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화. 조선에서 온 손님
나를 보내며, 조만간 동난각에 위치한 스물일곱 개 침대를 다 써보겠다고 농담처럼 말한 홍타이지였다.
그러나 그는 고작 스물일곱 날의 반도 버티지 못했다. 사람의 목숨은 정말로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옥좌에 앉아 잠자듯 죽어있는 카간의 시신이 발견된 시각은 한밤중이었다. 결국 북경 점령을 위해 무리한 것이 홍타이지의 남은 수명마저 깎아낸 듯했다.
열흘 사이 북경에 입성해 같은 숙소에 머물고 있던 세자와 함께 자금성으로 달려갔을 때는 이미 시신이 어느 정도 수습된 상태였다. 침상 위에 편안히 누운 카간의 입가에는 미소가 올라앉아 있었다.
‘그곳은 편안하십니까, 카간이시여. 그리시던 님은 만나셨는지요.’
갑작스러운 죽음이었지만 카간의 장례는 일사천리로 이어졌다. 심양에 있던 청 황실을 급하게 옮겨와 장례를 치렀고, 팔기의 기주들은 차기 황제를 세우기 위해 기나긴 회의에 들어갔다.
누르하치가 세운 만주족 풍습을 따라 홍타이지 역시 공식적으로 후계자를 지명하지 않고 사망했기 때문이었다. 나와 도르곤에게만 은밀히 유조가 내린 이유는 그것 때문이었다.
매일같이 자금성에 올라 홍타이지의 장례에 참석하는 동안, 황녀와도 여러 번 마주쳤다. 하루도 눈자위가 붉지 않은 날이 없던 황녀였다.
홍타이지가 마카타를 그렇게 아꼈던가.
나 같은 잡관과 황녀를 엮어주려 하였기에 그저 딸을 정략적으로 대하는 줄 알았으나, 황녀의 반응을 보면 또 그렇지도 않은 모양이었다.
제 남편이 죽었을 때보다 더 격렬히 슬픔을 표하는 황녀였다.
마주친 자리에서 눈물을 보이지 않은 적이 없었고, 깊게 패었던 보조개는 볼이 말라붙어가면서 점점 얕아져 갔다.
허나 황녀를 걱정할 틈이 없었다. 나 역시 몸이 나날이 축나는 것이 체감될 정도였으니까. 새벽별을 보고 자금성에 입궐했다 저녁별을 보고 숙소로 돌아오는 생활 때문이었다.
그 와중에 푸린을 즉위시키기 위해 내내 도르곤과 계략을 짜내는 것만으로도 머리가 핑핑 돌아갈 지경이었다. 거기다 한양에서 미리 짜놓았던 계획을 실행시키느라 수력(修曆) 벼슬을 지닌 자와 접촉하는 일 또한 골치였다.
때문에 가끔 머리를 비우기 위해 장례에 참석하는 동안에도 틈을 내 후미진 장소를 찾곤 했다.
새로운 황궁이 된 자금성에는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는 장소가 몇몇 존재했다. 갑작스런 북경 천도와 카간의 죽음이 겹친 탓이었다.
그렇게 기분 전환을 위해 들르던 장소에 황녀가 시녀 하나만 이끌고 들이닥친 것은 장례가 치러진 지 이레가 지난 어느 날이었다.
“이러시면 안 됩니다! 누가 보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이러십니까?”
“잠시만…… 잠시만 이러고 있게 해 줘. 안 장긴. 잠시만…….”
주위에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는 황녀가 내 가슴팍에 뛰어들었다. 당황스러운 마음에 그녀를 밀어내려 했지만 내 팔은 허공을 휘저을 뿐이었다.
내 가슴팍이 금방 황녀에게 전해 받은 따스한 물기로 젖어 들어갔으니까.
몸을 들썩이며 소리 죽여 통곡하는 그녀에게 위안이 되는 것이, 고작 내 품뿐이라는 사실에 마음이 조금 아파왔다.
그런 사람을 차마 내팽개치고 자리를 떠날 순 없었다. 황녀와 얽히면 얽힐수록 한양에 두고 온 사람에 대한 마음만 되새겨지고 있었지만, 그것과는 조금 다른 이야기였다.
카간이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면, 적어도 눈물 흘리며 슬픔을 감추지 못하는 당신을 한 번만이라도 안아주라 했을 것이다.
내 마음 탓이 아니다. 나는 그저, 은혜를 갚고 싶을 뿐이다.
***
“많이 늠름해졌군, 자네. 한양을 떠날 때와 비하면 아주 다른 사람이 되었어.”
“그런 말씀 하지 마십시오, 부원군 대감. 닦으라는 학문은 닦지 않고 무반(武班)이 된 것처럼 날뛰었으니, 당연한 일이 아닙니까.”
“그건 그렇지. 내게 보낸 답장에도, 내가 연구하는 왕학 이야기는커녕 대명의 동림학파(東林學派) 영향을 받았다며 경세치용(經世致用)을 운운하더군.”
그날 저녁 숙소로 쓰이던 회동관(會同館)에는 뜻밖에 반가운 손님이 찾아왔다. 명과 내통한 일이 임경업과 홍승주 사이 오간 편지 때문에 들통 나, 그것을 수습하기 위해 조선 조정이 보낸 사신이었다.
원래는 심양이 목적지였을 것이나, 북경 출진으로 인해 일정이 어긋나고, 결국 청이 점령한 북경으로 천도를 선언하면서 예상에도 없던 연행 길에 오른, 운도 지지리 없는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내 일도 아니고.
문제는 죄다 나와 구면인 사람들이 사행단의 정사와 부사로 임명되어 왔다는 것이지.
“자네는 왜 말이 없는가? 저하께 이미 자네가 타국 땅에서 한 짓거리를 낱낱이 전해 들었다네! 사람의 목숨은 누구에게나 하나일진대 어찌 그리 방약무인(傍若無人)했단 말인가?”
“대사간 영감, 그것이…….”
“덕분에 이 나이에 몇천 리를 주파해야 했던 것인지…… 이럴 것이었으면 자네를 남원에서 데리고 오지 않는 것이었는데.”
몇 년 만에 얼굴을 마주하는 성 영감님이었다. 고된 나랏일로 주름살은 더 느신 것 같은데, 어째 기운은 예전보다 더 승하신 듯했다.
“어허, 여습(汝習). 그래도 안 자의가 저하의 노고를 상당히 줄여드린 것도 사실 아닌가. 포로로 잡혀갔던 백성들도 안 자의가 올린 전공으로 상당수가 속환된 것 역시 사실이고.”
“부원군 대감께서도 그렇게 함부로 감싸시면 안 됩니다! 대국과 내통했던 일이 안 자의 덕분에 덮여졌다고 이러시는 것입니까?”
“어허, 대사간. 말이 조금 심하구만.”
원래대로라면 명과 내통한 일로 심양으로 끌려가 꽤나 고초를 겪었을 최명길이었다.
그러나 임경업이 먼저 청으로 잡혀와 오삼계를 산해관에서 끌어내는데 작지 않은 공을 세운 덕에, 그와 임경업이 저지른 허물은 유야무야 사면이 된 모양이었다.
애초에 제국의 후계를 정하는 일 때문에 다들 정신이 없기도 했고.
“심양 감옥에 잡혀있던 예판도 나를 그렇게까지 타박하지 않았는데. 허허. 여습 자네는 언제나 안 자의 관련된 일이라면 눈이 뒤집히는구만.”
“제가 키운 사람입니다. 안 자의가 저지른 허물은 곧 제 허물과 다를 바 없으니, 당연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그 허물은 사소하고 그가 세운 공은 창대하지 않은가. 젊은 피가 또 폭주할까 혼내는 것도 좋으나 이쯤 하면 충분할 것 같으이.”
“아주 틀린 말씀은 아니오나…… 안 자의가 저지른 허물이 사소하다는 대감의 말씀에는 동의할 수 없습니다.”
나를 건너다보는 성 영감의 눈이 활활 불타고 있었다. 소과 준비를 시키며 나를 갈아대던 그 눈빛이었다.
“분명 나라를 위해 일하겠다 맹세하고 심양으로 건너간 이가 나라를 배신할 판국이 아닙니까. 이 어찌 작은 허물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나라를 배신하다니, 청의 무관직을 받은 일을 이야기하는 것인가?”
“그냥 무관직도 아닙니다, 우리로 치면 정삼품 천총(千摠)쯤 되는 자리입니다!”
성 영감이 저토록 길길이 뛰는 이유가 있었다. 지금 내 직책이 팔기의 기주 바로 아래 지휘관인 잘안 장긴 자리니, 조선으로 치면 병마절도사 바로 아래의 지휘관이겠지.
품계로 쳐도, 청과 조선의 처지를 비교해 봐도, 그런 자리를 버리고 다시 정칠품 자의가 되어 조선으로 돌아가는 일을 선택하는 사람이 나 말고 있기나 할까.
“저하께서 말씀하시기로는 청주가 죽기 직전에 조선으로 돌려보내겠다는 약조를 남겼다 하지 않았는가. 안 자의 역시 돌아가겠다고 저하께 고한 상태고. 그것이 큰 문제가 되겠는가?”
“그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전부가 아니라니, 그렇다면 다른 일이 더 있단 말인가?”
“심양에서 들은 소문이 있습니다. 안 자의가 청주의 부마가 될지도 모른다 하더군요. 이는 저하께도 확인받은 일입니다.”
“무엇이?”
조선인들이 운영하는 음식점에 여자를 데리고 간 이상, 그 일이 심양의 조선인들 사이에서 퍼지지 않기를 바라는 것이 이상한 일이었다.
게다가 입이 싼 충신이 엽행 당시의 일을 대원들에게 떠벌리고 다닌 덕분에, 호포대 대장이 데리고 다닌 여인의 정체가 청나라 공주님이라는 소문은 심양관에서 꽤 유명했다.
성 영감은 그 소문을 전해들은 듯했다.
“흐음…… 자네가 화를 내는 이유를 조금 알 것 같긴 하군. 분명 공주를 국경 밖으로 내보낸 전례가 없진 않으나, 그것은 번국의 왕실에 시집보낼 때 이야기고.”
“제 귀한 제자를 오랑캐에게 빼앗기게 생겼습니다. 어찌 진정할 수 있겠습니까.”
“자네, 그렇게 입만 꾹 다물고 있지 말고 자네 스승을 좀 진정시켜야 하지 싶네. 변명이 있거들랑 어서 해 보게.”
내 일로 입씨름을 벌이던 두 중년의 눈빛이 나를 향해 날아왔다.
왜 카간의 앞에서 전략을 브리핑할 때보다 더 긴장이 되는지. 내가 조선을 떠난 지 오래되긴 한 모양이었다.
“청주는 예친왕이 있는 자리에서 저를 조선으로 돌려보내겠다 확약했습니다. 침전에서 유조를 내리는 자리였지요. 그 부분에 대해서는 염려를 거두셔도 될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공주와 관련된 소문은 어찌 된 것인가?”
“아주 없는 이야기도 아니고, 청주에게서 언급이 없던 일도 아닙니다. 허나 나리께서도 아시다시피 한양에 두고 온 사람도 있는 판에, 어떻게 해야 좋을지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습니다. 지금까지는 어떻게 마다해왔긴 한데…….”
“아…… 백후(伯厚)의 여식 이야기인가.”
불꽃이 튀던 성 영감의 기세가 뜬금없이 사그라든 것은 그때였다.
갑자기 말을 잃어버린 그를 대신해 최명길이 질문을 던져왔다.
“안 자의, 혹시 청주가 공주를 자네에게 시집보낼 것이라고 공언(公言)한 적이 있는가?”
“그것은 아닙니다. 심양에서 출진하기 전, 단둘이 있는 자리에서 넌지시 이야기한 적은 있지만, 공식적인 자리에서 언급한 적은 없었습니다.”
“청주는 북경에서의 일을 마무리 짓고 혼인을 진행시킬 생각이었나 보군, 그런데 갑자기 그의 목숨이 다해버렸으니…….”
잠시 생각에 빠진 최명길 덕분에 자리에는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성 영감이 말수를 잃은 이유를 알지 못했다.
“여습, 기운 내게. 청의 공주가 문제가 될 일은 없을지도 모르겠네.”
“그것이 무슨 말씀이십니까?”
“일단 상황을 지켜보세. 내 판단으로는 안 자의를 조선으로 데려가는 일에는 차질이 없을 것 같네.”
“정말로 일이 그렇게 쉽게 풀리겠습니까?”
다시 말씨름을 벌이는 두 중년 사이에서 꿔다놓은 보릿자루가 되었지만 그리 나쁘지 않았다. 이들이 돌아가면 해야 할 일이 산더미였으니까.
다른 잘안 장긴들에게 돌릴 격문도 지어야 하고, 수력(修曆) 벼슬에 임명된 탕약망이라는 이가 의문을 가득 담아 보낸 편지의 답장 또한 적어야 했다. 그래서 성 영감과 최명길의 대화는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고, 대화가 길어질수록 마음만 급해질 뿐이었다.
“……알겠습니다, 부원군 대감. 대감의 뜻대로 지켜보는 편이 낫겠습니다.”
“그래. 혹여나 안 자의가 세자 저하께 확언한 말을 어기겠는가. 자네는 자네 제자를 믿지 못하는 것인가?”
“그것도 그렇습니다만…….”
“자, 여습, 딱딱한 이야기는 그쯤하고 안 자의에게 조선에서 받아온 소식이나 전해주고 회포를 풀게. 사제(師弟) 사이에 몇 년 동안 얼굴을 보지 못하였는데, 할 얘기라고는 나랏일뿐인가.”
최명길의 타박을 받고 성 영감이 소식 보따리를 조금씩 풀어놓자, 그제서야 숨이 조금 트이는 듯했다. 이런 이야기라면 언제든지 환영이었다.
나와 충신이 심양으로 떠난 이후로 성균관을 나온 좌명은 여전히 대과를 준비하는 모양이었다. 식년시는 아직 돌아오지 않았지만 그사이 열린 별시에도 응시하지 않아 집안의 걱정이 크다고 했다.
“별로 걱정되지 않습니다. 제가 아는 일정이라면 단번에 급제하여도 이상하지 않습니다. 때를 보는 것이겠지요.”
“벗끼리 닮아서 그런지 같은 말을 하는구만. 백후의 자제도 비슷한 말을 했다네.”
“무어라 했습니까?”
“동방(同榜, 과거 급제 동기)은 평생 가는 것이니, 벗 둘이 심양에서 돌아오면 함께 급제하여 평생 볼 사이가 되고 싶다 하더군. 어디 젊은 선비란 놈들이 대과를 쉽게 보고, 허허.”
멀리서 전해져온 벗의 마음이 가슴을 따스히 데웠다.
교분을 맺은 시간보다 떨어져 있는 시간이 더 길었음에도, 우리의 우정은 흔들림 하나 없음이 분명했다.
얘기를 들으니 좌명은 과거 준비를 하면서 부탁했던 일 역시 제대로 해 준 듯했다. 그에게 맡긴 내 제자 둘 중, 요운은 이미 사서오경의 기초를 전부 떼고 슬슬 생원시 준비를 하는 모양이었다. 기특했다.
“요안이, 아니지. 쌍둥이 동생 쪽은 어떻습니까?”
“박 초관의 여식 말인가? 사서오경 공부는 어떻게 따라간 모양인데, 그렇다고 아녀자의 몸으로 과거를 볼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그건 그렇습니다만…….”
“그래도 좌승지(左承旨)를 제수받고 한양으로 올라온 백후가 그 모습을 어여삐 본 모양일세. 내가 한양을 떠나오기 직전에는 아녀자가 가진 글재주를 살릴 일이 떠올랐다며 이것저것 시켜보고 있었네.”
요안이 녀석, 이제 좀 어른스러워졌으려나.
아이의 2년은 어른의 2년보다 훨씬 긴 법이었다. 한양을 떠나기 전, 기둥에 키를 재던 녀석의 모습이 떠올라 나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 나왔다.
한양을 떠나오기 전과 생활이 크게 달라지지 않은 사람은 여전히 훈련도감에서 구르고 있는 박연 정도인가. 좀 더 넓은 집으로 옮기라고 내가 전해준 은자마저 새로운 연구에 모조리 쏟아 부어 아내의 원성이 크다고 했다.
“그 정도일세. 뭐, 내 얘기는 북경에 머무는 동안 천천히 이야기하기로 하고. 자네가 가족도 없이 단출한 탓에 먼 길을 걸어 전해줄 이야기도 가벼워 미안하구만.”
“아닙니다, 대사간 영감. 어찌 감사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제 대사간도 아닐세. 대사간 자리는 다른 이가 이어받았지. 한양으로 돌아가면 다른 직책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일세.”
몇천 리를 걸어온 주제에 성 영감의 얼굴은 한양에서 구르던 시절보다 훨씬 건강해 보였다. 방금까지 기운이 넘쳐나던 이유는 그것 때문이었나. 지옥 같은 야근에서 벗어나서?
그렇게 소식 전달을 마친 성이성은 품에서 서찰 몇 장을 꺼내놓았다. 방금 언급한 사람들이 전해준 편지였다. 심양에서도 그랬듯이 요안이 녀석의 편지가 제일 두꺼웠다.
그런데, 늘 받던 무언가가 하나 빠져 있었다. 철두철미한 성 영감이 빼먹었을 리는 없는 노릇이고.
“나리, 늘 전해 받던 물건이 없습니다. 혹시 한양에서 받아오시지 않은 것입니까?”
“무엇을 말인가? 전해 달라 부탁받은 물건은 이것이 전부인데?”
“충청감사, 아니지 신임 대사간 댁에서 계절마다 옷가지 일체를 지어 보내주곤 했습니다. 이번사행에는 보내지 않은 것입니까?”
하연이 옷깃마다 나비 수를 놓아 보내던 그 옷이었다. 이번 계절에는 몸을 쓰는 일이 꽤나 많았기에 입던 옷이 금방 낡아버려 새 옷이 필요했다.
“어…… 그것이…… 내가 깜빡 잊은 모양일세. 없으면 안 되는 물건인가?”
“그렇지는 않습니다. 심양관에도 옷 짓는 침모(針母) 정도는 있으니까요. 정 급하면 벗의 옷가지를 빌려 입어도 되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다행일세.”
“너무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헌데, 나리께서 부탁받은 일을 잊으시다니, 소생에게는 처음 보이시는 모습이 아닙니까. 최근에 무슨 일이 있으셨습니까?”
“무슨 일? 아니, 아닐세. 나도 이제 나이를 꽤 먹지 않았는가. 그 탓이겠지. 허허.”
성이성의 태도가 분명 평소와는 조금 달랐으나 크게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영감님도 사람인데 2년 동안 변할 수도 있는 노릇이지.
***
홍타이지가 세상을 뜬지 열엿새가 지났다.
후계를 정하는 회의에서는 격론이 오갔으나, 결국 고인이 된 카간의 뜻대로 새로운 황제가 자금성의 옥좌에 올랐다.
장자의 명분과 전장에서의 실적을 앞세운 호오거가 꽤나 세게 나왔던 탓에 그 도르곤조차도 꽤나 고생을 한 모양이었다. 황위에 올릴 자가 원역사보다 한 살이나 더 어린 다섯 살이었으니.
내가 선동한 팔기군 장긴들이 천안문 앞에 모여 적합한 이를 카간으로 모시라 무력시위를 했어야 할 정도로 사태가 심각했던 적도 있었다. 결국 도르곤이 차기 황제 자리를 놓고 호오거와 대립하는 모양새를 취할 수밖에.
결국 극단적인 갈등을 빚던 두 세력은 원역사대로 홍타이지의 9남 푸린을 황위에 올리는 것으로 입장을 절충했다. 도르곤은 좌섭정왕에 올랐고, 호오거의 세력 중 가장 연장자인 지르가랑이 우섭정왕에 올라 권력을 양분하면서 사태는 마무리되었다.
그 과정에서 한윤의 뒤에서 나를 아니꼽게 보던 세력이 도르곤과 칼을 맞댄 호오거의 세력이란 것을 알게 되었다. 아마 내 책략을 빌린 도르곤의 영향력이 점점 커지는 모습을 보고 견제한 결과가 이것인가.
하지만 그걸 이제 알아 무엇하겠는가. 한윤은 작위를 빼앗기고 목숨만이 붙은 채로 만주 구석으로 쫓겨났고, 나 역시 조선으로 돌아갈 터인데.
그 사이, 북경 전투에서 패한 이자성의 패잔병은 청군에게 추격당해 격멸 직전의 상태가 되어 낙양으로 물러갔다. 이자성군의 추격에 동참한 오삼계와 그 병력들은 그대로 남경으로 향한 모양이었다.
화북의 정세는 정리되었다. 이제 낯선 타국을 떠나 조선으로 돌아갈 시간이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