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4화. 싸우기 전에 이기라
조선으로 돌아오는 길은 생각보다 오래 걸리지 않았다.
남경으로 갈 때는 부산포까지 육로로 이동해 제주를 거쳐 먼 길을 빙 돌아갔지만, 오는 길은 제주를 찍고 바로 서해를 따라 북상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긴 여행길에 지친 몸을 이끌고 한양 도성문 앞에 겨우 도착했을 때였다. 생각지도 못했던 사람들이 성문 앞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전하께서 입궐하지 말고 귀가하라는 어명을 내리셨다고요?”
“그렇네, 사위. 그러니 전하께서 바쁜 나를 성문까지 보내지 않으셨겠나. 조정에서 자네가 순순히 말을 들을 사람은 나밖에 없으니 말일세.”
웬 붉은 관복과 푸른 관복이 어울리지 않게 성문 앞에서 어슬렁거리고 있더니, 나를 맞으러 나온 사람들인 모양이었다.
전하께서도 대단하시지, 내가 출장 갔다 돌아온다고 일국의 정승을 마중 내보내다니.
“하지만 장인어른, 남경에서 일어났던 일은 전하께 한시바삐 전해드려야 합니다. 그만큼 중대한 일입니다.”
“갑자기 적군이 국경 앞에 나타난 것이 아니고서야 하루쯤 쉬고 입궐한다고 크게 달라질 것이 있겠는가. 게다가 어명일세, 사위. 전하의 총신인 자네가 어명을 어길 셈인가?”
“그건 그렇습니다만…….”
“전하께서는 보위에 오르고도 자네가 쉴 틈도 없이 고생하는 상황을 매우 안타까워하고 계시네. 성은에 감사를 올리고 집에 돌아가 당장 휴식을 취하도록 하게.”
“…….”
“그리고, 조선에서 자네를 눈이 빠져라 기다리던 사람은 주상 전하 외에도 있지 않은가? 자네가 집으로 돌아가서 할 일이 아주 없진 않을 텐데?”
얼핏 들으면 빈정거리는 것처럼 들리는 김육의 말에 송곳이 꽂히는 듯했다. 정성공을 따라 남명으로 떠나게 된 것이 결정되고, 깊은 한숨을 내쉬던 하연의 모습이 눈에 걸려서였다.
“어차피 자네라면 오는 길에 장계는 미리 작성해놨겠지. 전하께 고이 전해드릴 테니 어서 그것을 내놓고 집으로 돌아가 쉬게, 어서.”
“하아, 알겠습니다. 장인어른께서는 저를 너무 잘 알고 계시는군요.”
“자네 스승 또한 그랬을진대 그것을 고스란히 이어받은 자네가 어찌 다르겠는가. 그 궤짝에 든 것도 전하께 올릴 물건이겠지? 여기 강 별제에게 어서 넘기지 않고.”
하긴, 그동안 너무 나 아니면 안 된다는 생각에 빠져 있었던 것 같다.
내 설명이 없더라도 임금과 김육은 내 보고서과 숭정제의 선물만 봐도 남경에서의 일이 어떻게 되었는지 쉽게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이 정리되고 여유가 생기자 김육의 옆에 서 있는 노비, 아니 관료 하나가 자세히 눈에 들어왔다. 방금까지 얼굴을 찌그러진 채 불만을 잔뜩 드러내고 있던 충신이었다.
내가 없는 사이 더 심한 조련을 당한 것이 분명했다.
충신의 불만어린 표정이 김육을 향할 때는 상쾌한 미소로 바뀌는 것을 보고 내 확신은 한결 짙어졌다.
“……부럽다, 한수야. 나도 너처럼 멀리 바다건너 어디라도 나갔다 오고 싶구나. 가능한 오래, 최대한 멀리.”
“어허, 강 별제. 지금 사담(私談)을 나눌 시간이 어디 있는가. 한시라도 빨리 궐내각사로 복귀해 처리할 일이 산더미거늘.”
“앓는 소리 하지 마십시오, 사형. 저도 다 스승님과 겪었던 일들입니다. 조선의 관료라면 다 겪어야 하는 일이라 생각합니다.”
“사위, 강 별제에게 어서 궤짝이나 들려 보내게. 기껏 생각해줘서 일을 시키는 대신 자네 얼굴 보라고 데려왔더니 시간이나 끌고 말이야.”
부드럽게 미소 짓는 입가와 별개로, 충신의 눈가가 싸늘하게 굳어지는 것이 보였다. 처음에는 분노로 표정이 굳은 줄 알았는데, 충신이 떨리는 목소리로 내게 나직이 속삭이는 것을 보면 그의 얼굴을 굳힌 감정은 공포였지 싶었다.
“이 미친놈아. 너나 나쯤이나 되니 버티는 거지. 이렇게 몸을 갈렸다가는 궁에서 송장 치울지도 모른다고!”
“어허! 빨리빨리 하지 못하겠는가! 틈만 나면 농땡이를 부리려는 버릇을 고치기가 참으로 어렵구만. 떼잉.”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아마 벗끼리 닮으셨다면 좌의정 대감도 사람이 딱 쓰러지기 직전까지 몰아붙이시는데 도가 터 계실 거거든요.”
“뭐, 뭐야? 그럼 내가 호조 일에 능숙해져 봐야 업무 강도만 더 심해질 거란 얘기가 아니냐?”
그 말을 듣자마자 말 잔등에 단단히 묶여있던 궤짝을 끄르던 충신의 손이 미끄러졌다. 이제 입가에 미소조차 유지하지 못하는 것을 보면 어지간히 낙심한 모양이다.
“버티고 버티다 보면 언젠가 볕들 날이 오지 않겠습니까? 제 스승께서는 입버릇처럼 참된 신료는 일하면 일할수록 강해지는 법이라 가르치셨습니다. 사형도 분명 강해지실 수 있을 겁니다.”
“……이게 다 네놈 때문이다. 성균관에서 네놈만 만나지 않았어도…….”
“무슨 말씀이십니까. 조부님의 한도 풀고, 부친께서 원하시던 문과급제도 거뜬히 해내신데다 누구나 꿈꾸는 육조의 참상관으로까지 근무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런 말씀 하시면 천벌 받습니다?”
“어허, 잡담은 그쯤 하래도! 강 별제! 손이 멈춰있지 않은가!”
충신의 원망 어린 눈길을 뒤로 하고, 멈춰버린 그의 손대신 재빨리 밧줄을 풀어 궤짝을 내렸다. 그리고 멍하니 나를 바라보고 있는 충신에게 선물을 주듯 무거운 궤짝을 안겨줬다.
“그럼 사위, 충분히 쉬고 딸아이와 함께 얼굴이나 비치게나. 남경에서 선물 정도는 사 왔겠지?”
“물론입니다, 장인어른. 나랏일이 바쁘실 텐데 어서 궐로 돌아가 보시지요. 조만간 찾아뵙겠습니다.”
그렇게 궤짝을 들고 멍하니 서 있는 충신의 등짝을 후려쳐 김육 쪽으로 보내는데, 충신의 눈동자에 빛이 사라져가는 것이 눈에 띄었다.
김육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된 것이 그리 절망스러운 건가.
어차피 창덕궁 직전에 갈라지기 전까지는 길이 겹치니, 충신에게 채찍 말고 당근도 주어야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힘이 빠져 저 귀중한 궤짝을 떨어뜨리기라도 하면 어쩌겠는가.
무엇보다, 정성공과 마주하면서 이 인간의 능력이 절실히 필요함을 깨닫기도 했고.
“사형, 그렇게 낙담하지 마십시오. 조만간 바다 건너 남경으로 보내드리겠습니다.”
“뭐? 정말이냐? 언제? 얼마나 오래?”
“이번에 남경에서 조선공과 선박의 설계도까지 추가로 입수해왔으니, 조만간 새 원양선을 몇 척 건조하게 되지 않겠습니까? 이번에 제가 명국과 교역을 재개하고 왔으니 그 배는 남경으로 향하게 될 것이고요.”
“나다! 그 일에 나만 한 적임자가 있을 리가 없다! 그렇지? 그렇다고 말해라, 어서!”
이렇게 된 거, 생각보다 새 선박이 빨리 뽑힐지도 모르겠다. 어떻게든 궐내각사를 탈출하고 싶어 하는 이 인간만 잘 이용한다면 말이지.
헌데 그렇게 들릴 듯 말 듯 속삭였음에도, 장인어른의 귀가 이쪽을 향해 쫑긋거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손에 들어온 노예는 절대 놓치시지 않으시겠단 말이군.
“예, 나라 사이에 이루어지는 교역에 사형만 한 적임자가 어디 있겠습니까. 남경에는 언젠가 한 번은 꼭 다녀오시게 될 겁니다.”
“역시! 고맙다, 한수야. 나는 너를 벗으로 둔 것을 한시도 후회하지…….”
“말은 끝까지 들으십시오, 사형. 우리말은 끝나기 전에는 모른다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앞서 걸어가는 장인어른의 눈이 이쪽을 향하고 있었다. 마치 충신을 남경으로 보내는 일은 절대 안 된다고 말하는 듯했다.
물론 나 역시 순순히 충신의 숨통을 터줄 생각은 없었다.
“단, 사형이 남경을 다녀오려면 좌상대감의 허가를 받아야 할 겁니다. 사형이 한 사람의 관료로 일인분은 한다는 판단을 좌상대감께서 내리셨을 때 말입니다.”
“뭐? 그럼……!”
충신의 소리 없는 비명이 한양거리를 울렸다. 앞서가던 김육은 그제서야 안심했다는 듯이 나를 보고는 슬며시 미소를 지어보였다.
***
다음날 새벽같이 대궐로 입궐하자마자 나는 침전으로 향해야 했다. 이미 금호문의 수문장에게 내가 입궐하거든 바로 침전으로 보내라는 어명이 도달해 있었다.
“낯빛이 먼 길을 다녀온 사람 같지 않으니, 내가 내린 어명을 어기지는 않은 모양이구나. 잘 다녀왔다, 한수야.”
“감사합니다, 전하. 전하께서 마음을 써주신 덕분에, 휴식을 단단히 취하고 이렇게 전하를 뵈옵니다.”
임금이 나를 향해 싱긋 웃음 지었다. 헌데 그 웃음에는 묘하게 힘이 없어 보였다.
“전하, 혹시 지난밤 수면을…….”
“아, 문제될 것은 없느니라. 네가 남경에서 가져온 성과를 확인하느라 흥이 조금 돌았을 뿐.”
“소신이 그 자리에 함께했어도 좋았을 텐데요. 전하께서 그리 무리하시도록 만든 것은 대체 무엇입니까.”
“당연히 네가 가져온 예상치도 못한 물건 탓이지 않겠느냐. 알면서도 그걸 묻다니, 너는 참으로 고얀 신하로다. 핫핫.”
임금이 비스듬히 보료에 몸을 기대고 있는 것을 보니, 그제서야 그 옆에 서 있는 촛대의 상태가 눈에 들어왔다. 분명 지난밤에도 새것으로 갈았을 초가 짜리몽땅해져 있었다.
임금의 서안 옆에는 내가 남경에서 가져온 궤짝 안에 들어있던 내용물들이 차곡차곡 쌓인 채였다. 그 중 남경에서 가져온 사치품들에는 손을 댄 흔적조차 없었다.
서안 위에 올려져 있는 것은 정화의 항해일지와 숭정제의 국서뿐이다. 그제서야 나는 임금이 밤새 무엇을 했는지 알아챌 수 있었다.
“그것들을 밤새 읽으신 겁니까?”
“그래, 이 정화라는 환관이 기록한 일지는 내 가슴을 뛰게 하는구나. 자꾸만 책장을 넘기게 되어 조금만, 조금만 하다 보니 어느새 네가 입궐할 시간이 되고 말았다.”
“그리고 그 옆에 있는 국서는…….”
“낮에 예조의 기록을 뒤지게 하니, 폐주 시절에 우리 조선 땅에 표류한 유구국 사신을 중원으로 보냈던 이후로 이 나라와 통교한 적이 없더구나. 그 당시 유구국의 중산왕(中山王)이 건재했던 것처럼 적혀 있던데, 실은 아니었을 줄이야.”
임금이 건넨 예조의 기록을 보니, 사쓰마 번이 류큐를 속국으로 만든 것은 조선에도 알려지지 않았던 듯했다. 조선에 표류했던 사신마저 이미 입막음을 당한 상태였던가. 하긴 원래 명나라로 보낼 사신들이었으니 사쓰마 번이 미리 손을 써 놨겠지.
“네가 알고 있던 지식이 아니었다면 유구국은 영원히 살마주의 속국으로 살았겠구나. 그래, 우리 조선에게 유구국을 구원하라는 이 국서도 네가 황제로부터 이끌어 낸 것이겠지. 이것이 조선의 국익에 도움이 되겠느냐.”
“어차피 하란타와 손을 잡고 바다를 건너 교역하는 일에 힘을 쏟기로 한 이상, 유구국은 손에 넣어 나쁠 것이 없는 섬입니다. 아니, 오히려 대만 섬에 있는 하란타의 거점을 생각하면 반드시 손에 넣어야 하는 곳이라 봐야 합니다.”
“남경과 대만, 그리고 구주 사이에 있는 섬이라……. 이 땅을 우리 군사들의 피를 흘려가며 살마주의 손아귀에서 빼앗아 올 가치가 있겠느냐, 아니 빼앗아 올 수는 있겠느냐.”
임금이 의문을 가지는 것도 당연했다. 국초에 대마도를 정벌했던 일이 있긴 하지만, 대마도는 부산포에서 엎어지면 코 닿을 곳에 있는 곳이다. 망망대해를 한참 헤쳐 나가야 나오는 류큐에 세력을 뻗치는 일에 확신이 설 리가 없다.
게다가 임진년에 시작된 일본과의 전쟁이 끝난 지 이제 반세기가 지난 상황이다. 이제야 왜란과 호란으로 입은 상처가 치유되고 있는 상황에서 전쟁의 위험을 감수해가며, 그리고 수많은 비용을 지출해가며 원정군을 꾸릴 이유가 있냐는 물음이었다.
“어차피 우리 조선은 먼 바다를 다닐 함대를 육성해야 합니다. 이것은 전하께서도 동의하신 일이고, 그것을 위해서 제가 하란타와 남경에서 선박 기술을 빼왔지 않습니까.”
“그래, 해적의 습격으로부터 우리 상선을 보호할 원양 함대를 육성해야한다는 점은 잘 알고 있다. 네 장계에 따르면 이번에 데려온 남경의 조선공들과 수군 교관들이 큰 도움이 될 것이라 했지.”
“충무공이 전쟁 중에도 수십 척의 판옥선을 건조했듯, 나라의 역량을 동원하면 그만한 수의 배를 건조하는 것은 시간만 조금 들인다면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다만 문제가 되는 것은…….”
“배에 탈 수군과, 그것을 지휘할 장수가 필요하겠구나. 특히 연안이 아닌 원양에서 일어날 싸움에 익숙한 수군 지휘관은 이 조선에 한 명도 없을 것이다.”
조선 수군은 연안 방어에 모든 힘을 집중한 군대였다. 주력 전선(戰船)인 판옥선부터가 긴 항해에 유리한 형태가 아닌 것만 봐도 그랬다.
억지로 류큐처럼 먼 바다에서 일어날 싸움에 지금의 수군을 밀어 넣을 수는 있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전투의 효율이 심각한 수준으로 떨어질 것이다. 수많은 병력과 전선, 그리고 어마어마한 양의 보급물자를 소모하게 될 테니까.
그러나 일단 명국에서 데려온 교관들도 있을뿐더러, 이 시대 최고의 해군제독이 지금 한양을 향하고 있는 상황이다. 시간만 충분하다면 훌륭한 원양 수군을 양성해낼 수 있다.
“그러니 잠시 시간이 주어진 사이, 철저하게 준비해야 합니다. 육도삼략에 싸우기 전에 이기라 적혀있듯이, 이길 수 있는 싸움판을 만들어 가는데 온 힘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대명 황제의 국서를 받아온 것이더냐. 일단 이것을 이용한 외교로 그들의 손발을 잘라내는 것은 어떠하냐.”
“저와 같은 생각이시군요, 전하. 전하께서도 아시다시피 일본국의 중앙과 지방은 아직 완전히 한 나라라고 보기 어려운 상태이며, 특히 변경에 있는 살마주는 더욱 그러합니다.”
이 시기, 일본은 막부와 번이 다른 입장을 취하는 경우도 꽤 있었다는 이야기였다.
내 설명을 들은 임금이 고개를 끄덕였다.
“유구국을 침공할 때는 막부와 번의 입장이 같았다 하더라도, 지금은 다를 수 있습니다. 사신에게 명의 국서를 지참시켜 명분을 보여주고, 일본국의 대군을 위한 다른 선물 또한 지참시켜 실리를 만족시킨다면…….”
“마침 훌륭한 선물거리가 하나 있구나. 우리가 가지고 있는 대청(對淸) 독점무역권을 이용한 선물 말이다. 그렇지 않느냐.”
“정확한 추측이십니다. 나라의 문을 닫아걸고 번주(藩主, 다이묘)들의 무역은 막은 채로, 막부가 무역을 독점하길 원하는 그들에게는 꽤 구미가 당기는 미끼겠지요. 그리고…….”
목소리를 잔뜩 낮추고 몸을 임금을 향해 기울였다. 이제 내 머릿속에 있던 계획이 임금의 머릿속으로 온전히 옮겨가진 않았으니까. 다음번은 더 큰 그림을 임금에게 고백해야 할 차례였다.
“……유구국을 점령한 살마주 세력은 이번 기회에 화근을 뽑아야 합니다. 그들을 그대로 방치했다가는 먼 미래에 더 커다란 화(禍)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더 먼 미래라? 한수야, 설마…….”
“예. 제가 천기를 누설했던 그 내용이 맞습니다. 제가 이 땅에 떨어지지 않고, 전하께서 학질에 쓰러지셨다면 이루어졌을 그 이야기입니다.”
일본의 근대화, 메이지 유신은 사쓰마 번이 없으면 이뤄질 수 없었던 일이다. 조슈 번과 손을 잡고 도쿠가와 막부를 무너뜨린 세력이 바로 사쓰마 번이 아니던가.
국제 정세에 민감했던 그들이 아니었다면 일본은 쇄국을 풀고 외부 세력에 문을 열 생각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다. 만약 이번에 사쓰마 번의 세력을 밟아놓는다면, 미래는 어떻게 변할 것인가.
설명을 전해들은 임금이 침을 꿀꺽 삼켰다. 그러나 그의 눈빛은 한 치 흔들림이 없었다. 허무맹랑하다 여겨질 수 있는 이야기에도, 이렇게 무한한 신뢰를 보내주는 임금 덕분에 마음이 먹먹해졌다.
“……조만간 봉림을 이 자리에 불러야겠구나. 그 녀석이 열도에 넘어가 해줄 역할이 무엇보다 중요하지 않느냐.”
“지금까지 보여준 정세를 파악하는 능력과 행동력을 보면, 대군이 전하의 기대를 충족시켜줄 것이라 장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저와 전하가 조금 돕기만 한다면 말입니다.”
“네가 자리를 비웠던 사이 통신사를 보낼 준비는 거의 끝났다. 왕복하는 데만 일 년 가량이 걸릴 테니, 봉림이 일본국 대군의 답서를 받아올 때까지 우리는 다음 단계를 준비하자꾸나.”
불꽃이 튀기 시작한 시선 두 개가 허공에서 마주쳤다. 임금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보며, 어깨가 무거워지는 것이 느껴졌다.
“예, 전하. 저는 이번 일에 몸을 갈아 넣을 준비가 되어있습니다. 곧 하란타에서 정식 특사가 올 것이고, 하란타어로 번역한 난중일기의 주인 또한 함께 도착할 테니까요.”
“그 사람이 우리 원양함대의 미래를 좌우할 것이라는 말이 아직도 나는 믿기지 않는구나. 지금은 그저 수군에서 은퇴한 상선의 선장이라고 하지 않았더냐.”
“충무공이 노량 앞바다에서 숨을 거두고 십년 후, 저 멀리 서쪽 땅에서 다시 태어나기라도 한 것 같은 사람입니다. 분명 조선에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전하.”
“네 말이 한 번이라도 틀린 적이 있었더냐. 나는 이번에도 네 뜻을 따르겠다, 한수야. 다만…….”
대강 앞으로 해야 할 일들의 방향이 정해졌다. 그 탓에 긴장이 풀렸는지 임금은 체통에 어울리지 않게 크게 하품을 내뱉고 말았다. 방금까지만 해도 무거웠던 편전 안 분위기가 순식간에 풀려 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내 어젯밤 거의 눈을 붙이지 못했느니라.”
“예?”
“상참(常參, 조회)까지는 어찌 버텨볼 테니, 오늘 경연만은 쉬어 가면 안 되겠느냐. 도승지의 임무 중에는 왕의 건강을 관리하는 것도 있지 않더냐.”
“전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