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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 어사, 조선을 뒤흔들다!-156화 (156/298)

156화. 장강을 거슬러

내가 정성공이 놀랄 정도로 출발을 서두른 덕분인지, 다행히 그에게 반촌에 머물던 네덜란드인들을 들키는 일은 없었다. 오히려 그와 동행하는 대가로 정성공에게 남명의 정보를 여럿 뽑아낸 참이었다.

이제 내가 남경에 가는 것은 기정사실이 되었기 때문일까, 부산포에 가까워질수록 정성공은 슬슬 은밀한 정보를 공유하기 시작했다. 부산포까지 하루 거리가 남자, 밤을 보내기 위해 묵은 역참에서 그는 매우 중요한 정보를 털어놓았다.

“……황해를 건너 산동부터 연안을 따라가는 항로는 오랑캐 놈들 때문에 쓰지 못하게 되었으니까요. 폐하께서는 제게 밀사의 역할을 다하라 명하시기도 했지만, 조선에게 새 항로를 전하라는 명도 내리셨습니다.”

“새로운 항로라…… 대명과 사람이 오가는 일은 당연하지만 이번이 끝이 아니겠군요.”

“조선에 올 때는 안전하게 박다(博多, 하카타)와 대마도를 거쳐 부산포로 왔지만, 갈 때는 이야기가 다르지요. 곧 부산포에서 항로를 익힐 뱃사람을 구하셔야 할 겁니다.”

남명 측은 부산포에서 제주를 거쳐 항저우의 항구인 닝보까지 가는 항로를 조선에 전달하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닝보에서 상하이를 지나 장강을 거슬러 올라가면 바로 황제가 있는 남경이니까.

아마 조선에도 그 항로를 아는 뱃사람이 아주 없진 않을 테지만, 매일같이 바다를 건너는 정성공의 지식만 하겠는가. 이렇게 되면 남명과 조선 사이에 직통 항로가 뚫리는 셈이다.

“도승지께서도 눈치를 채셨겠지만, 그만큼 아국 조정의 숨통이 트였다는 이야기기도 합니다. 폐하께서 장헌충이라는 도적의 우두머리를 포섭한 이후로는 장강에 가해지는 오랑캐놈들의 공세도 조금 무뎌졌지요.”

“호오, 그렇습니까. 폐하의 은덕에 도적의 우두머리조차 감화된 모양이군요.”

“꼭 그렇지도 않습니다, 하하. 폐하께서 역적 이자성에 맞서 북경성을 탈출하신 후에 생각을 많이 바꾸셨다고 들었습니다.”

고집을 부리다가 화북을 잃은 것이 그렇게 뼈아팠던 건가. 사천을 점령한 농민 반란군의 우두머리인 장헌충까지 끌어들일 정도로 숭정제는 사람이 많이 달라진 듯했다. 하긴, 그 정도 마음가짐은 가져야 청에게서 버틸 수 있었겠지.

그런 내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정성공은 내 앞에서 소리 내어 웃을 뿐이었다. 고요한 밤, 밖에서 들렸을지도 모를 정도로 큰 웃음이었다.

“게다가 저 정도 되는 사람이 조선까지 올 생각을 한 이유가 다 있습니다. 도승지께서는 그 이유를 아십니까?”

“글쎄요. 국성야(國姓爺, 나라의 성을 쓰는 사람)께서 일본에서 자라셨고, 조선에 올 때도 일본을 거쳐 오셨다고 하셨으니, 그 땅에 볼 일이 있으셔서 그랬던 것은 아닌지…….”

“그럴 리가요. 그런 자잘한 일은 부하들에게 시키면 되지 않습니까. 사실 폐하께서 임무를 내려주시면서 해주신 이야기가 매우 감명 깊었기 때문입니다.”

“이야기요?”

방금까지 부드럽기만 하던 정성공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싹 사라졌다. 마치 불쾌한 기억을 떠올리기라도 하는 것 같은 표정이었다.

“사실 우리 조정의 상황도 그리 좋은 편은 아니었습니다. 봉양 총독 마사영(馬士英)과 엄당분자 완대성(阮大鋮) 같은 자들이 현지의 토호들과 결탁해 사사건건 폐하께 반기를 들기 일쑤였지요.”

남경으로 겨우 천도한 숭정제였지만, 수도를 버리고 도망친 황제의 권위가 그리 튼튼할 리가 없었다. 당연히 남경이 근거지였던 지배층의 반발에 부딪혔을 터.

“그러나 폐하와 함께 남하한 오삼계 총관과, 남경 병부상서로 계시던 사가법(史可法) 상서께서 그 상황을 두고 보지 않으셨습니다. 복건성 일대에서 활동하던 저와 아버지를 남경으로 불러올리신 것도 그분들이십니다.”

“그 과정에서 공을 세워 국성(國姓)까지 하사받으신 거군요.”

“도승지를 처음 뵙는 자리부터 자랑한 것이 부끄럽지만, 그렇습니다. 육상에서는 오 총관의 군대가, 해상에서는 아버지의 함대가 오랑캐들을 막아냈으니까요.”

뒤이어 그의 아비, 정지룡이 벌어들인 재물들을 남경의 조정에 지원하기 시작하자 토호 세력은 급격히 힘을 잃어갔다 정성공이 덧붙였다. 남명의 상황이 안정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배경 이야기가 너무 길었군요. 아무튼, 그렇게 조정이 안정되고 나서야 폐하께서는 조선에 사신을 보낼 궁리를 하시기 시작하셨습니다. 그리고 은밀한 자리를 마련해 저와 아버지, 그리고 오 총관을 부르셨지요.”

“그 자리에서 해상을 장악하고 있는 국성야께서 조선과 접촉하라는 명을 내리셨겠군요,”

“예. 당시 저는 그 명령이 조금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어차피 조선은 오랑캐에게 넘어간 번국, 어찌하여 폐하께서 그리 신경을 쓰시는지 알 수가 없었지요.”

대륙 남부는 이전부터 조선과 교류가 거의 없던 땅이었다. 현지인 중에는 남경에서 조선으로 향하는 항로를 알고 있는 자도 드물어, 일본을 거쳐 오면서 제주를 경유해 남경으로 가는 항로를 아는 뱃사람을 데려왔다고 했다.

그런 상황이었으니 정성공에게는 황제의 명이 와닿지 않았을 수밖에. 돈도 안 되고, 정치적으로도 이미 적국의 하수인이 되어버린 나라에 왜 접촉하라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폐하께서 불타는 북경성을 탈출하신 이야기를 해 주시는 순간, 모든 것을 납득하고 말았습니다. 그런 충의(忠義) 넘치는 일화는 책에서도 몇 번 접하지 못한 이야기였으니까요.”

“…….”

“이게 말이나 되는 이야기입니까. 갑자기 나타난 정체 모를 적의 장수가, 갑자기 폐하께 내려온 하늘의 동아줄이 되다니!”

그렇게 정성공은 흥분에 사로잡혀 숭정제가 해준 이야기를 주절주절 늘어놓기 시작했다.

숭정제가 본토인과 다른 내 억양에서 조선인임을 추정했다는 이야기와, 숭정제가 본 장수의 갑옷과 오삼계가 얼룩무늬 군사 사이에서 목격한 갑옷이 같았다는 대목에서 그의 목소리는 뜨거운 열기를 숨기지 못하고 있었다.

“폐하의 목숨을 구한 분과, 이자성의 반란군을 격멸하러 오 총관의 옆에서 함께 싸운 분이 같은 사람일 줄이야! 어찌 이것이 하늘의 인도가 아니겠습니까!”

“국성야, 그것은…….”

“압니다! 알아요! 어쩔 수 없이 몸은 오랑캐들에게 의탁해야 했지만, 가슴속에 끓어오르는 의기(義氣)는 숨기지 못하신 것이 아닙니까!”

아비인 정지룡이 정성공에게 어려서부터 유교 경전을 철저히 가르친 탓일까. 정성공은 나를 숫제 망해가던 명 황조의 충신 취급을 하고 있었다.

그런 말랑말랑한 생각으로 숭정제를 살려 보냈던 것은 결코 아니었지만, 나는 정성공의 기세에 밀려 그의 말에 미약하게나마 맞장구를 쳐 주는 수밖에 없었다.

“역시! 그러실 줄 알았습니다! 도승지께서 남경 땅을 밟으시는 일을 폐하께서 몹시 고대하고 계실 겁니다! 아, 그 자리에서 과연 폐하는 어떤 표정을 지으실지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그날 밤은 분명, 남명의 정세에 관한 중요한 정보를 알게 된 유익한 밤이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깐, 나는 잠들기 직전까지 흥분한 정성공을 상대하느라 골머리를 앓아야 했다.

게다가 정성공의 폭주가 그날 저녁만이었으면 그러려니 했을 텐데, 그렇지도 않았다. 나는 항해 내내 넓지 않은 배 안에서, 그 이야기만 나오면 이상할 정도로 흥분하는 정성공을 상대해야 했다.

정성공은 그런 식으로 계속해서 내게 호감을 표하고 있었으나, 나는 영 마음이 편치 못했다. 숭정제의 적을 언급할 때마다 차갑게 식어가던 정성공의 표정 때문이었다.

지금은 저렇게 간도 쓸개도 빼줄 것처럼 굴고 있지만, 과연 명의 국익과 내 존재가 상충되는 상황에서도 정성공의 태도는 변함이 없을 것인가.

원양의 거친 파도가 내 위장뿐만 아니라 머릿속까지 뒤집어놓는 기분이었다.

***

부산포를 떠난 배가 제주를 거쳐 대륙에 닿은 것은 열흘 넘는 시간이 지난 후였다. 사실 뱃멀미와 정성공에게 시달린 덕에 정확히 며칠이 지났는지도 알 수 없는 상태였다.

뱃전 너머로 육지가 보이기 시작하자마자, 단단한 땅에 내리고 싶은 충동이 나를 덮쳤다. 그러나 그런 나를 정성공은 웃으며 만류할 뿐이었다.

“저쪽에 보이는 주산 군도는 우리 목적지가 아닙니다. 저기 아가리를 벌리고 있는 강이 그 유명한 장강인데, 저 강을 타고 올라가야 폐하께서 계신 남경이 나올 겁니다, 도승지.”

“우…… 우욱. 국성야, 나는 하루라도 빨리 육지에 발을 딛고 싶습니다. 정녕 방법이 없겠습니까?”

“폐하께서 기다리고 계신데 한시도 낭비할 시간이 없습니다. 게다가 저런 촌락에 내려 봐야 편하게 쉬실 곳도 없으실 겁니다. 조금만 더 참으시지요.”

정성공이 손가락으로 가리킨 강의 하구에는 초라한 어촌 몇 개만 띄엄띄엄 보이고 있었다. 장강의 끄트머리면 지금으로 치면 상하이가 위치하고 있어야 할 동네인데, 이 시절에는 아무것도 없었던 모양이다.

“게다가 조선에서 데리고 오신 제자도 의연하게 잘 버티고 있지 않습니까. 제자 앞에서 스승이 못난 꼴을 보이면 쓰겠습니까.”

정성공이 뱃머리에서 갈매기를 구경하던 꼬마를 손짓으로 불렀다. 쪼르르 달려온 녀석은 어설픈 중국어로 정성공에게 인사를 하더니, 바로 내게 말을 걸어왔다.

“보십시오, 도승지. 아이도 이렇게 팔팔한데 다 큰 어른이 이렇게 뱃멀미를 못 견디시면 쓰겠습니까.”

“영감님! 조금만 힘내세요! 저기 땅이 보이잖아요!”

길산이 녀석은 도대체 어떤 신체를 타고 태어난 건지. 배를 탄 경험도 없는 놈이 몇 년은 뱃일을 해온 뱃사람마냥 행동하고 있었다. 멀미는커녕 파도에 흔들리는 갑판도 두려움 없이 뛰어다니는 녀석이었다.

덕분에 멀미에 맥을 못 추는 나를 길산이 녀석이 충실히 도와주는건 고마운데……. 잠깐, 방금 내 귀로 들린 건 뭐지?

“영감님? 너, 누가 나를 영감이라 부르라 시켰느냐.”

“영감님이라 부르는 것이 맞지 않나요? 정삼품 이상 관료들은 영감이라 불러야 한다고 큰어머님이 가르쳐주셨는데요?”

“안사람이? 됐다, 영감님이라는 호칭 대신에 전처럼 사부라 부르도록 해라. 영감이라는 단어를 들을 때마다 소름이 돋는구나.”

“그치만, 별당 누나, 아니 별당아씨께서도 사부님이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계시면 영감님이라 불러드리라 했어요! 두 분 모두 그러라 하시기에 그런 것인데…….”

요안이 그 녀석이 또? 궁에서 다른 관료들이 나를 영감이라고 부를 때 내 표정이 썩었던 것을 보기라도 한 건가?

뱃멀미로 어지럽던 정신이 확 들었다.

“거 봐요! 효과 좋네! 역시 그분들이 사부에 대해서 하는 이야기는 틀린 말이 없다니까.”

***

대륙은 넓었다. 장강 하구가 보였을 때는 곧 목적지에 도착할 줄만 알았는데, 남경까지는 이틀이 더 걸리고 말았다.

하구에 마중 나와 있던 작은 배로 갈아탄 후, 우리가 탄 배는 마치 바다처럼 넓은 장강을 거슬러 올라갔다. 다행히 바다에 비해 멀미가 심하지 않았던 데다, 중간에 육지의 신선한 식수와 음식을 보급 받을 수 있어 남은 이틀 치 여정은 그리 고되지 않았다.

“저기 보십시오, 도승지. 저기가 바로 남경의 외곽성입니다!”

얼핏 보아도 북경성보다 더 커 보이는 성이었다. 흙을 쌓아 만든 토성 아래로 오가는 배들의 수만 보아도, 이곳이 대륙의 경제수도임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남경에서 구할 수 없는 물건은 없노라고 자랑하는 정성공의 말이 귓전에 꽂혔다. 장강 상류인 사천부터 내려온 물류와, 국제무역의 중심지 복건성에서 올라온 물류가 합쳐지는 곳이 남경이라 했다.

청이 해금령을 내리기 이전이었다면 대륙 북방의 해안에서 밀무역으로 가져온 물류까지 남경에 모였겠지. 심양과 북경에서는 강대한 청의 군사력에 놀랐다면, 이곳 남경에서는 명의 경제력에 놀라고 있었다.

“와! 무슨 배가 이렇게 많나요? 삼개나루의 수십 배, 아니 수백 배는 되는 것 같아요!”

길산이 녀석도 입을 벌리고 성 아래 펼쳐진 광경을 구경하느라 바빴다. 녀석이 속사포처럼 쏘아대는 질문을 정성공에게 물어가며 대답하고 있자니, 어느새 배는 남경 안을 흐르는 장강의 지류인 진회하(秦淮河)에 접어들기 시작했다.

“도승지, 폐하께서 당신을 꽤나 오래 기다리셨던 것 같습니다, 하하.”

남경의 황궁으로 통한다는 정양문(正陽門)에 배가 가까이 다가가기 시작했을 무렵, 정성공이 건넨 뜬금없는 말에 물음표를 띄울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곧바로 정성공이 던진 의문에 대한 해답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분명 이 배를 맞이하기 위해 나온 것이 분명한 환영단의 규모가 생각 이상으로 컸기 때문이었다.

“어서 오십시오. 이곳이 제국의 새로운 심장부, 남경입니다.”

배가 육지에 접안하고, 승객들이 내릴 준비가 완료되자 정성공이 내게 자랑이라도 하듯 말했다.

그 말을 뒷받침하듯, 정성공과 나를 마중 나온 행렬의 맨 앞은 높으신 분이 분명한 이들이 도열해 있었다. 소국의 밀사를 맞아들이는 일반적인 대국의 태도는 결코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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