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화. 송산 전투
“후욱……. 후욱…….”
오늘이 며칠이더라. 전장에 나온 이후로 시간 감각이 점점 마비되고 있었다.
손가락을 꼽아 헤아려보니 유봉산에 주둔 중인 명군을 포위한 지 무려 나흘이나 시간이 흘러 있었다. 아마 밤마다 일지를 쓰지 않았더라면 이 정도의 날짜 개념도 남아있지 않았겠지. 그 정도로 전장은 급박한 공간이었다.
그 와중에 다리에 찌릿한 감각이 느껴졌다. 이 좁아터진 공간에 몸뚱이를 쑤셔 넣고 매복한 지는 또 몇 시간이 지났더라.
“김 갑사. 아직 느껴지는 것이 없는가?”
“쉬잇…… 아직 애매합니다요.”
김 갑사는 맨땅에 귀를 댄 채 희미한 소리 하나까지 잡아내느라 한창 정신을 집중하고 있었다.
다가오는 적병의 소리를 잡아내기 위함일 것이다.
그런 김 갑사의 모습에 이 자리에 있는 조선군 전원의 눈길이 쏠려 있었다. 다들 깊은 호를 파내고 들어앉아 잡초와 나뭇가지로 몸을 숨긴 상태였다.
병사들이 탐탁지 않아 할 명령이었지만 불만을 표하는 자는 하나도 없었다. 나흘 사이 작지 않은 전투를 두 차례나 겪으면서 쌓인 신뢰 때문일 것이다.
처음에는 정면대결을 유도하던 명군이었다. 그러나 당연히 홍타이지는 그들과 맞서 싸워줄 생각이 없었다. 굶겨서 힘이 떨어졌을 때 치면 되는 것을 미리 싸울 필요가 없었겠지.
그러자 명군이 선택한 전략은 우회로 공략이었다. 하지만 이미 그것은 나와 홍타이지의 계산 안에 있던 행동이었다.
고지대에 매복해 있던 조청 연합군은 산 뒷길로 빠져나가려던 명나라 기병 수천의 머리 위에 탄환과 화살의 비를 퍼부었다. 그 지옥에서 살아 돌아간 자는 몇 되지 않았다.
가까스로 빠져나간 병력 일부는 해안에 위치한 군량고를 약탈하다가 추격하는 아군 기병에 목이 날아갔다. 적의 목표가 무엇인지, 어떤 상황에 빠져 있는지 그것만 봐도 짐작을 할 수 있었다.
명군은 두 번째 공격으로 기만 전술을 시도했다. 대규모의 병력을 카간의 군막이 위치한 진영으로 돌격시키는 척 하면서 별동대를 꾸려 영원으로 향하는 길을 뚫으려 한 것이었다.
매복해있던 병력 중 대다수는 카간을 구원하러 후퇴했지만, 길목을 계속해서 지키던 부대는 딱 두 무리 존재했다. 조선군과, 도르곤이 조선군에게 붙여준 자신의 팔기군 일부였다.
카간의 군막 근처까지 어지러이 싸우는 소리가 들렸을 정도로 명군의 공세는 매서웠지만 결국 그 시도는 무위로 돌아갔다. 별동대가 조선군의 매복에 걸려 전멸했기 때문이었다.
그 두 번의 전투 이후로 조선군 내에서 나를 얕보는 자는 한 명도 없게 되었다. 호포대의 화력과 정확도는 청군까지 합쳐도 비길 군대가 없었을 뿐더러, 내가 주장했던 그대로 명군이 계속해서 움직여줬으니까.
전장이 내 예상대로 굴러가고 조선군이 큰 군공을 세우기 시작하자 조선군에 대한 청의 대접도 계속해서 나아졌다.
조선군이 소모할 군량은 알아서 본국에서 조달하라던 자들이 약탈한 명군의 군량을 알아서 배분해주기 시작한 것이 첫 번째였다.
카간의 군막에서 계속 전령이 달려와 고급 정보들을 실시간으로 공유해주는 것도 컸다. 유봉산을 내려온 명군이 군량 부족을 이유로 송산 요새 진입을 거부당했다는 정보를 듣고 지금의 매복 작전을 계획한 참이었다.
현재 매복하고 있는 위치만 보아도 조선군의 위상이 얼마나 올라갔는지 알 수 있었다. 곧 적은 포위망을 돌파하고 영원성을 향해 기를 쓰고 후퇴하려 들 것이다. 그 맥을 자르는 가장 중요한 위치에, 호포대를 위시한 조선군 조총수들이 매복하고 있었다.
‘정말 그 자리에 우리 군을 배치하겠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래. 네놈들의 화력을 의심하는 자는 이제 내 군대 안에는 없다. 마음껏 날뛰어 봐라. 선물이다.’
홍타이지의 직속 팔기들은 명군에게 후퇴로를 열어주었다가 그대로 허리를 끊고 이쪽을 향해 몰아쳐올 것이었다. 그들이 망치가 된다면, 모루가 될 부대의 최선봉에 조선군이 배치되었다. 카간이 우리 부대에 어떤 기대를 걸고 있는지 알 것 같았다.
“나으리, 곧 적이 옵니다!”
“좋아. 전원 발포 준비! 화승에 불 꺼지지 않도록 주의하고, 다시 매복에 들어간다!”
땅바닥에 엎드려 소리를 듣고 있던 김 갑사는 내려놓았던 자신의 총을 주워들고는 파놨던 호로 다시 기어들어 갔다. 상체를 꺼내놓고 전방을 응시하던 조총수들도 다시 땅 아래로 모습을 숨겼다.
밖으로 드러나 있는 것은 대지와 평행하게 전방을 겨누고 있는 그들의 총구뿐이었다. 이 총구가 불을 뿜는 순간, 송산 전투의 클라이막스가 시작될 것이다.
멀리서 흙먼지가 이는 것이 보였다. 명의 대군이 이쪽을 향해 전진하고 있었다.
그들은 뒤꽁무니에 불이라도 붙은 듯이 급하게 이동 중이었다. 계획대로 청의 기병이 그들의 꽁무니를 잘 물어뜯은 모양이었다.
침이 꿀꺽 넘어갔다.
천천히, 소리 없이 명군의 선두를 그대로 흘려보냈다. 그들은 다른 곳에 매복한 병력들이 처리할 것이다. 뒤에 조청연합군 주력이 매복하고 있는 산에서 불어오는 바람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화려한 복장을 한 지휘관들이 슬슬 적병들 사이에서 보이고 있었다. 지금이다.
“호포대, 발포하라!”
버로우 해제!
그대로 상체를 호 밖으로 빼내어 장전하고 있던 방아쇠를 당겼다. 가늠좌 끝에 피보라가 불어닥쳤다. 몇 그램 안 되는 납탄은 너무나 쉽게 지휘관 하나의 생명을 빼앗아갔다.
탕! 타탕! 타탕!
내 양옆으로 지면을 뚫고 튀어나온 호포수들 역시 총구 끝에 겨눠진 적들의 인생을 오늘로 마무리 짓고 있었다.
“죽여! 다 죽여!”
“죽어라! 아버지의 원수, 명나라 뙤놈들아!”
“네놈들이 제대로만 싸웠어도 오랑캐 땅으로 잡혀 오진 않았다! 이 개자식들아!”
처음엔 말없이 방아쇠도 겨우 당기던 자들이었는데 어느새 전장에 익숙해진 듯했다. 아버지의 원수라 외치는 자는 평안도에 주둔하던 명나라 장수 모문룡의 패악질에 당한 자일까.
그에 화답하듯 능선 아래에 매복하고 있던 조선군 화승총수들이 일제사격을 시작하는 것이 보였다. 사거리가 짧아 더 전방에 매복하고 있어야 했던 자들이었다.
일제히 날아드는 수백발의 총탄은 적의 옆구리를 찢어놓았다. 특히 호포대원들이 저격한 지휘관들이 말등에서 떨어지자, 적의 혼란은 더욱 가중되기만 할 뿐이었다.
“히히힝!”
“기습이다, 기습!”
“장군! 으아아악!”
이미 꽁무니를 물어 뜯겨 정신없이 남하 중이던 적이다. 거기에 조선군의 비수가 옆구리를 뚫어놓았으니 군의 기강이 유지될 리가 없었다.
“발포를 멈추지 마라! 적이 눈앞에서 사라질 때까지 계속해서 발포하라!”
화약과 탄을 총구에 쑤셔 넣고는 총을 바닥에 툭툭 내리쳐 장전을 끝냈다. 제일 중요한 전투에 쓰려고 준비해온 특별한 화약 덕분에 장전 시간은 반이나 줄어들어 있었다.
흔히 쓰는 가루 상태의 화약이 아니라, 물을 뿌려 굳힌 것을 부숴 알갱이 상태로 만든 것이었는데, 덕분에 꼬질대로 총구를 쑤실 필요가 없이 몇 번 내리치는 것만으로도 탄과 화약을 정렬시키는 것이 가능했다.
일 분에 네 발씩 쏘아대는 호포대의 저격이 적의 고급 장교들을 찢어발기는 동안, 조선군 화승총수들과 살수들이 쏘아대는 화살과 총탄들은 적의 측면을 아주 아작 내 놓고 있었다.
주인 잃은 말 여럿이 적진 한가운데서 적군들을 뺑소니쳤다. 총탄과 화살에 맞은 적군들은 울부짖으며 사방으로 흩어졌다. 아수라장을 방불케 하는 모습이었다.
일부 정예군으로 보이는 자들은 몸으로 그들의 지휘관으로 향하는 총탄들을 막아보려 애를 쓰고 있으나 소용이 없었다. 목표를 가로막는 장애물을 쓰러뜨리고 뒤이어 날아온 납탄은 그들의 숭고한 희생을 너무나 쉽게 무의미한 짓으로 만들어버렸다.
뿌우우.
몇 발이나 쐈던 것일까. 가져왔던 일 회분 화약통 중 열 개 남짓이 내 발밑을 구르고 있을 무렵, 우리가 매복하고 있던 능선의 좌우로 뿔나팔 소리가 길게 울렸다.
슬슬 적중에도 정신 차린 자가 있는 모양인지 이쪽을 향해 명군이 발사한 화살과 총탄 몇 발이 날아들기 시작했을 무렵이었다.
이 개새끼들, 늦었잖아? 조선군 싸우는 거 구경만 하고 있었나.
두두두두.
땅을 울리는 소리와 함께 얕은 능선으로 쏟아져 내려간 것은 우리 군의 후방에 매복하고 있던 청군의 정예 철기였다. 말발굽에 일어난 먼지가 전장의 좌우를 뿌옇게 가렸다.
호란 시절에는 조선군을 찢어놓았을 악마들이 지금은 최고로 든든한 아군이었다. 조준을 방해할 정도로 땅을 울리는 기병의 규모에 욕지거리가 절로 나왔으나 가슴은 묘한 흥분으로 떨리고 있었다.
“적이 도주한다! 호 밖으로 나와 그대로 적을 추격, 섬멸한다!”
조선군의 매복 후 일제사격이 적을 혼란케 만드는 잽이었다면, 청군의 기병돌격은 적의 명치에 꽂혀 숨을 멎게 하는 묵직한 스트레이트 한 방이었다.
전장에 피보라가 한 번 더 휘몰아쳤다. 이번에는 기병의 창끝과 칼끝에서 벌어지는 무제한적인 학살이 불러온 피보라였다.
적은 굶주려 힘이 없다고는 하나 정예군다웠다. 머리를 박고 항복하는 자는 적고, 도망치거나 끝까지 맞서 싸우다 팔기의 칼날에 목숨을 잃는 자가 대다수였다.
“지긋지긋한 한조 놈들! 죽어라!”
“으악!”
“어딜 도망가느냐! 내 칼을 받아라!”
“치욕스럽게 목숨을 잇지 마라! 죽어도 대명의 군졸로 죽어라!”
조선군 조총수들은 기병의 뒤를 따라 돌격하면서 앞을 막아서는 명군을 쏘아 쓰러뜨렸다. 추격당하던 도중에 허리를 잘리고 삼면에서 공격을 받는 군대가 버틸 수 있는 방도는 없었다. 남은 것은 아가리를 벌리고 있는 요동만의 푸른 바닷물뿐.
일방적인 학살이었다.
쌓여가는 명군의 시체는 모여 산을 이뤘고, 흐르는 피로 바닷물이 붉은 색으로 변했다. 꺼림칙한 검붉은 색으로 변한 파도는 바닷물에 몸을 던진 자들의 흔적을 계속해서 해안으로 밀어댔다.
전장을 진동하는 비명 중, 만주어나 조선말로 된 비명은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오로지 명나라 군졸들이 쓰는 한어(漢語) 비명만이 계속해서 메아리치고 있었다.
명나라의 마지막 무력은 이 전장에서 모조리 분쇄되었다.
겨우 영원성으로 도망친 선두의 병력 일부를 제외하면 전부 청군이 파놓은 덫에 걸려 스러져갈 것이다.
대륙의 운명은 오늘 결정된 것과 다름없었다.
***
“어서 오십시오! 카간께서 고려국 일행을 기다리고 계신지 오래입니다!”
전투가 끝난 후, 카간의 부름을 받고 세자와 함께 그의 군막을 다시 찾은 길이었다. 이전에는 다짜고짜 반말을 던지던 청군 수문장 놈의 태도가 바뀌어 있었다.
심지어 내가 말에서 뛰어내리기 이전에 먼저 다가와 고삐를 잡아주고, 지시도 받지 않았는데 세자와 내 말을 끌어다 세워놓았던 것이다.
그런 수문장의 행동에서 무언가 이상한 낌새가 느껴졌다. 하도 세자가 청나라 사람들의 포섭을 주의하라고 이야기한 탓에 나도 물들어버린 건가.
공손해진 수문장 놈의 안내를 받아 군막의 중심, 털 깔개에 앉아 있는 카간을 영접하러 가는 길.
처음에는 우리가 들락거리는 것도 신경 쓰지 않고 대화에 아랑곳하지 않던 군막의 분위기도 많이 달라져 있었다.
카간 앞으로 열려있는 길 양옆으로 앉아있는 청나라 장수들의 시선이 전부 나와 세자를 향해 꽂혀 있었다. 그중에서 유독 빛나고 있는 도르곤의 눈빛을 나는 금방 구별해낼 수 있었다.
카간의 앞까지 걷는 그 짧은 시간 동안 숨이 막힐 것 같은 기분이었다.
“어서 오너라! 고려국 세자. 그리고 안한수!”
누가 들어도 방금 홍타이지가 내 이름에 강세를 두어 발음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옆에 서 있는 세자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보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 작가의 말
이번 화에 묘사된 전투는 소현심양일기의 신사년(1641년) 8월 20일부터 8월 25일까지 적힌 기록에 근거해 묘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