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화. 드러나는 송곳니
“잠깐, 좌상 대감. 내게 하신 말씀과 다르시지 않소?”
당황한 목소리가 터진 방향은, 본색을 드러낸 김상헌의 옆에 앉아있던 김집 쪽이었다. 낡은 갓을 눌러쓴 그가 끼어든 것은 예상 밖의 사태였다.
“왜, 이판, 좌의정인 내가 당신 성미를 거스르는 일이라도 저지른 모양이지?”
“그런 말까지는 아니오만…… 분명 내게 말씀하실 때는 한당(漢黨)의 신진들과 관계를 개선하려 이 자리를 마련하셨다 하지 않으셨소?”
“개선할 ‘수도 있는’ 자리를 만든다고 했을 텐데? 나는 틀린 말은 하지 않았다네.”
늙은 대신은 다시 한번 이빨을 드러내고 킬킬거렸다. 김집 역시 김상헌과 비슷한 연배로 보였지만, 이 자리에 드러난 상하관계는 너무나 뚜렷했다.
아연실색한 김집은 말을 잇지 못했다. 그에게 잠시 머물던 김상헌의 시선은 다시 나를 향했다.
“자, 안 교리. 어서 한 잔 받을 준비를 하게나. 내 자네 이름이 급제자 명단 맨 위에 걸렸던 날부터 이날을 너무나 고대하고 있었다네.”
“육조의 실권을 쥐신 좌상 대감께서 소인 같은 풋내기를 원하셨다니, 몸 둘 바를 모르겠군요.”
“그럼. 나는 오랑캐 놈들과 화의를 주장했던 놈들은 자겸을 제외하면 상종도 하기 싫지만, 자네같이 아직 생각을 고쳐먹을 가능성이 있는 푸른 싹은 두고 볼 가치가 있다 생각하거든. 후후.”
“이상하군요. 저야말로 대감께서 오랑캐라 부르는 청국과 가장 긴밀한 관계가 있는 자가 아닙니까? 제 주위에는 주화파 신료들이 가득하고요.”
호오. 동그랗게 말린 김상헌의 입술에서 바람 소리가 새어나왔다.
마치 요놈 봐라? 라고 되묻는 듯한 행동이었다.
그렇게 잠시 시선이 공중에서 부딪힌 지 얼마나 지났을까, 입술 한 쪽을 비튼 김상헌은 소매를 들어 비어있는 자신의 오른쪽 자리를 가리켰다. 앉으라는 소리였다.
“거기 호판의 자제는 사헌부 감찰들과 어울려줘야겠어. 자네같이 버릇은 없지만 윗사람들에게 대쪽 같은 인재는 사헌부에 필요할지도 모르거든.”
“제 벗, 성근의 부록으로 끼어온 자에게도 이런 은혜를 베푸시다니, 참으로 백골난망할 일이 아닙니까. 그 배려, 감사히 받겠습니다. 좌상 대감.”
“안 교리와 대면이 끝나면 자네도 잠깐 나를 봐야 할 것이네. 자네 부친에 대해서도 할 말이 있거든.”
잔치자리 한가운데에서 지정된 자리까지 걸어가는 동안 김상헌과 좌명이 나눈 대화였다.
저 자식의 발작 버튼이 부친 김육임을 알면서 저런 소리가 나오는 건가.
자리에 앉자마자 김상헌은 다짜고짜 술병을 들이대 왔다. 그의 가문에서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비법으로 담근 술이라 했다.
장동 김씨의 중시조격인 사람이 내리는 술답게, 병 안에 담긴 술의 정체는 독한 안동소주였다.
“자, 그럼 본론으로 들어가 볼까, 안 교리? 내 자네와 할 이야기가 아주 많다네.”
“이런 자리에까지 부르셔서 하실 말씀이 뭡니까, 대감.”
“일단 심양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 늦은 감사부터 전하지. 내 오랑캐의 말은 하나도 모르지만 자네가 내 개떡 같은 말을 찰떡같이 옮겨주었다는 사실은 느낄 수 있었거든.”
“역관의 고충이란 원래 그런 것이 아니겠습니까. 청주 귀에 들어갈 것이 분명한 자리에서 청주의 사촌에게 ‘너희들의 나라’라고 일갈하실 분이 많지는 않지만요.”
핫핫핫. 시원하게 웃음을 터뜨리는 김상헌이었다.
저 거친 표현을 ‘이곳’이라 고쳐 통역할 때, 내가 흘린 식은땀을 이 이리 같은 자가 알 것인가. 그 정명수놈마저 당황해 지르갈랑에게 만주어로 통역하는 것을 잊은 표현이었다.
“기특하게도 오랑캐 놈들도 충의(忠義)란 게 뭔지는 아는 모양이더군. 선비라면 그 정도 절개는 보일 줄 알아야지. 안 그런가?”
“…….”
“자네도 상감께서 계신 곳에 도끼를 품고 간 적이 있으니 알 터. 그래서 오랑캐 놈들도 내 명을 거두진 못한 게야. 핫핫.”
“아니오. 그날 좌상께서 보이신 행동은 진정한 충의와는 거리가 멀었다 생각합니다.”
마치 손자를 귀여워하듯 나를 대하던 김상헌의 분위기가 싹 바뀌었다. 김상헌 자신은 그 자리에서 지르갈랑에게 할 말을 다 한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모양이었지만, 나는 아니었으니까.
“그 자리에서 제가 대감의 언사를 수습하지 못했다면 좌상 대감은 여기 계시지 못했을지도 모릅니다. 그 일이 청주의 심기를 상하게라도 했었다가는 볼모의 처지셨던 저하와 대군 대감께도 피해가 갔었겠지요.”
“흥,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지 않은가? 자네는 일어나지도 않은 일로 나를 현혹하려 드는 겐가?”
“청주는 전쟁터의 군막에서도 대감의 일을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그 자리에서 대감의 돌발행동을 수습한 건 저입니다.”
김상헌의 손이 주안상 구석을 꼭 쥔 채 부들거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얼굴은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평안했다. 순간 그 괴리에서 오는 이질감이 소름이 되어 내 온몸을 덮쳤다.
“하기야…… 그날 이후로 옥에서 몇 년을 보내야 했던가. 오랑캐 놈들이 선비의 도리를 알 턱이 있나. 헌데.”
“…….”
“나는 단순히 전하께 충언을 올렸다는 이유로 심양에서 그 고초를 겪었는데, 대놓고 대명과 내통했던 자겸은 심양에서 사흘도 갇혀있지 않다가 풀려났단 말이지. 이상한 일이 아닌가, 안 교리?”
“그걸 왜 제게 물으시는 지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아니, 자네는 알고 있어. 옥에 갇혀 정보가 부족했던 나도 내릴 수 있었던 결론이니까. 들어볼 텐가?”
최명길과 자신을 비교하는 늙은이의 눈동자에서 괴랄한 광채가 튀었다.
남한산성부터 시작한 라이벌 의식은 아직까지 이어지는가.
“자겸도 그렇고, 나와 영원히 갇혀있을 줄 알았던 임경업도 몇 주 안 되어 풀려났었지. 자네에게 불려간다며 옥문을 나선 후에 말이야.”
“잘도 기억하고 계시는군요. 그래서 결론이 무엇입니까.”
“그 둘을 풀어주었던 자가 안한수 교리, 자네였던 게야! 다들 자네를 청주의 총애를 조금 받았던 자 정도로 알고 있지만, 그 정도 지위로 적국과 내통한 자를 풀어줄 수는 없는 법이지.”
그의 검은자위는 나를 똑바로 향한 채, 깜빡임 한 번이 없었다.
똑바로 있던 김상헌의 고개가 기괴한 각도를 이루며 기울어졌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군요, 좌상 대감.”
“아니야, 자네가 아무리 부정해도 나는 알 수 있다네. 자네는 조선으로 돌아와 전 청주와의 인연을 최소한으로 드러내고 있지만, 자네와 청주의 관계는 그 이상이었음이 분명하네!”
“…….”
“핫하. 정곡을 찔려서 당황했는가? 혹시 청주가 죽기 직전까지 그의 두뇌 역할을 한 것이 자네가 아닌가?”
그걸 어떻게 알았지? 세자 외에는 조선인 중 누구에게도 말한 적 없는 정보였다.
북경까지 방문했던 성 영감이나 최명길에게도 내가 청에서 정확히 어떤 역할을 맡았는지 이야기한 적이 없었다. 나와 호포대를 관리하던 충신이나 김 갑사 역시 나와 도르곤의 인연만을 기억했을 터.
그걸 이 늙은이는 차가운 감옥 바닥에서 제한된 정보로 전부 유추해냈단 말인가?
“역시, 아직 어려서 그런지 표정 관리까지 완벽하진 못하구만. 그래, 조선에 돌아오고 나서 그 일을 드러내지 않은 것은 조정에 나같이 오랑캐와 척을 진 자들이 득실거렸기 때문일 테지?”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그렇게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면 청주가 저를 조선으로 돌려보냈겠습니까?”
“보통은 그렇지 않지. 한 가지 가능성을 제외하면. ‘조선으로 돌아가 나에게 반대하는 자들을 쓸어버려라.’ 이러한 밀명이라도 받고 돌아온 것 아닌가?”
식은땀이 뒤통수에 굴렀으나 애써 내색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내 속까지 꿰뚫어보겠다는 생각인지, 노회한 이리의 시선은 계속해서 내게 고정되어 있었다.
“굳이요? 제가 정말 그런 명을 받았다면 정묘년에 길잡이가 되어 압록강을 넘었던 자들처럼 군사를 몰고 넘어왔겠지요.”
“역시, 손주 녀석 어르듯 다룰 수는 없구만. 내가 자네를 너무 쉬이 본 겐가?”
“글쎄요. 저를 탄핵하려 했던 자들의 우두머리께서 앞에 계신데, 제 스승인 부제학을 대하듯 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아니, 조무래기 놈들은 이런 자리에서라면 보통은 엎드리기 마련이라네. 보아하니 자네 벗도 조무래기는 아닌 모양이구만. 호판 녀석이 부러울 정도야.”
김상헌의 시선 끝에는,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던 사헌부 대간들 사이에서 술잔을 든 채 웃으며 공격을 받아치는 좌명이 놓여 있었다. 녀석도 잘 버티고 있다는 생각에, 나도 모르게 몸에 힘이 솟았다.
“그럼 이제 그리운 옛날이야기도 하셨으니 정말로 하려던 말씀을 하시지요. 집에 안사람이 기다리고 있는지라 인정(人定)이 울리기 전에는 자리에서 일어나야 할 것 같습니다.”
“할 이야기가 많다고 했을 텐데? 내 허락 없이는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는 것이 좋을 걸세. 또 야다시 자리의 주인공이 되고 싶지 않다면 말이지.”
“……좌상 대감이 계획하신 일이었습니까.”
다시 여유를 찾았는지, 김상헌이 소리 내어 웃었다.
흰 눈썹이 꿈틀거릴 정도로 파안대소하는 김상헌이었으나, 그 웃음에서 따스함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전해지지 않았다.
“아니. 그건 저기 조무래기들이 스스로 한 짓이지. 자네 정도 되는 자를 날려버리기엔 너무 미약한 바람이 아니었나?”
“대감이라면 저 정도는 날려버릴 강풍을 불게 할 수 있으시다는 이야기로 들립니다만.”
“역시, 이래서 자겸이 부러웠다니까! 우리 산림 중에 자네처럼 눈치 빠르고 쓸 만한 젊은이라고는 은진 송씨 가문의 두 녀석 정도뿐인데 말이지. 그 둘도 자네에게는 못 미치거든.”
송시열과 송준길 이야기인가. 원역사에서 문묘에 배향될 정도로 큰 인물이던 둘보다 내가 낫다는 평가는 분명 기분 나쁜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진지하게 나를 숙청할 수 있냐는 물음에, 김상헌은 부정을 표하지 않았다.
그것이 내 등짝에 식은땀을 흐르게 했다.
“자겸에게 배운 왕학 탓에 자네의 눈이 흐려진 게 아닌가 싶구만. 만고불변의 진리인 주자의 사상을 따르는 것이, 성리학의 기반 위에 세워진 이 나라 조선의 관료의 본분 아니겠는가?”
“……하시고 싶으신 말이 무엇이십니까.”
“기회를 주겠네. 우리에게 합류할 기회를 말이지. 자네의 사상은 전부 아직 세상을 덜 보았기 때문에 조금 비틀렸을 수 있겠지. 그걸 바로잡을 기회 또한 주겠네.”
“지금 제가 해나가는 것들이 틀렸다는 말씀이십니까.”
흰 눈썹으로 덮인 김상헌의 눈은 숫제 희번덕거리고 있었다.
결국 그놈의 성리학, 그놈의 명분과 의리를 강조하는 일장연설이 길게 이어졌다.
“……그리고 차가운 심양의 감옥 바닥에서 몇 년을 버티며 깨달았지. 나는 틀리지 않았네. 그것은 내가 살아서 이 땅으로 돌아와 다시 정승의 자리에 이른 것이 증명할 것이야.”
“대감께서 옥에서 세월을 보내시는 동안, 저는 병사를 키우고 전장을 누벼야 했습니다. 모순적이게도 제가 키운 병사들이 청군과 함께 북경을 끝장냈기에 대감께서 이 자리에 계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대명의 황제 폐하께서는 북경성이 불타는 아비규환의 현장에서도 무사히 몸을 빼 남경으로 천도를 단행하셨네. 아직 천기(天氣)가 대명에게 있지 않으면 그게 가능한 일이냔 말이야!”
노회한 정치가의 입에서 거품이 튀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고이 간직해 놓았던 숭정제의 용포 조각을 이 자리에 들고 올 걸 그랬나. 댁이 그리 받드는 명의 황제를 구해낸 천기의 정체는 바로 나란 말이다.
물론 그걸 이 자리에서 말할 수는 없었다. 김상헌에게 사실을 밝힌다 해도 그의 태도가 달라지겠는가. 오히려 나를 그의 당파로 끌어들이려 더 안달이 나겠지.
“자네의 눈은 어두워져 있네. 부디 정도(正道)를 다시 걷게. 자네 같은 이를 내 손으로 쳐내는 일은 뼈를 깎는 고통과도 같을 것이야.”
“…….”
“자네의 힘으로 조선의 미래를 올바른 길로 돌려놓으세, 자네가 있으면 저 오랑캐 놈들의 배후를 찌르고 황제 폐하께 자금성의 옥좌를 돌려드릴 수 있어!”
김상헌의 눈에서 흘러나오는 기괴한 색채는, 이 자가 나를 호랑이굴로 불러들인 이유를 그제서야 일러주고 있었다.
북벌(北伐).
아마 홍타이지가 죽고 어린 카간이 즉위한 상태에, 잠시 대륙이 둘로 갈라져 대립하는 상황이니 그런 허무맹랑한 소리가 이뤄질지도 모른다는 착각에 빠진 것인가.
이 자는 정말로 심양의 감옥바닥에서 노망이 난 것일지도.
“제가 생각하는 조선의 올바른 미래는 이쪽입니다, 대감. 명분과 의리를 따져 의미 없는 대륙의 패권 다툼에 끼어들어 무엇 하잔 말씀이십니까? 제게는 거기에 휘말릴 백성들이 훨씬 가엽습니다.”
“그놈의 백성, 백성! 내 남한산성을 나가는 자겸의 항복 문서를 찢으려 했을 때도 그놈은 그렇게 말했었지! 하지만 사직이 있어야 백성도 있는 것이고, 그 사직은 명분이 없으면 성립할 수 없다는 걸 왜 모르나!”
“…….”
“태조께서 천조에 사신을 보내 이 나라의 존재를 인정받은 이후로, 이 나라는 대명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가 된 건 자네도 잘 알지 않는가! 그걸 왜 부정하려 드는 게야!”
노인의 말투는 점점 거칠어졌고 목소리는 커져만 가고 있었다.
결국 나를 그쪽 당파로 끌어들이는 것이 목적이었군. 내 힘을 이용해 북벌의 명분을 밀어붙이든지, 최명길과 김육의 영향력을 약화시키든지, 아니면 둘 다든지.
“나는 알고 있네. 한당이라 불리는 자들의 진정한 중심은 자네란 걸. 겉으로는 자겸과 호판이 우두머리인 것처럼 보이지만, 그들의 개혁책이 관철된 것은 자네가 없었으면 불가능했을 테지.”
“제 길은 제가 정합니다, 좌상 대감.”
“어째서인가? 자네의 처 때문인가? 그거야 자네의 말 한마디면 친정과 연을 끊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이야. 벗이 문제인가? 저기 있는 호판의 아들 같은 벗은 얼마든지 내 준비해줄 수 있네. 송 헌납도 자네를 좋게 본다고?”
“대감!”
더 이상 김상헌의 억지를 참아주기 힘들었다. 줄곧 평정을 지키고 있던 내 입에서 호통이 튀어나왔다.
그때였다. 옆자리에서 조용히 지켜보던 김집이 자리를 털고 일어나 김상헌에게 다가간 것은.
“좌상 대감, 이쯤 하시오. 이러려고 신진들을 부른 자리가 아니지 않소.”
“끼어들지 말게, 이판! 내 이자에게 아직 할 말이 많아!”
무슨 잔치가 벌어지고 있는 건가요? 잔치가 아니라 난장판입니다.
김집의 개입으로 정신을 차려보니 이미 자리의 분위기는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 좌명이 앉은 쪽에서도 고성이 오가는 것을 보니 그쪽에서도 논쟁이 붙은 모양이었다.
이런 일이 일어날 것 같은 조짐을 느꼈지.
처음부터 연회와는 어울리지 않는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었으니까.
“어서 대답하게! 자네만 있으면 우린 천기를 올바르게 돌려놓을 수 있어! 자네만이 오랑캐의 심장을 찌를 비수가 될 수 있단 말일세!”
“좌상 대감! 갑자기 왜 이러는 것이오! 고정하시오!”
“나와 함께 오랑캐 놈들에게 칼을 겨눌 것인가? 아니면 나와 척을 지고 그놈들을 따를 것인가? 어서 답을 하지 못할까!”
“송 헌납! 이리 와서 안 교리를 데려가게! 어서!”
김집의 반응을 보아하니 김상헌이 이런 생각을 드러낸 것은 처음인 것 같았다. 저렇게 속으로 청에 대한 칼을 갈고 있는 자였기에, 능양군이 좌의정에 등용한 것일까.
그렇게 김집이 김상헌을 숫제 뜯어말리는 것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데, 곧 옆에서 묵직한 목소리가 울렸다.
송시열이었다.
“일단 자리를 피하시오. 안 교리. 좌상 대감께서 상태가 조금 좋지 않으신 듯하니.”
“송 헌납?”
“오해하지 않았으면 하오. 좌상 대감의 뜻이 우리 모두의 뜻과 같지는 않다오. 다만…….”
그의 눈길이 좌명을 둘러싸고 있는 사헌부 대간들에게 가 닿았다. 일그러진 송시열의 눈가를 보니 사헌부 놈들에게 실린 감정이 좋지 않아 보였다.
“일단 김 박사와 함께 자리를 뜨도록 하오. 스승님이 이 자리를 정리해 주실 것이니.”
“송 헌납, 당신…….”
“긴 이야기는 조금 후에 하지요, 나와 함께 갑시다. 어서!”
그 급박한 대화 사이에도 송시열의 진심이 느껴지고 있었다. 껄끄러운 자리를 피하게 해주려는 그의 속내가 너무나 고마웠으나, 그 전에 마지막으로 해야 할 일이 남아있었다.
“좌상 대감.”
“오? 안 교리, 방금 내 제안을 받아들이겠다는 말인가? 여기 이판은 아직 아무 것도 모른다니까.”
몸을 돌려 김상헌에게 다시 말을 걸자, 그는 화색을 띠고 내게 대답했다. 허나 그의 기대와는 달리, 나는 그저 마지막으로 오늘의 연회 자리에서 쌓였던 감정을 풀고 싶을 뿐이었다.
“소생, 당파는 다르지만 과거 대감이 보여주신 나라 사랑하는 마음에는 깊이 감명을 받았었습니다.”
“그래? 그거 참 반가운 소리구만?”
김상헌의 눈빛이 기대로 희번덕거리는 것이 보였다.
당장 내가 전향 선언이라도 할 것이라 기대하는가? 그렇다면 큰 오산인데.
“그 때문에 대감께서 심양으로 끌려가시던 시기에 지으신 시조가 소생의 가슴에 새겨져 있습니다. 그 시조에 답하는 시조를 지어, 오늘 이 자리에 저를 초대해주신 대감의 정성에 보답하고자 합니다.”
‘가노라, 삼각산아. 다시 보자, 한강수야.’로 시작하는 그 유명한 시조.
자신을 치켜세우는 말을 들은 김상헌은 어느새 잡고 있던 김집의 소매를 놓고 행동을 멈췄다.
그렇게 김상헌이 일으킨 소란으로 시끌시끌하던 연회 자리는 조용해졌다. 좌중의 모든 시선이 내게 쏠리는 것이 느껴졌다.
“삼각산 솟아있고 한강수는 흐르도다.”
“…….”
“고국산천 그대론데 옛 총기(聰氣)는 어디 갔나.”
“……!”
“어즈버 만고충신의 껍데기만 구슬퍼라.”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한 김상헌에게 등을 돌리며 도포자락을 휘날렸다.
분명 남한산성에서 최명길과 국사를 다투던 시절의 그는 이토록 망가지지 않았을 터인데.
그 안타까움을 잔뜩 담아 지은 시조였다.
“이 사람! 참! 지금이 어느 자리라고!”
송시열은 대놓고 김상헌에게 선전포고를 날린 내 행동에 당황한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그러나 자신의 임무를 잊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그렇게 송시열과 함께 좌명을 자리에서 일으키려 걸음을 옮기던 찰나였다. 다가오는 우리를 본 좌명이 싱긋 웃더니 내 시조를 듣고 시끌시끌해진 사헌부 대간들에게 손짓을 하고는 추가타를 먹였다.
“까마귀 싸우는 골에 백로야 가지 마라, 성낸 까마귀 흰빛을 샘낼세라. 청강에 기껏 씻은 몸을 더럽힐까 하노라.”
※ 작가의 말
주인공이 패러디한 원본인 김상헌의 유명한 시조는 다음과 같습니다.
가노라 삼각산아 다시 보자 한강수야
고국산천을 떠나고자 하랴마는
시절이 하 수상하니 올 둥 말 둥 하여라
좌명이 입에 담은 시조는 포은 정몽주의 어머니인 이씨 부인이 지었다는 시조입니다.
까마귀가 싸우는 골짜기에 백로야 가지 마라
성낸 까마귀가 흰 빛을 샘낼까 염려스럽구나
맑은 물에 기껏 씻은 몸을 더럽힐까 하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