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호랑이 어사, 조선을 뒤흔들다!-93화 (93/298)
  • 93화. 사필귀정(事必歸正)

    희미하게 먼지 냄새가 났다.

    병풍 뒤라고 청소가 덜 된 것인가. 내일 지시할 것이 하나 더 생겼구나.

    “오랜만에 뵙습니다요, 세자 저하. 소인이 찾아온 것은 다름이 아니라…….”

    “쓸 데 없는 말은 집어 치워라. 정명수. 나를 찾아온 저의가 무엇이더냐.”

    “같은 조선 사람끼리 이러시면 섭섭합죠. 마마.”

    “같은 조선 사람? 청국어로 이름까지 갈아치운 놈이 혀가 길구나.”

    병풍 틈으로 보이는 세자의 뒤통수에서도 표정이 읽히는 듯했다. 그러나 정명수를 앞에 두고도 세자는 용케도 평상심을 유지한 모양이었다. 연기실력이 제법 뛰어나시군.

    그보다 정명수 저 건방진 놈. 여기가 어디라고 그 낯짝을 들이미나.

    상황 파악이 됐으면 당장 이마를 마당에 들이박고 몸을 하늘로 향해 솟구쳐 그랜절이라도 올리지 않고.

    허나 그러지 않는 것을 보면 놈이 멍청하거나, 사태가 어떻게 굴러가는지 판단을 못하고 있거나, 둘 중 하나인 것이 분명했다. 놈은 소매 속에서 뇌물임이 분명한 꾸러미를 꺼내고 있었는데, 입가에 올라앉은 비열한 웃음이 심히 역겨웠다.

    “헤헤, 마마. 이것을 받으시고 지난 일일랑 물에 물 탄 듯 흘려보내지 않으시렵니까요?”

    “감히 내게 뇌물이라도 바치겠다는 것이냐?”

    “어떻게 그런 말씀을! 뇌물이라니요, 귀국하시는 마마께 바치는 선물이 되겠습니다요.”

    금주에서 처음 봤던 자리에서는 카간의 위세를 빌려 건방지던 놈이 공손하기 이를 데가 없었다. 알랑거리는 꼴이 궁둥짝에 꼬리라도 하나 달린 듯했다.

    천민의 신분으로 청에 넘어가 저 자리까지 올라가면 저 정도 간신 기질은 있어야 하는 건가. 원역사에서 사신으로 찾아온 조선에서 온갖 갑질을 하던 놈과 동일인물이 맞나 싶을 정도였다.

    병풍 뒤에 숨어서 이 장면을 지켜보는 내 입에서도 다른 뜻으로 감탄이 나오고 있었다.

    “자, 보십쇼! 황실에서 하사받은 벼루입니다요. 천금을 줘도 못 바꿀 물건입죠!”

    “그렇게 귀한 물건을 왜 내게 바치는 것이냐? 애초에 그렇게 비싼 벼루는 쓸 일도 없느니라. 팔아서 재물로 바꿀 정도로 궁핍하지도 않다.”

    “아이고, 마마. 제가 그걸 몰라서 그러겠습니까요? 한양으로 돌아가시면 전하께 ‘청국을 잘 다녀왔사옵니다.’하고 바칠 선물이 필요하지 않겠습니까요! 아이고 갑갑해라.”

    벼루? 야사에서 능양군이 소현세자에게 집어던졌다던 벼루가 저건가?

    야사는 야사일 뿐, 실제로 일어났을 리 없는 일이건만 왠지 호기심이 생겼다. 내 영향을 받아 바뀌었을 세자는 어떤 선택을 내릴까.

    “당장 치워라. 아버님께 바칠 물건은 이미 넘치도록 있으며, 네가 쓸데없이 간섭할 일 또한 아니다.”

    “아닙죠, 아닙죠. 물론 마마께서 선물을 충실히 준비하셨겠지만, 거기에 선물 하나를 더한다고 전하께서 싫어하시겠습니까요? 혹여나 이 벼루가 마음에 안 드신다면 이것은 어떻겠습니까요?”

    그렇게 호들갑을 떨던 정명수는 주머니를 뒤져 꾸러미 하나를 황급히 꺼내놓았다. 서두른 탓에 그가 꺼내놓은 꾸러미에서 누렇게 빛나는 덩어리 하나가 튀어나와 세자의 서안을 굴렀다.

    그것을 본 세자의 목덜미는 살짝 떨려왔으나, 다행히 주머니를 건네자마자 고개를 처박은 정명수는 그것을 보지 못한 듯했다.

    “황금……?”

    “소인이 비록 청나라 이름을 받고 입에 풀칠을 하고 있지만, 어떻게 고향을 잊고 살아가겠습니까요? 다 조선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나온 것이니, 요긴하게 써주시면 됩니다요!‘

    “정명수, 내게 이런 거금을 바치는 이유가 무엇이냐? 네가 심양에서 우리를 대하던 태도를 생각하면 아직도 이가 갈리거늘.”

    “아이고, 저하! 오해, 오해가 있어서 그렇게 된 일이 아니겠습니까요. 저도 조선에서 동지중추부사 자리까지 받은 자인데, 감히 저하를 해하려 했겠습니까요. 오해십니다. 오해.”

    오해라.

    그래서 용골대의 힘을 빌려 놈의 횡령을 고발한 시강원의 관원과 서리를 목매달았나.

    참자, 참자.

    맥주도 갈증으로 죽기 일보 직전이 가장 맛있는 법이다.

    남원에서 바늘을 꺼내 내 허벅지를 노리던 어사를 떠올리며 부들거리는 주먹을 겨우 눌렀다. 세자 역시도 열심히 뻗치는 화를 참고 있는 것 같았다.

    “입에 풀칠을 한다는 자가 바치는 물건치고는 값나가는 물건이 아니냐? 바른대로 고해라, 정명수. 나를 찾아온 이유가 무엇이냐.”

    “소인을 의심하시는 것입니까요? 저는 그저 세자마마와 쌓인 오해를 풀고자 온 것입니다요! 놈들이 저를 무고해서 일어난 일인데, 그것을 풀려는 의도까지 오해하시면 섭섭합니다요.”

    “오해를 풀고 싶었다면 더 일찍이 나를 찾아왔겠지. 내가 네놈의 목줄을 틀어쥔 것이 있기 때문에 찾아온 것이 아니냐?”

    처박혀있던 정명수의 고개가 살짝 올라왔다. 작게 째진 놈의 눈망울만이 앞을 향해 세자의 얼굴을 훑고 있었다.

    “헤헤, 역시 마마께서는 말이 통하시는 분입니다요.”

    “속히 말하지 못할까. 늦은 시간에 방문한 주제에 민폐가 길어지지 않느냐.”

    “실은 섭정왕의 수하들이 제 뒤를 캐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죠. 혹여나 그것이 마마께서 의도하신 일이 아닐까 해서…….”

    “…….”

    “아하, 마마께서 하신 일이 아니구만요! 섭정왕의 총애를 받는 그놈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냐.”

    “괜한 걱정을 했습니다요. 하긴 그랬다면 회동관 대문에서 쫓겨났지 않겠습니까요. 헤헤.”

    아냐, 네 생각이 맞아. 용케도 알아챘구나. 다만, 눈치가 좀 없는 게 아쉽네.

    정명수가 굳이 세자를 독대하자고 한 이유가 확실해졌다. 내가 없는 사이 유약해 보이는 세자를 포섭하겠다?

    세자가 아직 표정 관리를 잘 하고 있는 모양인지, 정명수의 얼굴에는 의심의 빛 하나가 없었다.

    “마마, 원하시는 것은 뭐든지 드리겠습니다요. 혹시 심양관에 세폐의 출납기록이 남아있다면 그것을 조금…….”

    “횡령의 증거를 없애 달라, 이 말이냐.”

    “예! 예! 바로 그것입니다요! 역시 세자 마마십니다요! 역시 찾아오길 잘했습니다요!”

    작은 눈이 눈에 띄게 커질 정도로 세자의 반응을 반기는 정명수였다.

    나도 모르게 새어나오는 웃음을 간신히 틀어막았다. ‘찾아오길 잘했다’라.

    저 멍청한 작자는 그 와중에 세자의 목소리가 차갑게 식은 것을 눈치 채지 못한 모양이었다.

    슬슬 마음의 준비를 해 볼까.

    “원하는 것 따윈 없다. 이까짓 벼루와 황금, 내겐 털끝만큼도 필요 없는 물건들이다.”

    “예?”

    “정말로 내가 그러길 바란다면, 네놈이 앗아간 내 백성들의 목숨부터 원상태로 돌려놓는 것이 어떠냐?”

    세자가 크게 열어젖힌 창문 틈으로, 서안에 놓여있던 꾸러미가 하늘을 날았다. 마당에서 무언가 박살 나는 소리가 방안으로 스며들었다.

    신호인가.

    “또한, 네가 한 걱정 역시 괜한 걱정이 아니니라.”

    “이게…… 이게 무슨 짓이십니까요?”

    “사냥감이 냄새를 맡았구나. 안 자의.”

    세자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나는 정명수를 향해 몸을 던졌다. 병풍이 옆으로 쓰러지며 낸 큰 소리가 뒤따라왔다.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채 눈만 꿈뻑거리는 정명수의 왜소한 몸을 제압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악! 악! 넌 누구야? 이게 뭐 하는 짓이야!”

    “‘섭정왕의 총애를 받는 그놈’이시다! 밖에 누구 없느냐! 당장 오라를 대령하라!”

    “네놈이 여긴 어떻게? 세자 당신……!”

    “저하께 못 하는 말이 없구나. 당장 사죄드리지 못할까?”

    마음 같아서는 오라가 아니라 개작두라도 대령하고 싶은데, 여기가 송나라 시절 개봉부가 아닌 것이 아쉬운걸.

    이미 내 체중에 눌려 몸도 꿈쩍 못하는 놈이 입만 살아 있었다. 뒷짐을 지우고 붙잡은 팔을 살며시 꺾어주자 방안은 순식간에 비명으로 가득 찼다.

    “얼마나 저하를 얕보았으면 저하를 상대로 이딴 거래를 하러 왔단 말이냐. 멍청한 놈.”

    “끄아아아악! 어떻게…… 어떻게……!”

    “네놈이 늑대를 피해 호랑이 굴에 들어온 결과다. 순순히 받아들이도록.”

    그제서야 사태를 파악하고 몸부림을 더 쳐보는 정명수였지만 내 힘을 당해낼 도리는 없었다.

    놈의 어깨에서 불길한 뿌득 소리가 나도록 힘을 더 주어 꺾었다. 놈의 입에서 역겨운 비명이 한 차례 터져 나왔다.

    “게다가 고작해야 그 정도 재물로 일국의 세자를 매수하려 하다니. 역관답게 통이 너무 작지 않느냐. 저하의 쌓인 원한까지 풀어드리려거든 이 방을 황금으로 채워도 모자랐을 터인데.”

    “으…… 으으! 당신들, 후회할 거야? 내가 잉굴다이님이나 조선 조정에 말 한마디만 하면…… 으악!”

    “이번 일은 섭정왕 전하의 뜻이고, 세자 저하의 뜻이다. 청국의 위세를 업은 자에게 조정에서 은전을 좀 건넸다고 간덩이가 부은 모양이구나!”

    다시 한번 놈의 팔을 잡고 있는 손에 힘을 주자, 정명수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곧이어 나타난 내관이 놈을 밧줄로 꽁꽁 묶고 입에 재갈을 물렸다.

    뭐, 이렇게까지 했으니 세자가 머리에 벼루를 맞는 미래는 사라졌겠지?

    “이 자를 창고에 가두고 날이 샐 때까지 감시해라. 날이 밝으면 나와 안 자의가 직접 입궁해 처분을 논의하겠다.”

    ***

    다음날, 꽁꽁 묶은 정명수를 끌고 자금성에 입궁했다.

    연락을 받고 마중 나온 청나라 관원들에게 죄인을 넘겨주면 일은 끝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궁 밖을 향해 걷던 나와 세자에게 전해진 것은 집무실로 들라는 도르곤의 명이었다.

    “저번이 마지막으로 보는 자리인 줄 알았는데, 너는 언제나 내 예상을 깨 놓는구나.”

    “부탁드렸던 사냥감이 갑자기 그물 속으로 들어왔는데, 그걸 놓아 보낼 필요는 없지 않겠습니까. 더구나 그 일이 섭정왕 전하의 노고를 덜어드릴 일이라면 더욱이요.”

    집무실에 들자마자 예전처럼 세자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이 내게 말을 걸어오는 도르곤이었다. 그러나 조선으로 돌아가는 일이 확정되어서 그런지, 세자는 전처럼 도르곤의 태도에 민감하지 않은 듯했다.

    도르곤과 세자 사이에서 죄인 정명수의 처분에 관해 오간 이야기도 금방 끝을 보였다. 둘의 뜻은 일치했고, 낭비할 시간도 없을 테니 당연한 결과일 테지.

    하지만, 그렇게 일을 마치고 바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도르곤이 세자에게 자금성 산책을 권했기 때문이었다.

    여러 해 동안 본 세자를 돌려보내려니 감회가 새롭다는 핑계였다.

    “……잠시 두 분만 있게 해달란 말씀이십니까?”

    세자와 나를 이끌며 걷던 도르곤의 걸음이 내조와 외조를 가르는 건청문(乾淸門)에 이르렀을 때였다. 갑자기 도르곤은 세자와 단 둘이 할 말이 있다며 내게 자리에 대기할 것을 명했다.

    “친왕과 세자 사이에 오갈 대화다. 무슨 뜻인지 알겠지?”

    “아……. 알겠습니다. 섭정왕 전하.”

    “하. 일이 이렇게 되는가. 결국 그 녀석 부탁을 들어주어야 하는 모양이군.”

    영문 모를 말을 남기고 도르곤과 세자가 멀어져갔다.

    잠시 자금성 한가운데에 떨어져 꿔다놓은 보릿자루 신세가 되었으나 그리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생각해보면 북경 입성 이후로 이렇게 여유가 있었던 것도 오랜만이었으니까.

    그렇게 하늘에 떠가는 구름을 보며 따사로운 햇살을 만끽하던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문득 곁에서 느껴진 인기척에 뒤를 돌아보니, 그 자리에 시녀 차림을 한 여인 하나가 서 있었다.

    여기서부터는 시녀가 함부로 나다니면 안 되는 공간이었다.

    건청문 건너의 공간, 황족들이 머무는 내조로 그녀를 돌려보내려 막 몸을 돌렸을 때였다.

    익숙한 사람의 익숙한 차림새였다.

    황녀 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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