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5화. 출장 전날
암행에서 돌아온 지 얼마나 되었다고 또 긴 출장이 확정되다니.
하연이 아쉬운 소리를 처음으로 늘어놓았을 정도였다. 퇴궐 후, 자초지종을 털어놓은 자리에서 아내는 땅이 꺼질 듯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그걸 보는 내 마음 역시 멀쩡하지 않았다.
게다가 내가 맡은 일도 작지 않은데, 자리를 비운 동안 문제가 생기지 않으려면 그것 또한 인수인계를 확실히 해놓고 가야 했다. 그렇지 않았다가는 무슨 일이 일어날지, 바로 며칠 후 조회에서 알 수 있었으니까.
“아무리 일본에 통신사로 가는 길이 험하고 고된 일이라고는 하나, 경국대전에 종친사환금지법이 멀쩡히 남아있지 않사옵니까? 봉림대군을 통신사의 정사로 임명하는 것은 온당치 않은 일이옵니다, 전하!”
“윤 주서. 여기가 당신이 끼어들 자리던가? 그리고 국법에는 종친의 과거 응시를 금하고 실권을 가진 관직을 내리는 것 역시 금하고 있지만, 현 상황에는 적용하기 어렵지 않은가?”
“적용하기 어렵다니요? 그것은 또 무슨 말이십니까, 송 집의 나리?”
“선대왕 시절의 조정에서도 선조대왕의 부마 동양위 신익성이 대신과 다름없는 발언권을 가졌던 것으로 알고 있네. 그 책임을 물어 청으로 끌려가 볼모살이까지 했는데, 이것 또한 경국대전을 어겼단 말씀인가?”
일본이 새 왕의 즉위를 축하하며 요청한 통신사 파견 건을 다루는 자리였다.
임금이 내게 보여주었던, ‘일본국대군’이 보낸 국서에 적혀 있던 내용이 그것이었다.
헌데, 그 자리에서 생각지도 못했던 폭탄이 터지고 말았다. 병으로 궐석이 생긴 승지 자리를 대리해 조회에 참석한 윤휴와 송시열이 논쟁을 붙어버린 것이다.
그 논쟁은 한참동안 이어졌다. 내가 중간에 끼어들어 중재할 타이밍을 잡지 못할 정도로 불꽃이 튀고 있었다. 김집과 김육이 대동법 건으로 갈등을 빚을 때, 부드럽게 중재에 들어갔던 최명길의 솜씨가 그리워질 정도였다.
그렇게 조정의 중신이라기엔 아직 모자란 내 능력에 혼자 탄식하던 사이, 상황을 지켜보던 김집이 영의정답게 중재를 시도했다. 그 틈을 타 나 역시 혓바닥에 가속을 더해가던 윤휴를 제지할 수 있었다.
“송 집의! 전하께서 보고 계신 자리에서 그리 핏대를 올려서 쓰겠는가! 목소리부터 낮추지 못할까!”
“윤 주서! 대리로 참석한 조회 자리에서 이 무슨 추태인가! 자네의 원래 자리를 자각하게!”
“그만 됐다. 과인이 봉림대군을 통신사의 정사로 임명하겠다한 것은 다른 이유도 있어서이니.”
보다 못한 임금은 부왕을 감금한 간신들을 쳐낼 때, 봉림대군이 위험을 무릅쓰고 찾아와 정보를 전하고 세자 시절의 임금을 도운 이야기를 꺼내고 말았다. 그러고 나서야 뜨거운 논쟁이 사그라들었다.
윤휴도 무작정 반대하기 위해 나선 것은 아닐 것이었다.
정안군(靖安君, 태종의 왕자 시절 군호)과 수양대군의 사례만 보아도, 힘을 가진 왕자가 왕권에 위협적이라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니까.
하지만 대군 사부였던 송시열은 봉림대군과 임금 사이에 일어났던 일을 모두 알고 있었다.
그리고 임금의 뜻을 내가 반대하지 않는 것도 보고 있었다. 그러니 원리원칙을 따지지 않고 임금의 편을 들고 나선 것이다.
“전하, 소신은 그것도 알지 못하고……. 대군에게, 그리고 전하께 큰 실례를 저질렀사옵니다. 죽여주시옵소서!”
“아니다, 윤 주서. 충분히 제기할 수 있는 비판이었으니 마음에 두지 말라. 게다가 이번 통신사는 평소보다 더 무거운 임무를 맡아야 하는 자리다. 그렇기 때문에 대군을 통신사로 보내는 것이다.”
안 그래도 언젠가 일본으로 사신을 보내야 하긴 했다. 네덜란드와 통교하기로 결정한 이상, 일본 쪽과도 외교로 풀 문제들이 생겨나는 것은 정해진 이치였으니까.
에도 막부는 직할지인 나가사키에서 네덜란드와의 무역을 독점하고 있었다. 원 역사에서 하멜의 표류기를 본 네덜란드 동인도회사가 조선과의 교역을 추진하려 들었을 때, 강력한 압박을 넣어 그것을 포기하게 만들기도 했다.
그래서 엘세라크가 이번 조선 방문을 최대한 은밀히 시행한 것이기도 했었다. 일본은 네덜란드와 조선 사이를 중개해서 이득을 챙기고 싶지, 두 나라가 직접 거래를 트는 상황은 원하지 않을 테니까.
‘혹여나 덕천(徳川, 도쿠가와)가의 정이대장군이라는 자가 냄새를 맡고 통신사의 파견을 요청한 것일지도 모르겠구나.’
‘하란타와 조선이 접촉한 건에 대해서 말입니까, 전하. 그럴 가능성은 높지 않다 생각하지만, 준비를 철저히 해서 나쁘지는 않겠지요. 유비무환이라는 격언도 있지 않습니까.’
‘이러면 꽤 노련한 중신을 통신사로 보내야 할 터인데…… 마땅한 자가 떠오르지 않는구나. 은퇴한 최명길을 보내기에는 그의 노구(老軀)가 멀고 험한 길을 견딜 수 있을까 두렵도다.’
‘흠……. 그럼 대군은 어떻습니까?’
당연히 봉림대군을 사신으로 보내자는 제안은 내게서 나온 생각이었다.
청의 고위층과 숱하게 어울리며 쌓은 친화력과 담대함에, 임금에 대한 충성심도 뛰어나다. 아마 대군은 임금이 비밀스럽게 얻은 정보라며 전해주는 조선과 네덜란드, 그리고 일본의 정세에 대해서도 의심 없이 받아들일 것이다.
무엇보다 맡은 관직이 없으니 파견 기간 동안 업무에 공백이 생기지도 않는다. 부족한 부분은 부사와 종사관, 제술관이 메워주면 된다. 이만한 적임자가 어디 있겠는가.
“……전하께서 어찌하여 대군 대감을 사신으로 보내자 하셨는지 납득하지 못할 자는 없을 것이나이다. 분명 여기 있는 윤 주서도 신과 마찬가지일 것이라 사료되옵니다.”
“그렇다면 봉림대군을 정사로 삼아 일본에 파견하는 일은 결정된 것으로 알겠다. 제신들은 대군을 보좌하기 적합한 이를 사신단에 추천하여 나랏일이 그르치는 일이 없도록 하라.”
이번 일을 성공적으로 마치면 봉림대군은 계속해서 외교관으로 일하게 될 지도 모르겠다.
일단 대군은 첫 인상부터 호감이다. 외모도 수려하고 기골이 장대한 데다 몸까지 잘 쓴다.
술을 좋아하지 않으니 사고를 칠 일도 적고, 힘이 장사인 여덟 명의 호위 무관을 항시 데리고 다니니 경호도 문제가 없다. 외국에 나갔던 경험까지 있으니 외교관이 천직일지도.
원 역사에서 그가 받았던 왕좌보다는 초라한 자리라 대군에게 조금 미안하긴 했다. 하지만 그의 능력이 어떻게든 조선에 도움이 되면 좋은 일 아닐까.
하지만 대군을 사신으로 보내는 일이 조회 자리에서 좋게 마무리되고도 내게는 숙제가 하나 더 떨어지고 말았다.
“두괴, 영보에게 사과하게. 직속은 아니더라도 어쨌건 자네의 상관이고, 대리로 참석한 조회 자리에서 선을 넘은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 아닌가.”
“미안하네, 영보. 모든 일에는 절차라는 것이 있는 법인데, 처음 참석한 자리라고 내가 너무 흥분했으이.”
가뜩이나 일이 쌓여있어 쉴 시간도 부족한데, 퇴근 직후 집에 돌아가기 전, 이 빌어먹을 싸움꾼들을 불러다가 둘의 사이도 중재해야 했다.
내가 보자고 했단 말에 얼굴이 밝아져 승정원으로 들어오던 송시열이 윤휴를 보고 표정을 잠시 구겼을 때는 일을 그르칠까 심장이 떨어지는 줄 알았다.
원 역사에서 1차 예송논쟁을 겪으며 원수가 되었던 둘이었다.
“영보, 자네도 마찬가지일세. 아무리 대리라지만 두괴 역시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에서 낸 의견일세. 참하관이 낸 의견이라고 해서 무시해서는 안 되지 않은가.”
“사과하겠네, 두괴. 내가 공과 사를 구분하지 못한 듯하이.”
그러나 내 중재 덕인지, 아니면 그만큼 목숨을 걸 사안이 아니어서인지는 몰라도 화해는 의외로 쉽게 이뤄졌다. 송시열에게 협조해줘서 고맙다며 감사를 전하고, 풀이 죽은 윤휴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는 것으로 일은 마무리되었다.
당분간은 둘이 갈등을 빚을 일은 없을 것이다. 당분간 내가 자리를 비운 사이 윤휴가 또 조회에 참석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기만을 바랄 뿐.
***
“사형, 여긴 또 웬일입니까?”
“네가 좀 바빠 보여야 말이지. 나도 네 장인어른께서 휘두르시는 채찍에 맞느라 바쁘고.”
송시열과 윤휴를 화해시키고 겨우 퇴근해 대문에 들어서는데, 노복이 달려와 사랑채에 손님이 들어있다 알렸다. 안 그래도 퇴근 직전에 임금이 꺼낸 일거리로 약간의 야근을 하고 온 터라 쉬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는데, 손님이라니.
“너 내가 별로 반갑지 않은 모양이다? 이야, 우리 우정이 고작 이 정도였다니, 변해버린 사제의 마음에 이 사형은 눈물만 나고 있도다.”
“눈가에 침이나 바르고 그런 소리를 하십시오. 그래,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세자의 측근을 추천해달라며 임금과 한참 입씨름을 하고 온 터라 반박할 힘도 없었다. 결국 대강 영의정 김집과 좌의정 김육의 친인척 중 세자와 연령이 비슷한 남자아이의 명단을 뽑아오겠다며 약속하고 나서야 궐문을 나설 수 있었던 건데.
지친 몸 탓인지 전해져오는 충신의 농담도 무겁게 느껴졌다. 그렇게 몇 번을 치고받고서야 겨우 물먹은 솜처럼 처지기 시작하는 몸을 보료에 누일 수 있었다.
“저번에 하란타 상관장이랑 있던 자리에서 했던 이야기, 기억나냐?”
“그 자리에서 돌았던 이야기가 한두 가지였어야지요. 도자기 굽는 데 문제라도 생겼습니까?”
“아니, 하란타에서 넘기겠다던 선박 기술 말이다. 내 그날 직접 장인들을 데려가 배를 관찰하기도 하고, 탐문도 해가며 그 정보를 바탕으로 조선(造船) 장인들과 의견을 모은 결과가 나왔다.”
“잘 되었군요. 결국 하란타선, 아니 난(蘭)선을 받아들이기로 하신 겁니까?”
“그리 쉽게 결론을 내릴 수 있었으면 좋았겠다만…….”
충신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말꼬리를 흐리는 것을 보니 일이 잘 풀리지는 않은 듯했다.
“난선에 실린 여러 장치들은 분명 도움이 될 것 같다. 이상한 장치를 이용해서 밧줄 여러 개를 다룬다든가, 여러 돛을 조합해서 쓴다든가 하는 것들 말이다.”
“도르래를 가리키시는 겁니까? 그걸 쓰면 확실히 적은 인원으로 배를 움직이는 데는 도움이 될 겁니다.”
“헌데 배 자체는 그리 큰 도움이 될지 모르겠다. 엘세라크의 말로는 들어가는 비용이 적다고는 하는데 글쎄…… 조선의 연안을 다니기에는 배가 영 불안하게 생겼다고 할까.”
지X맞게 생긴 해안선과 암초, 복잡한 해류 탓에 조선의 연안을 다니는 배는 조운선이든 판옥선이든 내구도가 생명이긴 했다. 그래도 나는 플류트 정도면 괜찮을 줄 알았는데, 경강상인으로 뼈가 굵은 충신의 눈에는 아닌 모양이었다.
역시 얕게 주워들은 지식과 실전은 다른가.
그럼 언젠가 원양에서 접근한 플류트가 그대로 한강을 타고 올라오게 될 거라는 상상은 그저 상상에 그치게 될지도 모르겠다. 역시 일이 그렇게 쉽게 풀릴 리가 없지.
“아, 물론 배 자체가 나쁘단 소리는 아니다. 속력도 빠르고 적재량도 나쁘지 않으니, 북경이나 더 먼 동네로 직항로를 처음 터서 무역할 때는 도움이 되겠지.”
“전면적인 도입은 어렵단 말씀이군요.”
“거기에 우리 수군의 판옥선은 느려 터졌으니 빠른 배를 타고 돌아다니는 왜구들을 상대할 때 맹선(猛船, 조운선을 군용으로 쓸 때 이름) 대신 쓰면 도움이 될지도 모르지. 헌데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내가 실망한 표정이라도 지었던 모양인지, 내 기분을 풀어주려고 과장되어 밝은 말투를 하던 충신의 목소리가 다시 무거워진 것은 그때였다.
“그 플류트라는 배, 크기만 보면 조운선 중에 큰 놈과 비기던데 그놈들이 그 작은 배로만 긴 항해를 했을 리가 없다. 그렇지?”
“예, 분명 한 종류의 배만 사용할 리는 없지요. 저도 그렇게 알고…… 아!”
“그래. 엘세라크라는 놈, 아무리 조선에 호감을 갖고 있다고 해도 처음부터 모든 정보를 우리 앞에서 깠을 리가 없지. 분명 더 큰 선박을 만들 기술도 있을 거다.”
나도 알고 있다. 당시 네덜란드는 갤리온이나 인디아맨, 스쿠너 같은 대형 선박도 운용했다는 사실을. 그래서 강선과 로렌츠 탄을 원하는 엘세라크에게 플류트 이상의 조선 기술을 요구했던 터였다. 충신이 원하는 것은 그쪽의 기술인가.
“배는 클수록 안정적인 법이다. 안 그래도 북경 근방의 선박 장인들을 조선까지 들여온 지 얼마 안 되었는데, 하란타의 대형 선박 기술까지 손에 넣는다면…….”
“조선, 청, 하란타. 삼국의 선박 기술을 섭렵한 배를 만들겠다는 말씀이십니까. 그거 참 엄청난 목표가 아닙니까.”
“단시간에 달성할 수 있는 목표는 아닐 거다. 하지만 네 구상대로 조선이 해상을 주름잡으려면 반드시 필요한 물건이기도 하겠지.”
충신의 눈이 활활 불타고 있었다. 김육에게 괴롭힘 당해 총기가 빠져있던 사람과 과연 동일 인물이 맞나 싶을 정도였다.
“사형. 그 말을 들으니 생각난 건데,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뭐, 하란타에서 큰 배를 건조하는 기술을 준다고 약조라도 했냐?”
“아니오. 이번에 조금 멀리 나갈 일이 생겼습니다. 그것이 사형의 구상에 조금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숭정제의 명으로 남경에 소환된 일은 아직도 날벼락 같았다. 그러나 이렇게 되면 거기서 얻어올 것이 하나 더 생기는 법이니, 나름대로 보람찬 출장이 되지 않을까.
내 이야기를 들은 충신의 눈에서는 숫제 불길이 터져 나올 것 같았다. 시한도 촉박하고 일감이 적은 조선까지 가겠다는 선박 장인이 없었던 탓에, 충신이 경덕진에 다녀왔을 적에는 도자기 장인 몇을 빼돌려오는 데 그쳤다고 했다.
“몇이든 좋다! 대륙 남부의 배는 또 북쪽과 다르다 들었다. 꼭! 꼭! 데려와 다오!”
“사형에게 가장 큰 선물이 되겠군요. 나라를 위한 일이기도 하니, 반드시 성사해보겠습니다.”
내 양물을 팔아서라도 장인을 데려오라며 흥분을 감추지 못하는 충신이었으나, 그럴 필요까진 없을 것이다. 설마 황제라는 자가 생명의 은인에게 그 정도 선물도 안 주려고.
다행히 열이 올라있는 충신과의 대화는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아무래도 장인어른께서 충신을 계속 굴려댄 덕분인지, 충신 역시 꽤 지쳐 있었던 것이다. 덕분에 인정이 울리기 전, 그를 집으로 돌려보낼 수 있었다.
“저기 사라지는 사람은 혹시…….”
“별당아씨께서 계속 마당을 맴돌고 계셨습니다요, 마님.”
손님을 대문까지 배웅하는 길, 스치듯 별당으로 사라졌던 익숙한 뒤태는 요안이었나.
명으로 먼 출장을 다녀와야 한다고 알리던 자리에서 그 푸른 눈망울에 울음기를 머금던 모습이 선했다. 내가 부탁해놓은 난중일기의 네덜란드어 번역을 하지 않겠다 난리를 치던 녀석을 겨우 진정시킨 것이 어제 저녁이었다.
사랑채로 돌아가면서도 그 모습이 계속해서 마음에 걸렸다. 이번 출장도 별 일 없을 것이라고, 금방 돌아올 것이라고 따로 불러 안심이라도 시켜야 할까. 아니면 녀석이 좋아할 만한 선물이라도 사와야 할까.
그렇게 한양을 나선 것은 충신과 대화를 나누고 며칠 지나지 않아서였다. 그동안 나를 기다려야 했던 정성공이 오히려 출발이 너무 빠른 것이 아니냐며 의아해할 정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