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호랑이 어사, 조선을 뒤흔들다!-90화 (90/298)
  • 90화. 갑작스러운 통보

    낙승이었다.

    그 후로 이야기를 나누는 내내 피터르의 얼굴에 생기가 감돈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젤란디아의 총독과 나가사키의 상관장에게 보낼 친서를 작성하는 동안, 그는 내 쪽을 가끔씩 흘끗거릴 뿐이었다. 마치 괴물이라도 보는 듯했다.

    그 면상에 다시는 조선을 무시하지 말라 쏘아붙이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그런다고 ‘잘못했다, 사과한다, 미안하다’라는 말을 할 리도 없고, 피터르 하나 누른다고 무엇이 달라지겠는가.

    내가 한문으로 작성한 친서를 아담 샬이 라틴어와 독일어로 번역하고, 피터르가 그것을 다시 네덜란드어로 옮기는 작업은 꽤 시간이 걸렸다. 옆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세자가 내게 말을 걸어온 것은 그때였다.

    “안 자의, 방금 저 하란타인을 몰아붙인 사실들을 네가 어찌 알게 된 것이냐? 저자의 태도가 급변한 것을 보면 그냥 무작정 생각나는 대로 뱉은 것은 아닐 테지?”

    “상인들을 관리하며 취합한 소문일 뿐입니다. 너무 심려치 마시지요.”

    “그럴 리 없다. 심양까지 저 먼 남방의 소문이 퍼졌을 리 없지 않느냐. 왜국에 하란타의 상관이 들어섰다는 이야기는 더더욱 그러하다.”

    “저하, 소문의 출처가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그것이 조선의 국익에 부합하는지가 더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세자의 푸른 용포가 순간 흔들렸다.

    잠시 깊은 생각에 빠진 듯한 세자였으나, 친서의 번역이 완료되었다는 아담 샬의 목소리에 세자는 금방 상념에서 깨어나야 했다.

    “부디 이번 만남이 조선과 홀란드, 홀란드와 조선 양국에게 이득이 되었으면 좋겠군요. 좋은 만남이 되었길 바랍니다.”

    “고맙네, 탕약망. 자네에게 도움이 되는 일이 아님에도 이렇게 흔쾌히 도와주어서 정말로 고맙네.”

    “저하 같은 분을 만난 것도 행운인데, 어찌 돕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가볍게 고개를 숙여 예를 표하는 아담 샬이었다. 그러나 세자와 아담 샬의 훈훈한 분위기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그을린 피부의 선원이 나를 보며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던져왔기 때문이었다.

    “저자가 뭐라 말하는 것입니까?”

    “그게…….”

    “통역해 주십시오. 감정 어른.”

    “정보가 어디서 새어나갔는지 반드시 찾아내겠다는군요. 조선 같은 나라까지 알려졌다면 큰 일이 아닐 수 없답니다.”

    하. 뒤끝 한 번 요란한 놈이었다.

    그래도 대답 정도는 해 주는 게 나으려나.

    “정보는 독자적으로 입수한 것이니 새어나갈 일을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전해주십시오. 다만…….”

    “다만?”

    “그런 걸 걱정하기 전에 세자 저하께서 투자할 내탕금을 어디 신기한 알뿌리꽃에 투자했다가 날리는 일은 없어야 할 것입니다. 말 그대로 피 같은 재물이거든요.”

    피터르의 입이 딱 벌어졌다. 얼마 전, 암스테르담의 튤립 거래가에 거품이 잔뜩 끼었다가 그것이 붕괴한 건을 지구 반대편의 선비가 어떻게 알았는지 열심히 추리해 보라지.

    ***

    “그래, 이게 그 코레아 왕위 계승자의 친서라 이건가.”

    “예, 그렇습니다. 엘세라크님. 그자가 젤란디아의 총독에게도 같은 편지를 보냈습니다.”

    얀 판 엘세라크, 데지마의 상관장은 끼고 있던 외알 안경을 지그시 고쳐 썼다. 온통 비밀로 감춰져 있던 동방의 나라에서 날아온 친서에는 믿기 어려운 내용들이 가득했다.

    ‘어째서 피터르같이 멍청한 놈이 이런 기회를 낚아채 온 거지?’

    감히 오라녜 공 마우리츠를 암살하려던 애비 덕분에 평생 바다를 떠돌아도 모자랄 놈이었다. 할아비가 동인도회사를 세울 때 큰 기여를 남기지 않았더라면 이렇게 목숨이나마 건져 선원 일을 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놈이 엄청난 대어를 낚아왔다. 일국의 왕위계승자가 먼저 동인도회사에 접촉해왔다. 그것도 어마어마한 제안과 함께.

    “적혀있는 내용은 전부 사실이겠지?”

    “물론입니다! 믿을 수 없었던 나머지 그들에게 실례를 저지르긴 했습니다만, 그 덕분에 코레아인들이 진심으로 나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피터르가 저지른 ‘실례’가 무엇인지 전해 들은 엘세라크는 이마를 짚었다.

    이 멍청한 놈은 떠봐도 되는 상대와 그렇지 않은 상대조차 구분하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자칫했다간 품 안으로 굴러들어온 황금을 걷어찰 뻔하지 않았는가.

    “멍청한 놈! 네놈이 모든 일을 망칠 수 있었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내가 직접 갔어야 했는데!”

    “웬 예수회 신부의 요청이라기에 저를 보낸 것은 상관장님이잖습니까. 저에게 책임을 뒤집어씌우시면 곤란합니다.”

    “아직도 입만 살아서는! 이 자들이 투자한다는 금액을 보긴 한 거냐! 은을 길더로 환산하면 자그마치 이만오천 길더다! 우리 정부가 VOC 초기에 투자한 금액과 같은 수준이란 말이다!”

    코레아의 ‘세자’라 불리는 자는 어마어마한 은을 동인도회사에 투자하려 하고 있었다. 허나 엘세라크의 폐부를 직접 쑤셔오는 조항은 투자금의 액수가 아니었다.

    “투자되는 은은 홀란드 현지 시세가 아닌, 중원의 시세로 계산하여 차입하고 증서를 발급하라고? 본국에서 은 시세가 더 값쌌던 시절의 일을 이 자들이 어찌 알았지?”

    “갈레온으로 실어가면 본국에서 은 대비 금의 가치가 대략 두 배가 되었던 사실까지 알고 있었습니다. 지금은 지나의 은 시세가 안정되어 그걸로 돈벌이가 안 되는 것도 정확히 알더군요. 그뿐만이 아닙니다, 상관장님.”

    세자의 심복이 얼마 전 일어났던 튤립 파동까지 암시했다는 말을 들은 엘세라크의 입이 떡 벌어졌다. 그가 온 유럽 땅에서도 아는 이가 드문 일이었다.

    도대체 어떻게?

    “만만히 볼 자들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 일에 개입했다가 손해만 보는 것이 아닐지…….”

    “멍청한 놈! 네놈이 그러니 아직도 높은 자리에 오르지 못하는 거다!”

    “예?”

    얼이 빠진 피터르를 앞에 두고 상관장의 머리가 빠르게 돌아갔다.

    위기는 곧 기회라 했던가. 허공을 좇는 그의 시선 너머로 누런 황금이 반사하는 빛이 잔뜩 비치는 듯했다.

    “봐라, 이 야판(일본)의 막부라는 자들은 어떠냐. 우리가 크리스천을 퍼뜨리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고작 이 좁은 데지마 하나만을 열어두고 제한적으로만 통교하고 있다.”

    “그렇습니다. 그래서 상관장님이 오신 거고요.”

    “끝까지 들어라, 멍청이! 그렇다면 밍이라 부르는 지나 놈들은 어떻고? 그놈들은 해군을 동원해 우리를 거점에서 쫓아냈고, 지나 국적의 상단은 우리의 가장 큰 라이벌이 되었다.”

    “제가 그 정도도 모를 것이라 생각하신 겁니까? 너무하십니다.”

    이 멍청이를 어디 말라카나 바타비아로 쫓아내 버리고 자신이 직접 페킹(북경)으로 갔어야 했다. 피터르가 조금만 더 클라이언트의 심기를 건드렸다가는 일생 최대의 기회를 날려버렸을지도 몰랐다.

    “그런 상황에서 차기 왕이 될 자가 우리와 거래를 트고 싶다는데, 거기서 그렇게 뻗대는 태도를 보여? 네놈, 이 친서를 들고 오지 못했었다면 내가 직접 나가사키 앞바다에 네놈을 처박았을 거다!”

    “아이고, 잘못했습니다! 상관장님!”

    피터르 같은 놈이 이 친서의 가치를 알아볼 리가 없었다.

    코레아의 차기 왕은 분명 해외 사정에 능통하고, 투자 이야기를 한 것을 보면 상업에도 큰 이해도를 가지고 있다. 그런 자가 우리를 사업 파트너로 지목해왔다.

    갑자기 입맛이 싹 돌았다.

    쇄국, 규제, 제한. 막부 놈들에게 당하며 쌓여왔던 체증이 한 번에 쑥 내려가는 기분.

    “그래도 상관장님, 이상하지 않습니까? 이 야판보다 더 엄격하게 문을 닫아 건 나라의 사람들입니다. 저들이 어떻게 이런 세세한 정보를 입수했겠습니까?”

    “그게 중요하냐? 그들이 돈이 될 것이라는 게 중요하지? 어차피 왕위계승자가 왕이 될 때까지는 아직 시간이 조금 있다. 그 안에 정보를 조금이라도 더 긁어모아!”

    친서에 적힌 내용대로라면 이 대담한 코레아인들은 곧 페킹을 떠나 본국으로 돌아간다고 했다. 세자가 왕이 될 때까지 대놓고 접촉할 기회가 더는 없는 것이 아쉬웠지만, 그 문제에 대해서도 대안을 제시한 그들이었다.

    ‘당분간은 코레아 땅에 표류한 벨테브레이라는 자의 핑계를 대어 왜관을 통해 서신을 보내라? 그쪽에도 머리가 잘 굴러가는 자가 하나쯤 있나 보구만?’

    황금의 땅 지팡구를 찾아온 엘세라크였지만 아직 그 땅에서 거둔 수확은 신통치 않았다.

    최대의 적인 에스파냐가 금은 시세의 안정으로 재정적 파탄을 맞고 있는 상황에서, 신생국 네덜란드가 뻗어나가기 위해서는 이 극동의 땅에서 새 먹거리를 뭐라도 찾아야 했다.

    그런 상황, 바다 안개 속 감춰진 비밀의 나라에서, 드디어 황금의 냄새를 맡았다.

    엘세라크의 직감이 그렇게 속삭이고 있었다.

    ***

    “숙부섭정왕(叔父攝政王)에 임명되신 것, 감축드립니다. 전하.”

    “네가 보기에는 지금 이 상황이 축하받을 상황으로 보이느냐? 용건이 있거든 빨리 말하고 돌아가도록 해라.”

    자금성 외조, 새로 들어선 도르곤의 집무실은 매우 혼잡했다. 좌섭정왕에서 숙부섭정왕으로 한 단계 칭호를 높인 도르곤은 나랏일로 오가는 신하들을 상대하느라 정신이 없어보였다.

    청이 북경으로 천도한 이후 그 후속 사태를 훌륭하게 수습해 승진한 것은 좋았겠지만, 본래 우섭정왕이던 지르가랑이 계속해서 본인이 맡은 내정까지 자꾸 떠넘긴다며 볼멘소리를 하는 도르곤이었다.

    “너무하시지 않습니까. 잘안 장긴의 인수(印綬)를 양백기의 기주(旗主)께 반납하러 온 길인데, 이렇게 쫓아내실 수 있습니까.”

    “하, 나를 배신하고 고려로 떠나는 놈한테 무얼 더 해줘야 하느냐. 됐다. 들어와 앉아라, 아르가투.”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작성하던 서류를 밀어놓는 도르곤이었다. 그가 내린 눈짓을 받고 밖으로 나간 환관이 집무실로 들어오려던 신하들을 막아 세우기 시작했다.

    “잘안 장긴의 도장만 환수하시고 저를 돌려보내실 줄 알았습니다.”

    “네놈이 타스하 잘안 일에만 관련된 게 아닌데 그럴 리가 있겠느냐? 이렇게 일을 벌여놓고 고려로 돌아간다니, 진작 형님께서 처음 너에게 다이칭 구룬을 섬기라 명하셨을 때 그 손을 잡았어야지.”

    도르곤은 아직도 내가 청에서 떠나게 된 일이 서운한 모양이었다. 그때 홍타이지의 제안을 받아들였다면 나를 시기한 반대파가 생기기 이전에 나를 고위층으로 끌어올릴 수 있었다며, 아쉬운 입맛을 다시는 도르곤이었다.

    “하, 멍청한 놈들 같으니라고, 그깟 출신이 뭐라고 말이지. 정작 네놈을 탐탁지 않게 보는 놈들 중에 내 수고를 덜어주는 놈 하나가 없구나. 빌어먹을.”

    “저번에 말씀드렸던 대로 북경에서 한조(漢朝)를 섬기던 관원들을 중용하십시오. 이번에는 다른 이들이 질시를 느끼지 않을 정도로만 말입니다.”

    “알고 있다. 안 장긴도 고려로 쫓아내더니, 이번에는 남쪽으로 도망친 적에게 인재들을 갖다 바칠 속셈이냐고 따져 물으면 그놈들 입도 다물어지겠지.”

    소매에서 비단주머니로 감싼 장긴의 인장을 꺼내 도르곤에게 건넸다. 도르곤은 내 얼굴을 한참 동안 빤히 바라보더니, 최대한 천천히 그 물건을 받아 책상 위에 놓았다.

    인장을 받기 싫다는 티가 팍팍 났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이야기를 들어보니 청나라에는 내 자리가 원래부터 없었던 것을.

    듣도 보도 못한 볼모의 처지였던 나였다. 그런 내가 청나라 안에서 영향력을 끼치게 된 것은 분명 도르곤과의 만남 이후부터였다. 이렇게 건강한 소현세자와 일찍 조선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된 것은 분명 앞에 앉아있는 섭정왕 덕분이었다.

    “너답지 않게 고개는 왜 숙이고 있느냐? 형님을 섬기지 못 하겠다 버티던 놈이 이렇게 나오니 오히려 신선하구나.”

    “저도 사람인지라 입은 은혜를 천 분의 일이나마 느낄 줄 압니다. 아마 이대로 자금성을 나가면 전하를 오랫동안 뵙지 못하겠지요. 조금이나마 제 마음을 표현하고 싶었습니다.”

    “됐다. 어차피 네게 주었던 것마저 빼앗아 가게 생겼는데, 감사를 받아 무엇하겠느냐.”

    “……예상은 하고 있었습니다.”

    단순히 도장을 인계받는 일에 도르곤이 주위 사람을 물렸을 때부터 짐작은 하고 있었다. 조선으로 돌아가는 일은 착착 진행이 되고 있는데, 홍타이지가 약속한 일 하나는 아무런 언급이 없을 때도 조금씩 예감이 오긴 했다.

    눈치가 빠른 건 처음 만난 자리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라며 헛웃음을 짓던 도르곤의 입이 딱 닫혔다. 그렇게 침묵을 지키던 도르곤이 말문을 연 것은 잠시 후였다.

    예측하던 내용 그대로였다.

    “마카타를 놓아줘야겠다. 아르가투.”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