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화. 왕재(王才)
빛을 찾은 눈동자와 함께 축 처져 있던 세자의 얼굴에 어느새 팽팽함이 감돌고 있었다. 동궁전 방 안의 분위기 역시 이제는 긴장감이 물씬 풍겼다.
“그러기 위해서는 힘이 필요하다. 내 나라 조선이 다시 그 처참함을 겪지 않기 위해서라면 오랑캐든 왜든 색목인이든 누구의 손이라도 빌릴 것이다.”
“그런 말씀을 처음 보는 자리에서 소생에게 하셔도 되겠사옵니까? 아직 이 나라 조정에는 오랑캐들을 탐탁지 않게 보는 자들로 가득할진데…….”
앞에 앉은 자가 입꼬리를 무너뜨렸다. 창덕궁으로 그의 행차가 다가왔던 순간부터 지금까지, 씁쓸하게나마 세자의 입가에 웃음기가 올라앉은 것을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래. 이 말을 꺼낸 것이 새어나가면 그것을 빌미삼아 나를 물어뜯으려는 자들이 분명 있겠지. 허나…….”
세자의 시선이 나를 향해 닿는 것이 보였다. 그는 꿇어앉은 나를 아래위로 훑고 있었다.
“네가 어떤 자인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심양에서 일어난 일을 조선에 앉아 자세히 알고 있는 것을 보면 예사 인물은 아니리라는 확신이 든다.”
“저하, 소생은…….”
“대사간이 너를 소개하면서 그러더구나. 혜성이 떨어진 자리에서 너를 만났고, 그 이후로 모든 일이 잘 풀리기 시작했노라고.”
언젠가 성 영감이 내게도 그런 이야기를 한 기억이 있었다. 그냥 주책맞은 영감님의 호들갑이라 생각하고 넘겼던 일이었는데, 꼭 그렇지만은 않았을지도.
“그렇사옵니까? 우연의 일치가 아니겠나이까.”
“아니, 방금까지는 그리 여겼지만 한낱 유생 주제에 일국의 세자를 대하는 태도가 방자한 것도 그러하고, 감히 나로 하여금 내가 꿈꾸는 조선의 미래를 논하라 말하는 것을 보고 생각이 바뀌었다.”
“…….”
“네놈은 무엇이냐? 도깨비라도 되는 것이냐?”
검지를 들어 나를 가리키는 세자의 표정은 사뭇 진지했다. 도깨비라, 내 가슴에는 검도 없고 그걸 뽑아줄 신부도 없는데. 물론, 몇백 년 후의 사람인 건 맞지만.
“저하, 심사가 흐트러지신 듯하옵나이다. 어찌 소생이 도깨…….”
세자는 내 해명을 들을 생각도 없는 듯했다. 한 손을 들어 말허리를 자르는 모습에 더는 말을 이어나갈 수 없었다.
“네가 말했던 대로 심양관에는 사람이 부족하다. 그러므로 내 앞에 앉아있는 낯선 자가 한낱 유생이라도, 혜성의 현신이라도, 도깨비라도 상관없다.”
세자의 풍채는 고된 생활로 메말라 있었지만 그의 말에서 묻어나는 품격에는 분명 군왕의 자질이 있었다. 아마 이런 자이니까 서양 문물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려 했을지도.
“내 이름은 왕(汪)이다. 모두를 품을 정도로 깊고 넓은 임금이 되라고 아바마마께서 지어주셨지.”
“…….”
“말도 기수를 스스로 고른다고 했지. 나는 네가 조선에, 그리고 내게 있어 필요한 자라고 생각하여 너를 품고자 한다. 너는 어떠하냐?”
아마 능양군을 만나기 전의 나라면 넙죽 엎드려 충성을 맹세했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한번 뒤통수를 맞고 데인 마당에 다시 경솔하게 행동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어찌되었건 전하의 끈이 닿아있는 몸이나이다. 괜찮으시겠사옵니까?”
“말로 하여금 내가 더 좋은 기수라는 것을 알게 만들면 그것은 아무 문제도 되지 않겠지. 아닌가?”
능양군보다 나을 자신이 있다 이건가. 꽤나 마음에 드는 대답이었다.
그러나 심양에는 또 하나의 임금 후보가 있을 것이었다. 아직 마음을 정하기는 이른 상태인 것은 확실했다.
“저하의 자비로우신 처우에 감읍할 따름이나이다.”
“좋다. 언젠가 네 진실된 충성을 받을 날이 있겠지. 그날을 기다리고 있겠다.”
세자에게 고개를 숙이며 가슴에 손을 댔다. 품에 임금에게 받은 물건의 무게가 느껴졌다.
언젠가 이것을 쓸 날이 올 것이었다.
***
궁에서 나와 발걸음을 북촌으로 돌리면서도 머릿속은 복잡했다.
세자의 처지가 불안하고 외로운 것을 알았기에 내가 먼저 치고 들어가 기선을 제압할 생각이었다. 분명 유약해 보이는 세자였다. 그래서 성공을 장담했던 것이고.
미래에서 전해 받은 지식을 가지고 그를 몰아붙일 때까지만 해도 좋았다. 그러나 세자가 자신이 생각하는 조선의 모습을 풀어놓는 순간, 그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고 말았다.
세자의 눈에서 불꽃이 튀던 모습이 아직도 생생했다. 분명 대화 중반까지만 해도 주도권은 내가 잡고 있었으나 동궁전에서 물러나올 때는 그렇지 않았다.
‘뭐, 일단은 가볍게 동업자 정도로 생각하면 되겠지.’
적어도 바라보는 방향이 같은 것은 확인했으니 세자를 따라가도 큰 문제는 없을 것 같았다. 아마도.
소현세자와 볼모 생활을 하며 이뤄야 할 목표들은 이미 대강 계획해 둔 상태였다. 겨울이 지나는 동안 시간은 많았으니까.
세자에게도 동행을 허락받았으니 이제 얼마 후면 이곳을 뜨게 되겠지. 한양에서의 일도 정리하고 심양에서 지낼 몇 년을 준비하려면 시간이 별로 없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그렇게 고민하는 동안 발걸음은 목적지에 도달해있었다. 북촌에서 제일 낡은 집 대문이었다. 노비를 두지도 않은 집이라 평소처럼 문을 벌컥 열고 들어가려던 찰나였다.
“……아! 문 열어!”
경첩이 낡아 틈이 벌어진 대문 사이로 상상치도 못한 목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쾅쾅쾅. 문을 두들기는 소리 역시 같이 나고 있었는데, 지금까지 이 집에서 이런 소리를 들은 적은 없었다.
급하게 대문을 박차고 들어갔다. 문이 열리자마자 바로 보이는 자리, 문이 닫혀있는 부엌 앞에 사람 셋이 모여 있었다.
“초관 어른!”
“안 선생 아닌가? 갑자기 이 시간에 왜?”
“부탁할 일이 있어서 온 것인데, 이게 무슨 일입니까?”
예고가 없었던 방문에 깜짝 놀란 박연의 질문에 대답하면서도 정신은 온통 다른 곳에 쏠려있었다. 가족 중 한 사람이 비어있었다.
“부탁할 일이라니? 어쨌거나 마침 잘 왔소!”
“잘 왔다니요? 그리고 요안이는 어디 간 것입니까?”
박연이 무어라 답하려 했지만 그럴 필요가 없었다.
남매의 어머니가 분명한 여자가 부엌문을 두들기며 요안이의 이름을 한창 부르고 있었다. 안에서 새어 나오는 가는 울음소리가 심장이 덜컥 떨어지게 만들었다.
“이게…… 대체? 요안이가 안에 있는 겁니까?”
“그렇소…….”
“갇히기라도 한 겁니까?”
부끄럽다는 듯 잠시 이마를 짚고 있던 박연이 나를 돌아보았다. 표정이 복잡했다. 이번엔 오라비가 부엌문을 두들기며 요안을 부르고 있었으나 여전히 대답이 없었다.
“갇힌 게 아니라 스스로 안에서 문을 막았다오.”
“예? 무슨 이유입니까?”
“나도 잘 모르겠소……. 오늘도 몰래 바깥나들이를 나갔다 왔길래 어딜 갔다 왔나 물어보려고 뒤를 따라갔는데, 제 방으로 가기는커녕 부엌문을 걸어 잠그고 울고 있지 않겠소.”
저번 수업까지만 해도 아무 기미가 없었는데? 지금 상황이 쉽게 이해가 가지 않았다.
밝고 순수한 아이였다. 반년 동안 녀석을 가르쳤지만 녀석이 문을 닫고 틀어박히기는커녕 눈물 한 방울 비치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어제도 좌명의 집에서 글을 배우면서 하연 옆에 착 달라붙은 채 열심히 글씨를 연습하던 녀석이었다. 그런데 그런 요안이가 틀어박혀 울고 있었다.
“혹시 초관 어른께서도 짚이시는 게 없으십니까?”
“전혀 없다오. 애들 엄마가 불러도 듣지를 않고, 내 말도, 요운이 말도 듣지를 않소. 혹시 어제 충청감사 나리 댁에서 무슨 일이 있었소?”
“아니오. 전혀…….”
“저러고 있는 것이 몇 각째인지 모르겠소. 우느라 목도 온통 쉬어버렸던데 걱정이오.”
이야기를 들어도 떠오르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거친 초관의 얼굴은 수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
“혹시 안 선생, 요안이에게 말이라도 걸어줄 수 있겠소?”
“어렵진 않습니다만…… 제가 말을 건다고 해서 요안이가 문을 열겠습니까?”
“나도, 안사람도, 요운이 말도 안 들었으나 선생 말은 들을지도 모르지 않소.”
많이 친해지긴 했지. 추운 겨울 동안 바깥 활동을 자제하느라 제자들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낸 터였다. 덕분에 수업을 마치고도 가끔 어울려주곤 했는데, 부엌에도 그 흔적이 남아있었다.
‘선생님은 뭘 드셨길래 그렇게 키가 크신 거예요?’
‘글쎄. 잘 모르겠구나. 그건 왜 궁금하느냐?’
‘저도 이왕이면 더 컸으면 좋겠는데, 선생님 옆에만 서면 작아 보이거든요.’
‘이미 여인네 치고는 충분하지 않느냐. 거기서 더 커서 어디에 쓰려고.’
‘안 알려드릴 거예요!’
그렇게 서로의 키 높이를 장도로 그어 표시한 금이 하필 부엌 기둥에 나 있었다. 이번 겨울이 지나면 내 턱높이까지 키를 키우고 싶다던 요안이었다. 다시 흘러나온 녀석의 울음소리에 가슴이 아려왔다.
“일단 딸에게 말을 걸어주시겠소? 안 되면 최후의 방법을 쓰는 수밖에.”
“뭔지 알 것 같지만 일단 제가 시도는 해 보겠습니다.”
부엌문 앞으로 다가섰다. 남매의 어머니와 요운이 자리를 비켜주었다. 그 순간 코에 묘한 향기가 풍기고 있었다.
‘먹?’
부엌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향기였다. 안에서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감도 오지 않았다. 머릿속이 하얗게 변하는 것이 느껴졌다.
“요안아. 나다.”
대답이 없었다. 울음소리는 약간 잦아들었으나 여전히 미약하게 흐르고 있었다. 울음을 삼키며 히끅거리는 소리가 내 마음을 지그시 눌러댔다.
“요안아. 무슨 일이라도 있는 게냐? 다 들어줄 테니 문부터 열거라. 응?”
“……돌아가세요.”
요안이 입이 드디어 열렸다며, 남매의 엄마가 옆에서 호들갑을 떨었으나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돌아가라며 말한 목소리는 잔뜩 쉬어 있었다. 오래오래도 운 것이 분명했다.
“요안아. 나도, 너희 부모님도 널 도와줄 것이야. 그러니 우리 얼굴 보고 얘기하도록 하자. 응?”
“이런 모습 보이기 싫어…….”
그때였다. 어깨에 북슬북슬한 손이 와 닿았다.
뒤를 돌아보자 괜찮다는 듯이 고개를 한 번 끄덕이는 아비의 모습이 보였다.
아까 말한 최후의 수단을 쓰겠다는 말이었다.
하나, 둘, 셋.
박연과 합을 맞춰 몸을 힘껏 부엌문을 향해 내던졌다. 옆에 괴력의 거한이 있어서인지 낡은 부엌문은 몇 번 몸을 부딪치자 경첩이 박살 나는 소리와 함께 수명을 다했다.
쾅.
자욱하게 일어난 먼지 탓에 시야가 뿌옜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데 귀로 들어오는 흐느낌에 마음만 계속 급해졌다.
콜록. 콜록.
기침이 연신 나왔다. 소매로 입을 가리고 것이 가라앉길 기다리며 요안을 찾아 연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러나 먼지가 가라앉기 시작한 후, 눈에 들어온 것은 전혀 생각지도 못한 모습이었다.
눈에 들어오는 요안의 모습이 낯설었다. 바닥에 주저앉아 멍하니 이쪽을 바라보는 소녀의 얼굴은 그대로였으나 무언가가 달라져 있었다.
“선생님……?”
그 와중에도 아비보다 나를 먼저 부르고 있었다. 옆에 선 딸 바보의 속이 뒤집히고 있을 것이 분명했으나 그것은 문제가 아니었다.
‘아…….’
아까 풍기던 먹 향기의 의미를 이제야 깨달았다.
바닥에 뒹구는 물건이 발에 채여 내용물이 버선을 물들였다. 내가 제자로 맞은 기념으로 선물한 벼루였다. 그러나 지금, 나는 먹물에 발이 축축해지고 있다는 사실조차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먹물에 검게 물들어가고 있는 것은 버선뿐만이 아니었다.
늘 눈부시게 빛나고 있어야 할 요안의 금발이었다. 그 예쁜 머리카락이 온통 먹물로 뒤덮여 있었다. 스스로 끼얹은 것이 분명했다.
먹물이 군데군데 굳은 얼굴 사이로 드러난 아이의 예쁜 눈초리는 한참을 울어서인지 퉁퉁 붉게 부어올라 있었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