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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 어사, 조선을 뒤흔들다!-123화 (123/298)
  • 123화. 적을 이롭게 한 죄.

    “그게 무슨 소리요, 안 선생? 거처를 옮기다니?”

    “잠시 병가를 내고 반촌에 가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대량의 무기를 점검해야 할 일이 생겼거든요.”

    “대량의 무기……? 호포대의 신형 조총에 문제라도 생긴 것이오?”

    그렇게 총을 허투루 설계한 적은 없다며 의문에 잠긴 박연이었다. 그에게는 가죽을 모아들이기 위해 지방으로 파견 보냈던 호포대를 한양으로 모은 김에 개인화기의 일시점검을 해볼 생각이라고 둘러댔다.

    “흠, 일을 단기간에 끝내고 싶은 모양이구려. 안 선생이 그렇다면 도와드려야지.”

    “감사합니다. 요새 초관 어른에게는 신세만 지는군요.”

    “그런 말 하지 마시오. 내 늘 안 선생을 가족처럼 생각했는데 이런 일마다 감사를 표하면 내가 섭섭하오.”

    금발벽안 초관은 털털하게 웃어젖히더니, 자연스럽게 하연의 안부를 물어왔다.

    그가 염려할 만한 사건이 그동안 있었으니까.

    “부인께서 안 계셨다면 큰일 날 뻔하지 않았습니까. 감사를 아무리 드려도 모자랍니다.”

    “원래 요안이가 언니를 보겠다며 뻔질나게 드나들던 집 아니오, 녀석이 요새 바쁘니 안사람이 대신 안부를 물으러 찾아가곤 한 것인데, 안 선생을 도울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오.”

    “아닙니다. 부인 덕분에 정말로 제 아내에게 큰일이 벌어지는 사태를 막을 수 있었습니다. 정말로 감사드립니다.”

    내 앞에서는 아무런 티도 내지 않는 하연이었으나, 앓았던 병의 후유증이 도졌는지 최근에는 외출도 제대로 하지 못할 만큼 기운이 없었다. 감자를 퍼뜨릴 때 야외 데이트를 하던 일이 마치 꿈이었던 것처럼.

    급히 비복 하나를 들이긴 했으나 비복도 다른 집안일을 해야 하니 아내를 24시간 붙어 돌보진 못했다. 그래서 일어난 일이었다.

    “마침 안사람이 선생 집을 찾아갔을 때 쓰러진 사람을 발견할 수 있어서 다행이었지. 비복이 하필 빨랫감을 들고 집을 비웠을 때 그런 일이 벌어지다니…….”

    “다행히 아내의 상태는 많이 좋아졌습니다. 의원 말로도 심각한 병은 아니라 하더군요.”

    “아예 요안이를 그 집으로 보내는 건 어떻겠소? 일을 마치고 남는 시간에 언니를 돌봐달라는 부탁을 하면 그 녀석도 거절은 하지 않을 것이라오.”

    잠시 귀가 솔깃했다. 그러나 요안이를 내 집에 들이는 일은 절대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아니 됩니다. 그러다가 지금도 위태한 요안이 혼삿길이 저 때문에 막히면 어쩌려고 그러십니까.”

    “허어, 그래도 아픈 사람을 놔둘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니오. 요안이도 언니 얘기를 전해 듣고는 마음 아파했으니 거절하진 않을 거요.”

    “일단 아내의 친정에서 비복 한명을 더 보내주기로 했습니다. 마음만 받겠습니다. 초관 어른.”

    박연이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눈에서는 뜻을 알 수 없는 아쉬움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하지만 요안이는 더 이상 내 주변에 두면 안 된다. 나와 엮일 일을 더는 만들면 안 되는 것이다. 이것이 녀석을 위한 최선의 선택이다.

    그런 내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박연은 노란 수염을 쓰다듬더니 입맛을 다실 뿐이었다.

    “내가 다른 뜻을 품고 그러는 건 아니라오, 선생. 잠시만이라도 그 핑계로 딸아이를 궁궐에서 멀어지게 하고 싶어서 그런 것이지.”

    “요안이를요?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딸아이가 어느 날은 침울한 얼굴로 귀가하기에 자초지종을 물은 적이 있다오. 처음에는 입을 닫고 있던 녀석이었는데, 그렇게 며칠 내내 얼굴이 풀어지지 않기에 계속 캐물었더니 속사정을 그제서야 털어놓았소.”

    “무슨 일이었습니까?”

    세자빈의 명을 받고 일하던 요안이가, 상궁 몇에게 괴롭힘을 당했다는 모양이었다. 그 정도는 본인도 예상했기에 참아 넘길 수 있었는데, 그 강도가 점점 심해졌다고 했다.

    헌데, 박연의 입에서 임금의 후궁이 거느린 상궁들이 요안이를 괴롭혔다는 이야기가 뒤를 이었을 때, 머리에 어느 생각 하나가 떠올랐다.

    “설마 요안이를 괴롭혔다는 상궁들의 윗사람이 조 소의님은 아니겠지요?”

    “어떻게 알았소, 선생? 요안이가 애비인 나보다 선생에게 먼저 달려가 고자질한 것이오? 이 녀석이 벌써 그렇게 컸다고 애비를 무시해?”

    계속해서 투덜거림을 늘어놓는 박연을 애써 무시했다.

    요안이 그 녀석, 궁중 암투에 제대로 말려든 모양이었다.

    이런 상황이라면 마음 같아서는 세자빈에게 찾아가 잠시 요안이의 일을 쉬게 해 달라 청하는 것이 도리에 맞겠으나, 차마 그렇게 하겠노라는 말을 박연에게 꺼낼 수 없었다.

    하연에게 요안이 관련 이야기를 들은 후, 기억에 남아 있던 세자빈의 타박도 전혀 다르게 다가오던 터였다. 그래, 지금 앞에 있는 금발벽안 아저씨가 계속해서 내게 밀어붙이는 그 일과 관련이 있었다.

    “딸내미 키워도 소용이 하나도 없구려, 선생! 몸뚱이는 말만해져가지고 무슨 바람이 들었는지 애비 말은 무시하기 일쑤니…….”

    박연의 푸념은 한 귀로 들어왔다 한 귀로 나가고 있었다.

    소의 조씨의 수하들이 요안이를 그리 대하는 걸 보면 이미 녀석은 세자빈의 세력으로 인식된 모양이었다. 원래대로라면 조선에서 조용히 살았을 박연 가족의 인생이 나 때문에 고생길이 훤해진 것이 분명해 목에 든 힘이 좍 빠지는 것 같았다.

    그때였다. 박연의 대문을 누군가가 거칠게 두드리는 소리가 들린 것은.

    “어, 요안이가 돌아온 것인가? 오늘도 뿔이 잔뜩 나서 귀가한 모양인가 보오.”

    “그렇습니까? 요안이 짓이라기에는 방금 소리는 꽤나 거칠었는데요.”

    쾅쾅.

    박연의 예측을 부정하는 듯 들려온 두 번의 충돌음이 박연의 집을 날카롭게 찢어놓았다.

    당황한 것이 역력한 박연의 시선과 내 시선이 공중에서 마주쳤다. 그 소리의 정체를 알아내려 방 밖으로 나가 섬돌에 발을 막 올리던 찰나였다.

    먼지가 한 차례 피어오르더니, 허술한 박연의 집 대문이 박살 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이윽고 통째로 뜯겨나간 돌쩌귀가 바닥에 튀어 올랐다.

    천천히 흩어지는 먼지 사이로 붉은 옷차림을 한 자들이 한둘씩 드러나고 있었다.

    “당신들, 이게 무슨 짓이오!”

    “여기가 훈련도감 초관 박연의 집이 맞는가?”

    “맞소! 헌데 무슨 일로 남의 집 문짝을 부숴 놓는 것이오!”

    호기롭게 따져 묻던 박연의 입이 멎었다. 먼지가 서서히 가라앉으면서 맨 앞에 선 자의 차림새가 완전히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금부도사 노홍기요. 잠시 같이 가 줘야겠소.”

    “예? 금부도사께서 소인 같은 자를 어이하여……?”

    “변명은 듣지 않겠소. 여봐라, 저자를 포박하라!”

    금부도사의 호령이 떨어지자마자 그의 뒤에서 금군 몇이 붉은 줄을 들고 뛰쳐나왔다. 오랏줄이었다.

    “아니, 내가 무슨 죄를 지었다고 포도청도 아니고 의금부에서 나왔단 말입니까!”

    “죄목은 국문을 받으며 알게 될 것이오! 순순히 오라를 받으시오!”

    “나는 의금부로 끌려갈 죄를 지은 적이 없습니다! 무슨 오해가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죄인은 그 입을 다물라! 어서 포박하지 못할까!”

    뛰쳐나온 금군들이 금발벽안 초관을 바닥에 내팽개쳤다.

    내 눈에서 불길이 솟았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당신은 누구시오?”

    “홍문관 교리 안한수요. 아무리 관리 앞에서 위세가 호랑이 못지않은 금부도사라 하나, 관원을 체포할 때는 적어도 내려온 전교의 내용이라도 알려야 하는 것이 아니오?”

    내 신분을 듣자마자 금부도사의 태도가 바뀌었다. 그는 높아 봐야 정5품, 낮으면 종6품, 나는 정5품 교리니, 속으로 품계를 헤아려보았으면 적어도 겉으로라도 예의를 차려야 할 것이다.

    “홍문관 교리쯤 되는 분이 어째서 역적의 혐의를 쓴 자와 어울리시는 겁니까? 이 자와 함께 엮여 들어가기 싫으시다면 이 일에 더 이상 관여하시지 않는 편이 좋을 겁니다!”

    “무슨 소리요? 박 초관이 역적이라니? 그가 역모라도 꾸몄다는 소리요?”

    역적 소리를 들으니 조금 뜨끔했으나, 겨우 내색하지 않을 수 있었다.

    헌데, 박연이 역적이라니? 이 사람이 무슨 역모를 꾸몄단 말인가.

    정말로 역모를 꾸민 자는 여기 있을뿐더러, 박연에게는 아직 속내를 드러내지도 않았을 텐데.

    “나는 지시받은 임무를 수행할 뿐입니다. 안 교리님도 관원이면 잘 알고 계실 일이 아닙니까?”

    “의금부에서 누군가를 잡아들일 때는 승정원이나 홍문관에서 전하의 뜻이 담긴 교지를 내려야 가능하단 사실도 알고 있소. 출동 시에는 도사나 금군이 반드시 소지해야 할 터, 박 초관의 죄목을 알려주시오.”

    금부도사가 우물쭈물하는 사이, 뒤에 서 있던 금군 하나가 소매에서 두루마리 하나를 꺼내 바쳤다. 일단 이 자는 위에서 까라는 대로 깐 사람인가.

    “……교지에는 군사기밀을 적국에 유출한 자라고 적혀있습니다. 모반(謀叛)에 해당하는 죄가 확실합니다.”

    “뭐요? 군사기밀을 유출해? 박 초관이 말이오?”

    순간 당황해 금부도사의 말을 부정하고 말았지만, 짚이는 바가 있었다.

    설마, 그 군사기밀이 내가 심양으로 떠날 때 박연이 주었던 플린트락 소총의 설계도를 가리키는 것인가.

    등골에 식은땀이 구르는 것이 느껴졌다.

    그 일로 박연이 잡혀가는 것이라면, 나 역시 모반죄를 지은 당사자나 다름없었다. 금부도사의 허리춤 고리에 매달린 환도는 박연만을 향한 게 아닐지도.

    그때였다. 마당에서 벌어지는 소란을 느꼈는지 방문 하나가 활짝 열린 것은.

    “이 무슨 소란…… 스승님? 아버지?”

    요운이었다. 방금까지 글을 쓰고 있었던 듯, 맨상투 바람에 버선발로 뛰어나온 녀석의 손에는 먹물이 튄 흔적이 가득했다.

    “아버지? 박 초관, 당신의 자식이오?”

    “요운아…….”

    “마찬가지로 체포하라. 가족까지 전부 의금부로 끌고 오라는 영이 있었다.”

    “안 됩니다! 가족만은 제발!”

    툇마루에 멍하니 서 있던 요운이도 마당으로 내팽개쳐졌다. 그 소란에 부엌에서 나온 박연의 처도 금군들에 의해 굵은 오랏줄로 꽁꽁 묶였다.

    “금부도사. 연좌제가 적용될 정도로 중한 죄란 말이오? 이 무슨…….

    “안 교리님. 더는 끼어드시지 않는 게 좋을 겁니다. 제가 국법대로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는 사실, 문관인 교리님이 더 잘 아시겠지요.”

    “…….”

    “게다가 방금 이 자의 자제가 당신을 스승이라고 불렀으니, 더 관련되었다가는 당신에게도 좋지 않은 일이 벌어질 수 있겠지요. 물러나십시오. 충고 드리겠습니다.”

    순간 머릿속에 경국대전이 펼쳐졌다.

    모반(謀叛), 외국에 붙어 본국에 대해 이적행위를 한 죄.

    죄인은 참형에 처하고, 처와 첩, 자녀는 노비로 삼는다.

    관리라면 당연히 외워야 할 법전이다. 그걸 알기에 금부도사도 그런 말을 한 것이다.

    아, 그렇다면 이 자리에 없는 녀석도…….

    “아버지?!”

    최악의 타이밍이었다. 제일 숨기고 싶은 녀석이, 하필 지금 이 시점에 귀가해 대문 밖에 나타났다.

    “아버지! 이게 무슨 일이예요! 선생님? 이 붉은 옷을 입은 무관분들은 대체…….”

    “요안아, 안 된다!”

    “호오…….”

    금부도사의 눈이 번쩍였다. 먹잇감을 발견한 듯한 눈빛이었다.

    “훈련도감 초관 박연, 자네의 여식인가?”

    “요안아! 선생에게 가거라! 어서!”

    “내가 물었지 않은가, 자네의 여식이냐고. 맞다면 체포 대상이 아닌가.”

    박연은 필사적으로 금부도사의 질문을 회피하고 있었다. 사태를 파악했는지, 장옷을 뒤집어쓴 채 멍하니 있던 요안이 녀석이 내 뒤로 뛰어들었다.

    마치 상처를 입은 듯한 그 가련한 모습에, 나도 모르게 소매를 들어 등 뒤에 숨은 녀석을 감싸고 말았다.

    “내 피를 타고난 아이긴 하나, 이제 관계가 없는 아이입니다.”

    “무슨 말인가, 박 초관? 출가라도 한 여식이란 소린가?”

    아, 박연이 무슨 일을 꾸미고 있는지 알 것 같았다.

    안 됩니다, 초관 어른. 제발…….

    “바로 그렇습니다. 소인과 연좌할 수 있는 사람은 내 가문 사람에 한정될 터.”

    “자네가 대역죄가 아닌, 단순히 적을 이롭게 한 죄를 저질렀다면 그렇겠지. 출가외인은 치지 않는 법이니까.”

    삼족을 멸하는 연좌는 왕에게 반란을 꾀한 자에게만 주어지는 형벌이다. 그렇지 않은 경우, 시집간 딸에게까지 연좌가 뻗치는 경우는 분명 드물었다.

    기억났다. 심지어 원 역사에서 역적이라 처벌받은 자들도 출가한 딸들은 목숨을 건졌던 경우가 꽤나 많았던 것도. 사육신인 성삼문의 딸도 그렇게 변을 면했다.

    “헌데…….”

    박연을 향해, 몸을 숙이고 있던 금부도사가 몸을 바로 세웠다. 이윽고, 그의 시선이 나를 향해 박혔다.

    “당신이 선생이라 부른 분은 영문을 모르는 표정인데? 안 교리님에게 시집간 딸이 아니란 소리인가?”

    요안이가 지금 의금부로 끌려간다면, 옥졸들의 손에 무슨 변을 당할지 모른다.

    만약에 박연이 모반죄로 처벌된다면, 그는 참수형에 처해질 것이고 처자식들은 이 일에 공을 세운 자들의 노비로 주어진다. 요안이처럼 외모가 아름다운 아이가 그런 처지에 놓인다면…… 상상하기도 싫은 결과가 따를 것이다.

    “아닙니다! 안 교리님이 분명 책임을 지고 데려간 딸입니다! 본부인을 돌보라고 첩으로 데려간 딸이 분명합니다! 제게 신세를 진 적이 있어, 부탁을 들어주는 대신 첩으로 들여 주셨습니다!”

    박연의 입을 떠난 ‘책임’이라는 단어가 가슴에 강하게 날아와 꽂혔다.

    신세를 졌다는 말 역시 그러했다.

    심양에서 그의 코피로 뒤덮인 편지를 받았을 때, 박연이 부탁 한 가지를 들어 달라 편지의 말미에 적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지금 내게 그 부탁을 전하고 있는 것인가.

    “스승님, 동생이 요새도 마님을 잘 돌보고 있습니까? 궁에 있는 시간이 오래 되어서 본분에 서툴다는 이야기가 들리던데요. 녀석에게 내려준 별채 값을 하지 못하는 것이 아닙니까?”

    “오라버니!”

    “이제야 오라버니라 부르는구나. 이 녀석.”

    금군에게 얼굴이 짓이겨져, 터진 입술에 피가 흐르는 요운이 겨우 고개를 들어 내게 말을 걸어왔다. 내 뒤에 숨은 아이의 목소리에는 울음기가 잔뜩 묻어나고 있었다.

    “호오, 가족들 말로는 안 교리님, 당신에게 시집간 딸이라는 듯한데, 사실입니까?”

    “…….”

    “왜 말씀이 없으십니까. 혹여나 박 초관이 거짓을 꾸며냈다는 뜻인가요?”

    말문이 턱 막혀버렸다. 내 아내, 내 여자는 하연 단 한 명뿐이었고 앞으로도, 죽을 때까지 영원히 한 사람만을 품으리라 다짐했었다.

    하지만, 이제는 어찌해야 하는가.

    이 막다른 상황에서 나는 어찌 행동해야 하는가.

    “말씀이 없으신 걸 보니 역시……. 박 초관의 여식도 체포해라!”

    “서…… 선생님……, 안…… 돼요…….”

    금부도사의 손이 천천히 올라갔다. 그의 뒤에서 나머지 금군 둘이 천천히 슬로 모션처럼 뛰쳐나오는 것이 보였다.

    하지만 그들의 발걸음은 곧, 그 자리에 그대로 못 박혀버리고 말았다.

    녀석을 감싸듯 뻗어있던 내 소맷자락을, 떨면서 잡아 오는 손길이 느껴지자마자 내 입에서 터져 나온 호통 때문이었다.

    “이놈들! 내 아내에게 어디 손을 대려 하느냐! 썩 물렀거라!”

    ※ 작가의 말

    십악대죄(十惡大罪). 동아시아에서 가장 무거운 죄로 여겨지는 열 가지의 죄목을 가리킵니다.

    그중에 모반(謀反)죄와 모반(謀叛)죄가 있는데요, 이 발음이 같은 한자어가 독자분들께 혼동을 드릴 여지가 있어 부연 설명을 드리고자 합니다.

    보통 사극 등에서 대역죄라 알려진, 사직을 위태롭게 하려는 죄의 정확한 명칭은 모반(謀反)죄입니다. 삼족을 멸하는 처벌은 이 죄에 따른 형벌입니다.

    그리고 십악대죄 중 세 번째로 논해지는 죄목이 모반(謀叛)죄인데요, 이것은 나라를 배반하고 타국과 몰래 뜻을 통해 이득을 주는, 지금으로 따지면 외환(外患)죄에 해당하는 죄목입니다. 두 번째 ‘반’자에 해당하는 한자가 다른 점, 유의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의금부에서 박연에게 걸고넘어진 죄목은 외환죄에 해당하는 후자의 죄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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