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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 어사, 조선을 뒤흔들다!-124화 (124/298)
  • 124화. 배신

    “갑자기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안 교리님? 초관의 말이 맞단 말이십니까?”

    “내가 아끼는 소실이네. 그들을 잡아가더라도 내 사람은 건드리지 마시게.”

    “방금까지는 대체 왜 가만히…….”

    “나도 모반에 연루될지도 모르는 상황인데 어찌 당황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자네, 지금 날 추궁하는 겐가?”

    내 눈빛을 받은 금부도사는 당황한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내 뒤에서 끊임없이 들려오는 흐느낌과 소맷자락에서 전해지는 떨림이 나를 굳세게 만들고 있었다.

    “아니, 그래도…… 저,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혹시 장옷 아래라도 확인할 수 있겠습니까?”

    “장옷은 왜? 남의 아내가 어떻게 생겼는지 그리 궁금하던가?”

    “교리님을 의심한다는 뜻은 결코 아닙니다만, 혹여나 만의 하나를 고려하여…….”

    아직 앳된 티가 가득한 녀석이니, 유부녀의 상징인 쪽 찐 머리라도 확인하겠다는 것인가.

    직업의식 하나는 투철하군. 허나, 지금 발휘하기엔 한참 틀렸어.

    “아낙의 머리칼은 낭군만 확인할 수 있는 것이 강상의 도리가 아니었나?”

    “아니, 교리님. 그것이…….”

    “아니면 장원급제자인 내가 유학의 근본을 잘못 알고 있고, 도사 자네가 옳은 것인가?”

    “…….”

    “해 볼 수 있으면 해 보시게. 금부도사.”

    양팔을 올려 도포의 넓은 소맷자락을 펄럭 소리가 나게 펼쳤다.

    절대 녀석을 내줄 생각 따윈 없다. 가족들이 전부 누명을 쓰고 체포된 이상, 녀석 하나라도 지켜야 한다.

    금부도사의 기세가 또 한풀 꺾였다. 얼굴을 땅에 처박은 박연이 뭐라 중얼거리는 것이 보였다.

    “방금 국법을 운운한 것은 도사 자네가 아닌가. 국법보다 지엄한 삼강오상(三綱五常)을 어겨가며 무리수를 던진 자네의 추측이 들어맞지 않는다면, 사대부의 분노가 어디로 향할지는 자네도 알고 있겠지?”

    “아, 알겠습니다, 교리님. 교리님 말씀을 믿겠습니다.”

    “그럼 죄인들을 데리고 물러가게. 의금부에 이 일로 소명할 것이 있으면 내가 직접 소명할 것이니.”

    “예…… 옛!”

    그렇게 박연의 가족들은 한 명씩 오랏줄에 묶인 채 금군들의 손에 끌려갔다.

    요운이는 슬픈 웃음을 짓고는 멀어져갔고, 박연과 그의 아내는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숙이더니, 대문 밖으로 사라졌다.

    마치 딸을 잘 부탁한다는 듯이.

    털썩.

    언제부터였는지 내 등 뒤에서 소리 없이 떨림만 전해오던 녀석이었다. 실이 끊어진 꼭두각시 인형처럼, 녀석의 가녀린 몸이 마당에 나뒹군 것은 잠시 후였다.

    ***

    꿈을 꾸었어요.

    아주 달콤하지만 슬픈 꿈을.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어디론가 사라져 가는데,

    어디선가 부드러운 먹 향기가 날아와 나를 감싸 안았어요.

    어린 시절부터 좋아했었는데. 정말로.

    ***

    기절한 요안이를 품에 안고 귀가한 나를 보고, 하연은 황망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하지만 현명한 내 아내는 자초지종을 듣더니 곧 평소의 표정을 되찾았다.

    “그런 일이…… 요안아, 몸은 괜찮은 것이냐?”

    “…….”

    “충격이 큰 모양이구나. 괜찮다. 말하지 않아도 괜찮다. 언니가 여기 있으니…… 당분간은 괜찮을 거야.”

    녀석은 쉽게 입술을 열지 못했다.

    가족들이 눈앞에서 시뻘건 오랏줄에 묶여 잡혀갔는데, 정신이 멀쩡할 리가 없지. 하연과 비복이 온몸을 주물러 깨어난 후에도, 아무 말 없이 눈물만 흘리다 의식을 잃기 일쑤였다.

    “괜찮아. 괜찮아. 잠시 이러고 있으렴.”

    “언니…….”

    하연이 어미처럼 동생을 품으로 끌어안았다. 등을 살포시 쓰다듬기 시작한 하연의 손길에, 다시 조금씩 들썩이기 시작한 요안을 보는 내 마음은 납 뭉치를 삼킨 듯했다.

    “갑작스러운 일이겠지만 부탁하겠습니다. 부인. 그대에게밖에 그 아이를 부탁할 사람이 없습니다.”

    “잘 둘러대셨어요. 이 아이를 그렇게라도 살릴 사람이 당신밖에 더 있으셨겠어요.”

    “남아일언은 천금에 버금가는 법이라 했거늘, 미안합니다. 소실은 들일 생각이 없었는데…….”

    “하잘것없는 제 질투보다 요안이의 목숨이 더 중요합니다. 제가 서방님이어도 그리했을 것입니다.”

    요안의 등을 토닥이던 하연이 쓸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내도 분명 한 사람의 여자다. 아무리 요안이가 친동생 같은 존재라 해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고는 해도, 자신의 낭군을 다른 사람과 나누기는 싫었을 것이다.

    “요안아, 쪽을 짓자꾸나. 앞으로 네 댕기를 보는 사람은 없어야 하니.”

    “언니…… 죄송해요…….”

    “네가 죄송할 것이 무어 있니. 아버님께서 누명을 벗고 무사하시길 빌자꾸나. 우리는 그사이에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한단다.”

    담담한 얼굴을 한 하연이 자신의 쪽 찐 머리에서 비녀를 빼 손에 들었다. 미취한 처녀를 상징하는 붉은 댕기가 요안의 빛나는 금발에서 풀려나가고, 솜씨 좋게 지어진 쪽이 녀석의 뒷머리에 올라붙었다.

    “이게 네가 말하던 그 흉터구나. 이렇게 보게 될 줄은 몰랐는데…….”

    “…….”

    “이것도 서방님의 흔적이라면 흔적이니, 사필귀정이라는 것일까.”

    얕은 탄식을 내뱉으며 자신의 비녀를 요안의 쪽에 끼워 넣는 하연을 보며,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아내에게 평생 갚아도 모자랄 빚을 졌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에.

    그렇게 안타까움과 슬픔이 뒤섞인 묘한 표정을 지으며, 하연은 품에 안은 요안의 흉터를 몇 번이고 쓰다듬었다. 요안이 먹물을 뒤집어썼던 날, 관자놀이에 새겨졌던 그 흉터였다.

    “이제 어찌하실 생각이십니까, 서방님. 박 초관이 군사기밀을 유출했다는 혐의로 잡혀갔다면, 그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당신에게도 칼날이 뻗어있다 봐야 할 것입니다.”

    “그대의 말이 옳습니다. 박 초관이나 요운이가 나를 고변할 것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지만, 아마 그들이 체포된 것은 나까지 염두에 둔 포석이라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 말씀은…….”

    “모르겠습니다. 그들이 내 목을 노리고 있는지, 아니면 내 기를 죽이려 하는 것인지 감이 잡히지 않습니다. 안개 속에 숨은 적과 마주한 느낌입니다.”

    적어도 저번처럼 사헌부에서 탄핵을 올릴 줄만 알았다. 그랬다면 오히려 대응할 방법이 있었을 것이다. 시간을 끌거나, 그들의 증거를 논쟁을 통해 반박할 수도 있었겠지.

    하지만 의금부가 개입된 일이면 달랐다. 조선은 절대왕정국가니까.

    게다가 내게 칼을 뻗은 김상헌의 뒤에 정말로 능양군이 있다면, 그렇다면 의금부는 내게 있어 사지가 될 것이다. 그들은 의금부의 국문장에 묶인 내게서 권력을 잘라내든지, 머리통을 잘라내려 하겠지.

    “서방님…….”

    “걱정하지 마세요, 부인. 내가 누굽니까. 청에서도 이런 일은 수두룩했습니다. 결국 모든 것이 잘 될 것입니다.”

    염려가 가득 담긴 눈길을 보내오는 아내를 안심시켰다. 내가 아내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은 이 정도에 불과했다. 제기랄.

    그때였다. 갑작스레 마당쇠의 호들갑이 날아와 내 복잡한 심사를 온통 흔들어놓았다.

    “나으리! 저번에 오셨던 귀하신 분이 다시 오셨습죠! 빨리 나와 보셔야겠습니다요!”

    저번에 온 귀한 사람이라면 봉림대군일 터, 무언가 내게 줄 새로운 정보가 생긴 것일까?

    그가 전해주러 온 것이 지금 궁지에 처한 상황을 이겨낼 수 있는 정보일지도 몰랐다. 눈치 빠른 하연은 어느새 요안을 안고 안채로 건너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대군 대감, 갑자기 무슨…… 아니!”

    “쉿, 목소리를 낮추라, 안 교리. 어서!”

    대군에게는 동행이 있었다. 상상도 못한 이였다.

    대군에게 부축을 받고 겨우 몸을 가누고 있는 이는, 지금 동궁전에 누워 회복에 전념해야 할 사람이었다.

    “저하! 어째서! 병환 중에 몸을 함부로 운신하시면 아니 되십니다!”

    “……반드시 내가 직접 와야 했다. 그만큼 중대한 일이다.”

    오늘은 잠복기라 열이 오르지 않을 것이라 하나, 그동안 말라리아의 열병에 파먹힌 세자의 몸뚱이는 분명 정상이 아닐 것이다.

    그런데 그 세자가, 사복을 입고 궁을 탈출해 내 집에 와 있다.

    도대체 왜? 무슨 일로?

    세자를 황급히 안방으로 모셨다. 북촌의 내 집과 대궐은 멀지 않았음에도 보료에 기대 거친 숨을 몰아쉬는 세자의 상태는 상당히 좋지 않아 보였다.

    “걱정은 하지 마라. 분명 어의가 대령한 네 약을 마시고 궁을 나온 참이니까.”

    “저하, 어떤 일이라도 저하의 옥체보다는 중요하지 않은 법입니다. 어째서 이런 일을 저지르신 것입니까.”

    “내가 학질에 걸린 것이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르겠구나. 그 덕분에 대군이 나를 찾아올 수 있었으니.”

    내 추궁을 듣기는 하는 건지, 알쏭달쏭한 말을 던져오는 세자였다.

    하지만 문병을 핑계로 봉림대군이 세자에게 새로운 정보를 들키지 않고 전할 수 있었다는 사실만은 그 와중에도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대군 대감, 대감께서 저하를 말리셨어야지요. 누구보다 형님을 아끼시는 대감께서 왜?”

    “안 교리, 김상헌이 나를 또다시 찾아왔었다. 이번엔 더 구체적인 이야기를 들고 말이다.”

    “그 무슨…….”

    “형님께서 자리를 보전하지 않고 너를 찾으신 이유도 그것과 같다. 형님께서 학질로 쓰러지신 것을 보고 기회다 싶었던 모양이더구나.”

    또 세자를 폐하고 봉림대군더러 세자의 자리에 오르라는 꼬드김인가.

    김상헌은 세자가 학질로 명을 다하기라도 바란 것일지도.

    “저하께서는 쾌차하실 것입니다. 지금 분명 병에 차도가 있지 않습니까.”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허나 그자들은 네가 형님께 약을 쓴 것을 모르는 것 같더구나. 아니면 별 것 아니라고 치부했던지.”

    “헌데 그렇다면 저하께서 이렇게 궐을 나오실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저하께서 멀쩡해지신다면 폐세자 건이 문제가 될 리 없습니다.”

    “안 교리, 그게…….”

    봉림대군이 막 입을 열려고 하던 찰나, 세자가 손을 뻗어 대군을 제지했다. 보료에 기댄 세자의 얼굴은 창백했으나, 다행히 그 숨결에는 평온이 돌아와 있었다.

    “봉림, 이제부터는 내가 하겠다. 그쯤 도와주었으면 되었다.”

    “하지만 형님!”

    “아무리 네가 이치에 맞는 말을 하더라도 안 교리가 네 말을 듣고 움직일 리가 없다. 그래서 너도 내가 궁을 몰래 빠져나오는 것을 돕지 않았느냐.”

    “…….”

    “안 교리의 주군은 나다. 그를 움직일 수 있는 것도 나고.”

    세자가 힘겹게 보료에서 몸을 일으켰다. 병앓이로 세자의 볼살이 쭉 빠진 것이 보였다.

    “안 교리, 잘 듣거라. 주군으로서 내리는 명령이다.”

    “저하, 갑자기 그것이 무슨 말씀이십니까?”

    “너와 관련된 자들은 어떻게든 나와 한당의 중신들이 돌볼 것이다. 그러니 너는…….”

    후유증으로 미세하게 떨리는 세자의 입에서 뜬금없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왜 세자가 이런 말을 내게 하는가.

    “저와 관련된 자들을 어찌하여 저하께서 돌보시겠다는 것입니까? 무슨 중대한 일이라도 일어난 것입니까?”

    “그래, 아마 곧 의금부로 너를 추포하라는 명이 떨어질 것이다.”

    “예?”

    “대군에게 찾아온 김상헌이 그랬다는구나. 너만 제거하면 한당은 허수아비가 될 것이고 나는 알아서 병으로 목숨을 잃을 테니, 그때 어린 세손을 제치고 봉림 더러 세자가 되라고.”

    그 노회한 이리가 결국.

    만약 세자가 말라리아로 죽지 않더라도, 수족을 잃은 상태에서 후유증으로 건강을 잃은 세자를 쳐낼 방법은 그들에게도 수없이 많았다. 역사에 온갖 음모론이 횡행했던 것처럼.

    세자의 말에서 칼날 하나가 뻗어 나와 내 목젖에 닿는 것이 느껴졌다.

    “네가 청에 남기고 온 호포대 일부를 문제 삼아 너를 쳐낼 것이라 했다. 어디서 들었는지 그들이 신무기를 쓴다는 정보를 입수한 모양이더구나.”

    “저하, 박 초관이 그 일로 제 눈앞에서 잡혀갔습니다. 그가 개발하던 물건을 청에 유출해 적을 이롭게 했다는 혐의였습니다.”

    “…….”

    “하지만 그건 저와 박 초관만 아는 일이었습니다. 증거 또한 없을뿐더러, 박 초관의 사람됨이라면 저를 고변할 리도 없습니다.”

    세자가 손을 뻗었다. 핏줄이 뚜렷이 드러난 그의 손이 내 어깨에 와닿았다.

    “게다가 저하, 북경에서 명이 비슷한 물건을 만들었던 것을 목격했던 적도 있을뿐더러, 청은 형식적으로나마 조선의 상국이 아닙니까. 어찌하여 적을 이롭게 했다는 죄목이 주어지는 것입니까?”

    “안 교리, 의금부는 사실이 어떻든 상관하지 않는 곳이다. 그 뒤에 작용하는 의지가 너를 모반죄로 엮으려 한다면 충분히 엮어낼 수 있는 곳이지.”

    “그것은 저도 알고 있사오나…….”

    “청이 이 사실을 알면 어찌하겠냐는 물음이겠지? 너도 잘 알고 있지 않느냐, 아버님은 언제든지 가차 없이 사냥개를 삶을 수 있는 분이라는 것을.”

    아.

    김상헌을 이용해 나를 베어내든, 귀양 보내든 해서 세자와 한당의 세력을 꺾고, 청의 추국이 들어오면 김상헌을 제물로 바쳐 위기를 모면하겠다?

    그 과정에서 신권을 약화시키고 왕권을 강화시키려는 능양군의 의도가 손에 잡히듯 읽혔다. 마침 청의 황제는 어리고 도르곤은 집안 단속과 남명 정벌에 바쁘니 여유가 있다 이거군.

    이런 X발.

    내가 조선을 위해 한 일이 얼마나 많을진대, 고작 권력을 위해, 세자를 견제하기 위해 나를 이토록 쉽게?

    “분명 네 억울한 감정이 하늘에 닿을 정도겠지. 나도 네 마음을 잘 알고 있다. 안 교리.”

    “저하. 이건 말도 안 됩니다. 좌의정의 당파와 정쟁이나 벌일 줄 알았지, 이런 말도 안 되는 상황에 몰리다니…….”

    “한수야, 정치는 원래 그런 것이다. 아무리 완전무결한 명분이 있어도, 손에 피를 묻히지 않고는 살아남을 수 없는 곳이 조정인 것이다.”

    “…….”

    “그러니 내 말을 잘 듣거라. 내 너를 이렇게 허무하게 잃을 수는 없다.”

    어깨에 닿은 세자의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렇게 전해지는 힘은 너무나 미약했다.

    “압록강을 건너거라. 청으로 피신해 섭정왕에게 몸을 의탁한 후, 기회를 보아 조선으로 돌아오거라. 네가 사는 법은 이것뿐이지 싶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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