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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 어사, 조선을 뒤흔들다!-43화 (43/298)
  • 43화. 뒤를 부탁해

    “야, 그걸 왜 아직까지 안 말했냐?”

    “우리가 말려들지 않게 하려고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선진.”

    그간에 있었던 이야기를 입을 꾹 닫고 듣고만 있던 내 벗 둘이 처음 꺼낸 말이었다. 잠시 능양군을 욕하는 ‘충신’과 도리를 지키라던 좌명 사이에서 설전이 있긴 했지만 금방 가라앉았고.

    임금이 내 앞에서 보이지 않는 칼날을 흔들어대던 이야기를 풀어놓는 것이 사뭇 걱정되었으나, 이들의 반응을 보니 나와 엮여 들어갈 수도 있다는 점은 그들에게 문제가 되지 않는 듯했다.

    그렇게 충신은 서운하다고 날뛰고 좌명은 고생했다며 어깨를 두드려주던 시간이 끝나자 분위기는 다시 진중해졌다.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더니, 이들은 천근 같은 무게마저 가볍게 만들어주고 있었다.

    “심양이라…… 좋아, 까짓거. 나도 같이 간다.”

    “예?”

    “어차피 만상, 송상 놈들이 사행 다녀오면서 이문을 긁어가는 것을 보느라 침만 질질 흘리고 있는 것도 지겹던 참이 아니겠냐. 어찌 보면 큰 기회다.”

    그 이야기를 하는 충신의 눈빛은 향수에서 돈 냄새를 맡던 그때로 돌아가 있었다.

    경험에 비추어보건대, 이렇게 스위치가 들어간 그는 말릴 수 있는 방도가 없었다. 뭐, 혼자 갈 일을 굳이 같이 가 준다면야.

    세자가 언제 귀국할지도 모르며, 실제로 가게 될지, 수행원에 추가로 뽑혀갈 수 있을지 모른다는 말까지 꺼냈으나 충신에게는 이미 그것이 중요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이미 머릿속에서 산가지를 놓으며 심양행 견적을 짜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는 듯했으니.

    “선진이 저렇게 나오면 남는 것은 내가 되겠구만. 걱정하지 말게, 언제 돌아와도 좋도록 자네 신변 뒤처리는 내가 해 줄 테니.”

    “말은 고마우나, 일정 자네가 왜?”

    혈혈단신인 몸 덕분에 정말로 세자를 따라가는 날이 온다 해도 챙길 것은 적었으나, 아닌 것이 몇 가지 있던 터였다. 성 영감 말로는 세자의 일시귀국이 곧 일어날 것이라 했으니.

    우선 가르치던 요안 남매를 두고 가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얇은 논어부터 시작해서 만들기 시작한 참고서 역시 반 넘게 완성되어 있었다. 내버려 둘 수만은 없는 일들이었다.

    그리고 성균관의 세력을 정리하는 일 역시 내가 끝을 내지 못한다면 그것을 이어받아 마무리할 사람이 필요했다. 서장의를 앞세워야 하니 아무에게나 시킬 수 있는 일도 아니었다.

    그 일에 적합한 사람은 딱 한 명뿐이었다.

    어차피 처가 있어 움직이기 곤란한 좌명에게 부탁해볼 생각이었으니 잘된 일이긴 했는데, 왜 굳이 본인이 먼저 나서서 짐을 떠안겠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인지 의문이 들었다. 그 답은 곧바로 알게 되었지만.

    “어차피 곧 처남 매부가 될 사이인데, 그 정도는 해 주어야지.”

    “뭐? 나는…….”

    “내 눈은 옹이구멍이 아니네, 성근.”

    하연에게 흔들린 것은 사실이었으나 마음정리는 끝난 상태였을 텐데. 이 눈치 없이 끈질긴 놈은 누이와의 혼인 이야기를 집어넣을 생각을 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심양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며 최선을 다해 변명해봤지만, 좌명은 들을 생각도 없는 듯했다.

    “어차피 혼례를 올려놓고 떠나면 그만 아닌가, 성근 자네, 심양 가서 새로운 여인네라도 만나고 싶은 건가?”

    “그게 아끼는 누이에게 할 소린가? 멀쩡한 여인을 청상과부로 만드는 짓, 나는 못 하네.”

    “그 아끼는 누이가 철들고 나서 처음으로 마음에 드는 사내가 나타났다고 하는데, 오라비 된 도리로써 가만히 있는 것이 더 이상하지 않은가? 잠자코 혼인이나 하게.”

    “일정!”

    그렇게 엎치락뒤치락하던 이야기는 결국 그녀의 의사를 물어본 후에 결정하겠다는 말을 내 입에서 꺼내고 나서야 잦아들었다. 평소 같았으면 끼어들었을 충신이 손에 술잔을 들고 관전만 하는 모습이 더 밉상이었다.

    혼인이라.

    지금까지 진지하게 생각하진 않았지만, 하연과의 혼인은 내 감정을 제외하고 실리만 본다면 나쁘지 않았다. 성이성의 수제자와 김육의 여식이 엮인다면 주화파 사이의 결합은 더 단단해지겠지.

    이성적으로 그녀가 마음에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아마 반응을 보니 그녀 역시 같은 마음일 것이고.

    하지만 그렇다고 인륜지대사를 이렇게 쉽게 결정해서도 안 될 것이다.

    무엇보다, 몇 번 만나지 않은 사람과 마음도 통하지 않았는데 무작정 결혼하는 일은 현대인인 내게는 용납되기 어려운 일이었다. 적어도 썸이라도 타게 해 주든가.

    그렇게 좌명에게 썸과 현대인 이야기만 쏙 빼고 보류의 의사를 전하자, 녀석은 강권하던 태도를 그제서야 멈췄다. 허나 이미 저놈의 머릿속에서는 내가 제 처남이 되어 있지 싶었다.

    “어차피 시간문제일세, 성근. 대사간 나리께 사모관대 빌릴 걱정이나 해야 할 것이야.”

    내가 하연에게 빠져들지 않을 거라는 생각은 추호도 없는 듯했다. 저 동생 바보 놈.

    그 대화 이후로 잠시 승평부원군 김류의 저택 주위에 사람을 풀자는 이야기가 나왔다.

    오늘 왈패 두목에게서 얻은 정보를 가지고 머리를 맞댄 결과 튀어나온 대책이었다. 물론 창고에서 빼돌려지는 세곡의 행방을 추적하던 유 서리에게도 계속해서 정보를 받을 것이었고.

    광흥창 서리 같은 끄나풀과 윗사람 사이의 끈, 그리고 김자점과 김류 사이의 끈에 대한 실마리만 제대로 잡아내면 지금까지 뜨뜻미지근하던 능양군 놈도 태도를 바꿀 것이었으니까. 그다음은 격노한 왕에게 지시받은 의금부나 사헌부가 알아서 하겠지.

    이후 끈 떨어진 김식을 조지고 성균관의 세력을 흩어버리는 것이 우리가 할 일일 것이었다. 그렇게 임금이 내려준 퀘스트를 해결하고 신임을 얻은 후, 세자에게 붙어 심양으로 나르면 능양군 놈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있겠지.

    왕은 나를 세자에게 붙이는 감시원이라고 생각하고 있겠으나 오히려 그것은 갇혀있던 호랑이를 벌판으로 풀어주는 격이 될 것이었다. 그 생각을 하니 속이 후련했다.

    ***

    싸늘한 공기 사이에서 정신을 차렸을 때는 해가 중천에 솟아 있었다. 눈을 뜨자마자 오늘 성균관 출석은 글렀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늦가을로 접어드는 계절답게 온돌도 놓여있지 않은 방에서 잠들기엔 사뭇 추운 날씨였을 것이나, 자면서는 추운 것을 느끼지 못했다.

    비밀의 방 안에는 어제 안주를 구워 먹은 화로가 하나 있긴 했으나 그게 전부가 아니었으니까. 내 배 위에 익숙하게 척 걸쳐져 있는 다리 하나를 겨우 치워냈다.

    “우…… 우…….”

    건드린 덕분에 잠이 얕아졌는지, 이상한 소리를 한 번 뱉고는 다시 턱을 긁적거리며 깊은 잠에 빠져든 충신이었다. 잠버릇이 이렇게 고약한 인간이 자면서 숯덩이가 담긴 화로를 걷어차지 않은 게 용했다.

    반대편에는 좌명이 흐트러짐 하나 없이 누워 잠들어 있었다. 충신 혼자 쓰던 공간이어서 그런지 이불이 사람 수에 비해 턱없이 모자랐던 덕분에 이들과 한 이불을 덮고 잘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덕분에 자면서 별로 춥지는 않았지만.

    어제는 심의 차림도 아니었고 통금시간에 굳이 순라군과 귀찮은 일을 만들기 싫었을 뿐인데, 돈 버느라 바빠 체험도 못 해봤던 MT 다음날 아침의 풍경을 조선 시대에 와서 겪을 줄은.

    아마 MT 가서 먼저 일어난 사람들도 이렇게 했을까? 아직 자고 있는 놈들을 두들겨 깨우고, 어지른 것을 정리하고, 창문을 열어 환기를 시키고.

    그렇게 어제의 흔적을 지우고 충신의 기루를 나선 후에도 하숙방에 등을 붙이고 쉴 수가 없었다. 일단 술과 외박으로 추레해진 행색을 가다듬고 어젯밤 좌명과 약속한 것을 이행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또 그 이야기인가?’

    ‘내 입을 다물게 하고 싶으면 시원하게 답을 내려놓게.’

    진지한 이야기가 끝나고 눈을 붙이려 한 이불을 덮고 난 후에도 계속해서 옆구리를 찔러대던 좌명이었다. 결국 약속 아닌 약속을 하긴 했는데, 사내가 한번 뱉은 말이니 지켜야 할 수밖에.

    “이리 오너라!”

    “스승님, 여기는 대체……?”

    이미 한 번 와본 장소였다. 그때는 혼자 술에 취해 업혀 왔던 장소여서 그런지, 솟아있는 대문이 낯설어 보였다. 빼꼼 열린 문틈으로 방문자를 살핀 노비가 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오셨습니까요, 선비님. 서방님과 아가씨가 손님방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요.”

    “그래, 들은 것이 있는 모양이구만.”

    “그런데, 뒤에 같이 오신 도련님과 아기씨는 뉘신지…….”

    누운 자리에서도 하연과의 혼인 이야기를 멈출 생각이 없는 놈에게 내일 해가 뜨면 담판을 지으러 가겠다고 홧김에 약속한 차였다. 요안 남매의 과외가 다음날 있었다는 것을 완전히 까먹고 무책임하게 뱉어버린 말이었다.

    하지만 사람은 위기를 통해 발전한다 하던가. 아침에 일어난 자리에서 머리를 열심히 굴려본 결과, 두 약속 모두 깨지 않을 방법을 떠올려낼 수 있었다. 게다가 거기서 오는 이득까지 있었고.

    “아, 내가 가르치는 아이들일세. 일정도 알고 있는 일이네.”

    당연히 거짓이었다. 좌명 그놈은 어떻게든 하연과의 삼자대면 자리에서 허혼서라도 받아낼 생각이겠지만 녀석의 생각대로 움직일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사이 오간 몇몇 서찰에서도 논어 글귀에 대해 질문하던 하연이었으니 공부를 같이 봐준다는 핑계를 댈 생각을 하고 요안 남매를 데려온 것이다. 설마 애들 앞에서 선을 넘으려고.

    과외를 계속하면서 신뢰가 쌓인 모양인지 박연이 등청한 사이 집을 지키고 있던 아이들의 엄마도 나들이를 쉽게 허락해주었다. 사실 천방지축인 녀석을 맡아준다는 것 자체가 그녀에게는 휴식이 될 터이니 반대는 안 하겠다 싶었다.

    허나 대문을 통과해 손님방으로 걸어 들어가면서도 조금 걱정되는 것은, 낯선 장소를 방문한 꼬맹이 녀석이 제 오라비와는 다르게 완전히 얼어있다는 점이었다. 평소대로 말괄량이 모습이었다면 그것도 문제일 것이지만.

    “아니, 성근. 이 아이들은 누구인가?”

    “오늘 수업이 있었던 것을 잊고 있었지 뭔가. 동석해도 괜찮겠지? 어차피 누이에게도 논어를 가르칠 예정이었는데, 같이 해보는 것도 좋지 않겠는가.”

    좌명의 당황한 얼굴을 보니 허점을 제대로 찔렀지 싶었다. 처음 보는 아이들 앞에서 혼인 이야기를 어찌 쉽게 하겠는가.

    문제는 약속된 방문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제자들 역시 얼굴이 굳어졌다는 점. 요안의 투명할 정도로 새하얀 얼굴이 오늘따라 더 새하얗게 보였다.

    하지만 이 자리에 당황한 사람만 있는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오라비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고 돌아본 하연의 얼굴에는 웬 흐뭇한 미소가 가득해 있었으니까. 생각지도 못한 반응이었다.

    “이 아이들이 가르치신다던 박 초관 댁 아이들입니까? 어린 나이임에도 벌써부터 학문에 매진하는 것이 너무 대견하지 않습니까. 게다가…….”

    하연의 붉은빛 어린 눈초리가 얼어있는 말괄량이를 향했다. 호기심이 가득한 눈길이었다.

    “가르치신다는 아이가 이렇게 귀여운 아이일 줄은 몰랐습니다.”

    “하연아, 그게 갑자기 무슨 소리냐.”

    “오라버니는 당의 이태백이 백석벽안(白晳碧眼)의 금발미녀를 노래한 시구를 들어본 적이 없으십니까. 지금 이 아이가 바로 그 글귀에서 튀어나온 것 같지 않습니까.”

    내게 지어보이던 웃음과는 또 다른 미소였다. 따뜻함이 담뿍 묻어나는 그 미소에 나도 좌명처럼 어안이 벙벙해져 있는데, 그 따스함이 이 자리에 얼어있던 무언가를 녹인 것 같았다.

    “……정말요? 저, 그런 이야기를 듣는 것은 처음이에요.”

    “목소리도 외모처럼 예쁘구나. 이름이 무엇이니?”

    세상에. 방금까지 얼어있던 요안이가 맞나. 예쁜 언니가 말 걸어주니 좋기라도 한 거야?

    옆에서 제 오라비가 녀석의 다홍색 치맛자락을 열심히 잡아당기고 있었으나 이미 반짝반짝 빛나기 시작한 요안의 푸른 눈동자는 온통 하연을 향해 있었다.

    저게 여자들의 친화력인가. 이미 서로 이름을 교환하고 잔잔한 수다로 시작해 둘만의 세계에 빠져 버린 두 아가씨를 말릴 수 없었다. 옆에 앉은 요운만 나를 보며 난처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자네가 무슨 흉계를 꾸몄는지 알 것 같구만, 성근. 어지간히 친화력이 좋은 아이를 데려왔어.”

    “친화력이 좋다니……. 아무튼 흉계라고 하니 섭섭하네. 막무가내로 밀어붙인 것은 자네가 아닌가?”

    “녀석, 동생을 가지고 싶다고 어릴 때부터 입버릇처럼 말하곤 했는데 저럴 줄은 몰랐으이.”

    계획이 완전히 어그러져 버린 모양인지 좌명은 이마를 짚고 있었다. 누이동생과 요안이 웃음소리를 섞어가며 수다를 떨고 있는 모습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 듯했다. 고소한 깨소금 맛이었다.

    “저, 글 열심히 배워서 이런 것도 쓰고 있어요!”

    “대단하구나. 나중에 내 방으로 와서 내가 지은 글도 보련?”

    요운이 다시 난감하다는 눈빛을 보내왔다.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박연의 집에서 아이들을 데리고 나오기 전, 코에 먹물까지 묻혀가며 종이에 무언가를 쓰고 있던 요안을 발견하고 그 내용을 물어봤었다. 방금 하연에게 녀석이 꺼내든 종이가 그것이었는데…….

    ‘절대, 절대 안 보여줄 거예요!’

    내가 말을 걸자마자 흠칫 놀라 튀어 오르더니 먹물이 마르지도 않은 종이를 재빨리 접어 품속으로 쑤셔 넣던 녀석이었다. 글을 건네받아 꼼꼼히 읽고 있는 하연에게서 눈길을 뗄 줄 모르는 녀석의 옷깃에 아직도 먹물 자국이 남아있는 것이 보였다.

    저 앙큼한 녀석. 나한테는 그렇게 굴더니 예쁜 언니한테는?

    딸자식 키워봐야 소용없다는 이야기가 이런 뜻이었나. 박연의 심정이 조금 이해가 가려 하고 있었다. 나도 좌명과 똑같이 이마에 손이 올라가 있다는 사실을 그제서야 깨달았다.

    ※ 작가의 말

    하연이 언급한 이태백의 시조는 실제 전해 내려오는 시조입니다.

    백석벽안(白晳碧眼: 흰 살결 푸른 눈)의 금발미녀

    관능적인 호복을 입고 호추(胡雛: 젊은 소그드남자 악사)에 맞추어 호선무(胡旋舞)을 추며

    농염한 자태로 술자리에 임했음이니 그 아니 좋은 취흥(醉興)이었으랴

    그러나 오늘의 서안의 밤은 너무 어둡고 무겁기만 하구나.

    중앙아시아의 소그디니아 지방에 사는 페르시아 계통의 이란인을 호인이라고 지칭했는데, 그 중에도 금발벽안의 미녀들이 꽤 있었던 모양입니다. 과거인들의 미인상도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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