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화. 다이칭 구룬의 친왕
“네 말대로 우리말에 꽤나 능숙하구나. 이야기 할 일이 있으면 붓부터 꺼내들던 것이 고려인이 아니냐? 고려인 관료 중에 이런 자가 있었더냐?”
“제가 알기로는 저자밖에 없습니다. 친왕 전하.”
친왕이라는 단어를 들으니 남자의 정체가 가물거리며 떠올랐다. 세자의 귀환을 축하하던 자리에서 예친왕이라 불리던 사람.
나이는 비슷해 보이면서도 풍기는 분위기는 차원이 다른 자였다. 지금도 무장으로 가득한 술자리를 꽉 휘어잡은 주체는 분명 그였다. 보이는 곳에 흉터 하나씩은 달고 있는 사나운 무장들이 그의 입술이 떨어지면 숨 쉬는 소리조차 내지 못했으니까.
그나저나, 이 사람이 왜 오목도의 집에 들어앉아 있는 것일까.
심양에서 오는 길에 말을 나눴던 적도 있었던 터라 오목도가 내게 흥미를 가져서 불러들였던 것이라 생각했는데, 웬 낯선 자가 상석에서 맞아들이는 사태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렇게 한참 머리를 굴리고 있는데, 집주인 오목도가 외마디 소리를 질렀다. 밖에 대기하는 하인을 부르는 소리 같았다.
이어 등 뒤에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그 소리에 돌아본 시야에는, 웬 익숙한 물건 하나를 받쳐 들고 있는 하인이 서 있었다. 분명 심양 관소에 얌전히 놓여있어야 할 물건이었다.
“심양으로 오는 길에 네가 보였던 묘기를 친왕 전하께도 보여드리려 불렀다. 속히 준비하도록.”
하인이 고급스러운 천까지 깔아 받쳐 든 물건은 내 투창기였다. 아틀라틀에 실어 던진 투창으로 노루를 잡았던 것이 여기까지 와서 다시 보여 달라고 할 정도로 그렇게 신기했나.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물건과 달라 눈에 띄긴 했다. 여진족 사냥꾼들이 쓰는 물건과 비슷했던 초기의 물건은 패스트볼 던지는 폼으로 쓰기 힘들어 약간의 개조를 거친 물건이었으니까. 손끝으로 창을 쏘는 것 같았으니 신기했겠지.
뭔가 맥이 탁 풀렸다. 그래도 세자에게 동정심을 가진 청나라 사람이라기에 나 개인에게 관심을 가져 술자리로 부른 줄 알았더니, 이건 완전히 잔칫날 재주부리는 원숭이를 부른 격이 아닌가.
“자, 어서 그날 보였던 모습을 친왕님께도 보여드려라, 어서!”
오목도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닫혀있던 쌍여닫이문이 등 뒤에서 활짝 열렸다. 놀라 돌아본 자리, 문 너머로 길게 놓여 있는 복도 끝에 과녁으로 쓸 만한 짚단 하나가 놓여있는 것이 보였다.
‘집 크기 자랑하는 것도 아니고. 실내에서 저걸 맞춰보란 소린가.’
투창기와 창 하나를 하인의 손에서 빼앗듯이 집어 들었다. 그래, 어차피 광대로 부른 것이면 철저히 광대 짓을 해주지.
숨을 가다듬고 손끝에 신경을 집중해 쏜 투창은 정확히 짚단에 명중했다. 사람이 서 있었다면 심장이 위치했을 자리였다.
“오오!”
“제가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본 적도 없는 자세였다고요.”
뭔가 익숙한 반응이 나를 둘러싸고 있었다. 기억났다. 김 갑사가 이걸 처음 봤을 때 내지른 반응과 똑같았다. 이 자들도 무예를 좋아하는 면에서는 똑같은 인간들인가. 역시 유목민족 출신답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하, 나 참. 그럼 팬 서비스라도 하나 더 해드려?’
감탄사가 나왔지만 어차피 광대에게 바치는 찬사일 것이다. 옆에 놓여있던 접시에서 음식 하나를 꺼내들었다. 오리알을 발효해 만든 피딴이었다.
발효된 오리알을 두어 번 허공에 던졌다 받으며 다시 한번 표적까지의 거리를 쟀다. 좌중의 시선이 내게 집중된 것이 느껴졌다. 머리카락 떨어지는 소리도 들릴 것 같은 정적이었다.
잠시 후, 희미하게 퍽 소리가 났다. 덕분에 보지 않고도 던진 오리알이 짚단에 명중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와!”
탄성이 터져 나온 이유는 날아간 오리알이 노린 자리에 정확히 꽂혔기 때문일 것이다. 이번에 겨냥한 자리는 투창이 꽂혀있는 자리에서 두 뼘 정도 위였다. 사람이었다면 머리 부분.
“온몸을 다 비틀어 던지는 것이 아닌가. 저런 특이한 자세로 무기를 던지는 자는 어떤 전장에서도 보지 못했다.”
일루 방향으로 넘어가던 체중을 이용해 그대로 상석을 향해 몸을 돌렸다. 자리에 있던 사람들의 표정에는 경탄이 가득했으나 기분은 한없이 더러웠다.
그래, 갓 쓰고 도포 입은 조선 선비가 원시 부족들이나 사용할 기술들을 실제로 쓰는 것이 신기하단 거지? 그 요상한 자세를 구경하려고 부른 것이고?
빈볼을 던지는 프로야구 선수들의 심정이 이제야 이해가 가고 있었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나를 부른 예친왕이라고 불린 남자는 껄껄 소리 높여 웃고만 있었다.
“좋아! 마음에 드는구나!”
그렇게 한참을 웃어대던 예친왕은 내게 그릇 하나를 내밀었다. 방금까지 과일이 담겨 있던 그릇은 텅 비어 있었다. 영문도 모르고 그것을 받아 들었다.
“자, 받아라! 나를 기분 좋게 만든 상이다!”
예친왕의 손에서 사발만한 잔으로 붉은 빛 감도는 투명한 술이 콸콸 쏟아지고 있었다. 한인 놈들이 술 하나는 잘 빚는다고 중얼거리는 그의 한쪽 입 꼬리가 슬며시 올라가 있는 것이 보였다.
청나라까지 와서 또 사발식이라고?
“쭉 마셔라! 고려국 선비라는 놈들은 죄다 째째한 놈들인 줄 알았더니 네 기개가 가상하구나!”
별로 마시고 싶지 않은 술이었지만 어차피 이 자리에서는 광대가 되어주기로 철저히 다짐했던 차였다. 생각해보면 신방례 자리에서 김식이 주던 술 보다는 기분이 덜 나쁘기도 했고.
숫제 그릇을 탈출할 기세로 찰랑거리는 술을 그대로 입 안으로 부었다. 기대를 가득 안고 눈동자를 부풀리고 있던 예친왕은 만족했다는 듯이 다시 껄껄거리며 웃어대기 시작했다.
지금 목구멍을 넘어가는 술은 전에 마셨던 소주보다 더 독한 것 같았다. 코끝에 감도는 독한 알코올 냄새로 눈이 핑핑 돌 지경이었다.
하지만 이 자리에서 약한 모습을 보여주면 꺾이는 것은 내 자존심만은 아닐 것이었다. 감각을 잃어가는 혀를 씹어가며 겨우 사발을 비웠다. 입 옆으로 흐른 술을 손등으로 쓱 하고 닦아내는 동안에도 웃음소리는 멎지 않았다.
“내려주신 술을 다 받아마셨으니, 안주도 먹어도 되겠습니까?”
예친왕이 고개를 끄덕이자마자 커다란 꼬치 하나를 손에 집어 들었다. 누린내가 나는 것이 양꼬치인 듯했으나 정도가 너무 심했다. 이 시대에 다 큰 양을 잡은 고기일 테니 어찌 보면 당연한가.
그렇다고 이미 집어 든 음식을 내려놓으면 좋은 인상을 주지 못하겠지. 숨을 멈춘 채 꼬치에 꽂힌 고기를 크게 찢어 삼켰다. 몇 번 씹지도 않고 삼킨 탓에 목이 멜 것 같았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하하! 이렇게 호탕한 자가 고려 땅에 있었단 말이냐? 소국에 있기에는 어울리지 않는 자로구나!”
예친왕은 완전히 흡족해하는 눈치였다. 소매에서 손수건을 꺼내 입가를 정리하는데, 옆에 앉은 오목도가 예친왕에게 무언가를 속삭이는 것이 보였다.
“좋다. 자리의 흥을 띄웠으니 상을 내려야겠지. 원하는 것을 말하라. 은이냐? 여자냐?”
은? 여자? 고작 이런 걸로 내릴 상이 있으면 조선에서 뜯어가지나 말 것이지. 선의에서 나온 말임은 분명했으나 하나도 좋게 들리지 않았다. 조선 땅에 나를 기다리는 사람이 있는데 여자를 받을 이유도 없었고.
“바라지 않습니다. 전하께서 기쁘셨다면 그것으로 된 것이겠지요.”
“호오……. 그래?”
“그럼 소생은 돌아가 보아도 되겠습니까? 이 자리에서 할 일은 다 마친 것 같사온데.”
괜히 일 마치고 피곤한 몸으로 끌려와 광대 취급을 받은 탓에 기분이 반쯤 상해있던 터였다. 차라리 저 자리에 섞여 부어라 마셔라 하고 놀았으면 더 기뻤을 것이다.
“그래. 돌아가도 좋다. 그러나 정말로 내게 상을 받고 싶지 않은 것이냐?”
“맞다! 맞아! 건방진 놈! 어딜 감히 전하께!”
하석에 앉은 무장 하나가 주먹을 을러대며 위협했으나 예친왕의 눈빛을 받고 금방 조용해졌다. 하긴 내려주는 사람 체면을 생각하면 아예 받지 않는 것도 문제가 될 터였다.
순간 내뱉고 싶은 말이 하나 떠올랐다. 그러나 이 말을 꺼냈다가는 이 만주 땅에서 내 뼈를 추리지도 못하는 사태가 일어날지도 몰랐다.
그 사태를 막기 위해 이성은 계속해서 혓바닥을 누르고 있었으나 한 가지 걸림돌이 있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 슬슬 목덜미를 타고 올라오는 술기운이었다.
“그럼 한 가지 소원이 있습니다.”
“무엇이냐?”
“질문을 하나 드려도 되겠습니까? 친왕 전하께서 답해주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예친왕이 고개를 끄덕여 계속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궁금한 것은 별것이 아니었다. 세자를 보고 절하는 조선인 노예들을 보고 나도 속에서 무언가가 부글부글 끓었으니까. 오늘 이 자리까지 오는 길에도 상투 튼 노예 몇을 목격한 덕분에 가슴 속이 아직도 뜨거웠다.
“이 땅에 끌려온 조선인, 아니지. 고려인 노예들이 수십만은 된다고 들었습니다. 그들을 고향으로 돌려보낼 방법이 없겠습니까?”
순간 술자리에 정적이 흘렀다. 하지만 잠시 후 돌아온 것은 기대했던 대답이 아니었다.
“뭐? 핫핫핫.”
“하하하. 저 고려놈, 술에 취하더니 정신이라도 나간 것이냐?”
“노예는 전리품이고 재산이다. 재산을 거리에 뿌리는 멍청이가 어디 있단 말이냐? 핫핫핫.”
예친왕의 대답 대신 돌아온 것은 무장들의 비웃음뿐이었다. 몇몇을 제외하고는 전부 나를 손가락질 하고 배를 잡으며 웃고 있었다.
그러지 않았던 몇몇 사람에 집주인과 예친왕이 들어가 있는 것이 다행이었다. 그러지 않았다면 자리를 박차고 뛰어나갔을지도.
“그만.”
그 말 한 마디에 좌중은 쥐 죽은 듯이 고요해졌다. 상관의 명령이어서 그런가? 이 막되어먹은 것처럼 보이는 놈들이 보여주는 군기에 조금 놀라고 말았다.
“이자들이 한 말이 옳다. 그들은 이제 고려의 백성이 아닌, 우리의 재산이다. 남의 것을 가져가려거든 대가를 치러야 하지 않겠느냐?”
굉장히 멍청한 질문을 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술이 확 깨는 것이 느껴졌다.
“이제 대답이 되었느냐? 고작 이런 답을 상으로 내리는 옹졸한 자가 되기는 싫다. 제대로 된 것을 말하라.”
결국 그들을 고향땅으로 돌려보낼 방법은 없는 건가. 아니지, 분명 예친왕은 대가를 치른다면 가져가도 된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럼 물고기를 받는 것보다는 낚시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 도움이 될 지도.
“그렇다면 말씀하신대로 대가를 지불하고 데려갈 방도를 찾겠습니다. 만약 그 방도가 합리적이라 생각하신다면, 그때 전하의 힘을 조금 나누어 주실 수 있겠습니까? 그것이 제가 바라는 상입니다.”
“호오. 지금 내가 네 뒤를 봐주라는 말이냐?”
“저희가 제대로 몸값을 지불하고 데려간다면 이는 대청국에도 좋은 일이 아니겠습니까.”
예친왕의 눈썹이 까딱하고 움직였다. 내게 날아오는 눈빛도 바뀌어있는 것이 느껴졌다.
“흥미로운 제안이구나. 좋아, 마음에 들었다. 단, 조건이 있다.”
“무엇입니까?”
“너희의 이익뿐만이 아니라 내게도 이익이 되는 일을 가져와라. 그렇다면 내 힘을 나누어주는 것을 고려해보겠다.”
뜻밖이었다. 조건이 붙긴 했지만 예친왕이 이렇게 흔쾌히 수락하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술기운에 지른 말로 엄청난 원군을 얻은 셈이었다.
감사의 의미로 갓을 벗어 깊이 고개를 조아렸다. 이번엔 진심이었다.
그 마음이 통했는지. 돌아나가는 뒤통수에 꽂히는 예친왕의 웃음소리는 아까보다 더 시원스러웠다.
“볼모 주제에 감히 나 아이신기오로 도르곤의 힘을 빌리려 하다니. 재미있는 자가 아닌가? 핫핫핫.”
***
아이신기오로 도르곤.
내 기억이 맞다면 곧 청나라의 실권을 쥘 사람이었다.
그를 만난 이후로 많은 것이 달라졌다. 청에 대한 이미지도, 심양에서의 목표도.
신하국의 잡관에게도 자국의 이익이 되는 일이라면 힘을 대 줄 것을 약속하는 권력자는 흔치 않았다. 나중에 알게 된 일이지만 술자리 농담으로 가볍게 한 이야기도 아니었다.
그런 도르곤의 면모는 현재 청나라의 모습을 압축해 보여주는 듯했다.
갓 태어난 미래의 제국은 성장을 위해서라면 어떤 것도 가리지 않고 받아들이고 있었다.
조선에서 천민이던 자도, 본디 명의 신하였던 자도 쓸모만 있다면 중히 쓰였다.
그 순간 미래의 일 하나가 떠올랐다. 곧 요동에서 두 제국의 미래를 건 커다란 전투가 일어날 것이었다. 지금 도르곤의 연줄을 제대로 잡은 것이 맞다면, 그 역사적 이벤트를 조선에 유리하게 써먹을 수 있을지도.
그날, 심양관으로 돌아온 이후 밤새 계획을 수정했다.
어차피 내가 받들 자를 왕위에 올리기 위해선 힘은 크면 클수록 좋았다. 청나라든, 명나라든, 그 힘을 키우기 위해서라면 나도 물불을 가리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깟 광대짓, 도움이 된다면 앞으로도 얼마든지 해 주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