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호랑이 어사, 조선을 뒤흔들다!-102화 (102/298)
  • 102화. 감자 나리

    지금으로부터 백여 년 후, 변방국 프로이센을 강대국으로 일으켜 세운 군주 한 명이 태어난다.

    그 업적을 기려 프리드리히 2세라는 칭호보다는 프리드리히 대왕으로 불린 그 군주는 세계사에서 또 다른 별칭으로 더 유명해진다.

    ‘감자 대왕.’

    자왈(子曰),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이면 가의위사의(可以爲師矣)니라.

    공자께서도 옛 것을 익혀 새 것에 응용할 수 있으면 타인의 귀감이 될 수 있다 하셨다. 지구 반대편, 백 년 후의 사람이니 ‘옛 것’은 아니지만 좋은 사례를 써먹지 못할 것은 없는 법이었다.

    독일에 감자를 보급시킨 감자 대왕의 아이디어, 여기서도 잘 써먹어야지. 나중에 내 무덤에도 프리드리히 대왕처럼 감자와 감자꽃이 놓이게 되려나?

    ***

    며칠 후, 마포나루 인근의 한 텃밭은 어울리지 않게 몰려든 구경꾼들로 몸살을 앓고 있었다. 평소 같으면 포구를 이용하러 오가는 사람들은 눈길도 주지 않을 평범한 밭뙈기였다.

    “무슨 일로 사람들이 이리 모여 있대?”

    “글쎄, 나도 잘……. 웬 밭뙈기 하나를 사람을 두고 지킨다는 말이 돌던데, 정말일까?”

    “밭에 무엇을 심어 놨길래? 금덩이라도 심었단 소린가? 아, 혹시 강 진사 댁 상단에서 취급하는 인삼이라도 심은 건가?”

    “그쪽에서 취급하는 인삼은 죄다 개성에 있을 텐데? 한양에서는 이미 재배가 어렵다 결론이 난 것 아니었나?”

    깊은 산에서 캐오기만 하던 인삼을 사람 손으로 키우기 시작한 것도 몇 년 되지 않은 일이었다. 그걸 청에 가져다 바친 상단의 우두머리가 청의 무관직을 얻었다는 소문은 마포에 모르는 사람이 없는 이야기였다.

    그런 보물 같은 작물을 접근이 쉬운 밭에 심었다고? 지키는 사람을 세워가면서?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하기엔 충분한 이야기였다.

    나루의 일이 점심을 핑계로 잠시 쉬는 시간, 그 사실을 확인하러 호사가들이 몰려든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리라. 그러나 그들의 눈에 들어온 광경은 기대와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박 서방! 이 밭에 심은 것이 인삼이라는 이야기가 사실이야?”

    “자세히는 몰라. 청에서 들어온 맛좋은 작물이라는데, 그걸 지키라고 하시더라고.”

    그렇게 몰려든 구경꾼 중 하나, 장 서방은 운이 좋았다.

    하필 그 자리를 지키고 있던 사람 중 하나와 안면이 있었던 것이다. 바글거리는 구경꾼들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그쪽을 향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맛좋은 작물?”

    “높으신 분들이 드시려고 교하에 농사짓던 걸 한양에서도 똑같이 하려고 하신다나? 아, 한양에 명성이 자자한 안 선비님이 이걸 그리도 좋아하셔서 직접 청에서 들여왔다 하더라고?”

    “우리 마누라가 맨날 읊어대는 그분 이야기구만? 저번 과거에서 장원급제하신 그분 말이지? 그런데 자네가 이런 일을 왜 하고 있어? 지루한 일이라면 치를 떨던 사람이.”

    아마 이 자리에 있는 대다수가 안 선비 이야기로 안사람에게 바가지를 긁혀본 경험이 있던지라, 둘의 대화에 공감하기는 그리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툭하면 남의 집 사내와 비교당하는 것이 남편들의 일상이 아니겠는가.

    장 서방의 말을 묵묵히 듣던 파수꾼, 박 서방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은 것은 잠시 후였다.

    “흐흐. 이걸 점심으로 먹여준다기에 일등으로 자원했지. 이거, 마령서라 하던가? 이 마포에서 마령서를 처음으로 먹는 사람은 내가 될 거야.”

    “뭐? 그런 일이 있으면 나한테도 말을 했어야지?”

    “뭔 재밌는 구경이 났다고 길을 막고 있수? 길 비켜요! 어허!”

    박 서방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함지박 하나를 인 아낙네 하나가 인파를 헤치고 나타났다. 자리에 있는 모두가 함지박에서 오르는 더운 김 몇 줄기와 구수한 냄새를 느낄 수 있었다.

    “고작 멍하니 서서 밭뙈기 하나 지키는 일로 이 귀한 걸 먹여준다고? 나도 자네 상단에서 일할 걸 그랬구만?”

    “부럽지? 그러게 사람은 줄을 잘 타야 된다고? 흐흐.”

    “아니? 이런 것까지 먹여주면 지금 서 있는 자리를 밤새 지켜야 할 것 아냐. 그건 별로 부럽지 않은데.”

    “밤새? 그런 이야기는 없었는데. 해가 지면 집으로 돌아가도 좋다 하셨어.”

    “뭐? 그럼 밤에는 누가 이것들을 지키나?”

    “나야 모르지, 뭐.”

    어느새 함지박을 안은 채 자리에 퍼질러 앉은 박 서방이었다. 김이 오르는 아이 주먹만 한 덩어리에서 껍질을 까낸 후, 구석에 놓인 소금을 찍어 입으로 가져가는 박 서방의 몸짓에 온 구경꾼들의 시선이 쏠려있었다.

    “이거, 참. 특이한데 맛나는구만?”

    “그렇게 맛있어?”

    “왜 높으신 분들이 이걸 즐기시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조금 퍼석한 감이 없지 않긴 한데 맛은 있어. 밥 대신 먹어도 될 것 같아. 조금 달짝지근한 것 같기도 하고.”

    “아이고…… 나는 언제 그걸 먹어보나? 나도 하나만 주면 안 되나?”

    “이 귀한걸? 안 돼. 남들한테는 절대 주지 말라는 엄명이 있었다고.”

    이게 사람을 놀리는 건지, 파수꾼 박 서방은 우스꽝스러운 표정을 짓더니 나머지 덩어리들도 껍질을 까 널름널름 해치우기 시작했다. 아마 이 자리에 있는 모두의 생각이 장 서방과 같았으리라.

    “아, 박 서방. 자네와 내가 남이라 불릴 사이야? 섭섭하게스리.”

    “어쩌겠어. 누군진 모르겠지만 밤에 파수를 설 놈한테 부탁해 보든지. 거, 쌀밥보단 못하지만 참 희한하게 잘 넘어가는구만, 이거.”

    “밤에? 밤에는 누가 파수를 서는데?”

    “모르지? 누구라도 서지 않겠어?”

    대화를 나누면서도 박 서방은 연신 마령서라 불린 덩어리들을 목구멍으로 넘기기 바빴다. 얼마 있지 않아 함지박에 있던 숭늉 그릇까지 들어 식사를 마친 그를 향해 원망과 부러움의 눈빛들이 마구 쏟아졌다.

    “아, 참. 이걸 잊었구만. 구경하고 있는 자네들, 이 작물, 훔칠 생각은 안 하는 게 좋을 거야. 귀한 작물이기도 하지만, 이파리와 줄기에 독이 있어서 잘못 먹으면 배앓이를 심하게 한다고 했어,”

    “자네가 먹은 건? 거기엔 독이 없나?”

    “응, 독이 있는 부분이면 나한테 주지도 않았겠지. 안 선비님도 이걸 매일같이 드신다던데? 맛이 없는 건 아니지만 끼니마다 챙겨 드시는 걸 보면 이 마령서란 놈이 그분의 비결일지도?”

    늘어지게 트림을 한 판 쏟아낸 박 서방이었다. 정말로 만족스럽게 식사를 끝마친 듯했다.

    헌데, 박 서방의 마지막 말을 들은 사내란 놈들은 죄다 다른 생각을 품고 있었다.

    비결이라는 단어 때문이었다.

    “아이고, 배부르다. 이걸 먹었으니 오늘 밤은 마누라가 좋아하겠구만.”

    “밤? 마누라?”

    “어허, 다 알면서 뭘 물어봐? 부러워서 그래?”

    “그러니까 청나라 황녀님까지 녹여낸 그분의 밤일 비결이 마령서인가 뭔가 하는 그거란 말이지?”

    박 서방에게 열녀김씨전의 이야기가 어떻게 와전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건 이 자리에 있는 모두의 머릿속에는 ‘정력’이라는 두 글자가 스쳐 지나갔음이 분명했다.

    여기저기서 묘한 열기를 담은 눈빛들이 빛나기 시작했다.

    “어이, 다들! 점심시간 끝나겠다. 일하러 안 가?”

    박 서방은 평소처럼 눈치 없이 구경꾼들을 닦달하는 모양새였으나, 그런 박 서방의 기세에 못 이기는 척 흩어지는 구경꾼들 역시 속으로는 다른 마음을 품고 있으리라.

    그리고, 여기 있는 대다수는 조금 있다 땅거미가 지면 다시 이 밭을 방문할 것이 분명했다.

    ***

    “……그러니까, 마령서를 일부러 훔쳐가게 만들겠다고?”

    “이미 한양 곳곳에 명령을 수행하고 있는 자들이 있을 걸세. 나루나 성문 앞처럼 오가는 자들이 많은 곳을 정해 마령서들을 뿌려놓았지.”

    “조회 자리에서 신 작물을 보급하겠다고 장담했다는 말은 들었는데……. 어떻게 그런 신묘한 생각을 한 건가? 사내라면 그걸 손에 넣지 못해 안달이 날 것 아닌가?”

    그럼, 그럼. 정력에 좋다면 바퀴벌레도 먹을 짐승들이 남자들인데. 맛도 좋은 물건이 방치되면 가져가지 않을 리가 있나.

    정말로 약효가 있진 않겠지만, 그래도 플라시보 효과라는 것도 있으니 낚이는 사람이 꽤 많지 않을까하는 기대에서 짠 계획이었다. 사실 정력에 효과가 없더라도 식사대용으로는 충분할 테니 큰 문제는 없을 거고.

    떠올렸던 감자 대왕의 일화를 참고하면서, 마지막에 내 식대로 살짝 변형을 넣어 본 것이었다.

    잡곡보다야 낫겠지만, 개량을 거치기 전인 이 시대의 감자가 쌀밥보다 맛있을 수는 없으니 약간의 조미료를 칠 필요가 있었으니까.

    과연 그 결과는 어떻게 나오려나.

    “헌데, 그 이야기는 정말인가? 혹시 돌아가는 길에 나도 몇 알…….”

    성균관 박사씩이나 되는 놈도 내 앞에서 이러고 있는 걸 보니 의문이 싹 사라졌다. 하긴, 먹물 좀 먹은 사람들은 마령서의 마령이 말 고환(馬鈴)이란 뜻을 알 테니 그 의미가 더 와닿았을지도.

    이건 백 퍼센트 먹힌다, 정말.

    “마령서야 교하에서 보낸 것이 광에 썩어날 정도로 있으니 못 줄 건 없지 않겠는가. 가져가서 아주머님과 드시게.”

    “고맙네. 헌데, 자네가 내 안사람을 아주머님이라 하니 뭔가 묘하구만. 그냥 부인이라 불러도 좋지 않은가. 왜 갑자기 격식을 차리는가?”

    그 눈치 없던 놈도 이상함을 감지한 모양이었다.

    김좌명, 네 죄를 네가 알렷다.

    드르륵.

    타이밍 좋게 사랑채 문이 활짝 열렸다. 역시 내 마누라야. 정이 통하면 마음도 통하는 걸까?

    오늘도 고운 하연이 장지문에 손을 댄 채 서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 입가에는 섬뜩한 미소가 올라앉아 있었다.

    그럴 만했다.

    “어, 하연이 아니냐? 네 서방과 이야기 중인데 갑자기 왜?”

    “오라버니, 참으로 훌륭한 짓을 해 주셨더군요.”

    찬 바람이 쌩쌩 부는 하연의 목소리에 괜히 죄지은 것 없는 나까지 소름이 돋는 듯했다.

    털썩. 좌명 앞에 익숙한 서책 하나가 던져졌다. 세자에게서 내려받은 그 책이었다.

    “아니…… 이건…….”

    “한양에서 책과 관련된 일을 하는 집이 몇이나 된다고. 이게 끝까지 숨겨질 줄 아셨나요?”

    “아니, 하연아. 그것이 말이다…….”

    “저와 제 서방의 이야기를 멋대로 한양에 풀고, 무사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셨어요? 오라버니?”

    하연의 눈에서는 숫제 한겨울의 눈보라가 쏟아져 나오지 싶었다.

    내 마누라, 무섭다. 잘못할 일을 만들면 안 되겠다.

    범인을 쉽게 찾은 이유가 있었다.

    내가 심양에 머물던 사이, 청풍 김씨 집안에서는 인쇄업과 서책 발간 사업을 더 키워놓았다고 했다. 한양에 나도는 책 중에 김육의 손길이 거쳐 가지 않은 물건이 없을 것이었다.

    아마 내가 써 놓고 간 소학 참고서가 불씨가 되었지 싶은데, 그것은 나중에 확인하도록 하고.

    회사에 사장님 따님이 들이닥쳐 털어대는데 사실을 고하지 않을 사람은 내가 알기로 없었다.

    “아니, 그게……. 어디서 들은 것이냐, 그걸?”

    “이 서책이 나돌고 있다던 세책점(貰冊店)에 가니 출처가 바로 나오던데요? 등잔 밑이 어둡다더니, 범인이 바로 피를 나눈 가지에서 나올 줄은 몰랐죠?”

    “하연아, 그건 내가 한 짓이 아니라…… 그래, 선진, 선진 사형이 너희 사연을 듣고 안타까워서…….”

    “이제 한양에 없는 사람에게 책임을 떠넘기깁니까? 여기 증인이 있는데도 잡아떼시려고요?”

    그제서야 하연의 등 뒤에서 쏙 하고 튀어나온 녀석이 있었다. 여전히 황금처럼 빛나는 댕기머리가 우물쭈물거리는 녀석의 머리끝에서 휘날렸다.

    “네 짓이었느냐?”

    “선생님…… 그게요…….”

    어쩔 줄 몰라 하며 손끝을 비벼대는 녀석의 눈망울에는 물기가 점점 차오르고 있었다.

    어이구, 내 골이야.

    몸은 자라 이제 여인의 태가 어엿하게 나는 녀석이, 속은 예전과 다를 바가 없어 보였다.

    이번엔 무슨 변명을 하는지 두고 볼까.

    ※ 작가의 말

    작중에 언급된 프리드리히 대왕의 감자 보급 일화는 다음과 같습니다.

    프로이센에 감자가 처음 도입되었을 때, 사람들은 낯선 모습과 맛 때문에 감자를 심고 수확해 먹기를 꺼려했습니다. 그걸 무마하기 위해 왕은 매일 감자로 만든 요리를 한 가지 이상 수라상에 올리라 명하게 됩니다.

    일단 매일같이 왕이 감자를 먹으니 대중들의 궁금증은 증폭되었지만, 그것으로는 부족했습니다. 그래서 낸 계략이, 자신의 직할지에 감자를 대규모로 재배하고 마을 공터에도 감자를 재배하면서, 자신의 친위대인 척탄근위대로 하여금 낮마다 철저하게 감자밭을 지키게 하는 방법이었지요.

    그렇게 자극된 대중의 심리가, 밤에 비어있던 감자밭에서 어떻게 작용하었는지는 독자 여러분들도 쉽게 짐작하실 수 있으실 것입니다.

    그런 위대한 업적 덕분인지, 실제로 포츠담 상수시 궁전에 잠들어있는 프리드리히 대왕의 묘지에는 아직까지도 참배객들에 의해 감자와 감자꽃이 놓이고 있습니다. 물론 평범한 꽃다발도 함께 놓이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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