르는 척 지루함이나 달래라고 난중일기 번역본을 건넨 결과였다.

이렇게 효과가 좋을 지는 절대 몰랐지만.

한 문장 한 문장이 칼을 휘두르는 듯했다던가. 시뻘게진 눈을 하고 난중일기의 주요 대목을 읊으며 충무공에 대해 질문하는 라위터르의 모습은 마치 귀신을 방불케 했었다.

글쎄, 현대인인 나도 이렇게 이 자리에 있는데, 혹시…….

“원양수사는, 적보다 열세인 전력을 가지고, 처음부터 끝까지 한 번의 실수도 없이 완벽한 작전을 수행한 장수를 어떻게 존경하지 않을 수 있냐고 말하고 있나이다. 오늘 깃발을 이용해 함선들을 지휘한 것도 충무공의 난중일기에서 배운 것이라 하나이다.”

“허어……!”

“게다가 충무공이 함포를 활용하기 위해 설계한 진형 또한 반백년 이전의 사람이 고안한 것이라기에는 귀신의 솜씨와도 같다 하였사옵니다.”

학익진 이야기인가? 어느새 책을 내려놓고 자리로 돌아가 임금을 향해 서 있는 라위터르의 눈에는 묘한 열기가 가득 차 있었다.

충무공은 진실로 대단한 분이셨다.

남기신 책 한 권만으로도, 은퇴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먼 동방까지 용병으로 찾아온 전직 군인을 이토록 열정에 불타게 만드시다니.

위대한 제독 두 사람이 시공을 뛰어넘어 만난 결과는 내 기대 이상이었다.

※ 작가의 말

1. 미힐 더 라위터르(Michiel de Ruyter)

2015년에 개봉했던 영화 탓에, 미힐 드 로이테르라는 발음이 익숙하신 분들이 계실지도 모르겠습니다.

네덜란드에서는 구국의 영웅으로 여기는 위인입니다. 이분이 없었으면 네덜란드의 황금시대는 일찍 저물었을 것이고, 스페인을 상대로 겨우 얻어낸 독립은 물거품이 되었을 수도 있었거든요. 실제로 네덜란드가 유로를 쓰기 전 사용하던 화폐인 길더(Guilder)에는 이분의 초상이 박혀 있었습니다.

맥주 운반인의 아들로 태어난 라위터르는 11살 무렵부터 선원일을 시작해, 15살에 스페인 군대와의 전투에 종군하기 시작하면서부터 군 생활을 시작합니다. 하지만 상비군이 확실히 존재하지 않던 시대라, 중간마다 민간 상선의 선장도 맡아가며 살아갔는데, 지금 작중 조선에 와 있는 시기가 바로 이 시기입니다.

1641년 포르투갈 독립전쟁에 네덜란드 해군 소장으로 참전한 후, 1642년부터 1652년까지는 배를 사들여 대서양을 왕복하면서 은퇴 자금을 벌었거든요. 영란전쟁 직전에 고향에 집을 사들인 것을 생각하면 40대가 넘은 나이라 은퇴를 생각한 것이 확실합니다.

그러나 운명은 그를 가만히 놔두지 않았습니다.

20년 동안 세 차례에 걸쳐 벌어질 영란전쟁이 발발하자, 그는 은퇴를 포기하고 바다를 지키기 위해 다시 군에 투신합니다. 또 다른 위대한 제독, 마르틴 트롬프 휘하에서 네덜란드 해군을 지휘하다가 트롬프가 전사하고 네덜란드 해군이 혼란에 빠진 후에는 라위터르가 해군을 수습해 영국 해군을 상대합니다.

1, 2차 영란전쟁에서는 당대 최강인 영국 해군의 전열함들을 상대해야 했고, 3차 영란전쟁에서는 또 다른 강대국인 프랑스 함대까지 참전해 영불 연합함대를 상대해야 했음에도 라위터르는 네덜란드 앞바다를 꿋꿋이 지켜냅니다.

네덜란드 본국에서는 왕당파와 공화파 사이의 갈등이 극에 달해, 오히려 코르넬리우스 트롬프 같은 졸장이 왕당파의 지원을 받아 라위터르를 방해하기도 했지요. 하지만 라위터르는 도리어 역습을 가해 영국 본토를 기습해 대형 전열함 다수를 불태우고 영국 왕의 이름이 붙은 기함, 로얄 찰스 호를 포획하는 전과를 올리는 등, 고군분투를 잊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영웅의 말년은 그리 좋지 않았습니다.

라위터르의 친구이자 공화파의 우두머리던 요한 더 비트가 왕당파의 모략에 말려들어 성난 군중에 의해 길거리에서 난자당해 생을 마감하고, 네덜란드의 권력을 잡은 빌렘 3세는 라위터르의 인기를 시샘해 스페인 해군을 도우라는 명목으로 제대로 된 지원도 없이 지중해로 파견을 보냅니다.

시칠리아 앞바다에서 일어난 해전에서, 위대한 제독은 포탄에 다리를 맞아 숨을 거둡니다. 영화에서는 검은 깃발을 달아 라위터르의 전사를 알리는 네덜란드 전열함을 적군인 프랑스 전열함이 보내줄 정도였다는데, 사실인지는 모르겠습니다.

라위터르는 특히 전함의 기동을 중요시하고 체계화된 신호체계로 함대를 지휘하였는데, 이것은 근대 해군 전술의 기초가 되었습니다. 아마 라위터르가 충무공의 행적을 살아생전 접했더라면, 작중의 반응을 보이지 않았을까요.

예를 들면 영란전쟁 때 본격적으로 쓰이기 시작한 수기 신호를 이미 충무공은 임진왜란 당시에 깃발과 포, 불붙인 연까지 이용해가며 자유자재로 사용하셨고, 마찬가지로 함선들이 종으로 늘어서 함포의 화력을 동시에 쏘아낸 단종진(單縱陣) 역시 영란전쟁에서 보편화된 진법으로, 학익진의 모습과 닮아 있습니다. 적선에게 돌격을 허용하면 불리해지니 고도의 함선 지휘가 필요하다는 점까지도요.

1. 이완

원 역사에서 효종의 북벌을 보좌한 장수, 그 사람이 맞습니다. 당시 경기수군절도사겸 삼도통어사로 수군을 지휘하고 있었던 것은 고증입니다.

효종이 북벌을 위해 쓸 만한 장수를 골라내려 장수들을 궁으로 불러들여 시험했을 때, 그 시험을 통과했다 전해지는 유일한 사람이기도 합니다. 입궐하는 장수들에게 갑자기 촉 없는 화살을 쏘아댔는데, 당황하지 않고 효종의 앞까지 도달한 사람은 이완뿐이었다고 합니다. 만일의 사태라 생각해 관복 안에 갑옷을 받쳐입고 입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3. 대장군전

조선 화포는 탄환뿐 아니라 거대한 화살을 발사할 수도 있었는데, 대장군전은 천자총통에 장착해 사용하는 날개 달린 활강탄의 일종이었습니다.

16~17세기 기록에도, 대장군전은 적함을 관통해 구멍을 뚫어 무력화하는데 탁월한 성능을 보인 것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안골포 해전에서 충무공이 구키 요시타카의 함대를 격멸했을 때도 대장군전이 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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