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화. 기념비적인 첫 전투
그렇게 이천오백 조선군은 새벽 야음을 틈타 강을 건넜다.
주사위는 던져졌다.
금주 봉쇄를 위해 요동만 일대의 제해권은 이미 청의 선박들이 장악하고 있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일을 대비해 횃불 하나 켤 수 없었던 조용한 진군이었다.
강을 넘자마자 맞닥뜨린 것은 명나라 군사들이었다. 아니, 명나라 군사‘였던 것들’이라고 말해야 좋을까. 눈에 들어온 것은 경계를 서고 있던 자들이 길을 뚫기 위한 청군의 정예 기병에게 말 그대로 으깨져버린 처참한 모습이었다.
인간과 말, 온갖 시신의 참상들이 뒤덮은 전장을 통과해 말을 달리는 세자는 말이 없었다. 이미 출진 이후로도 말수가 심각하게 줄어들었던 세자였다. 그의 얼굴이 달빛을 받아 하얗게 바래져 있었다.
“형님, 괜찮으십니까?”
“봉림, 내가 우리 군사들의 사기를 북돋았던 일이 옳은 일인지 모르겠구나. 아무리 이길 수 있는 싸움이라 하나, 내가 마주했던 자들이 이 꼴이 되어 남의 땅에 누울 것을 생각하니 견디기가 어렵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형님. 전쟁이란 원래 이런 것입니다. 저번에 형님이 아팠던 탓에 저 홀로 나섰던 전쟁터에서는 더 심각한 풍경도 여럿 보았습니다. 마음을 굳게 드십시오.”
성격이 터프한 대군은 이전에 종군했을 때도 별 감흥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세자의 심정 역시 공감이 가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잡혀간 백성 하나를 보아도 가슴아파하던 세자였다. 남의 전장에서 죽어갈 군사들에게는 어떤 기분일까.
송산 땅에서 아무리 대승을 거둘 것이라 하나, 세자를 보면 조선 병사 하나의 목숨도 헛되이 쓰면 안 될 것이다. 그런 다짐을 계속해서 마음속으로 우겨넣고 있던 찰나였다.
“적습이다! 적습!”
“저하! 아군 측면에 적으로 보이는 병력이 나타났다 하옵니다! 어찌하면 좋겠나이까?”
대열의 선두에 위치해 있다 척후병의 보고를 받아 급하게 세자에게 달려온 평안병사 유림이었다. 세자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길을 뚫고 있는 청 철기(鐵騎)의 뒤를 살수와 조총수로 따르기에도 벅찼던 터였다.
“적의 병력은?”
“수십에서 백 명 가량 되옵니다! 보이지 않는 적이 더 있을 가능성도 있나이다!”
유림의 목소리는 다급했다. 전체 병력 상 아군이 절대 열세였으므로 갑자기 나타난 적의 작은 병력에도 가슴이 떨어질 것이었다. 세자 역시 깊은 고민에 빠진 듯했다.
문득 떠오르는 생각 하나가 있었다. 갑자기 나타난 적 병력들을 써먹을 방법이.
“저하, 소인에게 맡겨주시옵소서.”
“안 자의? 무슨 말이냐?”
“나타난 적이 수십에 그친다면, 소인이 데려온 호총수들이 상대하기 가장 알맞은 병력이나이다. 포수들을 지킬 살수 몇만 붙여주신다면 저들을 격멸하고 본진에 합류하겠나이다.”
“이놈! 무관도 아닌 자가 어디 군을 움직이는데 끼어드느냐! 어디 정칠품 잡관 따위가!”
격노한 목소리가 내 귀를 파고들었다. 세자의 권위에 눌려 뜻을 꺾었지만 세자에게 조언을 주고 있던 나를 계속 눈엣가시처럼 여기던 유림이었다. 참아오던 것이 폭발한 모양이지?
“송구하오나 병마절도사 영감, 세자 저하를 위한 충언에는 품계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뭣이?”
“지금 청주의 명을 따라 한시바삐 목적지로 향해야 하는 처지가 아닙니까. 정해진 시간에 늦기라도 한다면 또다시 세자 저하께서 청주의 불벼락 앞에 노출될 터인데, 그래도 좋으시단 말씀이십니까?”
정론이었다. 허를 찔린 유림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하고 있었다.
따지고 보면 당신이 제대로 싸우지 않아 나와 세자까지 전쟁터로 끌려 나온 것이 아닌가. 그걸 안다면 입을 다물어야지.
하지만 내가 내세울 명분은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만일 적이 생각보다 많다면 소인과 호포수들을 버리고 목적지로 향하셔도 됩니다, 영감. 그것이 올바른 군략이 아니겠습니까?”
“어디 문관에 불과한 네놈이 스스로 미끼로 자원하겠다, 이 말이냐? 이게 무슨 말이나 되는…….”
“평안 병사, 이 자의 군재는 청주도 감탄한 재능이다. 그리 가볍게 이르지 마라. 그리고 안 자의.”
“저를 염려하시는 것은 알고 있사옵니다. 허나 허하여 주시옵소서. 저하.”
세자의 눈에 잠시 당혹감이 스쳐갔다. 허나 그가 금방 눈빛에 총기를 되찾은 것은 그동안 내가 쌓아온 신뢰 덕분일 것이다.
“아무리 청주와 약속한 시간을 맞추는 것이 중요하다 해도 너를 어찌 버리고 간단 말이냐. 안 자의는 뜻을 접으라.”
“적의 병력이 유봉산에 집중되어 있는 것은 출진 전에도 확인했던 사실이옵니다. 저들은 저희가 도하해온 강가를 경계하던 패잔병일 확률이 높사옵니다.”
사실은 확률이 높은 정도가 아니라 100%지만.
짧게 고민하던 세자의 입은 곧 열렸다.
“좋다. 네 말이 맞다면 싸워 이기는 것에는 문제가 없겠지. 허나 적의 병력이 생각보다 많다면 맞서 시간을 끌 생각은 하지 말고 곧바로 본진으로 귀환하라. 거기까진 양보할 수 없다.”
“저하?!”
“삼가 명을 받들겠나이다. 저하.”
“반드시 상처 하나 없이 돌아오라. 명을 어겼다간 용납하지 않겠다.”
고개를 숙이고 세자의 옆을 빠져나왔다. 유림이 세자에게 뭐라고 고하는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렸으나 신경 쓰지 않았다. 내 뒤를 따르던 김 갑사는 행군하던 호포수들을 불러오기 위해 말을 달렸다.
잠시 후, 끌어 모은 내 부대는 본대에 접근하던 패잔병 무리들과 목적지로 멀어져가는 본대 사이를 가로막고 설 수 있었다. 세자가 붙여준 살수 오십과 호포수 오십을 합친 규모였다.
드디어 우리 나으리가 타고날 무재를 뽐낼 날이 왔다며 행군 내내 들떠 있던 김 갑사도 지금은 착 가라앉아 있었다. 종군 경험이 있는 그가 큰 그림만 그릴 줄 아는 내 약점을 적절히 채워주고 있어 다행이었다.
“나으리, 살수들까지 붙일 필요는 없지 않았습니까요? 어차피 총 몇 방 제대로 맞으면 도망갈 놈들인 것 같습죠.”
“나도 그것은 김 갑사의 생각과 같네. 하지만 유비무환이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게다가…….”
아무리 홍타이지의 눈에 들어 지휘도까지 내려 받았다고는 하나, 실적 하나 없는 상태에서 내 의견이 군략에 받아들여지기는 어려울 것이었다. 내가 데려온 호포수들을 쓰는데도 평안병사 유림이 저렇게 태클을 거는 마당이었다.
이들의 위력을 기존 조선군들에게 각인시켜야 앞으로의 일이 편할 것이었다.
앞에 선 패잔병들에게는 조금 미안한 일이지만.
***
경계를 서던 명나라 군졸 장 씨는 야음을 틈타 강을 넘어 기습한 청나라 놈들에게 동료 대다수를 잃었다. 야만족 놈들의 말발굽을 피해 겨우 목숨은 건져 달아났으나, 곧이어 나타난 파총관(把摠官) 한 명에게 수습되어 목숨만은 건졌던 터였다.
그들에게는 새로운 임무가 주어졌다. 더 중대한 임무를 맡은 이를 안전하게 만들기 위해, 적의 후속부대와 시간을 끌라는 명령이었다.
장 씨는 당장이라도 도망치고 싶은 심정이었으나 겨우 참아냈다. 파총관의 칼날이 언제든지 그의 등짝 뒤에서 빛나고 있었으니까.
그러나, 상관의 희망과는 달리 마주친 거대한 적군이 그들을 무시하고 몇 안 되는 병력을 남긴 채 떠난 것이 보였다. 저 정도 병력을 상대라면 살아남을 수 있지 않을까. 전열 맨 앞에 서 있던 그에게도 새로운 희망이 솟아났다.
퍽.
하지만 미약한 희망은 너무나 쉽게 부서져버렸다. 불쾌한 파열음과 함께 방금까지 삶을 다짐하던 동료의 머리가 으깨져버린 것이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곧이어 천지를 뒤흔드는 듯한 폭발음이 뒤늦게 고막을 파고들었다. 놈들은 아직 까마득히 멀리 위치해 있던 터였다.
아랫도리가 뜨듯하게 젖어드는 것이 느껴졌다.
***
“적 삼백 보 거리로 접근!”
거리를 재 소리치는 김 갑사의 목소리가 대열 전체를 쩌렁쩌렁 울렸다.
웬 얼룩덜룩한 복장을 한 사냥꾼들이 만만해 보였는지 적은 천천히 거리를 조여들고 있었다. 조총 사거리 밖인 것을 알고 있는지 몸을 그대로 노출한 상태였다.
“호포수 전원 위치로! 호총 장전!”
대열을 갖추고 대기 중이던 호포수들이 적을 향해 열 명씩 다섯 줄의 방진을 형성했다. 살수들은 익숙하다는 듯이 조총수들을 가운데 넣고 두 무리로 갈라져 양옆을 감싸고는 활을 들었다.
김 갑사가 호포수들에게 훈련시킨 조선군의 조총수 운용법 덕분에 인계받은 살수들과의 호흡은 딱딱 맞아떨어졌다. 총검을 들 일이 생기면 그때는 조금 달라지긴 하겠지만, 그럴 일은 없어야 할 것이다.
“적 이백오십 보 거리로 접근!”
나도 황급히 말에서 뛰어내리면서 말등에 걸려있던 총과 줄에 꿰여 있는 호리병들을 낚아챘다. 대열의 맨 왼쪽에 서서 장전을 시작하는데, 이미 호총수들 중 빠른 자는 장전을 완료하고 적을 향해 총을 겨누고 있었다. 마음이 급했다.
기계적으로 호리병 하나를 열어 담겨있던 일회분의 화약과 탄환을 총구에 쑤셔 넣었다. 꼬질대로 정신없이 집어넣은 화약을 다지고 있는데, 옆에서 말없이 종군하던 충신이 말을 걸어왔다.
“드디어 한수 네가 그 물건을 쓰는 것을 내 눈으로 보는구나. 꼭꼭 숨기기만 하더니.”
“숨긴 적 없습니다. 사형이 바쁘다는 핑계로 피해 다닌 것이겠지요.”
딱딱하게 굳어진 얼굴을 보고 이 인간도 전장에 들어서니 긴장이란 것을 하나 싶었다. 하지만 충신의 말투는 평소와 같이 유려할 뿐이었다.
“선비 된 자가 활이 아니라 조총을 잡다니. 대사간 나리가 이 일을 알았다가는 경을 쳤을 거다.”
“제게 사형처럼 강궁을 자유자재로 쏠 능력이 있었다면 조총을 잡지도 않았을 겁니다. 바쁘니까 방해하지 마십시오.”
“인마, 다 네 긴장을 풀어주려고 이러는 것 아니냐. 네가 지시했던 것은 정확히 기억하고 있다 걱정하지 마라.”
충신의 손에 들려 있는 것은 반 토막 난 대롱과 짧은 화살이었다. 저것 없이도 남들보다 화살을 배는 멀리 날리던 양반이었다. 도대체 저 물건을 쓰면 얼마나 큰 위력이 나올지.
남은 화약을 화약접시에 넣고 뚜껑을 닫았다. 그렇게 장전은 끝났으나 내 옆에 서서 활을 겨누고 있는 충신에게 아직 할 말이 남아있었다.
“괜찮겠습니까? 굳이 전장에까지 따라오실 필요는 없었는데요.”
“인마. 내 사연 다 아는 놈이 굳이 모르는 척 물어보기냐.”
“사형…….”
“저놈들이 조금만 더 사람처럼 싸웠더라도 할아버님과 내 신세가 이렇게 되지는 않았을 거다. 마음에 걸리는 것은 동해바다에 떨어진 소금 한 톨만큼도 없음이야.”
충신의 표정을 이토록 얼어붙게 만든 것은 저들에 대한 적개심인가. 천천히 아기살을 통아에 잰 후 시위에 먹이는 그의 손길 역시 흔들림이 없었다.
그 표정을 딱 한 번 본 적 있었다.
기루에서 강홍립과 사르후 전투의 패전을 이야기하던 그 얼굴이었다.
“적 이백 보 거리로 접근!”
“호포대 일열! 조준!”
“예?”
“발사!”
옆에 서서 화살을 막 시위에 재고 있던 살수 하나가 어리둥절해서 뱉은 소리였다. 나 역시 숨을 삼키고 적 대열의 앞에 있던 복장이 화려한 자를 가늠자 위에 올려놓던 참이었다.
처음으로 사람을 쏘는 일이었기에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해야 했다. 그러나 급박한 상황은 그럴 틈도 주지 않았다. 곧이어 난, 천지를 뒤흔드는 소리와 흑색 화약 특유의 연기가 잡념까지 완전히 집어삼켰으니까.
차라리 목표가 옆에 선 자의 총구에서 스며 나온 연기에 가려진 것이 다행이었다. 부싯돌에서 튀는 불꽃 탓에 방아쇠를 누르며 눈을 감아야 했던 것도 다행이었다. 사람을 쏜다는 일말의 죄책감은 시야가 가려지면서 완전히 사라졌다.
꽝!
잠시 후, 불어온 바람에 연기가 걷히고, 내가 조준한 자리에는 안장을 텅 비운 말 한 마리만 날뛰고 있었다. 혼란스러운 적진을 헤집어대는 말의 잔등은 시뻘건 선지로 온통 물든 상태였다.
“나으리, 이 무슨?”
“전열 교대! 발사!”
살수의 목소리는 두 번째 열이 호총을 발사하는 소리에 묻혀 날아갔다. 다음 발을 장전하느라 대답할 틈도, 그럴 마음도 없었다.
살수의 의문은 합당했다. 내가 발사를 명한 자리는 일반적인 조총 사거리의 두 배는 되는 거리였으니까.
그러나 이제 그 의문은 어느 정도 해결되었을 것이다. 계속 발사를 명하면서 다음 발을 장전하는 내 눈에도 먼 거리에서 총탄을 맞아 쓰러지고 있는 적들이 보였다.
“살수들은 당황하지 마라! 적은 격멸되고 있다! 전열 교대! 발사!”
총을 발사한 아군이 줄을 바꿀 때마다 진형을 갖추고 접근하던 적 병력들이 한 줄씩 사라져갔다. 호총의 성능은 확실했다. 중간중간 총성이 끊길 때마다 웅성거리는 살수들의 대화들이 벌판을 메웠다.
다음 번 장전이 끝나갈 무렵, 이제 아군을 향해 다가오던 적의 발은 완전히 멎어 있었다. 그 사이를 웬 무장 하나가 말을 타고 헤집고 있었는데, 전진하지 않는 적들을 독려하는 지휘관인 듯했다.
저 자를 자빠뜨려야 이번 싸움이 끝날 것이라는 예감이 진하게 들었다. 단순한 패잔병이었다면 멀리서 빗발치는 총탄에 영문도 모르고 아군이 죽어갈 때 이미 와해되고도 남았을 일이었다.
“적이 계속해서 접근한다! 살수들도 화살을 퍼부을 준비를 하라!”
방아쇠를 당겨 적 하나를 더 쓰러뜨렸지만 그렇게 일방적인 피해를 입고도 적군은 도주할 뜻이 없는 듯했다. 우리를 쓰러뜨리고 본대로 어떻게든 합류하겠다는 생각인가.
적장의 칼이 적군 한 가운데서 번쩍 빛나더니 주변에 붉은 안개가 흩뿌려졌다. 그제서야 일방적으로 총탄을 얻어맞던 적군은 정신을 차렸다는 듯이 앞선에 등패수를 앞세우고 전진하기 시작했다.
“등패를 쏘는 것은 낭비다! 드러나 있는 적을 쏴라!”
이런 X발. 역시 전쟁은 게임이 아닌가.
멀리서 총탄을 퍼부어주면 명나라 패잔병 정도는 전의를 상실해서 도망칠 줄 알았는데.
고작 백 명 남짓 되는 적군에 쓸 만한 지휘관이 있다는 것은 계산 밖이었다. 이대로라면 세자와 약속했던 대로 무사히 돌아가긴 글렀을지도.
“나으리! 적이 곧 활 사거리 안으로 들어옵니다! 화살을 피할 준비를 하셔야 합니다!”
“호포대는 전원 총검 결합! 백병전 준비! 살수들은 화살을 쏘고 근접전 진형을 갖춰라!”
급하게 허리춤에 달린 고리에서 총검을 빼 총구에 씌웠다. 총열에 낀 찌꺼기를 닦아내는 손길이 떨리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무언가 공기를 찢는 소리가 나 재빨리 엎드렸으나 뒤이어 날아든 적의 화살이 내 앞을 가로막은 살수의 등패에 박히는 소리였다. 달궈진 총열에 닿은 손바닥이 잠시 뜨거웠으나 아픈 줄도 몰랐다.
이제 화살도 날아드는구나. 적과 직접 맞부딪힐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이 분명했다.
총검술은 누구보다 머릿속에 빠삭하게 박혀있었으나, 그걸 실제로 사람에게 쑤셔 박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일 터. 사람을 죽여도 감촉이 남지 않는 총질과는 차원이 다를 것이다.
‘저 놈만 잡으면……?’
마지막으로 총에 장전해놓았던 한 방이 남아 있었다. 적군이 접근한 탓에 사거리 밖에서 적병들을 고무시키던 적장은 이제 사거리 안으로 들어와 있었다.
‘제발!’
꽝!
그러나 기대했던 것처럼 가늠자 위에 올려놓았던 적장에게서 피보라가 뿜어져 나오는 일은 없었다.
젠장!
전투 경험이 적은 탓에 평정심을 찾지 못해서 그런가. 좌우로 계속해서 불규칙적으로 움직이고 있는 타겟을 맞추는 일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옆에서 막 장전을 끝낸 호포수에게 적장을 쏠 것을 지시했으나 그가 쏜 탄마저 빗나가고 말았다. 사람을 상대하는 첫 전장인데다 화약 터지는 소리가 마구 울리는 터라 다른 자들에게 명령이 전달되지도 않았다.
‘X됐다. 진짜 백병전까지 가야 하는 건가.’
마지막 한 방을 위해서 총구에 화약을 마저 털어 넣으면서도 머릿속에는 지옥과 같은 백병전의 참상이 떠오르는 중이었다. 적의 눈먼 화살이 언제 내 숨통을 끊어놓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눈앞이 하얗게 변했다.
그런데, 입에 물고 있던 로렌츠 탄을 뱉어 총구에 넣고 꼬질대로 쑤시다가 고개를 들었을 때였다. 눈에 들어오는 광경이 조금 이상했다. 다가오던 적들의 공세가 일시적으로 멈춘 것 같았다.
‘뭐야. 착각인가? 시간이라도 멈춘 건가?’
적의 진영에서 뭐라 알아들을 수 없는 외마디 말들이 계속해서 터져 나오는 중이었다. 천천히 이유를 찾기 위해 맴돌던 시선 끝에 드디어 원인을 찾을 수 있었다.
적장의 말이 춤을 추고 있었다. 말궁둥이에 박혀있는 작은 화살이 원인이지 싶었다.
곧이어 적장의 가슴에 말에게 박혀있던 것과 같은 화살 하나가 꽂혔다. 살을 맞은 적장의 몸뚱이는 축 늘어지더니 균형을 잃고 말 아래로 떨어져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 화살의 주인이 누군지는 내가 제일 잘 알고 있었다.
“인마, 장수를 노리려면 먼저 그 말을 쏴라. 이런 격언도 모른단 말이냐.”
“사형!”
“어떠냐. 한수야. 이 몸을 데려온 보람이 좀 있지 않냐?”
※ 작가의 말
이번 편에서 등장하는 조선군의 살수대, 총수대 혼합 운용법은 문화콘텐츠닷컴에서 “군예정구”, “기효신서절요”, “병학지남” 등 16세기 말에서 17세기 초에 편찬된 조선의 여러 병서 자료를 활용하여 최초로 복원한 진법을 근거로 묘사했습니다. 조총수를 5개조로 나누어 대장의 지휘에 따라 차례대로 사격하는 것 역시 그렇습니다.
적군이 와해되지 않았다면 총수대의 양 옆으로 벌려 선 살수들이 무장을 교체하고 앞으로 달려 나와 원앙진을 구성해 적의 돌격을 저지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