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호랑이 어사, 조선을 뒤흔들다!-159화 (159/298)

159화. 극장의 장막 뒤

하지만 입가에 침을 흘려가며 산해진미를 기대하던 길산이 녀석의 기대는 박살나고 말았다. 정성공이 나를 안내한 곳은 웬 야외에 반원 모양으로 설치된 건물이었으니까.

“국성야, 여기는 대체?”

“와사(瓦肆)라는 곳입니다. 무엇을 위해 지은 건물인지 도승지께서는 아시겠습니까?”

와사란 단어는 기억에 가물가물했지만, 이층누각이 솟아있는 입구를 들어서자마자 나는 이 장소가 무엇을 하는 곳인지 대번에 알 수 있었다.

반원의 한가운데에 위치한 마당과 무대. 그리고 그것들을 둘러싸고 계단처럼 층층이 솟아있는 가장자리.

누가 봐도 원형 극장이다.

내 도포는 붉지 않으니, 여기서는 신촌의 대학축제에 놀러갔던 새내기 시절처럼 눈초리를 받을 일은 없겠군.

“구조를 보아하니 저 앞에서 무언가를 공연하는 장소인 모양이군요. 이곳을 구경시켜주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아무래도 아까 밀실에서 뵈었던 다른 대신들은 나랏일이 미처 끝나지 않으신지라, 얄팍한 꾀를 짜내보았습니다.”

정성공의 인도를 따라 계단을 올랐다. 방금 입구에 세워진 이층 누각은 VIP석의 역할도 수행하는 모양이었다. 무대를 바라보기 좋은 위치에 의자 두 개와 작은 탁자 하나가 놓여 있었다.

꼬르륵.

고요하던 노천극장에 웬 기괴한 소리가 울렸다. 그 소리가 나를 따르던 길산이 녀석의 배에서 난 것임을 알아채는 데는 시간이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하하, 꼬마가 황궁에서 기다리는 동안 배가 많이 고팠던 모양이군요. 어떻게 여기 비치해놓은 과일이라도 먹겠냐고 전해주시겠습니까?”

정성공을 따르던 부하가 어느새 작은 의자를 가져다 한쪽에 배치하고 있었다. 정성공은 긴 항해 동안 길산이에게 관심을 보이더니, 이런 배려까지 해 주는 모양이었다.

자리에 앉아 그가 권하는 과일을 집어 들었다. 오랜만에 맡아보는 새콤한 냄새가 코 안에 가득 맴돌았다.

“귤이군요. 이 계절에 맛볼 수 있을 줄이야.”

“빙고에서 보관하고 있던 물건입니다. 장강 하구에서 남으로 조금 내려가면 있는 항구인 온주(溫州, 원저우)라는 지방에서 나는 특산품이죠. 조선에서는 접하기 어려운 과일일 텐데, 알아보시는 것이 용합니다. 너도 하나 들겠느냐?”

육적회귤(陸績懷橘), 남귤북지(南橘北枳)라는 고사에서 알 수 있듯 귤의 원산지는 이 지방이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귤 품종 중에 온주밀감이라는 것이 있었는데 그것이 여기가 원산지였나.

현대에서 먹던 귤만큼 달지는 않았지만, 향기는 그대로였다. 무언가 그리움이 묻어나는 과일을 한 쪽씩 맛보고 있는데, 길산이 정성공이 건넨 귤을 들고 눈치를 보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괜찮다. 어서 먹으려무나.”

친절하게도 귤을 입에 가져다 먹는 시늉을 하는 정성공을 보자, 길산이 녀석은 그제서야 껍질을 까 알맹이를 맛보기 시작했다. 귤을 삼키는 녀석의 눈이 또다시 커지는 것을 보며, 정성공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귀여운 아이군요. 아드님은 아닌 것 같고, 어떤 관계십니까?”

“지방에 감찰을 나갔다가 거둔 아이입니다. 본인 스스로 제게 가르침을 구하기에, 제 집에 머물게 하여 이것저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혈연이 아닌 아이란 말씀이십니까? 어쩐지 행동거지를 보니 귀한 집에서 태어난 아이는 아니지 싶더니…….”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었습니다. 저 아이의 출신보다는 아이가 제게 보여준 무언가에 강하게 끌리더군요.”

하긴 정성공 역시 길산이의 ‘무언가’에 이끌렸으니 저리 신경을 쓰는 것이 분명했다. 암행 도중 있었던 일을 간략히 설명하자, 정성공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납득의 표시를 보였다.

“마치 소설 같은 이야기군요. 마침 잘 되었습니다. 제가 지금 보여드리려는 것 역시 그러한 이야기입니다.”

“보여주신다니, 저 무대에서 말씀이십니까?”

내 물음에 미소로 답한 정성공이 손뼉을 쳐 신호를 보냈다. 그와 동시에, 무대의 뒤에서 풍악이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경극(京劇)을 보면 나오던 중국 특유의 그 음악이었다.

“무극(婺剧)이라 합니다. 사실 이번에 새로 만들어 무대에 올리려는 작품인데, 조선에서 오신 귀한 손님께 첫 선을 보이게 되어 영광입니다.”

해가 지고 향락의 시간이 오기 전까지 연극으로 나를 접대하겠다는 건가. 사실 밤에 어떤 접대를 해올지 뻔히 예상이 되는지라, 나는 차라리 이쪽이 나았다.

“아직 제목도 짓지 않은 신작입니다. 도승지께서 직접 지어주시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습니다.”

“제가 제목을요?”

“보고 나시면 무슨 뜻인지 알게 되실 겁니다. 그럼 즐겨주시지요.”

정성공이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은 이유는 조금 있다 알 수 있었다.

정말로 말도 안 되는 접대였다.

무극은 남경과 영파가 위치한 절강 지방의 전통극인 듯했다. 대부분이 대사가 없이 이어지는 무언극(無言劇)이라 길산이 녀석도 눈빛을 빛내며 무대에 집중하는 건 좋았다.

그런데…….

“국성야, 이건……?”

“쉿.”

극이 절정에 접어들고 무대의 배경이 바뀌었을 때였다. 어디선가 본 것 같은 광경이 무대에 재현된 것을 보고, 나는 정성공에게 그 이유를 따져 물으려 했다. 하지만 정성공은 말없이 손으로 무대를 가리킬 뿐이었다.

“와아!”

누가 봐도 황제의 의관을 한 배우가 언덕을 오르는 시늉을 하고 있었다.

그의 앞에는 긴 천이 고리 모양으로 매달려 있는 나무 소품이 위치해 있다. 그리고, 무대 한구석에서 또 다른 배우가 흰 갑옷을 입고 날 듯이 등장했다.

대사 대신 연이어 연주되며 몽환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는 음악 사이로, 나는 흰 갑옷을 입은 장수가 황제와 얘기를 나누며 격한 몸싸움까지 이어가는 모습을 뜨거운 얼굴을 싸안고 지켜봐야 했다.

마지막에는 장수가 무대에서 사라지고, 깨달음을 얻은 듯한 황제가 병사를 끌어 모으더니 관객석을 향해 무어라 외쳤다. 내가 알아들을 수 없는 것을 보니 민어(閩語)인 것 같았다.

“‘나는 하늘의 뜻을 받아 잃어버린 고토를 회복할 것이다.’라는 뜻입니다, 도승지.”

“무어라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군요. 이 무극은 폐하의 의지가 담긴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제 생각에는 ‘황제우견신장(皇帝遇見神將, 황제가 우연히 하늘의 장수를 만나다)’ 정도면 제목으로 적절하지 싶은데, 도승지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극 내내 거듭된 실패로 절망에 빠져있던 황제가 결말부에 하늘의 계시를 받아 복수전을 다짐한다. 대민(對民) 선전용으로 잘 짜인 연극이었고 재미 또한 있었으나, 나는 그리 즐거운 마음으로 연극을 감상하지 못했다.

왜긴, 이건 완전히 나와 숭정제의 이야기가 아닌가. 내가 청나라의 장수가 아닌, 하늘에서 내려온 장수로 각색되었을 뿐이다.

“왜 말씀이 없으십니까, 도승지. 어디가 불편하시기라도 한 것입니까.”

“아닙니다. 저와 폐하 사이에서 있었던 일을 아주 잘 각색한 듯하여 기분이 묘해졌을 뿐입니다. 문제가 될 수 있는 부분도 잘 얼버무렸고요.”

“아, 그렇습니다. 지금은 조선이 오랑캐의 영향력을 짙게 받고 있으니까요. 하지만 언제든지 원래 설정으로 돌릴 수도 있습니다. 저 장수를 하늘에서 내려온 신장이 아니라……. 아시겠지요?”

내가 머저리였다면 내 업적을 연극으로 만든 것을 보고 방금 길산이가 그러했듯 즐거워하며 박수를 쳤겠지.

하지만 나는 머저리가 아니다.

정성공이 굳이 자신의 시간을 희생해가며 이 무대를 보여준 이유는 분명했다.

‘우리와 손을 잡고 화북의 오랑캐를 격멸하자. 그리고 대업을 이룬 후 극중에서 잃어버린 장수의 국적을 제대로 돌려놓자’는 뜻인가.

아니면 ‘네가 한 일과 정체를 강남 전체에 퍼뜨리기 전에 우리의 제안을 받아들여라’는 협박인가.

어느 쪽이든 가능한 이야기였다. 그만큼 남명은 장강을 끼고 청을 잘 방어하고 있었고, 남경에서 엿보이는 이 나라의 경제력은 내 예상 이상이었다. 북경에서 숭정제를 살려보낸 것으로 이렇게 스노우볼이 구를 줄이야.

하지만 지나간 일을 따질 여유 따윈 없었다. 고민 끝에 고개를 돌리자, 늘 입가에 미소를 띠고 있던 정성공이 진지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이게 이 자의 민낯이었나.

아마 길산이 녀석이 이 자리에서 눈치 없이 귤을 더 달라고 청하지 않았다면 누각의 분위기는 걷잡을 수 없이 무거워졌을 것이다. 헌데, 길산이가 귤을 받으러 정성공의 부하를 따라가자마자 내 귀에 꽂힌 것은 예상치 못한 싸늘한 목소리였다.

“……꽤나 귀여운 아이군요. 저 아이가 이 무대를 즐긴 만큼, 도승지께도 즐거운 시간이셨어야 할 텐데요.”

“국성야?”

“도승지 정도 되는 분이 방금 무대의 의미를 곡해하실 리는 없겠지요. 그리고, 제가 하필 빙고를 열어서까지 이 귤을 도승지께 낸 이유도.”

정성공은 방금까지 손도 대지 않았던 귤을 내게 들이밀었다. 그것을 보자, 고사성어 하나가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이 자리에 귤을 낸 이유, 혹시 남귤북지(南橘北枳)라는 고사성어를 암시하신 겁니까. 회수를 기준으로 귤과 탱자가 갈라지듯, 지금 중원의 상황도 그러하다?”

“역시 도승지시군요. 저를 즐겁게 해주는 분답습니다.”

정성공의 말투는 이전 그대로였다. 그러나 낮게 깔린 목소리와 냉혹한 표정은 그의 본질이 이쪽이라는 것을 명확히 드러내고 있었다.

완전히 잊고 있었다.

정성공은 남명의 충신이자 상단의 우두머리이기도 했지만, 또한 악명 높은 해적이기도 했다는 사실을.

원 역사에서도 그는 돈으로 얻지 못하는 것이 있으면 태도를 바꾸어 약탈하기를 서슴지 않았다. 청의 아래 있는 자들이라면 본래 명의 백성이었다 할지라도 망설임 없이 칼을 휘둘러대던 것이 정성공이었다.

“이제 이 자리에 담긴 본의를 깨달으셨으면, 남경을 떠나기 전까지 답을 해 주셔야 할 겁니다, 도승지.”

“…….”

“소국의 사정은 헤아려줄 줄 알아야 대국이라 하셨지요. 오랑캐와 연을 아주 끊으란 말은 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적어도 우리 대명과 관련된 곳에서는 우리의 뜻을 엄중히 따르셔야 할 겁니다.”

“……그것이 당신과 대명 조정의 뜻입니까, 국성야.”

“일단은 제 뜻입니다만, 곧 조정과 황제 폐하의 뜻이 되겠지요. 저는 늘 황제 폐하와 대명의 이익만을 위해 움직이는 사람이거든요.”

숭정제의 총애가 내게 향해 있으니 그나마 남경까지 오는 길에는 나를 신사적으로 대했을 것이다. 그러나 내 행동이 명의 국익과 상충되고, 황제의 뜻이 내게서 떠나가면 이 자는 가차 없이 칼날을 들이밀 것이 분명했다.

정성공쯤 되는 자가 지나친 친절을 보일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다.

남경으로 오는 배에서 내가 정성공에게 느낀 꺼림칙한 기분은 근거 없는 망상이 아니었다.

***

숭정제에게는 나를 접대하겠다 핑계를 댔었지만, 정성공이 기루에 마련한 술자리 역시 단순히 접대를 위한 자리가 아니었다.

“도승지, 무슨 생각을 그리 하십니까? 혹시 몸에 문제라도 생기신 겁니까? 표정이 좋지 않으십니다.”

나름 포커페이스를 유지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상거래에 도가 튼 정성공의 눈에는 그렇지도 않았나보다. 사실 표정이 좋지 않은 이유의 상당수는 이 자 때문이었으나, 그런 티를 낼 수는 없는 노릇이다.

지금 내 주변에 흐르는 풍악과 기녀들의 웃음소리가 정성공과 내 칼날이 금속음을 내며 맞부딪히는 소리를 숨겨주는 상황이었으나, 내 귀에는 어떤 것도 들리지 않았다.

조선에서 들어오는 무역품의 가격을 후려치려는 자와, 그것을 어떻게든 방어하려는 자의 치열한 싸움이다. 이 상황에 무엇인들 귀에 들어오겠는가.

“아닙니다. 제가 사실 이런 자리를 즐기는 편이 아니라 그렇습니다. 술자리의 안주는 반가운 사람과의 즐거운 대화면 충분할 테니까요.”

“도승지께서는 꽤나 애처가신 모양이군요. 알겠습니다, 기생들을 물리도록 하지요. 허나 동석하신 분들까지는 어찌 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이 부분은 진심이었다. 단순한 핑계가 아니었다.

예전에 충신의 기루에서 기생들에게 골탕을 먹어서 그런가. 아니면 그렇게 술에 취해 정신이 든 자리에서 평생의 인연을 만나서 그런가.

이런 자리에서 추태를 부리고 싶은 마음은 전혀 들지 않았다.

게다가 방금까지 앞으로 명과 조선 사이에 이루어질 무역의 세부 조건에 관해 막후교섭을 열띠게 벌인 후였다. 중계 무역에서 이문을 적당히 남기라 말을 돌려 협박하는 정성공을 상대해야 했으니, 보통 힘든 일이 아니었다.

그에 더해, 정성공의 뒤에서 정지룡과 사가법이 술잔을 나누며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것도 꽤나 압박을 주는 상황이다.

치사한 놈들 같으니라고.

“아니면, 도승지께서는 지금 이 자리가 불편하신 겁니까? 방금 제가 제시한 조건이 마음에 들지 않으시기라도?”

이 양아치 같은 놈. 방금까지 교역품 가격을 후려쳐 놓고 능글맞게 잘도 저따위 말을 입에 담아?

그런 조건은 조선의 국익을 위해서도, 내 자존심 때문이라도 절대 받아들일 수 없었다.

심양관 시절부터 무역에 발을 담갔던 덕분에 대강 나라 사이의 무역이 어떻게 굴러가는지 알고 있는 나였다. 그러나 어린 시절부터 상업과 해적질에 잔뼈가 굵은 정성공을 상대하기엔 모자랐던 모양이었다.

“어이! 충효백! 아무리 국익을 위한 일이라지만 그쯤 해 둬라! 멀리서 손님을 모셔와 놓고 도가 지나치지 않냐!”

“오 도독님, 이쪽 일은 아버지와 제 담당입니다. 염려를 거두시지요.”

“염려를 거두라니? 조선국 도승지는 폐하께도, 내게도 은인인 사람이다. 그런 사람을 그리 몰아쳐도 되냐는 말이다!”

“그것은 오 도독께서 판단하실 일이 아니라 폐하께서 판단하실 일입니다. 그나저나 도독께서는 슬슬 귀가하셔야 하실 시간이 아닙니까? 집에서 기다리는 분께서 기루에 오래 머무른 사실을 아신다면 곤란해지실 텐데요, 하하.”

“크윽…….”

동석한 오삼계가 가끔씩 내 편을 들어주려 했으나, 정성공에게는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오히려 역으로 남명의 육군 총사령관을 압도하고 있는 정성공을 보니, 내가 애를 먹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지금 남명 조정의 실세는 정씨 집안이다. 아니, 지금은 주씨 성을 쓰고 있긴 하지만.

그들이 해군과 상단을 쥐고, 황제에게 무력과 자금을 동시에 공급하는 상황이니 어찌 보면 당연했다. 실제로 재상이나 사령관도 정성공 앞에서는 너무나 무력해 보이지 않는가.

정성공은 숭정제가 있던 자리에서는 일부러 힘을 숨긴 듯했다. 소국의 밀사를 상대하는 것은 사가법 정도면 충분하다 생각했던 걸까.

아니면 흥겨워하는 숭정제의 기분을 깨지 않기 위해서였을지도.

그렇게 정성공이 오삼계를 향해 ‘진원원’이라는 이름을 입에 올리는 것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잠시 머리를 식히고 싶어졌다. 이토록 갑갑한 상황에 몰린 것도 참으로 오랜만이었으니까.

“국성야, 이야기가 나온 김에 잠시 바람이나 쐬고 오겠습니다. 오랜만에 사람이 많은 자리에 드니 조금 갑갑하군요.”

“그러십니까. 너무 자리를 오래 비우시지는 마시길 바랍니다. 아니면 제가 경치 좋은 곳을 알고 있는데, 안내해 드릴까요.”

“아닙니다. 잠시 혼자 있고 싶어졌습니다. 금방 돌아올 테니 시간을 조금 주시겠습니까. 옆방에 두고 온 꼬마의 배가 터졌는지도 확인을 해 봐야 할 듯하고요.”

정성공의 입에서 파안대소가 터져나왔다. 평생 본 적도 없을 산해진미와 함께 방에 처박아둔 길산이를 살피러 가야한다는 핑계가 꽤나 잘 먹힌 듯했다.

어차피 이곳은 그의 홈 그라운드, 내가 도망갈 곳은 애초에 없었다.

하지만 그렇게 내 발걸음이 향한 곳은 길산이가 있을 작은 방이 아니었다. 복도를 지나 내가 향한 곳은 장강이 내려다보이는 난간이었다.

“후…….”

한숨이 새어나왔다. 현대였다면 당장 담배라도 빼물었을 것이다.

이럴 줄 알았으면 누구라도 동행시킬 걸 그랬나. 영감님의 조언이 어느 때보다도 그리웠다.

그러나 이 시대에는 제대로 된 담배도 없고, 담배가 건강을 해치면 낫게 할 의술도 없을뿐더러, 무엇보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담배 냄새를 좋아하지 않았다.

내 꼬인 심사를 달랠 수 있는 법은 달이 떠 있는 강에서 흘러드는 맑은 공기를 계속해서 폐에 채우는 방법뿐이었다.

“그곳은 위험합니다. 귀빈께서는 한 걸음 뒤로 물러나 주시옵소서.”

내 귀를 맑은 목소리가 파고든 것은 그때였다. 내 키가 컸던 탓인지 허벅지에 겨우 걸쳐있는 난간을 깨닫고는 황급히 몸을 뒤로 뺐다.

헌데, 그런 내 등허리를 웬 부드러운 천의 감촉과 짙은 향기가 감쌌다.

정신이 아찔해져 왔다.

※ 작가의 말

1. 정성공

정성공의 아버지는 명 말기의 거상이자 해적인 정지룡입니다. 정지룡이 일본과 중국, 대만 섬을 오가며 세력을 키우다 젊은 시절 나가사키에서 일본인 여인과 사이에서 낳은 자식이 정성공입니다.

그래서 정성공은 어린 시절을 일본에서 보냈고, 일곱 살이 되었을 때에야 복건성 바다의 지배자가 잡은 정지룡의 부름으로 중국 땅을 밟게 됩니다.

그에게 중국인의 정체성을 불어넣고 싶었는지, 아니면 자신이 가질 수 없는 명예를 아들이 얻길 바랐는지는 몰라도 정지룡은 어린 시절부터 정성공에게 체계적인 유학 교육을 시킵니다. 그 결과 정성공은 남경으로 유학까지 떠나게 되는데, 정성공의 명나라에 대한 충성심은 이때 형성되었다고 봐야 하겠습니다.

그 이후 남명에 투신해 국성인 주 씨를 하사받고 성공이라는 이름까지 내려받은 것은 작중에 묘사된 내용과 같습니다. 서구권에 알려진 정성공의 이명, 콕싱야(Koxinga/Coxinga)는 ‘국성야’를 민어로 읽은 발음을 그대로 옮긴 것입니다.

다만 숭정제가 생존해 훨씬 형편이 좋은 작중의 남명과는 달리, 원 역사의 남명은 사가법 편에서 말씀드렸다시피 개판 오 분 전이었습니다.

때문에 충분히 버틸 역량이 있었음에도 남경은 일 년 만에 청군에게 함락당하고, 전황이 극도로 불리해진 것을 깨달은 정지룡은 1647년 청에게 항복합니다. 그러나 아들인 정성공은 오히려 아버지를 쳐내고 세력을 이어받은 후 명에 충성을 다해, 결국 아버지가 청나라의 손에 처형되도록 만들고 맙니다.

그 이후 남명 정부는 사실상 정성공 한 사람에게 의존해 연명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닙니다. 청은 그 이후로도 정성공을 회유하기 위해 절강, 복건, 광동 3성의 도독을 하사하겠다는 등 계속해서 회유책을 펼치나, 정성공은 계속해서 남명에 충성을 바칩니다.

하지만 정성공 한 명의 활약으로 뒤집어질 판이 아니었습니다. 결국 강남 일대의 점령지를 모두 잃은 남명은 멸망의 길을 걷고, 정성공 또한 청의 공세에 대만까지 밀려나게 됩니다.

정성공은 병마와 싸우는 와중에도 남명 최후의 황제 영력제가 오삼계의 손에 목숨을 잃었다는 소식을 듣고 눈물을 흘리며 통곡했을 정도로 최후의 최후까지 남명의 충신이었습니다. 결국 남명의 명맥이 끊어지고, 지킬 것이 없어진 명 최후의 충신이 병으로 세상을 뜨면서 대륙은 청의 손에 완전히 들어가게 됩니다.

그런 정성공이었지만, 한편으로는 해적 출신의 함대를 지휘하며 무역을 통해 폭리를 챙기는 거상이기도 했습니다.

청나라 해안을 무자비하게 약탈해 해금령이 내려지는 원인이 되기도 했으며, 그 함대로 동아시아의 무역을 독점하고 폭리를 취해 포르투갈 상인을 축출하고, 네덜란드 상인들이 중국에서 손을 떼고 일본에 손을 뻗게 만든 장본인이기도 합니다. 정성공의 세력이 청에게 점점 밀려나게 되면서 이러한 경향은 더욱 심해집니다.

명나라에게는 충성을, 적에게는 무자비함을.

이 한 줄로 정성공의 생애를 요약할 수 있겠습니다.

2. 와사(瓦舍)

와사는 남경 일대에 송나라 시절부터 내려오는 공연 시설입니다. 기와로 기붕을 올린 무대가 가운데 있는 원형 극장을 담벼락이 가리고 있는 형태를 하고 있습니다.

작중에 묘사된 대로 절강성의 전통 연극인 무극의 주 무대가 되기도 하지만, 관객들이 모여 다른 기예를 감상하는, 현대로 치면 멀티플렉스 같은 공간이기도 했습니다.

영락제가 북경으로 천도한 이후로도 남경은 막강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남방의 중심도시였는데, 와사와 같은 오락시설들은 당시 남경이 얼마나 풍족했는지를 방증하는 사례이기도 합니다.

17세기 초반에 증덕소라는 이름으로 명나라에 23년간 머무른 알바로 세메도라는 포르투갈 선교사가 지은 <대중국지>에도 남경에 이러한 수많은 오락시설이 존재한다는 사실과 함께 남경의 흥성한 모습이 잘 묘사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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