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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 어사, 조선을 뒤흔들다!-55화 (55/298)
  • 55화. 헤어지지 못하는 자, 떠나가지 못하는 자

    “자네를 처음 장수 산골에서 마주친 것이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세월이 이렇게 흘렀구만.”

    세자를 환송하는 자리기에 관복을 차려입은 성 영감이었으나, 왠지 그 위로 처음 만났던 어사 시절의 모습이 겹치고 있었다. 기분 탓일까.

    “나랏일로 바쁘신 것을 아는데, 이 자리까지 나오시게 만들어서 송구스러울 뿐입니다.”

    “결국 가는가. 저 거친 북녘땅으로 보내지 않으려 했거늘.”

    “또 다른 기회가 될 것입니다. 조선 땅에서 하지 못하는 것들을 할 수도 있을 것이고요.”

    성 영감은 여전히 미안해했다. 벼슬을 받아 가는 길이라지만, 결국 남의 땅에 볼모로 가는 것이나 다름이 없는 일이었으니까.

    그러나 김자점이 의금부로 잡혀 들어가고, 엮여있던 김류 역시 사헌부의 탄핵을 받으면서 조정의 구도가 급변하는 상황이었다. 아마 심양에서 돌아오면 원역사와는 꽤나 다른 구도가 되어있을지도.

    사간원의 수장인 성 영감 역시 눈코 뜰 새 없이 바쁠 터, 굳이 배웅을 나온 것만으로도 나는 고마울 뿐이었다.

    “그리고, 마지막일지도 모르니 건방진 말씀 하나 올려도 되겠습니까?”

    “건방지다니? 무슨 말을 하려고 그러는가?”

    “한양에서는 성균관 공부에 나리께서 지시하신 공부까지 눈코 뜰 새가 없이 바빴지 않습니까. 심양에 가면 조금 여유가 생길지도 모르지요.”

    성 영감을 향해 애써 씩 웃어 보였다. 그러나 앞에 선 사람의 얼굴은 뜬금없는 말이라도 들은 듯한 표정이었다. 본인이 시켜 종이가 방을 가득 채울 기세였던 벌서의 무게가 느껴지지 않는 것인가.

    “여유가 생길 거라고? 아차, 자네에게 그 말을 전하지 않았구만.”

    “전하지 않은 말이라니요? 대사간 나리께서 심양까지 따라오시지는 않으실 것 아닙니까?”

    “당연히 나는 이곳에서 할 일이 있네. 뭐, 나중에 사행으로 갈 일이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그것은 아니고.”

    대사간의 눈이 반짝하고 빛나는 것이 보였다. 무언가 불길했다.

    “김 갑사, 유 서리! 앞으로 나오게!”

    내게 전할 선물이라도 있는 것일까. 앞으로 나오는 김 갑사의 팔 위에는 묵직한 궤짝이 하나 들려 있었다. 김 갑사는 무거운 물건을 들어준다 치고, 유 서리는 왜?

    “자네도 어쨌건 시강원 자의 벼슬을 받고 조선을 대표하여 가는 것인데, 자네 나름대로 대비한 것들이 너무 허술한 것 같아 먼 땅에서 도움이 되라고 같이 보내는 것일세.”

    음식을 가리는 것도 아니고 나 홀로 건사하는데 필요한 물건은 몇 되지 않았기에 짐을 단출하게 쌌었다. 크게 필요하지 않은 물건은 제자들에게 전부 남겨주고 가기도 했고.

    그런데 영감님에게는 그게 눈에 차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역시 나를 염려해 주는 건 이 사람뿐인가. 다시 코가 시큰해졌다.

    “저를 걱정하여 준비해 주신 것입니까? 어찌 감사를 드려야 할지…….”

    성 영감이 한 발자국 앞으로 나오더니 양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영문도 모르게 그 동작을 따라 하자 곧바로 조금 주름진 그의 손이 내 소맷자락에 걸쳐졌다.

    “자네는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나는 줄곧 자네를 가족과 같이 생각해왔다네. 가족을 위해서라면 이 정도는 준비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은가.”

    “나리…….”

    차오르는 감격에 목이 메어왔다. 성 영감은 그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무심히 다가와 내 목에 팔을 두르더니 등을 몇 번 두드리고는 다시 멀어져갔다.

    “다행이구만, 말하기 부끄러운 이야기라 반응이 이상할까봐 걱정했으이.”

    “제가 어찌 나리의 하해와 같은 마음에 그런 반응을 보이겠습니까.”

    “어서 궤짝이나 열어보게. 시간이 없네.”

    코끝이 찡해질 시간마저 주지 않고 닦달하는 영감님이었다. 애써 소매로 표정을 가리고 궤짝에 손을 뻗었다.

    무엇이 들어있으려나, 조금 두근두근한 마음으로 뚜껑을 열었다. 그런데, 궤짝 안에서 눈에 들어온 것들은 기대했던 물건들이 아니었다.

    “나리?”

    “자네가 원할 만한 것들로 준비했는데, 역시 마음에 드는 모양이구만. 다행일세.”

    예? 뭐요?

    궤짝을 열자마자 익숙한 냄새 몇 가지가 뒤섞인 채로 코에 와 닿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하나는 기억에 남아있는 냄새였다. 유 서리가 호랑이 발톱을 맞은 어사의 입에 으깨 넣었던 환약이 작은 주머니에 가득 들어있었다. 험한 길을 생각해 비상용으로 챙겨준 물건인 듯했다. 그것 말고도 챙겨준 사소한 물건들이 보였다.

    헌데 한약 냄새에 섞여 올라오는 이 냄새는…… 익숙하다 못해 지겨운 물건들이 한 쪽에 켜켜이 쌓여있었다. 갑자기 헛구역질이 올라오려 했다.

    “나리, 먼 길을 가는데 이렇게 많은 책을 주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가는 동안 지루하지 말라는 배려십니까?”

    “낯선 땅에 갔는데 뿌리를 잊으면 안 되지 않겠는가? 자네는 조선의 선비이니 그걸 잊지 말라는 뜻일세. 그리고…….”

    우욱……. 한양을 뜨면서 지겨운 공부에서 겨우 벗어나나 싶었더니 완전 착각이었다.

    어쩐지 일이 잘 풀린다 했다. 자신도 갈고 남도 갈아 넣는 데 귀신인 양반을 너무 얕봐 방심하고 있던 것이 문제였다.

    “자네 이야기를 부원군 대감에게 했더니 그분께서도 관심을 가지셔서 말이야. 그분께서 저술하신 왕학 관련 책도 들어있네.”

    성 영감이 맨 위에 있는 책 하나를 가리켰다. 왕학이 무언가 해서 책을 몇 장 넘겨보는데 왕수인(王守仁)이라는 이름이 눈에 들어왔다. 아, 양명학이구나.

    “자네 이야기를 했더니 명분만 따지는 꼬장꼬장한 선비가 아닌 것 같다고 좋아하시더구만. 꼭 본인의 저서를 정독시키고 감상을 받아내야겠다고 하셨으이.”

    선비의 지식이 머리에 있었는데도 성리학 공부를 하는데 애를 먹었는데, 이젠 양명학이라니.

    그래도 성리학보다는 실용을 추구하는 학문이니 읽어는 둘 생각이었다. 어차피 심양에 꽤 오래 있게 될 것이니 최대한 천천히.

    “아, 혹시라도 미루지 않는 것이 좋을 걸세. 대청 외교에는 부원군 대감만한 분이 없으니까. 최대한 열심히 읽어야 할 걸세. 핫핫.”

    책장에서 지행합일(知行合一)이라는 단어가 막 눈에 들어오던 찰나, 청천벽력 같은 이야기가 귀를 파고들었다. 언제든지 최명길이 숙제검사를 하러 심양에 쳐들어올 수 있다는 말이 아닌가.

    “콜록. 콜록.”

    “생각지도 못한 선물인가? 자네도 기쁜 모양이니, 그분께 심양에 가거든 꼭 직접 자네에게 가르침을 주시라 청해야겠구만. 자네에게 큰 도움이 될 것이야.”

    요새 통증이 잦아들었던 팔꿈치가 다시 찌릿찌릿해져 오고 있었다. 하, 이 공부지옥에서 벗어날 방법은 정녕 없는 것인가. 그때, 좋은 생각이 하나 났다.

    “이렇게 넘치는 배려를 해 주신 것은 감사하오나, 소생의 말에 이렇게 큰 궤짝을 실을 자리가 없습니다. 이미 등짐이 꽉 찼습니다.”

    “그건 걱정 말게. 내가 왜 김 갑사와 유 서리를 불렀겠는가?”

    대사간의 말이 멎자마자 김 갑사가 휘파람을 불었다. 그가 타고 온 말이 사람들 뒤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천천히 이쪽을 향해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명색이 관원이란 자가 수행원 하나 없이 이국 땅에서 활동할 수 있겠는가. 가는 길도, 도착한 곳도 분명 험할 텐데, 큰 도움이 될 것이네.”

    “그렇다면…….”

    김 갑사는 궤짝을 이미 자신의 말 잔등에 싣고 있었다. 군마여서 그런지 내 조랑말보다는 훨씬 덩치가 큰 탓에 짐도 많이 지는 것이 분명했다.

    유 서리 역시 웬 조랑말 한 마리의 말고삐를 틀어쥐고 어느새 내 앞에 서 있었다. 천천히 작은 갓을 숙여 내게 예를 표하는 유 서리였다. 그것이 뜻하는 것은 다른 의미가 아닐 것이었다.

    “이미 구면인 사람들이어야 활동하기도 좋지 않겠는가. 물론 이들에게 배울 것도 많을 것이고.”

    “선비님, 아니, 이제 나리라고 불러야겠구만요. 잘 부탁드립니다요.”

    “심양 땅에서도 나리와 함께하게 되었다니 기쁘지라.”

    으악! 결국 한양에서 나를 닦달하던 사람들이 그대로 심양으로 옮겨가는 셈이었다. 눈앞이 깜깜해지려 하고 있었다.

    “자네, 심양에서는 이번처럼 경거망동하지 말아야 할 것일세. 무슨 뜻인지 알겠는가?”

    심양에서도 김자점과 김식을 조질 때처럼 담장을 넘었다가는 유 서리나 김 갑사가 직통으로 성 영감에게 보고를 때릴 것이라는 이야기였다. 궐에서 물러 나온 날, 밤새 혼났던 것이 생각나 몸에서 힘이 쭉 빠졌다.

    ***

    두 사람을 데려가지 않겠다고 몇 번이나 입씨름 아닌 입씨름을 했지만 결국 영감님의 뜻을 꺾을 수 없었다. 애초부터 이길 수 없는 싸움이었다.

    아니, 내가 세자를 감시하러 가는 것은 반대한 양반이 도리어 감시자를 내게 박아 넣어?

    불만으로 입이 불뚝 튀어나와 있었으나, 눈에 보이는 것은 김 갑사와 유 서리가 흐뭇한 얼굴을 하고 본인들의 말을 내 말 옆에 두는 모습뿐이었다. 쳇.

    “아차, 시간을 너무 빼앗아 버렸구만. 자네 마중 나온 사람이 나만 있는 것도 아닌데.”

    “아닙니다. 영감. 매우 유익한 시간이었습니다.”

    어금니가 살짝 갈리고 있는 게 혹시 티가 나려나. 성 영감의 입꼬리가 부드럽게 올라가 있는 것을 보면 내가 이를 갈고 있는 것을 이 양반은 다행히 모르는 모양이었다. 원망해봤자 소용도 없겠다만.

    다음 차례로 앞에 나선 것은 좌명이었다. 그 뒤에 장옷을 입은 여인 한 명이 따라붙어 있었다.

    “더 오래 보고 싶었는데 아쉽네, 성근.”

    “어차피 심양 땅에 영원히 있을 것도 아닐세. 일정, 내가 맡긴 것들을 잘 부탁하네.”

    “암, 자네가 없어도 있는 것처럼 해 주겠네.”

    좌명의 눈길이 뒤에 서 있는 박연 가족에게 향했다가 뒤를 따르는 여인에게로 옮아갔다. 그의 잘생긴 눈썹 사이가 살짝 찌푸려져 있었다.

    “인사는 길지 않아도 되겠지. 말로 하지 않아도 잘 전해졌을 거라 생각하네.”

    “내 마음이 곧 자네 마음과 같지 않겠는가. 멀리 떨어져 있어도 우리가 벗임은 변하지 않을 것일세.”

    “고맙네, 성근.”

    조용히 내 주먹을 가슴 높이로 들어 보였다. 그걸 본 좌명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한 번 지어 보이더니 의미를 알아차리고 곧 그의 주먹을 맞대왔다. 잠시 전해졌던 체온과 함께 그의 마음도 전해지는 듯했다.

    “그럼 작별 인사를 할 사람이 자네뿐이 아니니 일찍 자리를 뜨는 것을 용서해 주게나.”

    “알겠네, 선진 사형에게 인사하러 가는 것인가?”

    좌명이 고개를 끄덕였다. 멀지 않은 곳에 충신이 있던 터였다. 화려한 전모에 너울을 뒤집어쓴 여인 두 명이 따르고 있던 터라 눈에 금방 띄었다. 아마 그의 기루에서 나온 사람들일 것이다.

    헌데 좌명이 자리를 금방 비운 것은 그 이유뿐만은 아닌 것 같았다. 그가 빠르게 충신을 향해 멀어졌음에도 그의 뒤에 붙어있던 여인은 좌명을 따라가지 않았으니까.

    “소저. 이곳까지 나오실 필요는 없었습니다.”

    “저를 이 자리에 있게 만든 것은 나리가 아니십니까. 늘 무심하신 듯 말씀하시면서도 이렇게 신경을 써주시면서…….”

    나 때문에 속이라도 상한 것일까. 하연의 얼굴색이 조금 초췌해진 것이 마음에 걸렸다. 평소와 달리 몸짓에도 힘이 없어 보였다.

    뭐라 할 말이 없었다.

    그런 나를 지그시 바라보던 하연은 천천히 품에서 작은 꾸러미 하나를 꺼내놓았다.

    눈에 익숙했다. 내가 보낸 물건이었으니까.

    “차라리 아무 말도 없이 떠나시지 그러셨습니까. 청혼을 거절하시고는 이런 물건까지 보내시다니요. 그랬다면 말씀하신 대로 마음을 접을 수 있었을지도 몰랐을 텐데요.”

    “송구합니다. 소생은 그저 사죄의 의미를 담아 보낸 것인데, 그렇게 마음 상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그날, 좌명의 집에서 날아온 사주단자는 청혼의 의미였다. 그러나 몇 년을 심양에서 썩을지 모르는 몸, 결국 그 청혼을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그녀가 보여준 마음을 받을 수는 없었지만 조금이나마 보답하고 싶었다. 하연이 꺼낸 물건은 내가 그런 의미로 보낸 물건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 어제 저녁에서야 노비 편에 겨우 보낸 물건이었다. 그녀는 그것을 왜 들고 나온 것일까.

    “이런 귀한 것을 남기시다니, 참으로 잔인한 분이 아니십니까.”

    “소저…….”

    충신에게 하연을 연상시키는 매화 향수를 만들 수 있냐고 물어봤더니, 갑자기 그런 물건이 뚝딱 나오냐며 한소리를 듣기도 해서 선물할 거리를 직접 찾아 나섰었다. 그 와중에 방물을 파는 종로 거리의 시전에서 발견한 물건이었다.

    “정표로 삼으라는 뜻이신가요. 나비가 그려진 연적을 보내시다니.”

    “예?”

    풀어헤친 꾸러미에서 나와야 할 것은 분명 꽃이 그려져 있는 청화백자 연적이었다.

    그러나 하연의 고운 손가락이 가리키는 부분에는 분명 푸른색으로 자그마한 나비 한 마리가 그려져 있었다. 꽃에만 신경을 쓰고 있었는데, 그 옆에 나비가 그려져 있다는 것은 전혀 알지 못했었다.

    “소저, 그것은…….”

    “그저 무뚝뚝한 분인 줄만 알았는데, 이렇게 아름다운 표현을 드디어 받게 되다니 소녀 기쁘기가 한량이 없습니다.”

    장옷 사이로 몇 가닥 삐져나온 윤기 흐르는 흑발 사이로, 파리했던 낯빛을 붉게 물들이고 웃음 짓는 그녀가 보였다. 까슬한 입술에 올라앉은 웃음이 너무나 행복해 보여 시야가 흔들렸다.

    꽃과 나비가 그런 의미가 있었나? 갑작스레 닥쳐온 사태에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내 본의가 아니었다고 말해야 하는 상황이었으나 쉽게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

    “갑갑했었습니다. 그동안.”

    “…….”

    “소녀가 새벽같이 일어나 글을 읽었던 이유를 나리께서는 혹시 아십니까?”

    갑자기 뜬금없는 질문이 날아왔다. 그러나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이 빨갛게 물든 채 던지는 질문을 무슨 수로 쳐내겠는가.

    “송구하오나 짐작이 가지 않습니다. 이유가 있으셨습니까?”

    “걱정이 많았습니다. 미래에 대한 걱정이.”

    점점 차 가는 나이와 찾아지지 않는 낭군감에 대한 걱정, 그리고 배우고 싶은 욕구가 해결되지 않는 상황. 그런 고민이 자신도 모르게 새벽에 눈을 뜨게 만들었던 것 같다고 고백하는 하연이었다.

    “허나 나리를 처음 뵌 날 이후로 새벽에 눈을 뜨게 되는 일이 없어졌습니다.”

    “예?”

    “나리께서 삼돌이 등에 업혀 온 그날, 심의를 갈아입히면서 처음 가슴이 뛰었습니다. 깨어나신 후에는 무례를 무릅쓰고 가르침을 구했는데, 흔쾌히 약조하시는 모습에 모든 고민이 사라졌지요.”

    지금도 가슴이 두근거리는 지 옷고름에 섬섬옥수를 올리고 다시 숨을 가다듬는 하연이었다.

    “취해있는 제 옷을 갈아입히신 것은 소저가 맞으셨군요.”

    “예. 그때 그 와중에…… 아, 아닙니다. 이것은 잊으시지요.”

    당황해 장옷자락을 움켜쥐고 얼굴을 가리는 모습이 귀여워 그녀를 정신없이 바라보고 있었다는 사실을 잠시 후에 깨달았다. 그런 나를 바라보는 그녀의 미소가 야릇했다.

    아차, 연적에 담긴 의미는 그런 의미가 아니라고 변명했어야 했는데 때가 너무 늦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의 페이스에 완전히 말려버린 것이 분명했다.

    “어쨌거나, 나리께서 이런 물건까지 정표로 주셨는데 소녀가 무엇을 더 바라겠습니까.”

    “소저, 사실은…….”

    “답례로 드릴 것이 있습니다. 받아주시지요.”

    다시 한번 힘을 끌어 모아 변명하려고 하는데, 그녀가 품에서 꺼낸 다른 물건이 내 입을 막았다. 작은 상자였다.

    여우에 홀린 것처럼 그것을 받아들었다. 이 자리에서 열어도 될까. 허락을 구한 내 눈빛에 그녀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여 응답했다.

    “이것은…….”

    윤기 흐르는 연녹색이 깃든 작은 비녀였다. 옥으로 깎은 물건인 듯했다. 이걸 왜?

    “제 모친에게서 물려받은 물건입니다. 혼례를 올릴 때 꽂으셨던 물건이라 하시더군요.”

    “그걸 소생에게 선물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것 또한 정표입니까?”

    장옷 사이로 드러난 얼굴에 하연의 얼굴에 짙은 미소가 감돌았다. 분명 매화나무는 저 멀리 길가에 있는데, 코끝까지 매화향이 훅 풍기고 들어오는 것 같았다.

    아, 조금 후에야 그 뜻을 알 수 있었다. 그것은 후에 심양에서 돌아와 그녀의 쪽진 머리에 이 비녀를 꽂아달라는 뜻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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