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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 어사, 조선을 뒤흔들다!-78화 (78/298)

78화. 틈왕(闖王)의 야망

얼마 후 낙양, 성루에 한 사내가 올라앉아 있었다.

세리(稅吏)의 아들, 전직 역관이자 군인.

그리고 지금은 ‘틈왕(闖王)’이란 이름을 이어받은 자.

이자성이었다.

“여진족 오랑캐 놈들이 정보를 흘렸다…… 그것도 아주 정확한 정보를.”

이자성의 뇌리에 본인을 청의 사신이라고 주장하는 자가 성문을 두드리다 잡혀왔을 때, 그자의 목을 베라 명했던 일이 떠올랐다. 책사인 이암이 말리지 않았더라면 알토란같은 정보를 그대로 흘려버릴 뻔했지 않은가.

‘금주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명국 정예병은 전멸에 가까운 타격을 입고 잔존한 병력은 오삼계가 수습한 일부뿐입니다. 요서 지역은 이미 아국의 손에 들어왔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사자의 손끝이 소매에서 나온 지도 곳곳을 누볐다. 가장 시원했던 소식은 이자성 자신을 그토록 괴롭혔던 홍승주가 청군에게 포로로 잡혔다는 이야기였다.

이자성이 고모부인 고영상이 이끌던 농민군 부장에 머물던 시절, 참패를 안겨준 자가 그 홍승주였다. 장안 근방에서 벌어졌던 전투에서 처참하게 패배한 결과 고모부 고영상은 사로잡혀 북경으로 끌려가 처형당했다.

이자성 역시 관군의 추격에 오랫동안 쫓겨야 했다. 그가 한숨을 돌릴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 청나라가 금주를 포위하면서 홍승주가 동북 방면의 사령관으로 재배치되었기 때문이었다.

“인연이란 참으로 묘하구만. 어찌 보면 나를 살려준 것과 다름이 없는 오랑캐들이 또 다른 기회를 던져주었다.”

이자성은 본래 섬서의 심장부인 서안을 치려 했다. 그날의 치욕을 갚기 위함이었다. 섬서는 그의 고향인 연안이 위치한 지역이기도 했다.

금의환향이란 고사도 있지 않은가.

장안이라 불리던 시절, 옛 왕조들이 수두룩하게 거쳐 간 서안을 점령하고 그 자리에서 새로운 황제국을 선포하려는 계획이었다. 국호는 순(順) 정도면 좋지 않을까.

“허나 이제 전국옥새가 눈앞에 아른거린다. 사내로 태어나서 어찌 손을 뻗지 않겠는가.”

명군이 오합지졸이라는 것은 그동안의 싸움으로 이자성 스스로가 더 잘 알고 있었다. 청의 사자가 한 말이 사실이라면 북경과 낙양 사이는 허허벌판과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산해관을 지키는 패잔병이 명 정예병의 전부라……. 그렇다면 아무리 북경의 성벽이 높다 하나 해볼 만한 상황이 아닌가.

막대한 세금과 천재지변, 그리고 명 조정의 실책이 오랜 기간 동안 누적되었으니 병부(兵簿) 또한 멀쩡할 리가 없었다. 아마 명부에만 존재하는 유령 병사를 제외하면 북경 주둔 병력 또한 많지 않을 것이었다.

‘그래서, 이런 정보를 내게 알려주는 이유가 무어냐? 도대체 너희는 무엇을 원하는 것이냐?’

‘돌아가신 선대 카간의 복수입니다.’

그들의 옛 우두머리가 영원성에서 일어난 싸움에서 입은 부상이 악화되어 죽었다는 이야기를 이자성도 들은 적이 있었다. 오삼계가 지키는 산해관이 그렇게 눈엣가시였던 모양이지?

게다가 금주에서 그렇게 큰 승리를 거두었음에도 보상금은커녕 화의조차 맺지 않은 명에게 그들의 칸은 분노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이자성까지 끌어들여 명의 숨통을 조이겠다는 의도가 명백했다.

그러면서 사자는 북경을 쳐 오삼계를 산해관에서 끌어내준다면 북경성에 대한 처분은 오롯이 이자성에게 맡기겠다는 뜻을 전해왔다. 아무리 계산해보아도 남는 장사였다.

어차피 화북을 약탈하는 것이 일상인 야만족들이니,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약탈로 얻을 수 있는 전리품만 건네준다면 큰 문제는 생기지 않을 것이다. 옥새와 전리품만 챙기고 돌아온다 해도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니었다.

특히 전리품, 구두쇠로 유명한 황제의 내탕금은 은만 사천만 냥에 달한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낙양에서 복왕 주상순을 삶아 죽인 후 얻은 금은보화로도 지금까지 군을 굴릴 수 있었던 것을 생각하면 구미가 절로 당기는 액수였다.

물론 야만족의 세력이 생각보다 변변치 않다면 아예 북경에 눌러앉아 새 왕조를 열 수도 있었다. 이자성은 입 안이 바짝 마르는 것을 느꼈다. 가슴 속에 불타는 야심 때문이었다.

“어차피 야만족 놈들과 맺은 약속을 지킬 필요가 있나? 감히 중원을 넘보려 한다면 이 이자성님의 군대에 쓴 맛을 보게 될 것이다.”

가슴 속에 맺힌 금빛 옥새의 형상이 터질 것처럼 부풀어 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그 날, 이자성은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다.

***

“폐하! 피가……! 목숨이 붙어 있을 때라니, 그것은 또 무슨 말씀이십니까?”

“난리 피우지 마라. 갑작스레 두통이 찾아오게 된 지도 꽤 되었군. 하르졸의 곁에 갈 날이 머지않은 것 같다.”

이 자리에서 안색이 변한 사람은 홍승주뿐이었다.

도르곤과 나는 겨울 동안 이미 카간의 병세가 심상치 않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심양관을 통해 칸에게 쓸 조선산 약재를 들여와야 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사랑하던 애첩, 보르지기트 하르졸의 죽음에 너무나 슬퍼한 나머지 그 이후부터 카간의 병이 악화되었던 것이다.

“홍 총독, 이 사실이 새어나가는 것을 엄히 금한다. 아직 말을 타고 전장을 누비는 것에는 큰 지장이 없지만 일이 어떻게 될지 모르니.”

“항장임에도 불구하고 폐하의 은덕을 입은 몸입니다. 어찌 제가 명을 받들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좋다. 안 장긴, 설명을 계속하라.”

물론 홍타이지의 머릿속에 북경을 이자성에게 내준다는 계산은 티끌만큼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이제는 청의 세력권에 들어온 몽골의 영역에는 산해관을 우회하는 길이 존재했으니까.

우회로는 우회로일 뿐이라 대군을 보내거나 공성전과 같은 장기 작전을 펴는 것은 무리였으나, 청군은 이미 수차례 그 길을 통해 북경을 포위하고 근방을 약탈해 무수한 전리품을 획득했던 경험이 있었다. 그때의 사령관 중 하나가 도르곤이었다.

“만약 오삼계의 병력이 산해관을 비우고 북경을 구원하려 한다면, 이자성의 병력과 맞붙게 하고 우리는 비어있는 산해관을 점령합니다. 만약 오삼계가 산해관을 비우지 않는다면…….”

“그렇다면 북경은 함락될 것이오, 젊은 장긴. 반란군 진압에 실패했다는 이유로 신하 죽이기를 서슴지 않는 황제요. 내가 금주에서 패한 이유도 군비가 없다는 이유로 속전속결을 명한 황제의 명에 따라야 했기 때문이기도 하오.”

금주에서 초반에는 청군을 격파하기도 했던 명군이 보급로를 끊길 정도로 위태로운 진격을 계속했던 이유가 거기에 있었다. 결국 포위되어 굶은 나머지 지휘체계가 무너지자 제멋대로 후퇴를 거듭하다가 각개격파 당한 것이다.

그런 자가 황제라면 아무리 많은 병력이 북경에 주둔하더라도 배겨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아마 원 역사에서 이자성의 반란군에 북경이 함락당한 것도 같은 이유였을 것이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허나, 이자성은 북경을 함락하더라도 점령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오?”

“답은 총독께서 주셨습니다.”

알쏭달쏭한 표정을 짓는 홍승주였으나 설명을 듣고는 납득한 얼굴이었다. 명나라의 재정은 국운을 건 전투에 댈 전비를 지탱하는 것조차 힘겨운 상태라는 것이 중요했다.

그저 농민군에 불과한 이자성의 세력이 계속해서 불어났던 이유는 관청과 부패한 지배층을 턴 재물을 골고루 나눴기 때문이었다. 낙양을 쉽게 점령할 수 있었던 이유도 그 덕분이었고.

그러나 그들이 기대하는 것과 달리 자금성의 금고는 텅 비어있을 것이었다. 전쟁배상금으로 고작 금 일만 냥과 은 일백만 냥을 대지 못해 화의를 파기한 명나라였다. 말기 황제들의 전횡으로 숨만 붙어있던 국가의 말로였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안 됩니다, 폐하. 북경은 잿더미가 되고 말 것입니다.”

“홍 총독. 잊지 말게. 자네는 이제 한조의 신하가 아니라 다이칭 구룬의 신하라는 것을.”

“하오나 폐하, 소신은 섬서에서 그자들이 약탈하던 모습을 직접 두 눈으로 보았습니다. 관청이 비어있으면 부자를 털고, 털 부자조차 없으면 백성들을 약탈하던 자들입니다.”

“그래, 더구나 그곳은 옛 몽골 제국이 대도라 부르던 시절부터 제국의 심장부였던 도시다. 약탈하지 않고는 배길 수 없겠지.”

지금은 군대의 모양새를 띠고 있다고 하나 근본은 유민으로 이루어진 도적 떼인 자들이었다. 번화한 도시를 점령하고 욕심을 숨길 수 있을 리가.

이제 입을 꾹 다물고 있는 홍승주의 표정은 복잡해 보였다. 아무리 청에게 항복했다고는 하나 자신이 살던 수도를 도적 떼에게 노출시키겠다는데 기분이 좋을 순 없겠지.

“그래서 군을 나눈다. 주공으로 삼을 제일군은 산해관을 압박하고, 조공 역할을 할 제이군은 우회로를 따라 북경 주변에서 대기한다. 일군은 내가 지휘할 것이고, 북경으로 떠날 이군 병력은 도르곤이 맡으라.”

“예, 카간.”

“홍 총독은 주공에서 한군 팔기를 지휘하다 유사시에는 우회로를 돌아 북경의 이군에 합류해야 할 것이다. 내가 이 임무를 주는 이유를 알겠나?”

“예전에 이자성을 토벌했던 경험을 살리라는 지시가 아니겠습니까.”

“그것이 전부가 아니…… 쿨럭…….”

다시 기침이 도진 홍타이지가 내게 눈짓을 보냈다. 대신 답변하란 이야기였다.

“북경의 지리도, 그곳의 사람들도 가장 잘 아시는 분이 총독이시지 않습니까. 유사시 총독께서 북경성이 잿더미가 될 위기를 막아주시길 카간께서는 바라시는 겁니다.”

“그래서 폐하께서 이 자리에 저를 부르신 것입니까. 항복한 지 얼마 되지 않은 항장에게 이토록 무거운 임무를 주실 줄은 몰랐습니다.”

“……잘 해낼 것을 믿고 있다. 홍 총독. 자네 덕분에 얻은 장기말은 유용하게 쓰고 있네.”

카간의 입을 닦아낸 수건에 이번에는 피가 묻어나지 않자 홍승주는 눈에 띄게 안도하는 모습이었다. 그렇게 밀실에서의 회담은 마무리 되었다.

헌데 도르곤과 홍승주의 뒤를 따라 자리를 뜨려는 나를 붙잡는 자가 있었다. 카간이었다.

곧이어 타스하 잘안, 즉 호포대에 도르곤의 북경원정군에 합류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이번 출진에서도 큰 공을 세우길 바란다. 이번에 기다리고 있을 상은 꽤나 무거울 것이니까 말이지.”

“기대에 부응할 수 있도록 성심을 다하겠습니다.”

고개를 조아리면서도 홍타이지가 내려준다는 상과 내가 기대하고 있던 것이 일치하는지 궁금했다. 내가 원 역사보다 북경 공략이 빨라지게 유도한 이유가 분명 있었으니까.

본래 소현세자가 볼모의 처지에서 풀려난 시점은 청군이 산해관을 뚫고 북경으로 천도한 이후였다. 대륙의 주인을 가리는 싸움이 마무리되었으니 조선의 배신을 염려해 볼모를 잡아둘 필요가 없어졌던 것이다.

하지만 일이 그대로 흘러갔다가는 청의 북경 공략이 홍타이지가 죽은 후에나 일어날 것이다.

그때까지 계속 청을 섬기라는 제안을 거절할 자신이 없었다. 안 그래도 얼마 안 되는 자유 시간을 ‘황녀님’에게 끌려 다니던 차였다.

“심양관에 머물고 있는 자는 잘 감시하고 있겠지.”

“예. 이미 산해관의 사령관에게 보낼 서찰을 쓰라 명을 내렸습니다. 그것이 오삼계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돌려놓길 바랄 뿐입니다.”

“그런 사소한 자까지 기억하고 있다니. 역시 너는 쓸모가 많은 자다. 아직도 나만을 섬길 생각은 없는 것이냐?”

“어차피 제가 섬기는 임금이 카간의 신하이니 사실상 카간을 섬기는 것과 다름이 없지 않겠습니까.”

“핫핫. 뭐, 지금도 성심을 다해 나를 받들고 있는데 소속을 바꾼다고 크게 달라지는 것은 없겠지. 그래, 마카타와의 혼인은 언제 할 생각이냐?”

뭐라구요?

작년의 엽행 이후로 황녀에 대한 이야기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던 카간이었다. 산군 녀석의 사연을 듣고 가끔 고양이나 보러 가라던 카간이 갑자기 급발진을 밟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네놈이 마카타를 황궁 밖으로 정기적으로 빼돌린다는 사실을 이미 보고받은 지 오래다. 내가 모르고 있을 줄 알았느냐?”

아……. 그날 황녀의 요청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었다.

황녀는 한 번 맛본 자유를 쉽사리 잊을 수 없는 모양이었다. 그 후로도 가끔씩 시녀의 옷을 빌려 바깥나들이를 하곤 했다. 문제는 그럴 때마다 나를 동행시킨다는 것.

땀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나를 황녀와 엮으려던 홍타이지의 의도는 삼척동자도 알 만한 것이긴 하나, 만에 하나 그 일이 카간의 심기를 거슬렀다가는 목이 날아갈지도 몰랐다.

그러나 나를 엄하게 꾸짖은 카간의 얼굴은 곧이어 스르르 풀어져 내렸다.

처음 보는 표정이었다.

“그런 얼굴도 볼 만하구나. 내가 마카타의 일로 네 목이라도 벨 것이라 생각했느냐?”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카간.”

“죄를 지은 것은 알고 있는 모양이구나. 핫핫.”

중간에 기침이 섞이긴 했으나 호탕하게 웃어젖히는 홍타이지였다. 가벼운 농담인 모양이었다.

그러나 웃음이 섞여 한없이 가벼워보이던 카간의 입은, 곧이어 무척이나 무거운 말 한 마디를 뱉어냈다. 생각지도 못한 선물이었다.

“나는 이번 일이 마무리되고 한조의 명맥이 끊기면 너와 세자를 고려로 돌려보낼 생각이다. 그것이 네게 내리는 무거운 상이 될 것이다.”

※ 작가의 말

일반적인 인식과는 달리 원역사에서 청이 산해관을 뚫고 북경을 점령한 일은 우연에 우연이 겹친 결과입니다. 작중에서 설명했다시피 산해관을 뚫지 않으면 점령전이 불가능했기 때문입니다. 말 그대로 천명이 따른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일이죠.

관중을 평정한 이자성군의 북경 점령→숭정제의 자결→이자성군의 북경 노략질에 산해관 주둔군의 가족이 피해→분노한 오삼계가 청군에게 항복 후 산해관 개방→청·오삼계 연합군의 이자성군 격파.

위의 복잡한 과정을 거치고 나서야 겨우 청은 중원에 입성하게 됩니다. 위 사건 중 청 측의 의지가 작용했던 것은 하나도 없다 보아도 무방합니다.

하지만 미래를 아는 자가 있다면, 저 흐름을 더 일찍 인위적으로 만들어내고 그 흐름마저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흐르도록 만들 수 있겠죠. 앞으로 그 과정을 지켜봐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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