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화. 출진
“그렇게 신묘한 물건을 사비를 털어 만들었는데 조정은커녕 심양관에서도 해준 일이 없지 않느냐. 윗사람의 도리를 다하지 못한 것이 마음에 걸린다.”
“하하, 틀린 말씀은 아니옵니다. 심양에서 벌어들인 재물 중에 손에 남는 게 없을 지경이나이다.”
하아. 돈이 복사가 되면 뭐하나, 다시 그대로 삭제됐는데. 이번 생에도 돈과는 큰 인연이 없을 모양이었다.
호총이라 불린 플린트락 소총을 찍어내는 데는 돈이 보통 들어간 것이 아니었다. 향피에서 들어오는 수입을 그대로 들어 바치다시피 했지. 예비분까지 고작 육십 정 남짓 찍어낸 것이 전부인데도 말이다.
박연이 부탁했던 대로 부싯돌로 쓸 자연동, 즉 황철석은 만주에서는 구하기 어렵지 않은 물건이었다. 허나 잡혀있는 조선인 대장장이들을 속환시키는데도 거금을 썼고, 박연의 설계도대로 소총을 한 정씩 찍어내는 과정은 말 그대로 돈을 잡아먹는 작업이었다.
거기다가 추가 공정까지 들어가야 했으니, 결과물이 일반 조총 가격의 몇 배에 달하게 된 것은 당연했다. 병조의 사람들이 박연의 총에 관심을 덜 준 이유가 있었다.
“그래도 형님, 안 자의가 만들어낸 조총은 끝내줍니다. 한양에 돌아가면 반드시 아바마마께 올려 전군에 보급해야 할 물건입니다.”
“값이 헐하지 않으니 그것은 어렵지 않겠느냐. 수십 보 남짓하던 사거리가 몇 배는 늘어난 것이 놀랍긴 하다만.”
“고려인 사냥꾼들 때문에 심양성 주변 맹수의 씨가 말랐다는 소문이 성내에 자자하지 않습니까. 조선 땅의 어떤 착호갑사들도 해내지 못했던 일입니다.”
고작 일 년 만에 조총의 개량은 눈부시게 이뤄져 있었다. 아마 총기 발전의 역사를 백 년은 가뿐히 뛰어넘지 않았을까. 그렇게 된 이유를 알고 있는 것은 지구상에 박연과 나뿐이었지만.
총구에 고리를 고정시키는 총검 정도야 이미 비슷한 물건이 대륙에 존재했을 정도로 금방 구현 가능했다. 그러나 내가 박연에게 전해준 다른 아이디어는 분명 개발하는데 시간이 조금 걸리는 물건이었다.
강선. 총알을 회전시켜 사정거리와 정확도를 비약적으로 상승시켜주는 공정.
이미 이 시대에도 원시적인 형태로는 존재했음이 분명했다. 박연도 총열에 홈을 판다는 아이디어를 듣고는 사략선원 시절 사용했던 총 이야기를 먼저 꺼냈을 정도였으니까. 찌꺼기를 흘러나오게 하는 용도로 팠던 홈이라고 했다.
그러나 강선을 어떻게, 몇 개나, 어느 간격으로 파야 효과적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래서 한양을 떠나며 이별하는 자리에서도 강선에 대해선 훗날을 기약하기로 했던 터였다. 그게 이렇게 빨리 결과물이 나올 줄은 몰랐지만.
심양에 도착한지 육 개월이 넘었을 때, 박연에게 편지 한 장을 받았다. 강선의 개발에 성공했다는 편지였다. 편지에 적힌 필체가 마구 흔들린 것을 보니 어지간히 기뻤던 모양인가.
그 떨리는 필체는 박연이 내가 남기고 간 은자로 얼마나 심혈을 기울여 연구에 몰두했는지를 증명하고 있었다. 먼저 테두리를 따라 일정하게 날을 세워 올린 봉을 만들고, 그것을 불에 달군 총열에 회전시키면서 꽂는 방식으로 강선을 파는 데 성공했다고 했다.
게다가 그게 끝이 아니었다.
‘이 아저씨, 총알까지 개량해 놨잖아?’
강선을 판 효과를 제대로 보려면 탄이 총열에 딱 들어맞아야 한다. 박연에게 강선 이야기를 하면서 같이 건넨 말이었다. 그 방법을 같이 고민하면서 화약이 터지는 힘을 이용해 탄을 변형시킬 궁리까지는 했었는데.
박연은 결국 옆구리를 파내 탄을 총열에 맞추는 방식이 적합하다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그러면 화약이 폭발하면서 압력에 약한 부분이 눌려 총열에 딱 맞게 될 것이었다. 이런 방식을 현대에서는 로렌츠 탄이라고 불렀다는 것이 그제서야 생각났다.
「안 선생에게 도움이 되길 바라겠소. 고생한 것은 사실이나 나중에 내 부탁 하나만 들어주면 그것으로 족하오.」
편지의 마지막에 적힌 문장이었다. 마지막 글자 위에는 웬 불그죽죽한 자국이 하나 나 있었는데, 아마 박연이 흘린 코피일 것이라고 짐작이 갔다.
이 정도로 고생했으니 앞으로 그가 하는 부탁은 절대 거절하지 못하게 될 것 같다. 무슨 부탁을 할지는 짐작도 가지 않았지만.
“안 자의가 길러낸 사냥꾼들도 이번에 그대로 전장에 의용군으로 끌려가지 않느냐. 단 오십 명 뿐이라 해도 거기에 들어간 재물은 적지 않을 것이다.”
“대신 우리 군이 올린 전과대로 조선 백성들의 속환을 보장한다는 약속 또한 예친왕에게서 받아내지 않았사옵니까. 작은 재물이 쓰였다고는 하나 소인은 그것으로 족하옵니다.”
“장하다. 너만큼 백성을 어여삐 여긴 자들이 조정에 열 명만 더 있었어도 이런 꼴은 당하지 않았을 것인데…….”
사실 이번에 종군하게 된 전장에서 애써 키운 유격대를 잃을 거라는 생각은 한 번도 한 적이 없었다.
왜냐고? 나는 이미 그 전투의 결과를 알고 있었으니까.
곧 송산에서 벌어질 거대한 전투는 겉보기에는 명군의 압도적 우위로 보일 것이다. 게다가 사령관을 맡을 청제 홍타이지는 오늘 출진하는 자리에서도 코피를 쏟아 건강이 염려되는 상태였다.
그런 상황이라 청은 심양관 역시 가용병력을 닥닥 긁어모아 참전하라는 명을 내린 것이다. 청인들에게는 심양의 조선 사냥꾼으로 알려져 있던 호포수들이 세자의 호위를 핑계로 전장으로 향하게 된 것은 그런 이유에서였다.
평안병사 유림(柳琳)이 이끄는 이천오백의 조선군은 이미 전장에 도착해 전투에 돌입해 있을 것이었다. 필요하다면 그 자들의 힘까지 빌려야지.
“그래도, 심양관 재정에 여유가 생기는 대로 네게 반드시 포상을 내려주겠다. 향피 장사에 투자해 큰돈을 벌었음에도 아직도 걸치는 옷이라고는 한양에서 가져온 것만 입지 않느냐.”
“옷차림 말씀이나이까, 그것은…….”
“저하, 그것은 한수의 재물이 모자라기 때문이 아니옵나이다. 도포 앞섶만 헤쳐보아도 그 이유를 알게 되실 것이나이다.”
입을 다물고 있던 충신이 갑자기 끼어든 것은 그때였다. 끼어든 것은 그렇다 치고, 그걸 저 인간이 어떻게 알았지?
별 거 아니라는 식으로 넘기려고 했으나 세자의 감은 좋았다. 결국 계속해서 추궁을 받은 끝에 순순히 옷고름을 끄를 수밖에 없었다.
“허어, 수가 놓여 있구나. 이건 나비 모양이 아니냐?”
“저하, 그것이…….”
“한양에 남아있는 정혼자가 사시사철 옷을 지어 보내는데 어찌 새로 옷을 지어 입을 생각을 하겠사옵니까. 핫핫.”
“내 안 자의가 미취한 것은 알고 있었으나, 정혼자를 놔둔 채로 심양에 왔단 말이냐? 허어.”
하연의 흔적이었다.
일 년 전이었다면 받지 않았을 물건이었지만, 타향살이를 오래 하는 동안 내 마음 역시 천천히 바뀌어가고 있었다.
조선 땅도 그리웠고, 그곳의 사람들도 그리웠다.
때문에 가끔은 심장이 뛰는 곳에 수놓인 나비가 위안거리가 되곤 했다.
정식으로 약혼을 한 사이는 아니었으나 정혼자라 말하는 충신의 말을 부정할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세자에게서 가벼운 타박이 날아오고, 그것보다 더 가벼운 충신의 입은 한양에서 있었던 일을 쉼 없이 떠들어댔다.
그래도 그 대화 끝에 세자가 대군을 이끌고 몸을 일으킨 것은 다행이었다. 가벼운 이야기로 시간을 보내다 보니 잠이 오기 시작한 모양이었다.
***
전장인 금주에 도착한 것은 심양관을 떠난 지 정확히 엿새가 지난 후였다. 김 갑사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칠팔백 리는 족히 걸은 것 같다고 했다. 하루에 사십 킬로를 넘게 행군해야 했던 병사들은 지칠 대로 지쳐 있는 상태였다.
“고달픈 길이로구나. 청주가 이토록 재촉해댈 줄은 몰랐다.”
“금주를 포위하고 있는 예친왕 상대로 대명의 십이만 대군이 몰려왔다고 들었사옵니다. 청주의 마음이 급할 만하나이다.”
“네 말을 들으니 도착하자마자 군영으로 부르는 이유가 있구나.”
말끝을 흐린 세자가 가볍게 하품을 했다. 엿새 내내 고된 행군을 해야 했던 수행원들은 주둔지가 마련되자마자 지쳐 쉬고 있던 참이었다. 멀쩡한 자들은 몇 되지 않았다.
그 멀쩡한 자들 명단에 세자도 들어가 있었다. 군관들을 제외하면 봉림대군과 나, 충신 정도만 지친 기색을 숨길 수 있었다. 아, 물론 세자의 호위를 맡은 호포수들 역시 멀쩡했고.
“그나저나 네 말을 듣기로 한 것이 정말 잘한 일 같구나. 예전의 내가 이런 고된 여정을 겪었다면 분명 앓아누웠을 것이다.”
“저하께서 열심히 따라주셨던 덕분이 아니겠나이까. 건강을 되찾은 것을 감축드리옵나이다.”
한양에서부터 세자의 안색이 좋지 않았던 것이 마음에 걸렸었다. 아마 양국 사이에 낀 스트레스와 운동 부족이 원인이었을 것이다. 원 역사에서 소현세자가 조선에 들어오자마자 급사한 것은 이유가 있었다.
심양으로 오는 동안 세자가 승마에도 익숙하지 않은 것을 보고 의심은 확신으로 변했다. 그래서 언젠가는 이 양반도 굴려서 건강체로 만들어야겠다고 생각은 하고 있었는데.
“가죽공을 던지고 받는 것이 이리 즐거울 줄 알았겠느냐. 그 요상한 놀이의 이름을 뭐라 했더라?”
“개치구(改治球) 말씀이십니까?”
“여염에서는 돌팔매질을 하며 논다지? 공을 던지는 놀이가 이렇게나 즐겁다니, 나도 확실히 조선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더구나.”
석전과 캐치볼은 다르지 않을까요, 저하?
그래도 그걸로 세자가 운동에 관심을 가져준 것은 행운에 가까웠다. 내가 오목도의 집에서 오리알을 던진 일화를 도르곤에게서 전해들은 세자가 그 묘기를 다시 보여 달라고 요구했던 것이 시작이었다.
이번엔 먹는 것으로 장난치기가 좀 그랬다. 그래서 충신의 가죽 공방에서 대충 공 비스무리한 것을 만든 후, 세자의 앞에서 허수아비 몇 놈을 자빠뜨리는 것을 보여줬던 터였다.
“그래도 생각보다 빨리 실력이 느셨사옵나이다. 역시 태조대왕의 핏줄을 이은 분답다는 생각이 들었나이다.”
“핫핫, 진짜로 태조대왕의 핏줄을 짙게 이은 것은 대군이지. 그 녀석의 덩치와 근육만 봐도 대단하지 않느냐. 그래도 이번 일을 계기로 나 역시 왕가의 핏줄을 제대로 이었다는 점은 확인할 수 있었느니라.”
내 강속구를 보더니 본인도 똑같이 해보고 싶어 안달이 났던 세자였다. 처음에는 공이 허수아비 근처에도 가지 않아 시무룩했었지.
그걸 보고 머릿속에 떠오른 것이 있어 이튿날 밤을 새 글러브 두 짝을 만들어 세자에게 바쳤다. 글러브의 용도를 묻는 세자의 질문에 나도 모르게 튀어나간 말이 캐치볼이었다.
‘개치…… 무엇이라고?’
‘아, 이 운동은 공을 던지면서 마음을 다스리는데 제일인지라, 고칠 개와 다스릴 치를 써서 개치구라고 이름을 붙였나이다.’
심양에 볼모로 온 이후로 마음이 복잡하지 않은 날이 없을 세자였다. 무심코 수습하려고 던진 말이 세자의 마음을 움직였는지, 그날부터 세자는 땀을 흘리며 캐치볼에 열중했다.
혹시나 세자를 왕위에 올리면 조선 땅에서도 야구를 즐기게 될 수 있지 않을까? 이런 쓸 데 없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세자는 짧은 거리에서 공을 던지고, 점점 그 거리가 멀어지더니 나중에는 내 폼까지 어설프게 따라하기 시작했다. 이제 세자가 던지는 공은 시속 100km는 가뿐히 넘을 것이었다. 야사에서 능양군이 세자를 향해 던진 벼루쯤은 이제 쉽게 받아낼지도.
그렇게 운동에 재미를 붙인 세자는 그동안 미뤄왔던 승마도, 궁술도 같이 단련하기 시작했다. 세자의 체격이 점점 단단해지면서 건강 역시 좋아졌다.
탄력 없이 허여멀건하게 늘어졌던 세자의 턱살들은 이제는 흔적을 찾아보기 어려웠다.
“말을 타는 것이 이렇게 편안하게 될 줄은 몰랐구나. 이것도 전부 네 덕이니라.”
역시 대퇴근이 건강의 원천이란 말은 틀리지 않았다. 앞서가는 말안장에서 뻗어 내린 세자의 허벅지가 꽤나 굵어진 것을 확인하고는 등자를 박차고 말에서 뛰어내렸다. 군문(軍門)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멈춰라. 어디서 오는 자들이냐?”
“황제 폐하의 명으로 종군 중이신 조선국 세자 저하이시다. 예를 갖추어라!”
황급히 고개를 조아리는 수문장 너머로 화려하게 장식된 군막 하나가 보였다.
군문을 통과하면서 마른침이 꿀꺽 목구멍을 넘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저 자리에서 오가고 있을 이야기가 앞으로의 운명을 결정할 것이다.
아니, 운명이 문제가 아니다. 저 자리에 내 목숨이 달려있을지도.
※ 작가의 말
한양에서 박연이 구해 달라 부탁한 자연동의 정체는 황철석이었습니다. 실제로 박연이 조선에서 개발에 몰두했던 무기 중 대표적인 것이 홍이포라 불리는 대포와 부싯돌로 점화하는 플린트락 소총이었지요.
화승에 불을 붙여 점화하는 매치락 방식에 비해 장전 과정이 줄어드는 이득이 분명 존재하나, 당시 조선에서는 부싯돌로 쓸 질 좋은 황철석을 캐지 못하는 상태라 제작비 문제로 개발이 엎어지고 맙니다. 나중에 나선 정벌 시절에도 러시아군으로부터 노획해 보급을 시도해보았으나 비슷한 사유로 엎어지고요.
명나라에서도 자생화총, 격전총으로 불리는 플린트락 개발 기록이 있으나, 명청 교체기의 혼란한 시기에 그대로 묻혀버리고 맙니다.
세계사에서 원시적인 강선이 등장한 것은 작중 시기보다 백 년 가량 이전입니다. 그 당시에는 언급했다시피 찌꺼기를 배출하는 용도로 판 것이었는데, 명중률을 높이기 위해 회전하는 강선을 파는 아이디어는 작중 시기보다 백 년 후에 발견됩니다.
대역물에 미니에 탄은 꽤 자주 보이는데, 로렌츠 탄은 원 역사에서도 묻힌 물건이라 그런지 언급된 소설이 별로 없더군요. 하지만 미니에 탄보다는 훨씬 뛰어난 물건임은 분명합니다.
옆구리를 판 형태로 만들어 폭발압력으로 총열에 딱 맞게 하는 개념은 미니에 탄과 같으나, 공정이 훨씬 덜 들어가고 탄의 무게 배분도 뛰어나 위력까지 증가한 물건이었으나…….
미니에 탄의 선점효과로 묻히고, 뒤이어 나온 후장식 소총의 위력에 치여 역사에서는 활약할 틈이 없었던 비운의 발명품입니다. 전장식 소총의 마지막 역작이라고 할까요.
앞으로 진행될 내용은 소현심양일기에서 1641년 8월 15일 이후 적힌 관중일기를 근거로 하여 묘사했습니다.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청 태종의 명으로 금주·송산 전투에 종군한 기록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