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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 어사, 조선을 뒤흔들다!-96화 (96/298)
  • 96화. 고백

    “소저, 참으로 잔인한 일을 저지르셨더군요.”

    앉을 자리를 찾아 맴돌던 하연의 버선코가 멎었다. 병풍 앞 상석을 비우고 손님 자리에 앉아 있는 나 때문에 머뭇거리던 발 한 쌍이었다.

    “앉으시지요. 몸도 좋지 않으실 텐데, 제 앞에서 무리하는 모습은 다신 보이지 말았으면 합니다.”

    “다 알고 계셨던 것입니까.”

    고개를 끄덕였다. 미운 사람 같으니라고.

    하지만 슬며시 마음 한구석을 비집고 올라오던 원망도 잠시, 한양을 떠나기 전과 다를 바 없는 은은한 매화향이 코끝에 와 닿자 서운한 마음은 봄눈 녹듯 사라졌다.

    이 사람이 내 앞에서 숨 쉬고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다행이었다. 귀국하자마자 거짓된 이야기를 듣고 멘탈이 터졌던 일이 아직도 생생했으니.

    머뭇거리던 버선발 한 쌍이 이윽고 내 정면에 내려앉았다. 분명 당황하고 초조한 기색을 비칠 만도 하건만, 이 고운 사람은 이런 상황에서도 한 치도 흐트러진 모습을 보여주지 않고 있었다.

    “소녀, 나리께 참으로 많은 죄를 지었습니다.”

    “그걸 아시면서도…….”

    “나리께서 제게 품으신 마음을 알기에, 목숨이 다했다는 소식 정도는 전해야 마음을 끊어주실 줄 알았습니다.”

    만났을 때부터 하연이 건강한 편은 아니었단 사실은 대강 짐작하고 있었다. 그 나이까지 시집을 가지 않은 것도, 유난히 잠을 이루지 못했다던 이야기도, 내 앞에서 가끔은 가슴을 부여잡던 모습도 모두 한 가지 사실을 가리키고 있었으니까.

    어느 날부터 한양에서 보내오던 나비 수 놓인 옷가지가 끊어진 이유가 있었다. 심양에서 황녀의 일로 하연을 떠올렸던 날, 비녀에 금이 가고 내 손끝에 핏방울이 맺혔을 때, 그녀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기라도 했던 것일까.

    나를 향해 천천히 절을 올린 하연의 고개는 숙여진 채 올라오지 않았다. 흑단 같은 풍성한 머리칼 사이, 언뜻 비치는 가르마가 창백했다.

    “일정이 거짓 흉보를 전했을 때, 마치 세상이 무너져내리기라도 하는 줄 알았습니다. 어찌하여 거짓으로 죽음을 위장하신 것입니까.”

    “오라비를 통해 전해드렸던 내용 그대로입니다. 제가 돌림병에 걸려 세상을 떴다는 사실이, 겨우 목숨만 부지했다는 사실로 바뀌었을 뿐입니다.”

    “살아만 있으면 되는 것 아닙니까? 내가 옆에 두고 싶은 사람이 살아만 있으면 되는 것 아니냐 이 말입니다. 도대체 왜 나와의 혼사를 거부하시는 겁니까?”

    가슴이 갑갑했다. 이럴 거면 끝까지 얼굴이나 비추지 말 것이지.

    그러나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높아졌음에도 앞에 앉은 사람은 여전히 고개를 숙이고 있을 뿐이었다. 다만, 야윈 어깨가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했을 뿐.

    “내 일방적으로 남긴 약조라 하나, 소저를 면대(面對)하고자 이번 증광시에서 장원까지 따 왔습니다. 이 정도로도 내 진심이 와닿지 않았습니까?”

    “…….”

    “청국에서 보냈던 외로운 시간 동안 소저가 수놓아 보낸 옷가지가 주는 위안이 없었다면 버티기 힘들었을 겁니다. 청국의 황제가 황녀를 내려주겠다 유혹해도 거부할 수 있었던 것은 소저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

    “대체 제게 왜, 왜 이러시는 겁니까, 소저. 제가 무언가 잘못이라도 저지른 것입니까? 말씀을 해 보세요, 제발.”

    하연의 고개가 더 깊이 숙여졌다. 천천히 떨리는 가녀린 몸은 그녀가 품은 마음을 비추는 듯했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면 내 소저에게서 물러나겠습니다. 소저께서 제게 품었던 마음이 식었다 하시면 저도 마음을 끊어내겠습니다. 허나 그 전에, 제발 뭐라 말씀이라도 해 주십시오.”

    “…….”

    “제가 심양에서 돌아오거든 꽂아달라며 비녀를 건네주셨던 것이 아닙니까. 제가 연적을 드렸을 때 소저께서 지었던 표정도 똑똑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도대체 왜 나를 밀어내시는 겁니까?”

    “나리…… 소녀는…….”

    툭.

    잔뜩 메인 목소리와 함께 바닥에 떨어진 것은 눈물 한 방울이었다.

    그걸 본 시야에 쩍하고 깊은 금이 그어졌다.

    “나리 같으신 분이 고작 저 같은 하찮은 여인네 하나의 일로 그리 마음을 쓰시면…… 안 됩니다. 옳지 않습니다.”

    “하찮다니요? 그게 무슨…….”

    “나리, 이제 저는…… 저는 그때와 같은 사람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나리를 온전히 섬길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순간 불길한 어떤 생각 하나가 뒤통수를 스쳤다.

    하연이 그동안 크게 앓았던 적이 있다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설마 그 이상인가.

    “나리께서 소학을 소녀에게 가르치실 때, 이런 내용이 있었지요. 집안을 다스림에 있어 부모에게 효도하고 남편을 공경하며 자식을 잘 키우는 것이 이상적인 여인상이라고.”

    “소저께서 그 세 가지를 못해낼 분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무엇이 문제란 말씀이십니까.”

    “……예전에는 그랬지요. 허나 돌림병을 앓은 후, 제 몸이 많이 달라진 모양입니다.”

    “달라지다니요. 소저, 설마…….”

    그제서야 천천히 고개를 들어 얼굴을 보이는 하연이었다. 고운 모습은 한양을 떠나기 이전과 다를 것이 없는데, 언뜻 야위어 보이는 얼굴이 눈물로 가득 뒤덮여 있었다.

    “나리, 이번 증광시에서 장원의 자리에 오르신 것을 경하드립니다. 허나 소녀는 이제 그런 나리의 곁에 있기 어울리지 않는 몸이 되고 말았습니다.”

    “소저…….”

    “돌림병에서 목숨을 건진 이후로, 달거리가 예전처럼 비치지 않습니다. 나리를 기다리며 세월도 꽤나 흘러 나이를 먹어 버렸지요. 이대로라면 나리의 후사를…… 이어드리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망치로 맞은 듯한 충격이 뒤통수를 스치고 지나갔다.

    하연의 말이 뜻하는 것은 무엇인가. 후사를 잇지 못하게 되다니. 그렇다면…….

    “아버님과 오라비는 혼약과 상관없이 이전처럼 나리를 대하겠다 약속했습니다. 저는 결함 있는 여인입니다. 그러니…….”

    “소저!”

    “……나리, 소녀를 버려주시옵소서. 부탁입니다.”

    “소저께서 내게 어찌 그런 말을 할 수 있소? 어찌 내게…….”

    “나리께 어울리는 더 좋은 가문의 여식을 맞으셔야 합니다. 나리 같은 분의 아이를 낳지 못할지도 모르는 돌계집을 정처(正妻)로 맞는다는 것은…… 천부당만부당한 일입니다.”

    비정한 말을 꺼내는 입과 다르게 하연의 눈에서는 하염없이 눈물 한줄기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가슴이 죄여왔다.

    짐작조차 하지 못한 이유였다.

    그제서야 내게 주먹을 맞은 좌명이 왜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입술만 질근 씹었는지 그 까닭 역시 깨달을 수 있었다.

    “아버님은 아무것도 모르십니다. 그저 귀여운 고명딸이 마음이 변한 줄만 아시지요. 그러니 부디 걸림돌이 될 낡은 계집일랑 놓아두시고 좋은 인연을 만나시옵소서. 소녀의 마지막 소원입니다.”

    하연은 내게 시선을 맞추지도 못했다. 내리감은 그녀의 풍성한 속눈썹 끝에는 투명한 진주가 계속 방울져 떨어졌다.

    이제 명확히 알겠다. 그녀가 나를 속였던 이유를.

    허나 그 모습을 보니 이젠 머릿속에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돌림병? 후사? 그게 뭐 어쨌다는 것인가. 몸이 나도 모르게 움직여 그녀를 끌어안았다.

    “나리? 이러시면 아니 됩니다!”

    큰 의미가 있는 행동은 아니었다. 그저 이 애달파하는 여인을 위로하고 싶었을 뿐이다.

    작은 샘물처럼 연신 흘러나오는 그녀의 슬픔을 더 이상 보고 싶지 않았을 뿐이다.

    “이러면 안 되는 짓을 한 사람은 소저가 아닙니까.”

    “놓으십시오. 선비 되신 분이 지금 아녀자를 희롱하시는 겁니까?”

    하연의 머리를 반쯤 끌어안은 채 소매를 들어 그녀의 눈물을 훔쳤다. 짙은 매화 향기가 콧속을 훅 간지럽혔지만 개의치 않았다.

    “멈추지 않으시면 소리라도 지르겠습니다. 이제 그만…… 그만둬 주세요.”

    말과 행동이 다른 것을 본인이 알아야 할 텐데.

    가볍게 버둥거리며 나를 밀치려는 하연이었지만 반항은 그리 거세지 않았다. 손목을 틀어쥐고 눈물을 마저 닦아내자 그녀의 떨림이 손끝을 통해 전해져 오기 시작했다.

    “쉿. 그것을 듣고 누가 오기라도 하면 오히려 곤란한 것은 소저가 아니겠습니까. 잠시만, 정말 잠시만이면 되니 진정부터 하십시오.”

    “하지만, 하지만…….”

    더는 반항이 없었다. 소매를 계속해서 적시던 눈물도 이제는 끝이 보이고 있었다. 떨림은 가라앉고 하연의 야위었던 얼굴은 점점 혈색을 찾기 시작했다.

    “내 옆에 둘 여인은 내가 결정합니다. 소저. 더는 아무 말 마십시오.”

    “나리께서도 제가 왜 이러시는지 누구보다도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이러시면 저만 곤란해집니다.”

    “소저도 제가 어사화를 하사받자마자 이 자리로 달려왔다는 사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아시지 않습니까. 멀고 먼 몇천 리 밖 청나라 땅에서까지 소저를 잊지 않았다는 사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아시지 않습니까.”

    하연의 뒷머리를 감쌌던 손을 천천히 그대로 당겼다. 그녀의 고운 입술에서 무언가 반박이 튀어나왔지 싶었으나 무시하고 그대로 그녀를 끌어안았다.

    눈물을 흘리며 몸을 떨던 그녀는 천천히 안정을 되찾고 있었다. 차갑게 식었던 하연의 몸에 천천히 내 체온이 옮겨가는 것이 느껴졌다.

    “괜찮습니다. 그깟 후사, 혹여나 생기지 않거든 호남의 친족에게서 양자라도 들이면 되는 일 아니겠습니까. 전례가 없는 일도 아니고요.”

    “하지만……!”

    “그리고 아이를 낳아 기르는 것이 여인이 가져야 할 덕목의 전부라고 가르친 기억은 없습니다. 부모에게 효를 다하고, 남편을 공경하며, 집안을 다스리는 것 또한 덕목이 아니었습니까. 제가 없는 동안 복습에 소홀하셨던 것인지요.”

    어깨에 얹은 하연의 머리가 가볍게 떨려왔다. 방금처럼 슬픔이 담긴 떨림이 아니었다. 관복의 옷깃 역시 더는 젖어 들지 않았다.

    “실은 당신을 만나 조금 불평을 할까 했습니다. 그대가 나를 속인 덕분에 마음고생도 심했고, 준비한 과거 또한 망칠 뻔하지 않았습니까.”

    “그걸 아시면서도 어째서 저를…….”

    “허나 그대를 만나 설득하겠다는 일념 하나로 받은 것이 이 홍패입니다. 그대 없이 이것이 가능했을 것이라 생각하지 않습니다.”

    내게 안긴 여인의 등을 천천히 토닥거렸다. 급히 울음을 멈춘 탓인지, 다시 울음이 터진 탓인지 하연이 가볍게 끅끅거리며 체중을 더해왔기 때문이었다.

    “후사를 남기는 일이 지어미의 본분임은 노비들도 아는 사실입니다. 어찌 제가 나리의 옆자리를 탐내겠습니까. 그러니 부디…….”

    “어허, 그런 말은 이제 그만하라지 않았습니까.”

    자꾸만 가슴을 파고드는 정인의 턱 아래 손을 받쳤다. 그제서야 하연의 얼굴을 몇 년 만에 제대로 볼 수 있었다.

    여전히 고운 얼굴이었지만, 이전보다 푸석푸석해진데다 눈물로 부어오른 얼굴은 병색을 숨기지 못하는 상태였다.

    “쉬이. 이젠 아무 말도 하지 마십시오. 그저 이대로 내 말을 듣기만 해 주세요.”

    “…….”

    “아이는 하늘이 점지해주시는 것이라 배웠습니다. 소저의 몸 상태가 이대로 지속될 것이라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의원에게 계속해서 보이면 차도라도 보이겠지요. 아직 우리는 젊지 않습니까.”

    “…….”

    “내 아내가 되어주세요. 곧 하사받을 집에서 그대가 나를 기다릴 것이라는 상상만 해도 앞으로의 조정 생활을 쉬이 버텨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잠시 멍하니 있던 하연의 눈에서 다시 눈물이 흐르는 것이 보였다. 입술을 곱씹으며 터져 나오는 신음을 참던 그녀는 다시 내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이번 울음의 의미가 이전과 다르다는 것은 삼척동자도 알 것이다. 지금 내 가슴이 조여드는 방향 역시 다르다는 것도.

    ***

    그렇게 울음을 터뜨린 하연을 한참 동안 안고 있었다.

    눈물로 내 가슴을 적시면서도 품을 벗어나지 않는 그녀가 할 대답은 이제 하나뿐이었으니까.

    “그리고 이렇게 쉽게 무너지시기 싫으셨다면 당신도 비밀을 좀 더 꽁꽁 숨기셔야 했습니다. 자초지종을 안 내가 어떻게 행동할지 정도는 예상하셨어야죠. 요안이 녀석 입단속도 잘하셨어야 하고요.”

    “요안이 짓이었나요. 그 아이를 제게 맡기신 이후로 아우처럼 여기며 보살폈는데 그런 짓까지 할 줄이야…….”

    “오히려 그 녀석이 울면서 그대를 살려 달라 찾아오지 않았더라면 당신 오라비의 입에서 진상을 들을 생각도 못 했을 겁니다. 제겐 너무나 감사한 일이었습니다.”

    “제 앞에서는 늘 밝기만 한 아이였습니다. 찡그리는 것이 상상이 안 될 정도로요. 그런 아이가 저를 위해 울며 나리를 찾아갔다니…… 그것 또한 상상이 잘 안 되네요.”

    “이제 열여섯인데 왈가닥인 것은 여전한 모양이군요. 박 초관이 속 좀 썩이겠습니다. 하하.”

    내가 가볍게 웃자 품에 안겨있던 하연 역시 따라 웃음을 흘렸다. 그 웃음소리는 방금까지 넘쳐나던 울음 대신 넓지 않은 사랑방에 천천히 퍼져나갔다. 마치 따스한 물이 담긴 욕조에 몸을 누인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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