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호랑이 어사, 조선을 뒤흔들다!-99화 (99/298)

99화. 산당(山黨)과 한당(漢黨)

세자의 표정은 방금과는 달리 한껏 진지했다. 단순히 농담으로 말하는 것 같지가 않았다.

“거대한 존재라니요. 고작 정오품에 불과한 저보다 높은 관리는 수두룩하지 않습니까. 저는 갓 대과에 급제해 홍문관 교리와 시강원 겸사서를 겸하는 신하에 불과합니다.”

“안 사서. 여기 조정 신료들은 장님에 귀머거리가 아니다. 우리가 심양에서 한 일은 알음알음 한양에도 전해졌다는 사실을 잊은 것이냐.”

“그 말씀은…….”

“네가 전대 청주와 현 섭정왕의 총애를 받았다는 사실을 당상관치고 모르는 자가 없을 것이다. 그런 자를 수하로 두고 부릴 배짱 있는 자가 몇이나 되겠느냐.”

아하, 그래서 나를 홍문관으로 보내버린 거구만? 홍문관 부제학이던 성 영감은 옳다꾸나 하고 나를 받은 거고?

성 영감은 청 황제의 총애를 받은 자가 나 아닌 다른 사람이었어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사람이었다. 나와는 그전부터 인연도 있으니 여러모로 위험물의 고삐를 쥐여주기엔 최적이란 결론이었을까.

“부제학이 강직하긴 한 모양이구나. 그런 너에게도 가차 없이 대하는 것을 보면.”

“이제 와서 생각해보니 오히려 저와의 관계 때문에 더 엄하게 대했지 싶기도 합니다. 홍문관의 다른 신료들도 제 작업량을 보면서 혀를 내두를 정도였으니까요.”

“특별대우를 받는다는 사실이 퍼진다면 네게도 좋을 것이 없다. 질투가 여인의 칠거지악이라고는 하나, 사내라고 질투를 모르겠느냐. 차라리 부제학 밑으로 간 것이 다행으로 보이는구나.”

“그렇습니까…….”

세자의 말대로 잘된 일일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갈리다가 코피 쏟고 골로 가지만 않는다면 말이지.

그런 생각을 읽기라도 한 것인지. 세자는 진지했던 얼굴을 풀고 가볍게 웃음을 흘렸다.

“그렇다고 너무 그렇게 긴장하진 말거라. 나랏일을 맡은 첫날인데 벌써부터 그렇게 짐에 짓눌린 표정을 하는 것도 좋지 않을 것이다.”

“저하 말씀이 맞습니다. 안 그래도 나랏일 외에도 신경 쓸 것은 차고 넘치지 않습니까.”

“네가 대과를 준비한답시고 두문불출했던 바람에 더욱 그랬었지. 부제학과 호판이 도와줘 어찌 넘길 수 있었지만 말이다.”

“제가 없으면 얼마나 곤란해지실지 깨달으시는 계기가 되셨으면 하옵나이다.”

갑작스레 쓴 극존대 때문인지, 어처구니없다는 듯 소리를 내어 웃은 세자였다. 차마 반박을 못 하는 모습을 보며 새삼 가까워진 세자와의 거리가 느껴졌다.

“핫핫, 너도 꽤나 건방져졌구나. 그래도 네 제안대로 적당한 땅에 속환인들을 정착시키는 건은 잘 풀린 모양이다. 덕분에 조정에서 내 입지가 꽤나 단단해졌어.”

“세자께서 청으로 끌려갔던 백성들을 구해내 돌아왔다…… 감히 누가 그 업적에 딴지를 걸겠습니까.”

“그래. 네 예상대로였다. 저번 임시귀국 때는 청의 문물에 물들었다며 나를 비난하던 구 척화파 대신들도 이번엔 입을 다물더구나. 꽤 통쾌하지 않느냐.”

“조선의 신하 된 자로서 나라의 근본인 백성을 구해 돌아온 저하께 칼날을 들이밀 수 있는 자는 없을 것입니다. 잘하셨습니다.”

세자는 뿌듯하다는 듯이 기지개를 쭈욱 폈다. 아마도 그의 속은 사이다를 들이킨 듯 시원할 것이다.

나를 처음 만났을 무렵의 세자가 죽상을 하고 다녔던 것은 아비인 능양군과의 갈등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가 청의 문물에 관심을 가지고 호의를 보였다는 이유로 척화파 신하들에게 상소로 공격을 당했다는 이야기는 이미 들은 적이 있었다.

아마 원 역사에서 소현세자의 갑작스러운 죽음 이후, 법도대로라면 후계를 이어야 할 원손을 제치고 봉림대군이 세자가 된 것도 여기서 기인하려나. 대군은 심양에 있으면서도 청에 대한 적개심을 숨기지 않던 사람이었으니까.

“허나 당분간은 계속 몸을 사리셔야 합니다, 저하께서는 썩어 문드러진 대명의 실체를 두 눈으로 직접 목격하셨지만, 저들은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잊으셔선 안 됩니다.”

“저들의 머릿속에 있는 대명은 여전히 천조이며 재조지은의 은혜를 갚아야 할 대상이겠지. 알고 있다. 때문에 네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말을 마치고 잠시 어두운 창밖에 시선을 꽂아두던 세자가 내 쪽을 향해 몸을 기울였다. 그의 목소리는 눈에 띄게 낮아져 있었다.

“한수야. 이제부터 시작이다. 오늘부터 네가 내 검이 되어 내 앞을 막아설 자들을 베어 넘길 준비를 해야 한다.”

“이 말씀을 하려고 부르신 것입니까. 홍패를 내려받은 순간부터 각오는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 보위에 오르고도 할 수 있는 일이나, 보위에 오르고 행하면 늦을 일이다. 가뜩이나 최근 아버님의 건강이 부쩍 좋지 않으신데 혹여나 무슨 일이라도 일어난다면…….”

“꽤나 과감해지셨군요. 저하께서 대업을 직접 입에 담으실 줄은 몰랐습니다.”

“심양에서 내게 자신감을 불어넣어 준 사람이 한수 네가 아니냐. 나는 네가 계획한 조선의 부국강병책이 꽤나 마음에 든다. 그것을 웬 걸림돌들에게 방해받기 싫은 것이야.”

자리끼 그릇에 손을 뻗어 물을 한 모금 삼킨 세자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원래대로면 능양군이 수명을 다하는 날은 오 년 정도 남았겠지만, 수명이 남아있던 홍타이지가 급사한 일을 생각하면 언제든지 역사의 톱니바퀴가 다르게 돌아갈 수 있었다.

세자의 염려는 합리적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고작 종 오품관에 불과한 네가 갑자기 칼질을 해댈 수는 없겠지. 그러나 천릿길도 한 걸음부터라고, 현 조정의 상황에 대해서는 의견을 나눌 필요가 있다 생각해 부른 것이다.”

“지금 조정을 주름잡는 세력에 대해서 말씀이십니까. 오늘 업무를 수행하던 도중에 부제학에게 대강 듣긴 했습니다.”

“내가 심양에 있는 동안 상당히 많은 변화가 있었더구나. 아버님의 총애를 받던 공신 세력의 일각이 붕괴한 것이 큰 모양이다.”

원 역사대로라면 공신과 비공신, 그리고 척화와 주화로 나뉘어 파벌이 갈리던 집권 서인 세력이었다. 그것이 능양군 말년에 벌어진 소현세자의 사망과 봉림대군의 세자책봉을 계기로 그 입장에 따라 당파가 형성되었을 터.

허나 지금 내가 바꿔놓은 역사는 조금 묘했다. 귀국하자마자 사망했어야 할 세자는 쌩쌩하게 살아있고, 친인조파였던 낙당(洛黨)의 구심점이던 김자점이 내 손에 의해 제거되면서 사태가 조금 이상하게 뒤틀려 있었다.

“……전하께서 산림(山林)을 적극 등용하셨다고요?”

“네가 호피복면을 뒤집어쓰고 일으킨 그 일로 조정 중신 여럿이 힘을 잃었다고 들었다. 당사자인 김자점은 낙향해 다시는 조정으로 돌아오지 못했고, 그와 인척으로 맺어져 있던 이시백이나 부정에 직접 연관된 김류도 예전만 못하게 되었지.”

“그 총신들의 공백을 산림을 통해 메우려던 것이 전하의 속내시군요. 그렇다면 그를 통해 등용된 산림들이…….”

“기호학파의 수장 김집과 그의 제자들이다. 송시열, 송준길…….”

익숙한 이름들이었다. 원래대로면 김자점이 몰락한 조금 나중에야 조정에 출사하는 인물들. 명분론과 반청을 기조로 삼은 산당(山黨)의 구성원들.

그 사실을 듣자 문득 오늘 낮에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작성한 교서의 초안을 예조로 제출하러 가던 길, 나를 유난히 쏘아보던 관원 하나가 신경 쓰이던 차였다.

‘저, 제게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십니까?’

‘…….’

‘영보, 예서 무얼 하고 있는가? 어서 가지!’

푸른 관복을 차려입은 채 입을 꾹 다물고 있던 관원은 삼십대 중반쯤으로 보였다. 처진 눈에 눈썹 사이가 먼 것이, 풍기는 분위기만 봐도 예사롭지 않았는데, 혹시 세자가 언급한 자 중에 그의 이름이 있을지도.

그 기억을 떠올리자 앞으로 무언가 일어날 것만 같은 예감이 들었지만, 일단은 앞에 앉은 세자가 우선이었다.

조정의 새로운 세력을 줄줄이 나열하고 있는 세자의 기분은 좋지 않아보였으니까.

“저하께서 이미 알고 계신 자들 같습니다? 표정이 좋지 않으시군요.”

“알지. 송시열은 봉림의 스승이었으니까. 봉림의 꽉 막힌 정치관은 스승에게서 물려받은 것이다.”

“그런…….”

“이번에 내가 귀국할 때, 심양에 잡혀있던 전 예판 김상헌도 풀려났다. 반청복명(反清復明)을 외치는 그 자들에게는 천군만마와도 같겠지.”

이제 세자가 왜 조정의 정세를 논하려 했는지 알 것 같았다. 가까운 훗날 접촉해올 네덜란드 세력에게 조선을 개국하고 이 나라의 산업구조를 바꿔놓으려면, 산당이라 불릴 이 꼰대들은 가장 큰 걸림돌이 될 자들이었다.

헌데 본래 임금이 바뀐 후에야 정계로 나왔을 산림들이 어째서 지금 능양군의 소환에 응했는가. 그 의문의 해답은 곧바로 떠올랐다.

“……아무래도 북경에서 명국의 황제를 살려 보낸 일이 화근이 되었군요.”

“덕분에 지금 이 시점에 한양에 돌아올 수 있게 된 것은 천운이 분명하나, 황제가 장강 이남에 살아있다는 소식은 재야에 묻혀있어야 할 사림의 망령들까지 끄집어낸 모양이로구나.”

“저하께서 말씀하신 대로라면 앞으로 저희의 앞길이 순탄치만은 않을 것입니다.”

“그래. 완성부원군과 네 빙장이 의정부와 비변사를 장악한 상태고, 네 스승이 홍문관의 수장으로 버티고 있으나 산림들의 세력은 재야에까지 퍼져있어 넓고도 깊다. 오랜 싸움이 될지도 모른다.”

원 역사에서 조정의 실세였던 김자점과 원두표의 세력을 정치적 공세를 통해 분쇄한 것도 그들 산당이었다. 아무리 최명길과 김육이 유능한 재상이라고는 하나, 산림과의 정쟁에 패배하지 말라는 법도 없었다.

그리고 무사히 세자가 왕위에 오른다 해도, 어떤 일을 추진할 때마다 ‘전하, 통촉하여주시옵소서!’라는 말에 시달릴 것을 생각하니 벌써부터 이마가 지끈거렸다.

세자의 표정도 좋지 않은 것을 보니 같은 심정인 듯했다.

“일단 홍문관을 제외한 나머지 삼사와 승정원의 관원들을 대할 때는 주의를 아끼지 말도록 해라. 그곳이 그들의 본거지니까.”

“산림들이 왕명의 출납과 궐내의 언론을 장악했다는 말씀이시군요. 명심하겠습니다.”

“또한, 청국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 너는 그들에게 청국의 앞잡이 정도로 비칠지도 모른다. 그 점 또한 명심하도록 해라.”

왕의 비서실과 감사원은 그들의 손아귀에 있다는 뜻인가. 안 그래도 궐내각사에서 홍문관과 사간원, 사헌부는 멀지 않던 터였다. 그들의 시선 때문에 성 영감이 오히려 나에게 엄하게 대했을지도.

“처음부터 산림들과는 대립각을 세울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군요.”

“아버님께서 어떤 생각을 품으셨는지 자세히는 알 수 없으나, 신하들을 서로 대립시켜 이득을 취하겠다는 생각으로 이 구도를 만드신 것이 아니겠느냐. 내가 아버님이었어도 그렇게 했을 것이다.”

“호란으로 약화된 왕권을 강화하기에는 최적의 시기가 아니겠습니까. 마침 갓 황제가 즉위해 청국의 정세도 혼란하니 간섭도 적을 테고요.”

“그렇겠지. 그렇기에 네 어깨가 무거운 것이다. 한수야.”

콧잔등을 어루만지던 세자가 무겁기 그지없는 말을 던져온 것은 잠시 후였다. 세자의 눈빛 역시 깊게 가라앉아 있었다.

“듣기로는 아버님께서 장원 시권의 주인이 너인 것을 아시고는 기쁨을 감추지 못하셨다는구나. 아마 그동안 의심을 사지 않게 노력한 보람이 있는 모양이지.”

“전하의 신임과 저하의 신임, 그 둘을 조정에서 유일하게 갖춘 사람이 저로군요.”

“아버님께서 품으신 뜻이 나와 같지 않으신 것이 극히 유감이다만, 나는 아버님과 대립각을 세울 생각이 없다. 이 상황을 해결할 열쇠는 한수 너밖에 없다는 사실을 너 스스로도 잘 알고 있을 터.”

“전하와 저하 사이를 봉합하라는 명이십니까. 쉽지 않은 일이 될 것입니다.”

“아버님께서 나를 경계하신다는 사실은 뼈저리게 잘 알고 있다. 다만 아직까지 시도해볼 만한 가치는 분명 있을 것이다. 허나 일이 의도대로 풀리지 않는다면…….”

그때는 왕도 적으로 돌릴 각오를 해야 한다.

세자의 눈빛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목구멍으로 침이 꿀꺽 넘어갔다. 곧 조정에 불어닥칠지도 모르는 피 냄새가 코끝에 스미는 듯했다.

“하지만 너무 멀리까지는 보지 말자꾸나. 일단 앞에 닥친 일부터 하나씩 해결하다 보면 길이 열릴 것이다.”

“그 말씀이 옳습니다. 저하.”

“일단 우리가 발견한 거대한 화두부터 조정에 던지고 봐야지 않겠느냐. 청국에서 들여온 보물들 말이다.”

“마령서(馬鈴薯), 감저(甘藷), 낙화생(落花生) 말씀이십니까.”

세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김육이 노구를 이끌고 수차례나 파주까지 왕복할 정도로 대단한 보물들이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다던 고명딸의 혼인날에도 그가 이야기를 굳이 꺼낼 정도로 중대한 일임은 분명하지.

감자, 고구마, 땅콩.

청나라가 중원을 통일한 후 인구를 폭발적으로 증가시킬 수 있었던 작물계의 치트키 그 자체.

감자와 땅콩은 이미 파주에서 성공적으로 수확을 마쳤다고 했다. 그리고 세자가 서랍을 열어 꺼낸 꾸러미에는, 현대의 것보다는 조금 부실했지만 분명 고구마인 것이 분명한 덩이뿌리 몇 개가 들어있었다.

“마침 오늘 남도에서 올라온 파발이 전해준 물건이다. 재배법과 종자를 건네주고 시험 재배를 부탁했던 남도의 수령이 보낸 것이지.”

“따뜻한 곳에서만 자란다는 감저인데, 이것을 남도에서 수확할 수 있다면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재배도 어렵지 않고, 빈 땅에 수십 줄기만 심어도 식구가 여덟인 집을 능히 건사할 수확량이 나온다니……. 이 녀석들이야말로 조선의 미래를 바꿀 녀석들이다.”

“이것들을 조정에 던지시겠다는 말씀은…… 저하의 의도를 알겠습니다.”

내가 세자와 몇 년을 같이 일했던가. 이제 한 마디만 나눠보아도 나의 뜻이 세자의 뜻이고, 세자의 뜻이 나의 뜻이 될 경지에 이르렀지 싶었다.

“본격적으로 대립각을 세우기 전에, 산림들이 저하의 나라에 도움이 될 존재들인지 알고 싶으신 것이로군요.”

조용히 눈꺼풀만 몇 번 여닫는 세자였다.

이 새로운 작물들을 조정에 제출했을 때 어떤 반응이 나올 것인가.

농업을 제일로 치는 나라의 신하답게 이 혁명적 작물을 환영할 것인가. 아니면 청의 앞잡이가 유입시킨 믿을 수 없는 물건이라고 거부할 것인가.

조정에 던져진 감자와 고구마는 양 당파 간 탐색전의 시작을 알리게 될 것이다. 그것이 길고 긴 정쟁을 암시할 것인지, 아니면 다른 예상치 못한 결과를 불러올 것인지는 지금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네게 할 말은 이 정도다. 홍문관의 입번 자리를 오래 비웠으니, 곧 돌아가야 하지 않겠느냐.”

“저하의 뜻은 온전히 전달받았습니다. 돌아가 내일의 준비를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좋다. 역시 너를 심복으로 삼길 잘했다는 생각이 드는구나.”

세자는 그렇게 굳은 얼굴을 풀고 미소 짓더니, 서랍에서 물건 하나를 더 꺼냈다.

웬 서책 한 권이었다.

그것을 내 앞으로 밀어놓는 세자의 입꼬리에 올라앉은 웃음이 점점 진해지고 있었다.

“이것은 또 무엇입니까?”

“돌아가면서 들고 가거라. 빈궁이 전하는 선물이다. 네 몸은 이제 너 하나만의 것이 아니니, 몸을 아끼라는 말도 함께 전하더구나.”

“세자빈 마마께서 제 건강을 염려해주시는 겁니까? 헌데 어이하여 서책을…….”

“어젯밤 빈궁이 너에 대해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더구나. 퇴청한 후 그 서책을 읽어보면 이유를 알게 될 것이다. 이제 그만 물러가도 좋다.”

알쏭달쏭한 말이었다. 그러나 창문 밖으로 달이 한 뼘이나 밤하늘을 오른 모습을 보니, 그 이유를 세자에게 물을 시간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급히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종종걸음으로 자리에서 물러나는데, 여전히 짙은 웃음을 띠고 있던 세자가 뜬금없는 농담을 던진 것은 잠시 후였다.

방금까지 진지하게 미래를 논하던 사람과 동일인물이 맞나 싶었다.

“입번을 마치고 퇴청하더라도 부인은 적당히 괴롭히도록. 아무리 신혼이라지만 지나친 여색은 몸을 상하게 하는 법이다.”

“저하!”

※ 작가의 말

1. 당파 싸움

이번 화에 언급된, 인조 치세의 권력 구도가 잘 와닿지 않으시는 독자분들을 위해 부연 설명을 첨부합니다.

광해군 시절에 위세를 떨치던 북인 세력이 인조반정으로 숙청되고, 그 이후 조정을 지배한 것은 서인이었습니다.

인조 시기에는 그 서인의 세력이 두 부류로 나뉘는데요. 반정공신 세력인 공서파(公西派)와 대외정책에서 의리 명분론을 내세운 청서파(淸西派)로 나뉩니다. 보통 병자호란 당시 주화파를 전자, 척화파를 후자라 여기는데, 완전히 같은 집단은 아니지만 대략 일치한다고 보셔도 무방합니다. 이 글에서도 주인공이 성균관에 다니던 시절 주화파/척화파의 기준으로 붕당을 설명했을 것입니다.

다만 인조 말년에 들어서 귀국한 소현세자가 급사하고, 새로운 왕위계승자로 누구를 올려야 하냐는 문제가 발생하는데요. 이때 조정은 명분을 내세워 소현세자의 아들인 원손을 지지하는 산당과, 왕의 뜻을 받들어 봉림대군을 지지하는 낙당·원당으로 파벌이 갈리게 됩니다.

그리고 나머지 하나, 한당이라 불리던 세력은 실리 지향적인 실무 관료들이 모인 세력인데요. 후계 문제에는 뚜렷한 입장을 내보이진 않았지만 제도를 개혁하려는 성향을 띤 신하들이 모인 집단이라 볼 수 있겠습니다. 세력이 비교적 적었던 터라 산당과 협력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헌데 주인공이 성균관 시절부터 역사를 비틀어버린 바람에, 김자점으로 대표되는 공신 세력이 일찍 몰락하고, 구심점을 잃은 낙당·원당은 흩어져버린 상황입니다.

그래서 원 역사에서는 효종 대에서야 두각을 드러냈던 김육 등이 조금 이른 시점에 당파의 실세로 자리매김하면서 공신들의 빈자리를 메웠다고 설정했습니다. 그걸 견제하기 위해서 인조는 재야에서 사림들을 일찍 불러올려 신진 세력을 형성시켰을 것이고요.

그래서 원래는 ‘낙당·원당/산당·한당’의 대립구도였던 조정이 이 글에서는 산당과 한당, 둘만 남아 대립구도를 형성했다고 생각하시면 이해에 도움이 되실 것 같습니다.

2. 고구마 수확량

세자가 당대의 고구마 수확량을 언급한 대사는 서유구가 지은 <종저보(種藷譜)>에서 인용했습니다.

「진실로 식구가 여덟 사람인 집에서 무릇 묵혀두고 내버려 둔 공지에 고구마를 수십 구(丩, 덩굴) 심으면 굶어 죽지 않을 것이고 굶주리지도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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