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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 어사, 조선을 뒤흔들다!-150화 (150/298)
  • 150화. 솔잎 감자 소주

    다행히 엘세라크가 로마를 운운한 것은 그저 감탄사의 표현인 모양이었다. 잠시 무언가를 고민하던 네덜란드 상관장은 피자가 식기 전에 즐기는 것을 택했다.

    피자를 먹으면서 엘세라크는 자신이 흥분한 것에 대해 사과하더니, 요안이를 통해 토마토와 레시피의 출처에 대해 물었다. 이미 심양에서 임금에게 한 차례 변명했던 이야기라 답변은 쉬웠다.

    “남만시는 하란타에서도 얼마 전까지 악마의 열매라고 불릴 정도로 잘 먹지 않았던 열매래요. 나폴리라는 동네에서 떡에 넣기 시작한지도 얼마 안 됐다는데요?”

    “우리 역시 북방에 머물 무렵 밀떡에 익숙하지 않아서 어떻게든 맛있게 먹어보려 노력했던 결과라고 전하거라. 나 역시 놀라고 있다고도 말하고.”

    “선생님의 열린 자세와 탐구심에 경의를 표한다네요. 이 아저씨, 선생님이 마음에 든 것 같아요.”

    네덜란드와 손을 잡기로 정한 마당에, 아마 당분간 조선에서 네덜란드의 대표자 역할을 할 사람의 마음을 얻어 나쁠 것이 없었다.

    그렇게 피자가 화제가 된 이후, 식사 자리의 분위기는 삽시간에 풀려나갔다. 사실 카스텔라를 엘세라크의 앞에 들이밀었을 때 생긴 앙금이 아직도 남아있었을까 걱정했는데, 그 걱정은 기우에 지나지 않는 모양이었다.

    닫혀있던 방문이 드르륵 소리와 함께 열린 것은 그때였다.

    “다흐!”

    “다흐! 메니어 강!”

    이런 중요한 자리에 약속도 하지 않고 나타난 자가 하나 있었다. 얼굴 표정이 관리가 되지 않는 것이 느껴졌다.

    “사형? 여기엔 갑자기 무슨 일입니까?”

    “내 집에 내가 오는 것이 문제라도 되냐? 애초에 이 하란타인들에게 흔쾌히 숙소를 내준 것은 나였을 텐데?”

    “그건 그렇지만 이 자리는 국사를 논하는 중요한 자리입니다. 갑자기 이러시면 곤란합니다!”

    “곤란하기는, 어차피 여기서는 하란타와의 교역 이야기가 오갈 것이 아니냐. 내가 이 자리에서 오간 이야기를 듣나, 나중에 전하의 어명으로 받나 결과는 같지 않냐?”

    말이야 옳지만 이 인간이 웬일로? 분명 충신은 장인어른에게 일대일로 갈려나가 가루가 되기 직전의 상태였을 것이다. 그래서 이 자리엔 굳이 부르지 않았던 것인데.

    문득 생각난 것이 있어 훑어보니, 아니나 다를까 충신의 눈가 아래가 시커멓게 죽어가고 있었다.

    아, 이 인간 설마.

    “사형, 설마 좌상 대감으로부터 벗어나려고 여기로 온 건 아니겠지요? 요새 연일 입번을 하느라 죽을 것 같다고 투덜거린 게 어제였던 것 같습니다만?”

    “그래, 내 잘난 사제 녀석아. 너 덕분에 그 호조 지옥에서 잠시 벗어날 핑계를 얻었다. 제발 사람 하나 살리는 셈 치고 가만히 있어주라. 예 드렁크?”

    “야, 이크 빌.”

    아니, 이 인간은 어떻게 네덜란드어를 더듬더듬 쓰는 건지. 청나라에서 만주어 배우기 싫다고 입 딱 다물던 충신은 어디로 갔단 말인가. 게다가 엘세라크와 이미 친분이 있어 보이는 모습은 또 뭐고?

    어이가 없어 입을 벌리고 있는데, 충신이 손짓으로 술잔을 넘기는 시늉을 하더니 품에서 웬 술병 하나를 꺼냈다. 거의 본 적이 없는 화려한 문양의 청화백자 술병이었다.

    “아니, 사형. 제가 지금 상황이 이해가 안 되는데, 설명 좀 해 주시겠습니까?”

    “내가 왜 이 하란타인들을 내 별장에 머물게 했겠냐. 이들의 상관을 짓는데 일손까지 잔뜩 빌려주고. 다 여기서 돈 냄새가 풀풀 나서 그런 거 아니겠냐?”

    “예?”

    그 와중에도 충신은 단어 몇 개와 손짓 발짓을 써가며 엘세라크와 시시덕거리는 중이다. 아니, 둘 나이 차이도 꽤 나 보이는데 어떻게 그렇게 친해진 건지? 도자기를 손가락을 가리키며 나도 모르는 네덜란드어 단어를 뱉어대는 충신이 낯설었다.

    “짬이 날 때마다 반촌에 와서 여기 엘세라크 씨와 만났다. 네 장인께서 매일같이 나를 괴롭히시는 바람에 하필 통역이 없을 때만 골라서 만났어야 했지만 말이지.”

    “저기…… 선생님의 사형이시면 제가 어떻게 불러야 하나요? 지금은 제가 통역해 드릴 수 있는데요……. 그렇게 엉망으로 뜻을 통하지 않더라도…….”

    “뭐야, 네 소실, 아직도 널 선생님이라 부르냐? 그러고 보니 예전에 수향이가 보았다던 그 아이가 아니냐! 이 참형을 당해도 모자랄 놈이!”

    난장판이었다. 충신은 오랜만에 날을 잡았다는 듯이 나를 조롱해대고, 그 기 센 요안이 녀석도 이 인간의 기에 눌려 울상만 하고 있고.

    엘세라크는 조선말도 알아듣지 못하는 주제에 이 광경을 보며 껄껄 웃고 있었다. 요안이 보고 자신을 오라버니라 부르라던 충신의 옆구리에 내 팔꿈치를 쑤셔넣은 후에야, 그가 불러온 혼돈의 장을 겨우 수습할 수 있었다.

    “야, 도승지 영감. 내가 여기 온 이유는 호조에서 벗어나기 위함만은 아니었다고. 봐라, 엘세라크 씨의 눈이 이 술병에서 떨어질 줄을 모르고 있지 않냐.”

    “그 존대도 평대도 아닌 말투는 도대체 뭡니까? 그리고 이 술병…… 아!”

    “그래, 인마. 엘세라크 씨에게 조선의 도자기 수준을 보여줄 중요한 견본이다. 네 장인어른 같이 빡빡하신 분이 날 풀어주신 이유를 알겠지?”

    하긴 그 찰거머리 같으신 분이 먹잇감을 놓아주신 데는 이유가 있을 터.

    충신이 엘세라크의 앞에 살포시 내려놓은 청화백자 술병은 이 방에 있는 모두에게 자신의 미끈한 자태를 자랑하고 있었다. 그걸 응시하는 엘세라크의 눈에서 안광이 번뜩였다.

    “야, 통역해라. 당신이 가져온 회회청으로 우리 장인이 혼을 쏟아 만든 도자기라고, 이제 당신들이 접근도 어려운 경덕진에서 빼돌린 명국 장인의 솜씨까지 더해진 물건이라고 꼭 강조하고.”

    “당장 얼마나 만들 수 있냐고 묻고 있습니다, 그…… 별제 나리.”

    “그 별제 나리라는 말 대신 다른 건 안 되냐? 아무튼, 시간만 충분히 주면 원하는 만큼, 원하는 종류로 만들 수 있다고 전해라. 아, 회회청 안료 또한 충분해야 하고.”

    아마 원 역사에서 기술이 떨어지던 일본에서 도자기를 구해가던 일에 비하면, 네덜란드는 조선에서 더 빠르고 확실한 결과물을 얻어낼 수 있을 것이다. 채색만 빼면 중국에 뒤떨어지지 않는 도자기 기술을 보유한 조선이다.

    탐욕에 눈을 빛내고 있는 엘세라크를 앞에 두고, 충신은 술병 입구를 틀어막고 있던 종이뭉치를 단숨에 제거했다. 방 안 가득 솔잎 향기가 퍼지는 것이 느껴졌다.

    “한수 네 지혜와 우리 기루의 전통이 결합한 물건이다. 성공을 기원하며 한잔하실 거냐고 묻거라.”

    “물론이랍니다. 헌데 저, 선생님. 페퍼문트가 무엇을 가리키는 말일까요?”

    “페퍼문트?”

    내 반문에 엘세라크는 콧구멍을 크게 벌려 공기를 빨아들이는 흉내를 냈다. 아, 설마 이 향기를 가리키는 말이라면 페퍼문트의 뜻은…….

    “니 페퍼문트! 디트 솔!”

    “저, 제가 통역해드릴 수 있다니까요? 별제 나리?”

    다시 막무가내로 엉터리 네덜란드어를 내뱉으며 엘세라크에게 술잔을 내미는 충신이었다. 껄껄 웃은 엘세라크는 술잔 가득 술을 받더니, 내게도 술을 받으라는 시늉을 해왔다. 그렇게 남자 셋은 충신이 가져온 술병의 내용물을 맛봤다.

    “어? 이거?”

    “한수 너는 마셔본 기억이 있지? 그때와는 맛이 조금 다를 거다.”

    “호어드 스맥!”

    “맛이 좋대요.”

    충신의 분위기에 휩쓸린 것은 나만이 아닌가.

    엘세라크 역시 잔을 단숨에 비우더니 얼굴을 잔뜩 찡그려대고 있었다. 아마 저 사람이 네덜란드인이 아니라 영국인이었으면 ‘크…… 뻑 예!’ 라고 말하지 않았을까.

    “어? 별제 나리, 이분이 이 술은 얼마나 만들 수 있냐고 물어보시는데요?”

    “술은 왜? 이것도 문제가 없다고 전해라. 네 서방이 가져온 마령서 덕분에 양을 두 배는 늘릴 수 있게 되었으니.”

    “마령서로요?”

    소주는 막걸리를 증류시켜 얻는데, 그 막걸리를 빚는 고두밥을 지을 때 삶은 감자를 섞어 술을 빚었다고 했다. 어쩐지 묘하게 맛이 다르더니 그 이유 때문이었나.

    하지만 방금까지 술맛을 즐기던 엘세라크의 표정은 그 말을 듣더니 진지하게 변해 있었다. 무언가 감을 잡은 듯했다.

    “저, 별제 나리. 배에 물건을 실을 때 바닥에 무거운 짐을 일부러 싣나요?”

    “그래, 배 아랫부분이 가벼우면 배가 물에 지나치게 떠서 얕은 풍랑에도 뒤집히기 쉬워지니까. 우리 상단에서도 청으로 배를 보낼 때 일본에서 사온 은을 바닥에 깔아 보내곤 한다. 올 때는 네 아버지가 쓸 석탄을 실어 오지.”

    “아, 상관장이 말하는 발라스트(Ballast)가 뭔가 했더니…….”

    “바닥짐을 가리키는 거구만? 그런데 그건 왜?”

    다시 입안에 술을 머금고 굴려보던 엘세라크가 요안을 향해 뭐라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방금까지 웃고 떠들던 분위기가 삽시간에 진지해지고 있었다.

    원래 동아시아의 주요 수출품 중 하나가 도자기가 된 이유는 엘세라크가 말한 대로 선박의 평형추 겸 화물로 쓰기 위해서였다. 올 때는 남미산 은을 잔뜩 실어다 대륙에 비싸게 팔았고.

    물론 도자기 자체가 매력이 없는 상품이라는 뜻도 절대 아니었다. 그 VOC가 꼬박꼬박 은과 황금으로 대금을 결제해가며 사간 것이 중국산 도자기였으니까.

    그러니 중국에서 도자기를 사갈 길이 막힌 지금,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에서 조선에서 도자기를 사 가겠다고 나오는 것도 이상할 이유가 없었다. 엘세라크도 그렇기 때문에 조선에서 구할 수 없는 안료인 회회청을 선물로 들고 찾아온 것이다.

    “조선산 도자기를 하란타로 보낼 때, 그 안에 이 술을 가득 부어 배에 실어 달라 하네요. 이 술이 마음에 드나 본데요?”

    “조선 사람도 아니면서 솔잎향의 풍류를 안다고? 이 사람 점점 마음에 드는구만? 적당한 값만 맞춰주면 못 해줄 것도 없다고 일러라. 술 빚는 것 또한 이 강충신이 한양에서 제일이라고도 전하고.”

    헌데 술을 도자기에 채워간다고? 도자기를 포장재로 쓴 경우가 없진 않았지만 술을 담아갔다는 이야기는 들은 적이 없는데?

    그 순간 내 머릿속에 무언가 번쩍하고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이 시기, 대서양에서 이뤄지던 삼각무역의 중요한 교역품 중 하나가 독한 술이었다는 사실이 떠오른 것이다.

    아프리카─서인도 제도─신대륙을 연결하는 교역품, 럼(rum)이었다.

    “역시 하란타의 상관장 정도 되면 돈 냄새 맡는 코도 뛰어나구만? 어차피 긴 항해 동안 금방 상하는 식수 대신에 써도 손해는 없을 것이고, 이걸 본국으로 가져다 팔아서 대박이 나면 그것대로 이득이다?”

    “이 땅에서 자신의 생각을 간파하는 이를 만날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다는데요? 한 잔 받으시래요, 별제 나리.”

    고수들은 한 합만 겨뤄도 실력을 알아챈다던가. 나를 빼고 술잔을 교환한 충신과 엘세라크는 이미 의기투합을 끝낸 모양이었다. 아니, 이 자리 만든 사람은 난데…….

    “사형, 그런데 정말로 그렇게 술을 많이 빚을 수 있겠습니까? 아무리 술 빚는데 이제 쌀을 반만 쓴다지만, 내다팔려고 그렇게 많은 쌀을 쓴다는 걸 알면 탄핵을 당할지도 모릅니다.”

    “그럼 마령서만으로 어떻게 해 보면 일 아니냐. 안 그래도 반촌 사람들이 심은 마령서가 남아도는데 처치곤란이라 열심히 머리를 굴리고 있었던 터다. 원래 이런 건 ‘도련님’인 네 몫 아니냐?”

    “그건 그렇습니다만……. 헌데 왜 진작 마령서만으로 술을 빚지 않은 겁니까?”

    “삶은 마령서로 막걸리를 담아봤더니 잡내가 너무 나서 말이다. 그걸 밑술 삼아 증류해서 소주를 뽑아봤는데 그 잡내가 따라오지 뭐냐. 그래서 쌀을 반 섞고 나서야 괜찮아졌던 건데.”

    술을 담그는데 쓰는 누룩균이 감자는 싫어하는 건가? 순수한 탄수화물로 빚을수록 술이 맛있다는 이야기는 들은 적이 있었다. 어라, 순수한 탄수화물?

    “사형. 좋은 생각이 하나 떠올랐습니다.”

    “뭔데?”

    그럼 감자에서 순수한 탄수화물을 뽑으면 되는 일 아닌가. 어차피 내가 아니어도 감자에서 전분 뽑는 법 정도야 금방 발견되었을 것이지만, 걸림돌을 미리 치워주는 것은 분명 충신에게 도움이 될 것이었다.

    “뭐? 그런 방법이? 그러고 보니 술을 담글 때도 고두밥 대신 떡으로 빚는 법도 있었지. 그럼 마령서 가루로 그렇게 해보면?”

    “모르겠습니다. 일단 시험해볼 가치는 있지 않겠습니까?”

    “어이, 꼬맹이! 통역해라. 우리의 사업에 대해 아주 급한 일이 생겨서 자리를 뜨게 생겼으니 정말로 미안하다고, 곧 이 술과 관련해 신통한 결과물을 가지고 다시 찾아오겠다고 전해라.”

    말을 마치자마자 충신의 손가락이 술잔, 그리고 자신의 머리를 향했다. 뒤이어 그가 지은 괴상한 표정 탓에 엘세라크는 크게 소리 내어 웃음을 터뜨렸지만 뜻은 온전히 전해진 듯했다.

    “아, 너한테도 할 이야기가 있긴 한데, 그건 나중으로 미루마. 저번에 떠나는 하란타 배를 배웅 나갔을 때 봤던 걸로 구상한 게 조금 있거든.”

    하란타 배? 충신은 플류트를 보고 무언가 떠올린 것이 있는 듯했다. 어차피 엘세라크와 이 자리에서 조선 기술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눌 셈이었으니 마침 잘 됐다.

    그렇게 충신은 내게 또 한 가지 고민을 남기고 바람처럼 사라졌다. 하지만 술 연구할 시간이 과연 있을까? 우리 장인어른께서 과연 그런 사소한 일로 노예를 놔 주시려고.

    그래도 넘쳐나는 감자로 독주(毒酒)를 빚을 수 있게 된다면, 단순히 네덜란드에 팔 교역품이 늘어나는 것 이상의 이득이 있을 것이었다. 예를 들면 소독에 쓸 알코올을 확보할 수 있다든지. 하연이 내 아이를 낳을 때 소독용 알코올이 있다면 출산의 위험도 줄어들 것이다.

    “실례를 저질러서 미안하다고 전하거라. 원래 저런 사람이라는 것도 꼭 말하고.”

    “괜찮대요. 젊은 신하들 중에 이리 뛰어난 인재들이 있으니 조선의 미래가 밝아 보인다네요.”

    “저렇게 천방지축이어도 일처리 하나만은 깔끔한 사람이라고 전하거라. 아마 이 땅에서 독한 증류주를 가져가는 일은 어렵지 않게 풀릴 것이라고도 말하고.”

    그 말을 전해 들은 엘세라크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그는 충신이 남겨두고 간 청화백자병을 주름진 손가락으로 쓰다듬어보더니, 이번에는 진지한 눈빛을 나를 향해 쏘아보냈다.

    “어……. 선생님?”

    “왜 그러느냐.”

    “원래는 말할 예정이 없었긴 한데, 마음이 바뀌었다며 지금 말해야 될 것 같은 이야기가 생겼다네요. 시간을 조금 더 달라는데 괜찮으시겠어요?”

    방금까지 웃고 떠들던 엘세라크의 표정이 확 달라져 있었다. 임금 앞에서 보이던 모습보다 더 무거운 분위기를 풍기고 있는 네덜란드 상관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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