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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 어사, 조선을 뒤흔들다!-67화 (67/298)

67화. 헤드 헌팅

“그전까지의 패배가 거짓말 같구나! 내리는 술을 감사히 받아 마셔라!”

승전을 이야기하는 홍타이지의 목소리는 들떠 있었다. 시야가 가려져 있어 그의 얼굴을 볼 순 없었지만 아마도 평소에 반쯤 감겨 있던 카간의 눈은 또다시 번쩍 뜨여 있을 것이다.

시야는 왜 가려져 있느냐. 내 시야를 가리고 있는 것은 바가지의 바닥이었다. 그 안에 담겨있다 내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것은 그들이 아이락이라고 부르는 마유주(馬乳酒)였고.

목구멍을 넘어가는 마유주의 맛이 막걸리와 비슷했던 탓에 기분은 점점 더 찝찝해져 갔다. 전생에 겪었던 오리지널 사발식의 안 좋은 기억이 스멀스멀 올라왔기 때문일지도.

아니, 그냥 술기운 때문인가.

“한조 놈들의 군대 육만을 도륙하는 동안 아군이 입은 피해는 없다시피 하다니! 이게 말이나 되는 소리냐? 으하하하!”

카간이 저토록 흥분할만한 전과긴 했다. 저러다 또 코피를 쏟으면 안 될 텐데.

그의 아비인 누르하치가 쓰러진 장소가 이 땅이었다. 원숭환이 방비하던 영원성을 뚫지 못하고 그 전장에서 얻은 부상으로 인해 명을 다했었지. 그런 땅에서 드디어 홍타이지가 대승을 거뒀다.

“죽은 병사가 없을 뿐, 부상 입은 자는 있지 않습니까, 카간.”

“다친 자들도 손가락으로 셀 정도가 아니냐? 이번 싸움은 역사에 영원히 남을 것이다!”

원 역사에서 일어난 송산 전투에서도 궤멸한 명군에 비해 청의 병력은 거의 상하지 않았다. 그 전술을 바탕으로 적절한 위치에 조선군의 화력이 더해졌으니 어찌 보면 이러한 결과는 당연했다. 저들이 미래를 몰랐기에 기뻐하고 있을 뿐.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 그러한 이야기는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세자가 그동안 품었던 염려가 단순한 기우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온몸으로 체감하고 있다는 것이 중요했다.

“저자가 고려국 문관이라는 사실이 믿어지질 않는구나. 몸뚱이는 우리 전사들보다 크고, 도르곤 네 말에 따르면 무예도 출중하다고 하지 않았느냐. 이번엔 군재마저 증명했지.”

“처음 만난 자리에서 제가 내린 백주를 받아 마실 때도 저렇게 호쾌했습니다, 카간.”

“그래? 고려 놈들이 많이 먹고 마신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내 앞에서 그런 모습을 보여주는 자는 하나도 없었다. 헌데 저자는…….”

도르곤과 홍타이지 사이에서 오가는 이야기는 단순한 칭찬의 뉘앙스가 아니었다.

카간의 군막은 호랑이 아가리 속이 분명했다.

홍타이지가 직접 마유주를 바가지에 부어주는 동안에도 그의 눈은 쏟아지는 술이 아니라 내게 계속해서 꽂혀있었다. 그는 바가지에 술이 넘치는 것도 한동안 인지하지 못했다.

‘술아, 제발 천천히 줄어들어라.’

먹이를 노리는 맹수의 눈빛을 다시 마주하고 싶지가 않았다. 게다가 저번과 달리 그 눈빛을 품은 자들이 군막 안에 단 둘만 있는 것도 아니었다. 술기운 때문에 드는 착각인가.

분명 승전을 기념해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술 한 잔씩을 카간에게 내려 받는 자리였을 것이다. 각자의 자리에서 삶은 고기를 안주삼아 술을 즐기면 충분했을 텐데.

헌데 나는 왜 카간의 명으로 그 자리에서 마유주 한 바가지를 원샷 때리고 있는가. 카간의 옆자리에 앉아있는 도르곤이 찌른 일이 분명했다. 심지어 그날 도르곤에게 받았던 사발보다 지금 들고 있는 바가지의 크기가 훨씬 컸으니.

이 만주족 놈들에게 나는 어떻게 비춰지고 있는 걸까. 설마 프로 먹방러는 아니겠지. 그럴 거면 구독료나 도네이션 정도는 쏴 주든가.

“저 고려 놈은 누구냐?”

“카간에게 이번 전투의 기본이 되는 전략을 고한 자라고 합니다.”

“그 이상하게 생긴 조선 삼을 사러 갔던 자리에서 본 것 같은데?”

“투이 장긴(청 정예병인 바야라의 지휘관)이 환장하는 물건에도 저자의 손이 뻗쳐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홍타이지가 나를 군막 한 가운데 세우고 원샷을 명한 덕분에 이 자리에 있는 모든 장수들의 눈빛이 내게 꽂혀있는 것이 피부로 느껴지고 있었다. 귀로 들어오는 그들의 뒷담화 덕분에 마유주를 넘기는 목구멍의 움직임만 점차 빨라졌다.

더는 나대지 말라던 세자의 말을 듣는 게 맞았을지도 모르겠다. 이 자리에 와서 깨달은 것이지만 생각보다 나는 심양에서 꽤 알려진 존재인 듯했다.

끄억,

가벼운 트림과 함께 바가지를 전부 비워냈으나 이유모를 불안감은 비워지지 않았다. 앞에 앉아있는 높으신 분들의 시선이 계속해서 내게 향해있었기 때문이었다.

“폐하, 안 자의가 술을 다 마셨으니 저희는 이만 자리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내 옆에 서 있던 세자의 목소리에서 불안한 감정이 느껴졌다. 세자는 평범한 잔에 받은 술을 금방 비우고 옆에서 이 꼴을 전부 목격하고 있었을 터였다.

“안 된다. 아직 할 이야기가 남아 있다.”

“할 이야기가 있으시다니, 그것은 어인 말씀이십니까?”

“네게 할 이야기는 아니다. 너 혼자라면 자리로 돌아가도 좋다.”

“아닙니다. 안 자의는 제 사람이니, 윗사람 된 입장에서 폐하의 고언을 함께 듣겠습니다.”

그러면서 세자는 나와 카간 사이에 슬며시 오른쪽 어깨를 들이밀었다. 그가 표하는 의지는 확고했다. 아마도 세자 역시 나와 같은 것을 예상하고 있으리라.

“뭐, 좋다. 네가 있으면 이야기가 더 빠르게 진행될지도 모르겠군.”

세자의 어깨 너머로 다시 맹수의 눈빛이 날아왔다. 하지만 앞을 막아주는 세자 덕분에 그 눈빛을 피할 생각은 들지 않았다.

맹수에게 등을 보이면 오히려 쉬이 당하는 법이었다. 조선 땅에 처음 떨어져 호랑이와 마주쳤을 때 뼛속 깊이 배운 교훈이었다.

“저자를 내게 넘겨라. 고려 같은 소국이 품기에는 아까운 자다.”

순간 숨이 턱 막혔다. 본격적으로 발톱을 드러낸 카간이 내쏘는 기운은 차원이 달랐다.

그동안 카간이 풍기고 있던 살기는 단순히 무의식중에 흘러나오던 것에 불과한 모양이었다. 앞을 가로막은 세자의 존재마저 지워버리는 듯한 압도적인 기운이었다.

“폐하, 무슨 말씀이신지 제 청국어가 짧아 이해하지 못하였습니다.”

“못 들은 척 하지 마라. 안한수를 내 휘하로 넘기라 하였다. 네놈들 같은 소국이 시키는 소꿉놀이와 저자의 그릇이 걸맞지 않다는 것은 세자가 더 잘 알고 있을 텐데?”

이제 홍타이지가 내뿜는 살기는 세자에게까지 향했다. 세자의 어깨에 새겨진 용 문양이 부들거리고 있었다.

“고려국 세자는 왜 말이 없는가? 또다시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는 핑계를 대려는 것이냐?”

“그게 아니라…….”

“그렇다면 제대로 된 정예병도 몇 없는 고려에서 저자의 재주를 썩히겠단 말이냐? 좁은 새장에 갇힌 매는 언젠가 나는 법도 잊어버리기 마련이다. 그 꼴을 볼 순 없지.”

세자는 몰아치는 카간의 기운에 압도당해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의 관자놀이를 구르는 땀방울 하나만 보일 뿐이었다.

“폐하. 그렇게 막무가내로 빼앗으려 들면 고려국 입장에서는 곤란하기 마련입니다. 카간의 위치에서 그들의 처지까지도 헤아려주셔야지요.”

“고작 말직의 신하 하나 데려가는데 무엇이 곤란하단 말이냐, 도르곤?”

“세자가 머무는 심양관을 먹여 살리는 것이 안한수 저자입니다. 저번에 제가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저자가 찾아와 땅과 사람을 내놓으라 으름장을 놓은 것을?”

그래, 도르곤, 말 한 번 잘 했다. 그냥 나는 이 전투의 전개를 미리 알고 있어서 대박을 하나 친 거고, 심양관은 나 없으면 안 굴러가니 제발 카간은 뜻을 접어주었으면.

하지만 그 말을 들은 홍타이지의 눈빛은 광채만 더해갈 뿐이었다. 그 옆에서 의미심장한 표정을 짓는 도르곤을 보니 그 말이 나를 위해서 한 말은 절대 아니라는 것을 바로 깨달았을 수 있었다.

“덕분에 고려국 체류자들에게 들어가던 군량을 다른 곳으로 돌릴 수 있게 되지 않았느냐. 그것 또한 저자의 생각이었느냐?”

“그렇습니다. 폐하께서 드시고 효과를 절찬하셨던 홍삼이란 물건도, 황후께서 애용하시는 향기 나는 가죽도 저자가 심양 땅에 공급하는 물건입니다. 고려국 심양관의 재정은 저자의 재주에 크게 의존하고 있습니다.”

“전부 심양에 크게 유행하고 있는 물건들이로군. 그럼 만금을 주고 데려와도 아깝지 않은 자가 아니냐.”

카간의 눈빛이 앞을 막아선 세자를 숫제 꿰뚫어 버린 채 나를 향하고 있었다. 도르곤 놈이 황제의 불타는 탐욕에 기름을 부어버린 것이 분명했다.

“그것으로 끝이 아닙니다. 그렇게 벌어들인 재물을 가지고 정예 병력 오십 인을 양성했는데, 그들의 사격 솜씨가 사람의 것이 아니라 합니다.”

“정예병을 키워내는 재주도 있다는 것이냐?”

“예, 카간. 필가산 뒷길에서 벌어진 전투를 보고 온 제 부하들이 증언한 바입니다. 얼룩덜룩한 옷을 입은 자들이 보통 조총의 두 배가 넘는 사거리에서 한군의 지휘관들을 정확히 쏘아 떨어뜨렸다고 합니다.”

저자가 내게 부대를 붙여준 이유는 그것이었나. 카간에게 보고를 올리며 곁눈질로 연신 나를 흘겨보는 자의 속내는 시꺼멓기 그지없었다.

도르곤의 시누이 짓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해방된 조선인들을 끌고 심양 근방에 서식하는 해로운 짐승들의 씨를 말린 일이나, 심양의 관리들 사이에서 유행 중인 피자 배달까지 언급하고 있었다.

이 정도면 거의 스토커 수준이 아닌가.

그제서야 깨달았다. 도르곤이 나를 노려왔던 것은 하루 이틀 일이 아니라는 것을. 내게 힘을 나눠주면서, 동시에 내 그릇을 재고 있었다는 사실도.

세자의 직감은 날카로웠었다.

“더는 참지 못하겠다. 오늘부터 나를 섬겨라. 안한수.”

“폐하!”

“고려국 세자는 비켜서 있으라! 나와 한수 사이의 일이다!”

청나라 황제에게 직접 당하는 헤드헌팅이라…….

기분 자체는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가슴을 두근거리게 만드는 제안이었다.

분명 그의 제안을 승낙하면 조선에서 움켜쥘 수 있는 기회보다 더 큰 기회를 얻을 것이 분명하다. 모든 것을 바닥부터 쌓아올리느라 몸을 갈아 넣고 아웅다웅거릴 일도 없을 것이다.

“내 너를 중히 쓸 것이다. 나의 신하가 되거라.”

내가 그렇게 맛있어 보이는 매물인가. 숫제 내 쪽으로 몸을 기울여 손을 뻗는 카간이었다.

항복한 명의 장수들도 왕작까지 내려주며 중히 쓰는 사람이니 그의 손을 잡으면 출세는 탄탄대로겠지. 똑똑한 사람이라면 그렇게 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그러나…….

“안 된다! 안 자의, 너는 조선의 신하다! 그 손을 잡지 마라!”

“도르곤! 고려 세자가 입을 다물게 해라.”

카간의 명을 받은 도르곤의 일갈에 세자는 내게 눈빛만 보내는 존재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러나 소현세자의 마지막 외침 때문인지, 내가 가슴에 품고 있던 물건의 존재감을 기억해낼 수 있었다.

“어서 입을 열거라, 안한수. 대답은 물론 승낙이겠지?”

청태종 홍타이지에게 머리를 숙이고 들어갔을 때의 이득을 계산하는 머리와는 달리, 가슴은 거세게 방망이질 치며 그 생각들을 거부하고 있었다.

분명 내 가슴에 품은 것은 선비의 심장.

그것 때문인가.

고동치는 심장소리가 조각난 마패에 반사되어 흩어진다.

나는 조선시대에 떨어지고서 왜 이 길을 택했는가?

가슴에 품은 마패는 내가 남원 관아에서 다짐했던 초심을 다시 일깨워 주었다.

내 목숨을 구해준 어사 나리, 내가 구렁텅이에서 구해냈던 백성들, 한양에서 내 뒤를 지켜주고 있는 좌명, 내 일이라면 발 벗고 나서던 박연과 요안 요운 남매. 그리고 하연…….

‘하, X발……. 인연이란 게 이렇게 무거운 것이었나. 핏줄의 무게 또한…….’

나도 모르게 입술 사이로 한숨 한 자락이 푹 새어나갔다. 그때 이후로 품어온 큰 뜻을 단숨에 꺾기엔 카간의 제안은 단 한 끗이 모자랐다.

그것을 본 카간은 눈자위를 희번덕거리고 있었다. 아마 내가 갈등 끝에 승낙할 것이라도 믿어 의심치 않는 모양이었다.

그렇게 영겁처럼 느껴지는 찰나의 시간이 흘렀다. 답이 없는 깊은 고민에 빠져있다 잠시 시선을 들었을 때, 내 눈에 들어오는 무언가가 있었다.

그 순간, 아슬아슬하게 평형이 맞추어져 있던 마음속 저울에 먼지 한 톨이 더해졌다. 천천히 기울어가던 저울의 평형추는 반대쪽에 올려놓을 물건을 찾지 못하자 결국 급속도로 무너졌다.

“폐하. 저는…….”

※ 작가의 말

청사에 기록된 금주·송산 전투의 정확한 병력교환비는 53783 vs 10입니다.

열하일기, 연원직지출강록에도 같은 내용이 적혀 있습니다. 소현심양일기에는 10만의 명나라 구원병 중 오삼계가 이끄는 3만 명만이 영원성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기록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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