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화. 마지막 황제
숭정제의 낯빛은 파리했다. 검게 물든 눈밑과 생기 없는 눈동자는 마치 죽은 이를 방불케 했다. 한 나라의 황제라기에는 너무 초라한 모습이었다.
“오랑캐의 갑주……! 놈들도 이미 성내로 진입했구나. 하…하하…….”
“아니옵니다, 폐하! 저 자가 오랑캐의 장수라면 어찌 그들의 말을 쓰지 않겠습니까. 희망을 가지십시오!”
“저자가 내 병사라면 내게 감히 평대를 하겠느냐? 내 최후를 관람할 관객이 하나 더 늘었구나. 하하…….”
황제가 최후라는 말을 언급한 것을 증명이라 하듯, 환관이 가로막고 선 커다란 나무에는 흰 비단이 매달려 있었다. 갑작스레 불어온 바람에 흔들리는 그 기다란 천쪼가리는 마치 교수대의 올가미를 연상케 했다.
그렇게 코웃음과 함께 말을 씹어뱉은 황제는 다시 한번 칼끝을 환관에게 들이밀었다.
“왕 태감! 비켜라! 비키지 않으면 정말로 베겠다!”
“제가 어찌 비킬 수 있겠습니까? 차라리 베십시오! 폐하를 돌아가시게 둔다면 소신이 어찌 하늘을 이고 살 수 있겠습니까!”
일국의 황제에게 남은 충신이 고작 한 명에 불과한가. 눈앞에서 목격한 망국의 클라이막스는 당사자가 아닌 내 가슴마저 묵직하게 만들고 있었다.
“폐하, 부디…… 부디 마음을 지금이라도 돌려주십시오. 총병관의 군세가 언제 나타날지 모릅…….”
“전령을 띄운 지가 언제인데 여전히 총병관을 기다리란 말이냐! 에잇!”
황제가 휘두른 검이 두 팔을 벌린 채 그를 막아선 환관의 소맷부리를 길게 잘라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늙은 환관의 몸뚱이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다음엔 옷자락이 아니라 목을 벨 것이다! 비켜라!”
“……신을 베시고 마음을 돌려주시옵소서. 마지막 고언이옵니다.”
밤하늘을 가른 칼끝이 높이 치켜 들렸다. 당장이라도 호를 그리며 늙은 환관의 목을 그을 기세였다.
“아악!”
거친 비명이 새벽공기를 찢었다. 그러나 그 비명은 환관의 입에서 새어 나온 것이 아니었다.
“폐…… 폐하! 무슨 일이시옵…… 어딜 접근하는 것이냐, 이놈!”
환관은 사태를 파악하지 못한 와중에도 갑자기 손을 쥐고 쓰러진 황제의 안부를 살피느라 바빴다. 황제의 손에서 떨어져 땅에 꽂힌 검에 다가가는 나를 경계한 것은 덤이었다.
“손이…… 손이……!”
아플 만도 하지. 말 그대로 돌직구가 손등을 강타했을 테니까.
그러나 고통에 신음하는 황제 따위는 내 알 바 아니었다. 환관의 고함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땅에 꽂힌 보검에 손을 댔다. 그 검에서는 체온은커녕 어떤 온기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 네가 직접 짐의 목숨을 거둬가겠다? 그것도 나쁘지 않지. 내 딸들…… 내 귀여운 딸들도 그 검으로 베었다. 짐의 몸뚱이, 네 마음대로 하거라.”
“아니 되옵니다. 폐하!”
비통한 외침과 함께 늙은 환관이 내게 몸을 던져온 것은 그때였다. 바닥에 주저앉아 허탈하게 중얼거리는 황제를 놔둔 채였다.
그러나 별 소용이 없었다. 주인을 구하려는 그의 낡고 쪼그라든 몸뚱이를 밀쳐내는 것은 내겐 너무나 쉬운 일이었다.
“왕 태감……!”
“으……으으…….”
나동그라진 환관을 보며 황제는 얼굴을 굳힌 채 말을 잇지 못했다. 신음만 연신 뱉어내는 심복을 보며 무슨 생각을 품고 있는 것일까.
“왕 태감을 베지 말라. 그는 죄가 없다. 죄라고 하면 하필 섬겨야 할 자를 잘못 만난 죄일 뿐이겠지.”
“…….”
“내 목을 가져가라. 가져가서 네 주인에게 바치고 천금을 얻으라. 다만, 왕 태감과 내 백성들은 해하지 말라. 짐의 부탁이다.”
허탈한 목소리가 내 발 아래에서 들려왔다. 황제는 목을 길게 뺀 채 나를 향해 엎드려 있었다.
“내 선황을 지하에서 뵐 면목이 없는 몸이노라. 수급을 취하되 머리카락으로 얼굴만 가려다오. 부탁이다.”
모든 것을 내려놓은 지존은 한낱 필부보다 초라했다. 최후를 예감하고 울먹이고 있는지, 익선관마저 떨어진 황제의 뒤통수는 천천히 떨리고 있었다.
무언가 목을 막는 듯 했으나 입을 열어야만 했다. 이대로 놔두다가는 황제가 스스로 목숨을 끊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나는 당신의 수급을 취하러 온 것이 아니오.”
“……무슨 소리냐?”
“나는 당신을 살려서 남경으로 보내러 온 사람이오.”
떨리던 황제의 머리가 진동을 멈췄다.
“그…… 무슨……?”
“요동총병관 오삼계에게 반란군이 북경으로 향할 것이라는 전갈을 받았을 것이오. 그걸 심양에서 보낸 자가 나요.”
“네가……? 왜……?”
“자초지종을 말하기에는 시간이 없소. 어서 옷을 갈아입고 이곳을 떠나시오. 이것들이 있으면 성문을 빠져나가기 어렵지 않을 거요.”
엎드려 있던 황제가 고개를 들었다. 떨림이 옮아간 황제의 눈동자가 나를 아래위로 훑고 있었다. 그 눈동자에는 온갖 의문이 적혀있었으나 그것을 신경 쓸 시간이 없었다.
내 허리춤에 묶었던 꾸러미가 바닥에 던져졌다. 숭정제를 위해 준비한 청나라 전령의 복장과 표찰이었다.
“왕 태감이 매수하기라도 한 것이냐? 어째서 청의 장수가 그들을 배신했단 말이냐?”
“그것이 중요하오? 태자와 황자들은 이미 성 밖으로 빼돌렸지 않소. 그들의 뒤를 따라 당신네 황조의 발상지, 남경으로 가시오, 어서.”
“……나는 갈 수 없다.”
땅바닥에 던져진 꾸러미와 나 사이를 몇 번이고 왕복하던 황제의 시선이 아래로 내리꽂혔다. 예상치 못한 일에 생기를 찾았던 황제의 목소리는 다시 기어들어가고 있었다.
“……이미 비빈과 공주들을 내 손으로 베고 오는 길이다. 내 혈육의 피를 손에 묻히고 왔는데, 내 목숨을 살린다 해도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이냐.”
“그것이 황제쯤 되는 자가 할 소리요? 비빈은 숱하게 갈아치우고, 자식은 셀 수 없이 낳는 자들이 황제란 자들이 아니었소?”
“내 신하 중에서 그런 충언을 남긴 자가 없었을 줄 아느냐?”
“…….”
“나는 사직을 구하지 못했다. 황도는 불타고, 천하의 주인 자리는 이제 바뀌겠지. 남경으로 가더라도 어떻게 낯을 들고 살아갈 수 있단 말이냐.”
“낯을 들고 살아가는 게 그렇게 중요하오? 방금까지 선황들을 뵐 낯이 없어서 머리카락으로 얼굴을 가려달라고 한 자가 할 말이냔 말이오!”
“……그것이 아니다. 나는…….”
황제는 말을 잇지 못했다. 어깨는 쪼그라들고 머리는 땅을 향해 내려갔다.
갑갑했다. 내가 이놈을 살리려 여기까지 어떻게 왔는데. 이미 숭정제의 머릿속은 죽을 생각으로만 가득해보였다.
속이 터질 것 같아 손에 든 보검을 다시 땅에 내리꽂았다. 갑작스러운 소음에 눈을 크게 뜨고 나를 바라보는 황제의 멱살을 보검 대신 손에 쥐었다.
“정신 차리시오! 끝날 때까지 끝난 것이 아니라는 격언을 알지 못하는 것이오?”
“그런 격언은 들어본 적이 없느니. 그리고 네가 짐의 마음을 어찌 이해하겠느냐. 군주의 짐을 짊어져 보지 않은 자가 그 무게를 어찌 체감할 수 있겠느냐.”
“그것이 무슨 말이오?”
“나는 지쳤다. 무너져가는 제국의 기둥을 지탱하는 것에도, 점점 바닥을 보이는 국고를 보며 허리끈을 조이고 줄을 타던 것에도, 그리고 언제 내 목에 칼이 들이밀어질까 벌벌 떨던 것에도 지쳤다. 이제 그만…… 끝내고 싶다.”
멱살을 잡힌 황제는 나와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말끝을 흐리는 그의 눈동자에 공허가 들어차고 있었다.
정신을 차리게 할 필요가 있었다. 잡고 있던 한쪽 멱살을 놓았음에도 황제의 시선은 내게 돌아오지 않았다.
퍽.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누런 용포가 흙바닥에 나뒹굴었다.
“으윽……. 그래, 때려죽이는 것이 속이 시원하다면 때려죽여라. 그것도 나쁘지 않겠…….”
몸을 일으키다 무릎을 세운 채 중얼거리던 황제는 뱉던 말을 마무리하지 못했다. 내 발차기가 그의 정강이에 작렬했기 때문이었다.
“으……으으…….”
“아프시오? 죽음을 그렇게 쉽게 입에 올리던 자도 아픔 정도는 느끼는 모양이오?”
정강이를 부여잡고 바닥을 기던 황제의 멱살을 다시 잡아 올렸다. 눈동자에 다소 생기가 돌아와 있었다.
“내 목숨으로 만족하고 백성들은 건드리지 말라고? 개소리 집어치우시오! 그것이 천자(天子)라 불리는 자가 할 소리요? 북경성은 늦었다 쳐도, 이민족의 칼날 끝에 노출될 다른 백성들은 생각하지 않는 것이오?”
“내가 죽고 저항 없이 패권이 넘어간다면 더 큰 희생이 있겠느냐. 부디 북경성만이라도…….”
“제발 정신 좀 차리시오!”
짝.
이번에는 뺨이었다. 생전 당해본 적 없는 폭력에, 황제의 뺨은 금방 시뻘겋게 부플어 올랐다.
“당신 목숨 하나 거뒀다고 저항하는 백성들이 아주 없어질 것 같소? 오히려 황제를 죽인 세력에 대해 적개심만 불타오르겠지!”
“그것은 그러하나…….”
“그들이 요동을 점령하던 시절부터 학살을 서슴지 않았다는 것은 황제 당신 스스로가 더 잘 알지 않소! 그걸 알면서 어찌 그리도 장담할 수 있단 말이오?”
원 역사에서도 현실은 숭정제의 말과 정반대였다.
청이 패권을 쥔 후에도 청군에 반항했다는 이유로, 만주족의 복식을 따르지 않았다는 이유로 대륙의 곳곳에서 학살이 자행되었다.
그런데, 군주 된 자가 백성들을 건드리지 말라는 말만 남기고 무책임하게 죽는다니, 이게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허나 송의 소제가 애산에서 목숨을 버린 덕에, 그 치욕을 기억한 송의 백성들은 결국 몽골 오랑캐들을 몰아내지 않았더냐.”
“개소리하지 마시오! 소제는 애산에서의 일로 역사에 이름을 아름답게 남겼을지 모르나, 그 후로 몽골의 말발굽에 짓밟힌 백성들은 누가 기억해주었단 말이오!”
“…….”
“홍무제께서 명의 시대를 열기 전, 몽골 치하에서 삼등민 취급을 받던 송의 백성들이오! 위정자라면 당신의 백성을 지키는 것이 책임이자 의무 아니오!”
황제는 잠시 동안 아무 말도 꺼내지 못했다. 쓰러진 환관의 가느다란 신음 소리만 이 자리를 울렸다.
“그건…… 그래, 태자, 탈출시킨 태자가 있다. 그 녀석은 분명 영민하고 제왕의 자질이 있으니, 내 뒤를 잘 이어 줄 것이다.”
“태자와 황자들을 고작 외조부에게 탈출시키고 평민처럼 살라 명했지 않소! 그런 아들들이 어찌 당신의 뒤처리를 해준단 말이오!”
“그걸 네가 어찌……!”
자신만이 알고 있을 이야기를 꺼내자, 황제는 눈에 띄게 동요하기 시작했다.
그의 부어오른 뺨에 식은땀이 맺히고 있었다.
아내와 딸들은 적군에게 능욕당할 걸 걱정해 제 손으로 죽여 놓고 이제 와서 탈출시킨 태자를 운운하다니. 그 탓에 황제의 멱살을 틀어쥔 손에 나도 모르게 힘이 들어가고 있었지만 낭비할 시간이 더는 없었다.
“그래, 당신 말대로 태자가 남쪽으로 잘 탈출해 남경으로 들어갔다 칩시다. 그곳의 실권자인 마사영, 좌량옥 같이 권력에 눈이 돌아간 자들이 태자를 가만히 놔둘 것 같소?”
“…….”
태자가 남경까지 내려갔다가 정통성 문제를 우려한 남명의 황제에게 죽임을 당했다는 이설(異說)이 현대까지 내려올 정도였다. 숭정제 스스로가 남경의 상황은 더 잘 알 것이다.
“내가 군주의 짐을 짊어져보지 않아서 당신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하였소? 지금 군주가 짊어져야 할 짐을 내팽개치고 죽으려는 자가 누구란 말이오!”
“…….”
“입이 있으면 말을 해 보시오! 천자의 입은 그토록 무거운 것이오?”
“……네 말이 모두 맞다. 틀린 말 하나 없구나. 너처럼 충언을 아끼지 않는 자가 몇 명만 더 있었더라도 진작 남경으로 천도하였을 것을…….”
잡고 있던 멱살을 놓았다. 마음 같아서는 이 자식을 한 대 더 치고 싶었으나 참아야 했다. 다행히 황제는 조금 비틀거리더니 드디어 똑바로 서 나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러나 여전히 그의 눈빛에는 결의가 담겨있지 못했다. 칼자루 끝에 맞아 기절했다가 방금 막 깨어난 늙은 환관만 이끌고 남경으로 가기에는 너무나 험난할 여정일 테니까.
그러나 잠시 이어지던 짧은 침묵은 늙은 환관의 떨리는 목소리에 의해 깨졌다. 목소리처럼 떨리는 환관의 손끝은 동편의 벌판을 가리키고 있었다.
“폐하…… 폐하……! 드디어 기다리던 오 총관이……!”
일어나는 먼지의 양이 상당했다. 적어도 수만의 군세가 북경을 향해 오고 있었다.
혹여나 동가구(董家口)를 통해 우회해오기로 했었던, 홍승주가 이끄는 한군팔기의 규모는 일만에도 미치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면…….
“왕 태감이라 했소?”
“예……? 예!”
“황제를 모시고 속히 이곳을 빠져나가시오. 그리고 산해관에서 나온 군세와 만난다면, 바로 남경으로 향하도록 하시오. 청과 반란군의 군세를 합하면 오 총관의 군대로는 이겨내기 어렵소.”
“알…… 알겠습니다!”
그나마 머리는 빠르게 굴러가는 모양인지, 시간 낭비 없이 환관은 황제의 옷을 재빨리 갈아입혔다. 그러나 여전히 황제는 반쯤 넋이 빠져있는 듯했다.
“정신 차리시오! 시간이 넉넉하지 않단 말이오!”
“……너는 누구냐. 하늘에서 갑자기 내려온 신장(神將)이라도 된단 말이냐? 이런 상황에서 내게 구원의 손길이 갑자기 뻗칠 리 없다.”
“아무려면 어떻소! 그것이 무슨 상관이오! 살아가서 선황들에게 낯을 들 수 있도록 나라를 수습하시오!”
“네 정체를 말하지 않으면 내려가지 않겠다. 명령이다. 정체를 밝혀라!”
꿈꾸는 소리를 뱉었던 방금과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다.
하긴, 독단적이고 의심이 많았다는 꼬리표가 붙어있긴 하나, 망국의 시기가 아닌 평시에 태어났으면 명군이 되었으리라는 평가도 받는 인물이니 어찌 보면 당연한가.
그래도 이제 와서 황제다운 면모를 보여주다니.
빛을 도로 찾은 황제의 눈동자는 나를 똑바로 주시하고 있었다. 정말로 내가 정체를 밝히지 않는다면 탈출하지 않을 기세였다.
“내 정체를 알고 싶으면 필사적으로 탈출하시오. 당신이 대명을 수습하고 살아남는다면, 언젠가 다시 만날 날이 있겠지.”
“대명? 너, 그러고 보니 억양부터…… 설마…….”
젠장, 실수다. 조선 출신이라는 걸 들킨 건가. 이 일이 새어나가면 곤란해질 텐데.
하지만 고개를 가볍게 한 번 끄덕인 황제는 더 이상 캐묻지 않았다.
“그쯤이면 됐다. 만약 빠져나가지 못하고 잡히더라도 너에 대한 이야기는 절대 함구할 것이다. 안심해라.”
“그렇다면 빨리 산을 내려가시오. 곧 날이 밝아올 것이오!”
“알았다. 네 말대로 할 테니 잠시 내 칼을 빌려다오. 아직 할 일이 남아있다.”
설마 이렇게까지 정신을 차려놓고 그 칼을 목에 꽂아 넣으려는 것은 아니겠지?
하지만 내 생각을 읽고 있다는 듯, 황제는 머리를 한 번 흔들 뿐이었다.
그렇게 보검을 전해 받은 황제는 땅에 내던졌던 용포를 집어 들더니, 검을 한 차례 휘둘러 어깨에 달린 자수를 잘라냈다. 용 한 마리를 잃은 용포는 다시 땅에 거칠게 내팽개쳐졌다.
“받아라. 네 분명 언젠가 다시 만날 날이 있다고 말했을 것이다. 그날을 위해 이 보검과 함께 가지고 있도록 해라.”
“보검은 필요 없소. 당신에게 상을 받고자 한 일이 아니오.”
“그렇다면 이것만이라도 받도록 해라. 다시 만났을 때 너를 알아보고자 함이다. 원하지 않으면 버리거나 불태워도 좋다.”
황제의 의지는 굳었다. 이 인간을 빨리 북경에서 탈출시키려면 어쩌겠는가. 내미는 정표를 받을 수밖에.
그의 어깨에서 빛나던 금룡의 자수는 그렇게 내 소매로 들어갔다. 그 모습을 보며 살짝 얼굴을 풀고 웃음을 띠는 숭정제였다.
“다시 만날 날을 기대하고 있겠다. 내 반드시 살아남을 것이다.”
“나도 기대하고 있겠소. 당신이 나라를 수습하는 것을 멀리서라도 지켜보겠소.”
다시 한번 입술을 비틀더니 고개를 까닥하더니 어둠 속으로 멀어져간 황제였다.
내가 그를 만났다는 흔적은 소매 속에 든 정표뿐이었다.
감상에 잠겨 있을 시간이 없었다. 휴식을 취하는 대원들이 일어나기 전에 빠르게 진영으로 합류해야 했다.
방금보다 조금 옅어진 것 같은 어둠에 나 역시 몸을 던졌다.
※ 작가의 말
작중에 언급된 송나라 소제와 애산에 관한 이야기는, 남송의 최후를 그린 애산 전투와 관련된 이야기입니다.
몽골에서 발흥한 원나라가 화북을 점령하고 있던 금나라를 멸망시킨 후, 40여 년간 장강을 끼고 남송과 전쟁을 벌였다는 사실은 유명한데요. 그 40년 전쟁의 끝에 남송 멸망에 방점을 찍은 최후의 전투가 애산 전투입니다.
이미 원세종 쿠빌라이 칸에 의해 남송의 수도가 함락되고 황제가 끌려간 이후에도 남송의 충신들은 저항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또 다른 황제를 세우고 의병 20만을 모아 최후까지 항전하게 되죠.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의 파상공세를 막을 수는 없었습니다. 육상에서의 저항군은 모두 전멸했고, 수군 전력만 겨우 보전해 지금의 대륙의 남쪽 끄트머리인 광동성까지 쫓겨가게 되는데요.
그 마지막 거점인 애산에까지 원의 대규모 수군이 공격해옵니다. 보급이 차단된 상태에서 마른 음식과 바닷물로 버티던 최후의 남송 세력은 결국 붕괴하고, 수뇌부와 황제는 자결을 선택하게 되는데, 이 장면은 중국의 역대 왕조의 멸망 중에서도 가장 비장하고 장렬한 최후로 유명합니다.
아마 숭정제가 이 고사를 인용한 이유는 이 애산 전투에서 살아남은 몇 안 되는 생존자의 외손자가 명을 건국한 태조 주원장이었기 때문이겠죠. 여담으로 원 역사에서 숭정제가 목을 매단 나무는 최근까지 보존되어 있었으나, 문화대혁명 시기에 베어져 소실되고 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