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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 어사, 조선을 뒤흔들다!-139화 (139/298)
  • 139화. 효녀

    하지만 내가 김 갑사에게 물음을 던진 이유는 따로 있었다.

    아마 대문 앞에 선 낭자를 보고, 장소에 어울리지 않는 여인을 목격했던 예전의 기억을 떠올렸던 것이 원인일 것이다.

    조선에 떨어졌던 첫날 겪었던 신비한 기억, 전라도에 어사로 나가면서 되새겼던 그 기억이었다.

    장수, 진안의 산골을 다시 밟게 된 것이 몇 년 만이었던가.

    내가 처음 조선에 떨어졌던 그 산골 말이다.

    성 영감의 정인이 혼백이 되어 나타났던 그 장소에, 나는 마지막 매듭을 풀러 가야만 했다.

    ‘세상에, 이건……?’

    어사의 장례가 끝나고, 유품을 정리하던 도중 발견한 물건 탓에 옮겨야 했던 걸음이었다.

    어사가 평소에 몸에서 떼어놓지 않던 낡은 붓 하나가 있었는데, 우연찮게 열린 붓두껍 안에서 이상한 물건을 하나 발견했던 것이다.

    작은 머리카락 묶음이었다.

    나비 수 달린 오색실로 단단히 묶인 정표, 어사가 그것을 왜 소지하고 있었을지 모를 수가 없었다.

    그렇게 어사는 정인의 머리칼을 가슴에 품은 채 상여에 올라타 선산으로 향했다.

    그리고 남겨진 낡은 붓은 놓여야 할 자리가 있을 터.

    마침 임금이 내게 어사가 되어 전라도로 갈 것을 명했을 때, 깨닫게 된 것이 하나 있었다. 남은 물건을 있어야 할 자리에 돌려놓는 것이, 어사의 마지막 부탁이 될 것이라는 걸.

    그렇게 나는 장수 산길에 있던 묘소를 찾았다.

    처음 보았을 때는 아무런 표식도 없던 버려진 봉분에는, 어느새 익숙한 글씨가 새겨진 긴 나무판자 하나가 묘비를 대신해 우뚝 서 있었다.

    열녀춘향지묘.

    분명 어사가 피눈물을 흘리며 깎았을 여섯 자를 뒤로 하고, 나는 한양에서 가져온 어사의 붓을 있어야 할 자리로 돌려놓았었다.

    “나으리, 요사이 뜬금없는 말씀을 가끔 꺼내시는데, 무슨 일이라도 있으신 겝니까요?”

    김 갑사의 말이 옳았다.

    어울리지 않는 장소에 서 있는 여인을 보고 조선에서 떨어진 첫날 본 원혼을 떠올리는 것은 분명 정상이 아니다.

    그저 어사를 갑자기 보내면서 받은 충격 탓에, 자꾸만 좋았던 시절의 기억을 현실에 겹쳐 보게 되는 것이리라. 이것 또한 지나가야 할 과정이겠지.

    “아닐세. 하긴 빚을 지는 데는 남녀노소 구분이 없을 터인데, 여인이 이런 자리에 있는 것이 이상할 일도 아닐 것이네. 쓸 데 없는 소리를 한 모양이군.”

    “어제 산적들도 말하지 않았습니까요. 고리대금은 빚진 본인뿐만이 아니라 가족도 고통받는 일이라고요. 아마 같은 맥락이 아니겠습니까요.”

    김 갑사의 대답을 들으니 그런 것 같기도 하고. 그렇다면 저 낭자는 아비나 서방의 빚을 대신 갚으러 찾아오기라도 한 건가.

    안 그래도 고리대금업자의 집을 알려주던 아낙의 태도가 마음에 걸리던 차였다. 정보를 뽑아낼 사람을 가릴 때가 아니었다.

    “거기 서 있는 소저, 말씀 좀 물어도 되겠습니까.”

    그 말에, 대문 앞에 못박혀 서 있던 낭자가 고개를 돌렸다. 꽤나 앳된 모습이었다.

    “네? 저, 저 말씀이신가요?”

    “여기가 재물을 꾸어주는 곳이라 듣고 찾아왔는데, 소생이 옳게 찾아왔는지 궁금해서 말입니다.”

    “그게…… 저도 처음인지라…….”

    낭자로부터 약간의 경계심이 느껴지는 건 어쩔 수 없을 테지. 낯선 선비가 갑자기 말을 걸어온 상황이니까.

    하지만 의외의 변수가 있었다. 가만히 입이나 다물고 있었어야 할 녀석이 김 갑사 뒤에서 툭 하고 튀어나온 것이다.

    “누나! 누나 같은 사람이 이런 데 있으면 안 돼!”

    “너는 누구니?”

    “나는…… 아무튼 이런 데 있으면 안 돼! 집으로 돌아가! 어서!”

    버릇없고 나서기 좋아하는 꼬마.

    녀석의 돌발행동이 낭자의 경계심을 순식간에 무너뜨리는 것이 느껴졌다.

    짜식, 밥 먹여준 값은 하는구만?

    치고 들어가려면 지금일 것이다. 당황과 호기심을 감추지 못하고 있는 낭자를 향해 단숨에 입을 열었다.

    “녀석의 말이 맞습니다. 이곳은 낭자 같은 사람이 함부로 드나들 곳이 아닙니다.”

    “저도 알고 있어요. 하지만…….”

    “혹시 무슨 사연이라도 있어 찾아오신 겝니까? 낭자께서 괜찮으시다면 말해주시지요. 저는 지나가는 길손이지만 혹시나 도움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갑작스레 닥친 상황 탓인지, 낭자는 그런 내 앞에서 그저 우물쭈물하고 있을 뿐이었다. 어쩔 수 없나. 시간이 들더라도 천천히 그녀의 입을 열어야겠다 생각하고 있을 무렵이었다.

    갑자기 어디선가 고성이 들려왔다. 그 방향으로 시선을 돌려보니, 웬 중갓 쓴 중년 하나가 건물에서 뛰쳐나와 이쪽을 향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뭐 하는 양반이신지 모르겠지만, 남의 장사를 방해하셔서는 안 되지요?”

    “자네는 누군가?”

    “이 근방에서 사정이 어려운 자들에게 재물을 빌려주는 일을 하는 자올시다. 양반님이 뭐하는 분인지는 모르겠지만, 제가 필요해 찾아온 사람을 중간에 가로채시는 건 상도덕에 어긋나는 일이 아니리까?”

    얼굴에 욕심이 뒤룩뒤룩 달린 놈이 낭자를 향해 천천히 접근하고 있었다. 등짐에서 정의봉이 진동하는 느낌이 드는 것은 착각이 아닐 것이다.

    “상도덕이라, 사정이 딱해 보이는 사람의 사연을 들으려 하는 일이 상도덕에 어긋난다는 말은 처음 듣네만? 그건 자네만의 상도덕인가?”

    “소인과 엮이면 이 근방에서 여러 가지로 피곤하실 텐데요? 이 계집은 소인을 찾아온 것이 분명하니, 놓고 가던 길 가시지요.”

    “내가 자네의 말을 들어야 할 이유는 없을 터인데? 자네, 양반을 상대로 꽤나 건방지구만? 아무리 강상의 도리가 무너져간다고는 하나, 위아래를 모를 지경까지 이르렀다는 이야기는 들은 바가 없건만.”

    놈과 낭자 사이에 내 몸을 집어넣었다.

    산적들에게서 들은 이야기와, 포구에서 만난 아낙의 태도, 그리고 지금 놈의 태도를 종합해보자 어떤 확신 하나가 들고 있었다.

    이놈이 만악의 근원 중 하나일 것이라는 직감.

    “제가 아래인 것은 분명하지만, 양반님의 위에 있는 더 높으신 분을 움직일 수 있지도 않겠습니까? 보아하니 조금 배우신 분 같은데, 이쯤하면 알아들으실 수 있으시겠지요?”

    “호오, 자네는 이 근방에서 힘 좀 쓸 수 있는 사람인가보지?”

    “굳이 이 근처의 유력자나 수령님들의 이름을 소인의 입으로 들으셔야 하시리까? 천천히 열거해드릴 수도 있습니다만.”

    다른 양반이 들었다면 화가 울컥 치솟았을 태도였다. 그러나 내 가슴에 품은 마패는 그 울화마저 진정시켜주고 있었다.

    아마 영감님에게 어사의 기본을 배우지 않았더라면, 이런 사소한 일에도 마패를 들이밀고 몽둥이질을 해댔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고작 이런 피라미를 잡으려고 정체를 밝히는 것은 하수나 하는 짓. 등짐 속 정의봉이 나설 자리는 여기가 아니겠지.

    “호오, 그래? 양반에게 감히 그런 말을 하는 걸 보니 자네가 언급할 분들 위세가 꽤나 대단한 모양이지?”

    “암요, 양반님 같은 미미한 분들은 콧바람으로 날려버릴 수 있으신 분들이올시다.”

    건방진 새끼. 이놈을 어떻게 조져야 할지 머릿속에서 천사백만 개의 시뮬레이션을 돌려보는 동안, 놈은 내게 접근하며 역겨운 낯짝을 점점 들이밀고 있었다.

    평범한 사람이면 꽤나 압박을 받았을 상황이다. 하지만 상대가 나란 게 운이 없군.

    “그래? 나를 콧바람으로 날려버릴 수 있다니, 엄청나게 대단하신 분들이 아닌가. 혹시 정승이나 판서쯤 되는 분들인가?”

    “핫, 정승 판서요? 꽤나 자신을 과대평가하시는 모양인데…….”

    “헌데, 자네가 권세를 빌려올 수 있는 분들이 아무리 대단한 분들이라고는 하나, 어차피 여우가 호랑이의 위세를 빌린 격이 아닌가? 그걸 함부로 휘두르다가는 언젠가 크게 다치게 될 것일세. 내 충고하겠네.”

    웃음을 가장하고 있던 놈의 가면에 금이 가는 것이 느껴졌다. 어서 본색을 드러내라. 쓰레기 같은 새끼야.

    “마지막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그 계집, 좋은 말로 할 때 놓고 지나가시지요.”

    “싫다면?”

    “말투를 보아하니 한양에서 유람 나오신 선비님 같으신데, 제 말을 듣지 않으신다면 앞으로의 유람길이 순탄치 않아지실 거라고 저도 충고를 드리지요.”

    충고라. 과연 앞길이 순탄치 않아지는 건 누구 이야기일까.

    앞서 어사를 나갔던 전라도에서도 정체를 숨기며 여러 번 겪은 일이었다. 이런 X같은 상황을 어사 나리께서는 그 연세에 어찌 참고 견디셨는지.

    하지만 그분의 가르침을 받은 이상, 어사로써 한 치도 흐트러진 모습을 보여서는 아니 된다.

    철저히 정체를 숨기고, 죄악은 한 톨도 남김없이 응징해야 한다. 그게 영감님이 나를 끼고 다니며 늘 강조하신 어사의 자세였으니까.

    “그러한가? 그럼 마음대로 해 보게나. 죽산 안가에 속해있는 사람으로서, 이런 일은 절대 묵과할 수 없으니.”

    “어디 들어본 적도 없는 희성이시군요. 가문의 힘도 미약하신 분이 이 근방에서 힘깨나 쓰시는 분들을 적으로 돌리면 꽤나 피곤하실 텐데요?”

    “고작 중인의 협박에 피곤할 리가. 자네가 말한 콧바람 세신 분들의 실체도 분명치 않은 판에 말이지.”

    “죽산 안씨에 낡은 청색 쾌자(快子)…… 관자에는 웬 삼베조각을 붙인 양반이 지나가거든 꽤 특별하게 다뤄달라 그분들께 주청을 올리지요, 다 양반님께서 자처하신 일이올시다.”

    암, 특별하게 다뤄야겠지. 그놈들도 암행어사를 맞이해야 할 터인데.

    “할 말은 그게 다인가? 그럼 이 낭자는 내가 데려가겠네.”

    화를 숨기지 못하는 놈에게 내 얼굴을 바짝 들이밀었다. 최대한 썩어가는 미소를 입가에 띠려 노력하면서 말이다.

    놈의 등 뒤로 놈의 부하 몇이 슬슬 다가오고 있는 것이 보였으니 슬슬 자리를 뜰 때가 된 모양이었다. 일부러 도포를 과장되게 펄럭여 놈의 얼굴에 스치게 한 후, 몸을 돌렸다. 손에는 낭자의 소매를 틀어잡은 채였다.

    “후회하실 겁니다!”

    후회는 무슨.

    얼굴에 감정도 제대로 숨기지 못하고, 맞서는 자의 정체도 파악하지 못하는 놈이 말이야.

    ***

    뜻밖의 상황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낭자를 데리고 산채로 향했다. 처음에는 낯선 선비를 따라가야 하는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낭자였지만, 그 상황에서 꼬마의 활약이 또 빛을 발했다.

    ‘누나, 이분은 누나한테 해를 끼칠 분이 아녜요. 저를 믿어줘요.’

    잠시 갈등하던 낭자는 이윽고 나를 따라오길 택했다. 아무리 꼬마의 친화력이 대단했다고는 하나, 낯선 사람을 덜컥 따라나서겠다 정한 것을 보면 꽤나 어려운 상황에 몰린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얼마 안 있어 꼬마를 믿고 잘 따라오던 낭자의 발걸음은 멈추고 말았다. 일행이 마을을 벗어나 점점 외진 곳으로 접어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째서 산으로 들어가시는 거예요? 혹시 선비님께서 저를 속이신 건가요?”

    “구월산에 있는 화전민촌으로 갑니다. 낭자를 당분간 안전하게 둘 곳은 그곳뿐입니다.”

    “구월산이요? 거긴 산적이 들끓는다고 들었어요. 혹시 산적과 한 패이신 건…….”

    옆에서 꼬마가 뭐라 말을 더해주었으나, 낭자의 의심을 벗기기엔 모자란 모양이었다. 하긴 웬 낯선 남자 셋이 자신을 산중으로 데려가는데 의심하지 않는 사람이 있을 리가.

    “저를 믿지 못하시겠다면 그놈의 소굴로 돌아가셔도 좋습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아니, 꼭 그렇게 하겠다는 뜻은 아니고요…….”

    “정 제 정체를 확인하고 싶으시다면 확인시켜 드릴 수도 있습니다. 다만, 대업이 끝날 때까지는 화전민촌에 계셔 주셔야겠지만요.”

    정 안 되면 마패라도 보여주고 출두가 끝날 때까지 산채에서 돌봐야 할 것이다. 그런 내 제안을 들은 낭자는 의심이 다소 가신 기색이었으나, 난감하다는 듯 말을 이었다.

    “대업이 끝날 때까지요? 저는 집에 두고 온 사람이 있어요. 아버지는 제가 없으면 아무 것도 못 하신단 말이에요.”

    “실례지만 낭자 홀로 아버님을 봉양하고 계셨습니까? 아버님의 상태가 대체 어떠시기에…….”

    “제 아버님은 맹인이세요. 지금까지는 바느질과 길쌈으로 어찌 입에 풀칠을 해 왔는데, 제가 없으면 아버님은 입에 곡기도 대지 못하실 거예요.”

    장님인 아버님을 홀몸으로 봉양하는 기특한 처자였나. 혹시 고리대금업자에게 찾아간 것은 부친의 사정 때문일지도. 그렇다면 사람을 보내 일이 끝날 때까지 아버님도 산채로 모셔오면 될 일이 아닌가.

    하지만 그 이야기를 듣고 잠시 개운한 표정을 짓던 낭자는, 다시 얼굴에 의문을 가득 띄우고 말았다. 그럴 만했다.

    “아버님까지 데려오신다고요? 어째서 제게 이렇게 잘 해주시는 거죠?”

    “아, 그런 쪽으로 생각은 안 하셔도 됩니다. 저는 이미 아내가 있는 몸이고, 낭자가 염려하는 쪽의 생각은 한 시도 품은 적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더 이해가 되지 않는걸요? 선비님께서 하늘에서 내려오신 분도 아니시고, 갑자기 제게 이런 꿈같은 일이 벌어질 리가 없어요.”

    “낭자, 꿈같은 일이라니요. 제가 해드리는 일이 그렇게 큰일에 비유될 일은 아닌 듯한데.”

    잠시 화색을 감추지 못하던 낭자였다. 하지만 이윽고 그 얼굴에는 화색 대신 어둠이 몰려들고 있었다.

    “선비님께서 제 마지막 의문을 풀어주신다면, 순순히 따라가겠어요. 아마 제가 처한 상황이 궁금하신 것이겠죠? 그것도 전부 말씀드리겠어요.”

    “마지막 의문이라 하심은…….”

    “선비님은 대체 뭐 하시는 분이시기에 저를 도와주시는 건가요? 도대체 왜……?”

    고작 산적들도 감화시켜 정보를 뽑아내려는 마당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낭자는 중요한 증인이자 참고인이 될지도 몰랐다.

    게다가 눈먼 아비를 봉양하는 기특한 딸이라면 마을이나 관아에서 생계를 도와주기 마련인데, 그렇지 못해 고리대금업자를 찾아왔다는 사실이 사연을 들은 이후로 계속해서 마음에 걸리던 터였다.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제 정체를 알게 되어도.”

    “제발 제 의심을 거둬주세요, 선비님. 그것만 풀린다면 당장이라도 선비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싶은 심정이에요.”

    이렇게 된 거, 어쩔 수 없나.

    김 갑사에게 꼬마를 데리고 앞서가라는 손짓을 보냈다. 그러고 나서야 낭자와 단 둘이 남을 수 있었다.

    순박한 얼굴에 마치 울 것 같은 표정을 하고 있는 낭자를 향해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황해도 어사 임무는 여기서부터 시작이군.

    “마지막으로 묻겠습니다. 정녕 제 정체를 알기를 원하시는 겁니까.”

    가슴으로 뻗은 손바닥에, 품고 있는 마패의 윤곽이 느껴졌다.

    그 모습을 보는 낭자의 눈동자는 불안하게 흔들릴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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