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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 어사, 조선을 뒤흔들다!-153화 (153/298)
  • 153화. 남쪽에서 온 밀사

    속으로 오만 욕지거리를 해가며 임금이 있는 편전으로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오늘 수업이 갑자기 중단되어 좋아하는 세자에게 숙제를 왕창 내주어 화풀이를 한 후였다.

    “네가 아직 궁에 머물던 것이 참으로 다행이지 않느냐. 퇴청하여 사가에서 쉬고 있는 것을 불러올리는 것보다야 이편이 낫겠지.”

    “잠들어 있다가도 입궁했어야 할 정도로 시급한 일이니, 그리 생각하는 것이 마음이 편하겠습니다, 전하.”

    “그렇다. 장계를 읽고 너 또한 같은 결론을 내린 모양이구나.”

    초대받지 않은 손님의 국적은 장강 이남에서 생존을 위해 몸부림치고 있을 남명이었다. 남명에서 국서를 들고 조선으로 찾아왔다? 짚이는 것이 딱 하나 있을 수밖에.

    “제가 불타는 북경성에서 저지른 일이 여기까지 굴러왔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전하.”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한수야. 특히 자신을 사신이라 하지 않고 밀사라 한 것이 마음에 걸리지 않느냐.”

    임금과 머리를 맞대고 부산포진 첨사가 올려 보낸 장계를 다시 읽어 내려갔다.

    낯선 선박 하나가 수평선 너머로 나타났기에 군선을 출동시켜 부산포로 나포해왔더니, 항로를 잃었다고 주장한 명국인 몇이 배에 타고 있었다고 했다.

    헌데 그 명국인들이 부산포진 첨사 앞에 도달하자마자 태도를 싹 바꾸었다나.

    “자신이 황제의 칙서를 들고 온 밀사라?”

    “부산포진 첨사가 밀사라 자칭한 자들에게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꼈다고 첨언해놓았군요. 도대체 어떤 자들이기에?”

    “묘하구나. 게다가 그들의 우두머리는 스물이 갓 넘은 듯한 젊은이라?”

    “가짜일 확률도 배제할 수는 없겠습니다만, 어쨌건 밀사로 보낸 자이니 나이는 중요하지 않겠지요.”

    아마 남명 입장에서도 겉으로는 청에게 굽히고 있는 조선에 정식 사신을 보내는 것은 부담이 컸을 것이다. 그러니 조선을 떠보려는 의도든, 아니면 국서를 보낸 사실이 청에 들통났을 경우 수습하려는 의도든 밀사를 보내는 것이 합리적인 움직임이겠지.

    “……네 말이 옳구나. 역시 그러면 이들을 한양으로 불러 직접 확인해야겠구나.”

    “전하께서 직접 확인하시면 아니 됩니다. 만일 이 일이 청에 발각되었을 경우 문제가 되는 것은 명국뿐만이 아닙니다, 전하.”

    “그럼 너 혼자 이들을 상대하겠단 말이냐. 아니면 아, 설마…….”

    만약에 일이 잘못된다면 나를 방패막이로 삼아 임금이라도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 내 말뜻을 깨달은 임금의 입가가 싸늘하게 굳었다.

    “전하, 전하께서는 이제 세자가 아니십니다. 전하의 위치를 자각하셔야지요.”

    “섭섭하구나, 한수야. 너는 분명 반정 직전에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살자고 내게 말했을 텐데. 내게는 다른 선택을 하게 만들려는 참이더냐.”

    “전하…….”

    “분명 그때 내가 네 방패가 되겠다고도 전했지 않느냐. 너는 내 방패가 아닌, 모든 것을 베어 넘기는 칼이 되겠다 맹세했던 것으로 기억하거늘.”

    신하로서 모든 책임을 뒤집어쓸 각오를 하고 말한 것이었는데, 임금은 그것조차 용납할 수 없었나 보다. 진지한 임금의 표정 앞에서 심장이 꽉 쥐어짜지는 것이 느껴졌다.

    “고작 적국의 밀사 하나를 받은 일로 내 총신을 지키지 못한다면, 내게 임금의 자격은 애초부터 없었던 것이겠지. 다시는 그런 말을 입에 담지 않도록 하여라, 알겠느냐.”

    “전하, 하오나…….”

    “너 정도라면 어차피 이런 사소한 일을 수습하려 섭정왕에게 둘러댈 핑계는 금방 만들어 낼 수 있지 않느냐. 더 이상 내가 네게 마음의 빚을 지게 하지 말거라.”

    틀린 말은 아니었으나, 과연 얼굴도 마주하지 못한 채 몇 년이 지난 상태에서 나와 도르곤의 관계가 예전과 변함없을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리스크는 내가 지고 가려 했던 것인데, 임금의 의지가 이리 굳으니 그의 말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아니면 내가 너무 지금 상황을 실제보다 무겁게 여긴 것일지도.

    그렇게 마음에 올렸던 무게를 내려놓자, 굳어있던 머리가 다시 돌기 시작했다. 임금 역시 그것을 눈치챘는지 표정이 다소 밝아져 있었다.

    “아마 전하께서 즉위하셨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명에서 책봉을 허한다는 조서라도 보내온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것에 대한 답서를 받으면 남경의 황제도 어느 정도 위신이 서겠지요.”

    “고명(誥命, 책봉에 사용된 문서)을 보내온 것인가……. 시간대가 좋지 않구나. 저들이 조금만 일찍 조선에 도달했어도 얼마 전 청으로 책봉을 요청하며 보낸 사신에게 이 일을 전하라 일렀으면 되었을 것을.”

    “이미 지나간 일을 고민해 무엇 하겠습니까, 전하. 일단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부터 차근차근 해 나가면 되는 것입니다.”

    결론은 빠르게 내려졌다. 동래부로 급히 내려보낼 왕의 명령서를 그 자리에서 꾸미는 것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렇게 오늘의 야근이 일찍 끝나게 된 것은 다행이었지만, 기분은 그리 좋지 않았다. 당분간 이 일로 늘어날 일더미들이 손에 잡힐 듯했기 때문이었다.

    ***

    명의 밀사들이 한양으로 들어온 것은 그날로부터 열흘쯤 지난 후였다. 임금의 조서를 받들고 급하게 동래부로 내려간 파발을 받자마자 그들도 한양으로 움직인 듯했다.

    부산포에 표류한 명나라 사람을 본국으로 돌려보내기 위해 한양으로 올려보낸다는 핑계를 대서 그런지, 그들의 도착은 도성에 아무런 반향도 일으키지 않았다. 덕분에 야음을 틈타 그들을 쉽게 궁궐로 들일 수 있었다.

    “아름다운 곳이군요. 조선국 국왕 전하는 언제 뵐 수 있는 것입니까?”

    “당신이 누구인지, 정말로 대명의 국서를 품고 온 밀사인지도 확실하지 않습니다. 그런 판국에 벌써 전하를 입에 담는 것은 조금 이르지 않습니까?”

    “틀린 말씀은 아니군요. 오늘 제가 좋은 인상을 드릴 수 있길 바랍니다.”

    밀사의 입에서 흘러나온 것은 억양이 약간 남다른 명국어였다. 내가 북경에서 숱하게 접했던 명국어와 조금 달랐다. 그 차이에서 오는 묘한 이질감이 내 심기를 건드렸다.

    허나 남명의 밀사 입에서 이러한 이야기가 나온 이유는 분명 있었다. 주위의 시선을 피하기 위해 나와 임금이 택한 장소는, 능양군이 나를 처음으로 궁으로 불렀던 그 장소였으니까.

    내게 예를 정중히 표한 후, 밀사는 앞을 막아선 내가 아닌 연잎이 떠다니는 연못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나와 비슷한 연배로 보이는 젊은이에게서는 알 수 없는 여유가 풍기고 있었다.

    “잊지 마십시오. 당신들이 아무리 대국에서 온 이들이라고는 하나, 당신들의 말을 믿고 한양까지 불러올리신 것은 주상 전하의 크나큰 은혜임을.”

    “젊으신 데도 불구하고 조선 조정의 중신이신 것 같은데, 한어(漢語)가 유창하시군요? 조선의 고위 관료들은 역관과 붓이 없으면 벙어리가 된다고 들었는데, 제 정보가 틀리는 날도 있군요.”

    “조선을 위해 일하는 사람들이 반드시 외국의 언어를 습득해야 할 필요는 없지요. 아니면 혹시 지필묵에 익숙하지 않아 필담이 불가능하신 것인지?”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그저 당신의 명국어 실력에 조금 놀라 나온 말이라 여겨주십시오. 저 또한 여러 나라의 말을 익히는 것을 미덕으로 여기는 사람인지라.”

    눅눅한 습기를 머금은 공기에서 불꽃이 튈 것 같았다. 서로를 오가는 말들이 칼날처럼 계속해서 맞부딪치고 있었다.

    첫인상은 틀리지 않았다.

    이 자, 만만치 않은 인간이다.

    “그리고 방금 입에서 흘러나온 말은 순수한 감탄의 의미였습니다. 아름다운 것을 보면 넋을 놓는 것이 제 습관이거든요. 그리고…….”

    “그리고?”

    “당신이 저를 어떻게 생각하시는지는 모르겠지만, 일개 밀사로 취급하면 곤란할 겁니다. 이 몸은 대명의 국성(國姓)을 황제 폐하께 하사받은 고귀한 신분이거든요. 방금 당신이 저지른 무례는 없던 것으로 하겠습니다.”

    남의 나라에 온 것 같지 않은 태도였다. 오만함과 당당함 사이 어딘가에 있는 그의 태도가 어딘지 건방지게 느껴졌다.

    하긴, 이 정도 되는 인물이어야 적국인 청의 번국에 밀사로 보낼 수 있으려나. 내 감정을 드러냈다가는 오히려 일을 그르치는 법, 점점 굳어가는 입가에 웃음을 억지로 더했다.

    “주 씨 성을 하사받았다……. 여기는 조선입니다. 당신의 성이 무엇이든 간에 입을 잘못 놀렸다가는 그대로 결박되어 저 북쪽으로 보내질 수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시길.”

    “재미있는 협박이군요. 그래도 겉으로는 북쪽의 오랑캐들을 섬기고 있다는 말입니까? 조선은 그런 것치고는 꽤나 독자적인 행보를 보여주고 있던데요.”

    “글쎄요. 당신이 얻어낸 정보 중에는 주상께서 심양에 계실 적에 청국의 현 섭정왕과 깊은 교분을 쌓으셨다는 정보는 없었나 보군요.”

    “그 정도도 모를 리가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목숨을 걸고 조선에 찾아온 것은, 또 그럴 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나도 꽤 산전수전 다 겪은 몸이라 생각했는데, 이 젊은 밀사 역시 그런 내 앞에서 한 치도 물러서지 않았다.

    도대체 뭐 하는 놈이지?

    이 자가 사기꾼이 아니라 정말로 숭정제가 보낸 밀사라면, 그렇게 중대한 임무를 이리 젊은 사람에게 맡겼단 말인가?

    “대체 무슨 이유일지 궁금하군요. 주 씨 성을 받은 밀사님. 그리고 당신이 정말로 대명의 국서를 품고 찾아온 밀사라면, 방문한 목적이 무엇인지도 궁금하고요.”

    “그건 천천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일단 제 앞에 계신 당신에게 흥미가 생겨서요.”

    “제게요?”

    “제가 폐하께 올렸던 충언대로 조선국왕 전하가 즉위하시기 전에 밀사로 왔어야 했는데 말입니다. 당신 같은 분이 저를 맞이하기 전에요.”

    자꾸만 말을 빙빙 돌리는 밀사의 언행에 슬슬 짜증이 올라오려 했다. 그러나 이렇게 올라오는 짜증 역시 이 자가 유도한 것일 터. 외교에선 늘 머리를 차갑게 유지해야 한다.

    “대명에 충성을 다하는 이들이 조선 조정에 가득했을 시절에 찾아왔어야 했는데, 지금 조선의 조정은 숨이 막히는군요.”

    “일이 생각대로 풀리지 않는 모양이군요. 지금 조선에 오신 것을 후회하십니까?”

    “아니오, 그건 아닙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꽤 즐겁습니다.”

    밀사는 나를 보며 얼굴에 해맑은 웃음을 띠었다. 이젠 또 즐겁다고?

    “즐겁다니요?”

    “당신과 대화를 나누면서, 폐하께서 주신 두 가지 임무 중 한 가지에 상당히 진전이 있었거든요. 제가 세운 가설이 맞아 들어가고 있기도 하고요.”

    “임무라……. 당신이 말한 그 한 가지 임무가 무엇인지, 제가 맞춰보아도 되겠습니까?”

    “해 보시지요.”

    이제 조선은 청을 상국으로 두고 책봉을 받는 나라다. 명에게는 이만큼 자존심이 상하는 일도 없을 것이다. 그러니 자신들의 옛 번국에게 책봉 조서를 내려 아직 명나라가 죽지 않았음을 알리려는 것이겠지.

    장강 상류에서는 다소 후퇴하긴 했으나, 명은 남경을 중심으로 그 강력한 청의 공세를 어떻게든 막아내고 있다고 들었다. 명이 조선에 신경을 쓰고 있다는 사실은, 장강 이남에 그만큼 여유가 생겼다는 이야기이기도 했다.

    그런 내 추측을 밀사에게 전하자, 그는 가볍게 웃음을 터뜨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도도’라는 청나라 장수에게 꽤나 고전중이라는 말을 덧붙이면서.

    “역시, 첫인상이 정확히 들어맞았군요. 당신은 저를 즐겁게 해줄 사람이 분명합니다.”

    “그래, 그래서 황제 폐하의 칙서를 전달하는 일에 진전이 있었단 말입니까? 저는 분명 당신을 밀사로 인정하겠다는 말도, 칙서를 받들겠다는 말도 하지 않았을 텐데요.”

    “그럴 리가요. 그것은 명분에 불과합니다. 사실 당신들이 대명의 책봉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실리적으로 아무런 이득이 없지요. 조선에서 올린 국서가 장강 너머 청군에게 벼락을 꽂을 것도 아니니까요.”

    “…….”

    “조선의 국서가 남경에 당도하면, 조정에 남아있는 일부 불순분자들의 입을 틀어막는 효과는 있겠군요. 그것만으로도 작은 효과는 아니다 할 수 있겠지만 말입니다.”

    예상하지도 못한 대답이 밀사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그럼 책봉조서는 핑계고, 이 자는 다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조선을 찾아왔단 말인가.

    그렇다면 진전되었다던 임무는 도대체 무엇을 가리키는 것인가.

    정리되지 않은 머릿속은 혼란스러울 뿐이었다.

    “그럼 대체 긴 항해까지 해가며 조선에 들어온 이유가 무엇입니까. 주상 전하를 뵙고 구두로 전해야 하는 칙명이라도 있단 말입니까?”

    “그것은 천천히 알려드리겠습니다. 성공했다는 확신이 들기 전까지는 공개할 수 없는 임무인지라.”

    그런 나를 지그시 바라보던 밀사는 다시 한번 부드럽게 웃음 지었다. 마치 내가 혼란스러워 하고 있는 모습을 즐기기라도 하는 듯했다.

    그런 밀사의 모습을 보며 뇌리를 스치는 한 가지 생각이 있었다.

    “……조선에서 주상 전하가 아닌 누군가를 만나고 돌아가는 것이 그 한 가지 임무입니까.”

    “아직은 알려드릴 수 없다 말씀드렸습니다. 다만 꽤 근접한 답이긴 하군요.”

    “혹시 황제 폐하께서 북경에서 남경으로 천도하신 일과 관련이 있는 임무입니까.”

    나는 보았다. 방금 밀사의 표정에 한 줄기 금이 간 것을.

    싱글거리는 미소 사이로 아주 약간의 딱딱함이 감돌고 있었다. 방금의 추론은, 내가 아니었으면 할 수 없는 추론이었다.

    “역시 만만하게 봐서는 안 되는 분이시군요.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저와 통성명이라도 하지 않으시겠습니까?”

    “내 이름자가 비싼 것도 아니니 못 해줄 것도 없지요. 하지만 가는 것이 있으면 오는 것도 있어야 하는 법, 당신의 성명 역시 알려주어야 할 것입니다.”

    밀사의 입술 사이로 날카로운 치아가 몇 개 드러났다. 잠시 짙은 미소를 유지하고 있던 밀사는 천천히 입을 열였다.

    “조선국의 내각대학사(內閣大學士)는 얕봐서는 안 되는 사람이라고 본국 조정에 전해야겠군요. 그럼 제 이름을 알려드릴 테니, 귀하도 성명을 말씀해 주시지요.”

    “조선국 도승지 안한수입니다. 당신은?”

    밀사는 내 물음에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즉시 답하는 대신, 내 이름을 입에서 여러 번 굴려보더니 그제서야 내 요구에 답해온 것이다.

    “제 이름은 주성공이라 합니다. 영광스럽게도 폐하께 충효백(忠孝伯)이라는 작위를 받고 있습니다. 국성을 받기 이전에는 정복송이라 불렸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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