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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 어사, 조선을 뒤흔들다!-148화 (148/298)

148화. 푸른 눈의 조선인

그렇게 막 입을 떼어놓으려던 찰나였다. 순간 편전 밖에서 풍겨온 달달한 향기에, 자리에 있던 모든 이의 주의가 그쪽으로 쏠렸다.

“왓 데(wat de)…….”

엘세라크가 들고 온 선물이 파란색 염료 하나일 리가 없었다. 명색이 일국의 국왕이 즉위한 것을 축하하는 선물이니까.

염료는 네덜란드 측에서 알아서 준비한 물건이었다. 그 외에 조선 측에서도 따로 요청했던 물건 또한 있었고.

예를 들면 바타비아에서 데려온 정밀부품 기술자라든지, 유럽산 아마(亞麻)의 종자 같은 물건들은 조선 측에서 요청한 것이었다. 박연의 부담을 줄여주고, 슬슬 생산에 한계가 온 닥나무를 대체할 물건들.

하지만 그것들은 나중으로 미뤄두어야 한다.

지금 편전 밖에서 존재감을 발휘하는 물건은 네덜란드인들의 또 다른 선물인 향신료와 설탕으로 만든 물건이니까. 설탕을 가져오지 않았다면 아마 꿀을 대신 넣어 만들었을 음식이다.

“와! 읍……!”

자리에서 대화가 오가지 않아 잠시 붓을 놓고 있던 요안이 녀석이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내질렀다가 입을 막는 것이 보였다.

“카스텔라…….”

엘세라크의 눈썹 사이가 잠시 찡그려졌다.

그럴 만도 했다.

카스텔라는 이 시대 네덜란드인에겐 결코 유쾌하게 받아들일 수 없는 과자였으니까.

“어째서 이 음식이 조선에 존재하냐고 묻습니다. 혹시 장기(長崎, 나가사키)에 전래된 서쪽의 음식이라는 이유로 대접하는 것이냐고 물어오는군요.”

카스텔라. 흰자 거품을 낼 팔 힘과 레시피에 맞는 재료만 있다면 가마솥으로도 구워낼 수 있다. 전기밥솥으로도 만들어본 경험이 있어, 이 물건을 조선에 재현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엘세라크가 얼굴을 찌푸리는 이유도 내 짐작과 같을 것이다.

앞에 놓여있는 과자는 분명 그의 조국 네덜란드를 억압하던 적국, 스페인의 카스티야 지방에서 유래한 음식이었으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정확하게 알고 있습니다. 귀국이 귀국의 영토를 강점한 강대국과 숱한 피를 흘려가며 싸워왔다는 사실을. 그리고 지금 당신에게 제공된 과자가 그 강대국의 과자라는 것도.”

순간 엘세라크 안에서 무언가가 끊어지는 소리가 들린 듯했다. 그러나 엘세라크는 그런 기색을 곧 능숙히 지워냈다.

“이 음식에 담긴 의미를 조롱으로 해석해도 되냐고 묻고 있습니다. 도승지 영감, 이자가 화를 숨기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우호적인 의미를 담고 조선을 방문하신 분들께 그런 무례를 저지를 리 있겠습니까. 서반아의 물건으로 당신을 조롱할 생각은 한 톨도 없었다고 전해주십시오.”

박연의 통역을 듣자, 엘세라크의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궁금하겠지. 생각해 보면 어떻게 이 조선인이 네덜란드가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강대국 스페인과 피를 흘려 긴 전쟁을 치르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지 전혀 감이 잡히지 않을 테니까.

“더구나 그 전쟁은 당신들의 승리로 마무리되어가고 있지 않습니까. 무적을 자칭하던 그들의 함대도 당신들 손에 스러졌고요.”

“……!”

“그걸 전부 알고 있으면서 왜 이런 이야기를 꺼내는지 궁금하실 겁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카스텔라를 네덜란드인 앞에 낸 것은 내 독단이 아니었다. 이미 임금의 앞에서 박연을 불러 그들을 접대할 때 어떤 음식을 내야할지 머리를 맞대고 지혜를 짜냈던 것이 얼마 전이었다.

박연은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 냈던 플랑드르식 스튜를 내자고 주장했으나, 카스텔라를 내자는 내 제안을 듣고 방금 엘세라크가 지었던 반응을 그대로 보여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자리에 카스텔라가 나오게 된 것은 일종의 충격 요법이었다.

“불쾌하게 느끼셨다면 미안합니다. 다만, 당신이 지금 느끼고 있는 감정을 우리 조선의 사람들도 느끼고 있다는 점을 생생하게 전해드리고 싶었습니다.”

“……?”

“당신의 조국 하란타와, 내 조국 조선은 비슷한 점이 참으로 많습니다. 알고 계십니까?”

갑작스러운 상황에 이제 반박할 기운마저 잃은 듯한 엘세라크였다. 그런 그를 바라보며 나는 자세를 바로하고 옷매무새를 단정히 했다.

“우리 조선 또한 얼마 전 북쪽에 위치한 강대국의 침략을 고스란히 겪었습니다. 지금은 조금 나아졌긴 하나, 여전히 속국과 비슷한 처지에 놓여 있지요. 그런 나라의 사람이 어찌 하란타를 조롱하겠습니까.”

“……상관장이 말하길, 그런 사정이 있었는지는 미처 알지 못했다 합니다.”

“이 극동의 땅에 놓인 조선의 상황과, 당신의 조국 하란타의 상황 역시 크게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강대국에게 핍박받고, 얼마 안 되는 가진 것들을 날카롭게 갈고 닦아 생존에 나서야 하는 그런 처지. 공감이 가지 않으십니까?”

박연에게서 긴 통역을 전해들은 엘세라크는 말이 없었다.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더니, 조용히 고개를 한 번 끄덕일 뿐이었다.

“하란타가 국가 주도로 상업을 중시하는 것 또한 비슷한 이유겠지요. 당신들이 타고 온, 최신 기술이 집약된 범선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조롱은커녕, 경의를 표해도 모자랄 지경입니다.”

그 말에 덧붙여 나는 그들이 타고 온 범선, 플류트의 장점을 엘세라크 앞에 늘어놓았다.

무역과 네덜란드 환경에 최적화된 범선, 어찌 칭찬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 말을 전해 듣자마자 엘세라크의 몸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한 것이 보였다. 아마 이 자의 눈에는 내가 도깨비로 보이고 있을 것이다. 아, 서양 사람이니 고블린으로 보이려나.

“제가 알려준 정보냐고 묻기에, 저도 모르는 정보라고 답했습니다. 그 다음엔 제물포에서 잠깐 배를 본 것만으로도 그걸 알아낸 것이냐고 물어오는군요.”

“정보의 출처는 중요하지 않을 겁니다, 엘세라크 씨. 당신들을 대하는 우리 조선의 입장이 중요할 뿐. 그렇지 않습니까?”

홀린 듯이 고개를 끄덕이는 엘세라크였다. 그의 눈동자에 복잡한 감정이 비치고 있었다.

“당신이 예물로 가져온 염료, 어떤 의미인지 잘 알고 있습니다. 대륙의 남부에서는 정지룡의 세력 탓에 도자기를 구하기 어렵고, 열도에서는 원하는 수준의 도자기를 얻기 어려우니 우리를 차선책으로 택한 것이겠지요. 맞습니까?”

“정확하다고 합니다. 이제 도승지 영감이 무슨 이야기를 해도 놀라지 않겠다고 하는군요.”

“그 과정에서 일방적인 이득을 얻을 생각은 하지 말아야 할 것이라고 전하십시오.”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을 어찌 속일 수 있겠냐며 농담을 섞어 대답했습니다.”

그러나 엘세라크가 회회청(回回靑)이라 불리는 코발트블루 염료를 조선에 들고 온 이유는 단순히 도자기 수급을 위한 목적만은 아닐 것이다. 역사에서 VOC(네덜란드 동인도회사)가 일본에게 도자기 건으로 한 짓을 생각하면 뒤에 숨은 저의가 뻔했다.

VOC는 경덕진의 도자기 대신 일본의 도자기 상당량을 유럽으로 가져다 팔았지만, 정작 도자기 판매 건으로 일본 손에 남은 이익은 거의 없다시피 했다. VOC가 채색에 들어가는 청색 안료인 회회청을 바가지를 씌워 팔았기 때문이었다.

네덜란드 입장에서도 바닥 수준인 일본의 도자기 기술을 본인들이 육성해 팔아먹었으니, 일본을 상대로는 그래도 된다는 변명을 할 수 있겠지.

‘하지만 조선은 다르다.’

일본과는 달리 조선에는 수백 년간 쌓아온 도자기 기술이 있다. 그리고 나는 그들이 안료를 팔아 일방적인 이득을 챙기려 한다는 속셈을 간파하고 있다. VOC의 속셈대로 일방적인 경제적 식민지가 되어 끌려 다닐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리고 아국은 단순히 도자기 무역에 한정해 하란타와 교류할 생각은 없습니다. 우리 임금께서는 상단을 통한 무역뿐만 아니라 그 이상의 것을 원하십니다. 엘세라크 상관장.”

“‘그 이상의 것’이 무엇이냐고 묻습니다.”

“무역 차원을 넘어, 귀국과 아국이 친선과 협력의 단계에 이르길 원하십니다. 가능하면 직접적인 외교 관계도 수립하고 싶다 하셨습니다.”

그제서야 엘세라크는 임금이 자신을 편전으로 따로 부른 이유를 알아챈 듯했다. 적국의 과자를 내오면서까지 조선의 처지를 이해시키려 했던 점까지 전부.

“하란타가 대만 섬에 세력을 확장하고 있는 것을 조선이 돕거나, 혹은 우리와 연합해서 이 지역의 해상 패권을 잡을 수도 있겠지요. 이제 당신이 본국에 전해야 할 이야기가 무엇인지 아시겠습니까?”

박연에게 무거운 말을 전해들은 엘세라크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편전에 꽤 오랫동안 적막이 감돌았다.

“그것은 본인이 답하기 어려운 문제라 합니다. 다만 전하의 고귀한 뜻은 반드시 국서로 꾸며 본국으로 보고할 것이라 합니다. 그리고…….”

“그리고?”

“본국에서 곧 하란타 공작의 특명을 대리하는 사신이 이 지역에 도착할 것인데, 외교 차원의 이야기는 그와 하는 것이 맞겠다고 하는군요.”

“틀린 말은 아니군요. 상관장. 다만 당신이 가져온 도자기 무역 건은 가능한 빠른 시일 내에 착수될 것이라는 점, 미리 알려드리겠습니다.”

상관장의 얼굴이 환하게 바뀌었다. 이미 청나라에서 귀국할 때, 충신이 경덕진에서 도자기 장인들을 빼왔을 때부터 그려왔던 큰 그림이었다. 물이 들어올 때 빠르게 노를 저어야 한다.

뒤이어 네덜란드 상관을 도성 내에 설치할 의사가 있다고 전하자, 엘세라크는 뛸 듯이 기뻐했다. 아마 그 상관은 내 영향 아래에 있는 반촌에 설치될 확률이 높지만 말이지. 도자기 공방이 위치한 이천과도 가깝고.

“아, 그리고 상관장이 덧붙이는데, 북경에서 친서로 요청하셨던 하란타인 선장 역시 이번을 기회로 삼아 특사와 함께 이곳을 향해 오고 있다고 전해달랍니다.”

“다행이군요. 귀국에서 그 제안을 이상하게 여기는 건 아닌지 염려했습니다.”

“선장 한 명을 보내는 일은 어렵지 않다고 말합니다. 다만, 특사가 조선을 방문한 이후에 조선에서도 하란타로 특사 한 명을 보내주었으면 한답니다.”

나쁘지 않은 대답이었다. 그 사람이 함께하는 상태에서 네덜란드와 손을 잡으면 동북아의 해양 패권을 정말로 잡을 수 있을지도.

하란타로 가는 특사는 아마 박연이 맡게 되려나? 그 뜻을 엘세라크에게 전하자, 그의 표정이 복잡해지고 있었다.

이윽고 엘세라크가 박연을 향해 네덜란드어로 뭐라 다급하게 말을 거는 것이 보였다.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었으나, 내 등 뒤에서 대화를 받아 적던 요안이 녀석이 짧게 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려왔다.

“황공하오나 전하, 잠시 저와 상관장 사이에 오가는 대화의 통역을 제 여식에게 맡겨도 되겠나이까.”

“박 종사관? 갑자기 그것이 무슨 말인가?”

“이 자가 소신이 특사로 하란타에 파견되는 건에 대하여, 제게 상당히 무거운 발언을 요구했나이다. 제 뜻이 담긴 대답을 저 스스로 통역할 수는 없기에, 딸자식의 재주를 빌리려 하옵니다.”

“중대한 발언이라니? 알았다. 네 여식의 통역 솜씨만 충분하다면 문제는 없겠지.”

임금이 허락을 내리자마자 모두의 시선이 요안을 향했다. 그러나, 이러한 중책을 맡은 녀석은 마치 울 것만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버지, 이걸 왜 제게…….”

“내 진심이 전해지려면 내 입으로 꺼내서는 안 되는 말이 있는 법이다. 네가 들은 그대로 전하께 전해 드리거라. 알겠느냐.”

“네…… 아버지…….”

콧소리를 내 숨을 삼킨 요안은 곧 표정을 바로잡았다. 그 표정에 결의가 가득 찬 것이, 엘세라크가 박연에게 대체 어떤 말을 했는지 궁금하게 만들고 있었다.

“엘세라크 상관장은 아버지에게…… 아니 박 종사관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무엇이라 하더냐.”

“본래 네덜란드…… 아니 하란타인인 네가 조선의 특사로 오는 것은 옳지 않다. 라고요.”

딸의 통역이 끝나자마자, 임금과 나를 향해 시선을 맞추고 있던 박연이 엘세라크를 향해 돌아섰다. 그리고 점점 유창해지는 박연의 네덜란드어 사이에서, 나는 ‘네덜란드’라는 단어 대신 ‘하란타’라는 단어가 쓰였다는 사실을 알아채고 말았다.

“통역하거라, 요안아.”

“엘세라크 상관장은 뒤이어 박 종사관에게 너의 조국은 대체 어디냐고 물으며, 확실한 답변을 요구했습니다……. 그리고…….”

“…….”

“박 종사관은 딱 잘라 대답했습니다. 내 조국은 하나뿐이고, 나는 내 나라의 이득을 위해 움직일 뿐이라고요. 또…….”

박연의 푸른 눈에서 얼핏 물기가 반짝였던 것을 본 것 같았다. 그러나 그 물기는 이 자리를 휩싸고 있는 묘한 열기에 눌려 금방 증발하고 말았다.

“종사관은 마지막으로 덧붙였습니다. 나는 코레시안, 아니 조선 사람이다. 하란타는 내가 태어난 땅에 불과하다.”

※ 작가의 말

박연과 엘세라크 사이에 오간, 정체성을 묻는 대화는 실제로 일어났던 사건을 근거로 해 재구성했습니다.

원 역사에서 하멜이 제주에 표류했을 때 일어난 일입니다. 제주목사에게 불려간 하멜 일행이 마주한 것은 붉은빛이 도는 금발을 한 남자였습니다.

그렇게 ‘하멜표류기’에 전해 내려오는 내용을 제 식대로 재구성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총독(제주목사)가 우리에게 물었다.

“이 사람이 누구인지 알겠는가?”

“우리와 같은 네덜란드 사람이 아닙니까.”

당연한 대답이었다. 생김새부터가 이곳의 사람들과는 달리, 우리와 닮아있지 않은가.

하지만 총독은 껄껄 웃더니 생각도 못 한 대답을 던져왔다.

“틀렸다. 이 사람은 코레시안(Coresian, 조선인이다.”」

그리고는 박연과 하멜은 서툰 네덜란드어로 그제서야 손짓발짓까지 동원해가며 의사소통을 하게 됩니다. 기록에는 한 달 정도 하멜 일행과 어울리고 나서야 박연의 네덜란드어가 예전의 수준을 회복했다고 적혀있습니다.

다만 고향 사람들을 만난 박연의 마음은 매우 복잡했던 것 같습니다. 하멜 일행이 조선에 머무는 내내 조선의 관리로서 그들을 대한 박연이었지만, 정조 때 윤행임이라는 문신이 남긴 글에는 이런 기록도 전해 내려오거든요.

「조정에서는 박연에게 가서 (하멜 일행의 사연을) 알아보라고 명했다. 박연은 그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눈 후, 바닷가에 주저앉아 하루 종일 옷소매가 다 젖도록 눈물 흘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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