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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 어사, 조선을 뒤흔들다!-36화 (36/298)
  • 36화. 설렘

    “그 표정은 무엇인가. 성근? 어젯밤 기루에서 보여주던 표정과 비슷한데.”

    “아니, 아닐세. 잠시 숙취가 올라와서 그런 것일세.”

    이 눈치 없는 새끼. 지 동생 앞길 막히면 어쩌려고 이런 짓을 꾸며?

    생각해보면 동생을 처음 언급할 때도 처리 방안 운운하며 치워야 할 짐 덩어리 취급하던 놈이었다.

    뭐, 시집 안 가겠다고 뻗대는 누이가 있으면 질릴 만도 하련만.

    저런 좋은 규수가 시집을 못 갈 리가 없었다.

    “숙취라. 아까 내 누이가 올린 물로는 부족하던가? 아하. 자네 우리 하연이가 다시 보고 싶어서 그런 모양이구만.”

    “아니. 자네는 숙취도 없는가? 이 와중에 계속 농담이라니 조금 얄밉네.”

    “어제 취해서 쓰러진 척하느라 고생 좀 하긴 했지.”

    “뭐?”

    이 자식. 나를 충신에게 술자리 먹이로 던져주고, 본인은 기생 무릎에 머리를 묻고 취한 척 엄살을 부린 모양이었다.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내가 취해 정신을 잃은 척하면 자네가 나를 버리고 가지는 않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선진이 이렇게 일을 잘 풀어줄 줄은 몰랐네. 하하.”

    “이잇……. 내 다음에 비슷한 일이 생기면 자네를 필히 길바닥에 버리고 갈 것이야!”

    기루의 함정은 하나가 아니었구나!

    뒤통수를 망치로 맞은 것 같은 충격이 스치고 지나갔다.

    내가 지금 하연이라 불린 여인의 방에 누워 있는 것은 좌명의 설계였음이 분명했다.

    이 자식, 밑장을 빼? 언젠가 손모가지를 부러뜨려야 할 일이었지만 지금 내가 손쓸 수 있는 일은 없는 것이 한스러웠다.

    “그렇게 대놓고 속았다는 표정 짓지 말게. 내 분명 자네에게 미리 공지를 하였을 텐데.”

    “무슨 소리인가? 그게.”

    “내 누이에게 자네를 팔았다 하지 않았는가. 그 순간부터 정신을 바르게 챙겼어야지.”

    좌명의 얼굴에 한껏 빙글거리는 미소가 가득해져 있었다. 얄미움 그 자체였다.

    “내 탓만은 아니라네. 자네 이야기를 전해 들은 누이가 꼭 자네를 스스로 보고 판단하고 싶다고 졸라댄 결과이니.”

    “자네 누이가 남긴 말이 인사치레는 아니었나 보네. 비슷한 이야기를 들었으이.”

    “뭐, 자네가 어지간히 마음에 들었으니 계속 문 너머에서 자네가 깨어나길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 아니겠는가?”

    콜록. 당황스러운 말이 들어와 나도 모르게 헛기침이 나왔다. 머릿속은 온통 하얀 도화지였다.

    “하연이가 다시 보고 싶으면 말하게. 이번엔 꿀이라도 타서 꿀물을 올리라 할 테니. 녀석, 그런 면에는 또 손끝이 야무지다네.”

    “으으…… 일정 자네…….”

    “그래도 나쁜 일은 아니지 않은가. 내가 봐도 박색은 아닌 아이일세. 글공부도 그 정도면 자네와 말이 통하지 않는 일도 없을 것이고.”

    그 와중에도 본인 누이 자랑이었다. 하연이라 불린 누이의 미모가 보통은 아득히 넘은 것은 사실이었으나…… 아, 진짜 이 새끼 눈치 드럽게 없네.

    “본인은 글공부가 부족하다고 했었던 기억이 나는데.”

    “뭐? 그 녀석, 내훈(內訓), 열녀전(烈女傳) 이런 책은 예전에 다 떼고 지금은 논어를 가르쳐 달라며 떼를 쓰고 있는데?”

    “논어라, 지금 제자들에게도 가르치고 있긴 하지.”

    “그럼 내 누이도 가르쳐주면 되지 않겠는가? 그 녀석, 논어에 여자와 소인은 가르치기 어렵다는 구절을 말해줬더니 화를 펄펄 내는 바람에 내가 손대기 더 이상은 어렵네.”

    하늘은 공평한 모양이었다. 그 잘생긴 얼굴을 하고 누이에게 눈치 없는 짓거리를 하고 있는 좌명이었다. 그렇게 눈치가 없으니 와이프한테 걸핏하면 철퇴를 맞는 것 같기도 했고.

    “가르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네. 여자를 가르치는 일이 처음도 아니고.”

    “박 초관 집 여식 얘기인가? 자네의 태도를 보니 정말로 정인은 아닌 것 같아 다행이긴 하구만.”

    “아, 유녀 취향 같은 건 없다고 하지 않았는가!”

    “알겠네. 알겠네. 농담일세. 하하. 그래서, 내 누이는 가르쳐 볼 생각인가?”

    굳이 좌명의 누이가 아니었더라도, 이 자식의 함정에 걸려들지 않았더라도 배움을 청하는 자는 가르칠 생각이었다. 하연이라 불린 그녀가 박색이었어도 가르쳤을 것이다. 아마.

    그런 의미에서 이미 편지를 교환하기로 했다는 이야기를 풀어놓았을 때, 앞에 앉은 눈치 없는 공처가 놈의 얼굴은 눈에 띄게 밝아져 있었다.

    “……다행이구만. 아, 그 녀석. 악기는 가르칠 필요 없다네. 녀석의 해금 솜씨는 거의 악공에 버금가거든.”

    “그 와중에도 또 누이 자랑인가. 자네가 누이를 짐덩이로 여기는지, 정말로 아껴서 그러는지 이제는 헷갈릴 지경일세.”

    “둘 다일 수도 있지 않겠는가? 하하. 자네 같은 이가 아니었으면 머리카락 끝도 내보내지 않았을 귀한 동생일세.”

    씩 미소 짓는 좌명의 얼굴에는 누이에 대한 애정이 말 그대로 흘러넘치고 있었다. 그것이 지금은 오히려 내게 부담으로 작용하고 있었지만.

    “어차피 나는 다룰 줄 아는 악기가 없으니 가르칠 일도 없네. 대사간 영감께도 그 일로 선비의 육례를 더 연마하라며 격려를 들은 판일세.”

    “그럼 내 누이에게 배우면 되지 않겠는가. 그 녀석, 소금(小笒) 역시 잘 분다네. 괜찮지 않은가?”

    문득 좌명의 누이가 가녀린 목관 악기를 입에 대고 부드러운 곡조를 플루트를 부는 것처럼 연주하는 모습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녀의 동양적인 미모와 너무나 잘 어울리는 광경이었다. 나도 모르게 얼굴에 열이 확 쏠렸다.

    “자네, 방금 무얼 상상했는가? 하하. 역시 자네에게 하연이를 보여주길 잘했지.”

    “잠깐 숙취가 얼굴에 쏠렸을 뿐이네. 자네 누이 자랑은 그쯤 하게나.”

    “여기서 숙취 탓을 하다니, 변명이 훌륭하구먼. 마지막으로 자랑 한 번 더 하겠네.”

    “무얼 말인가? 또 자랑할 것이 남았다는 말인가?”

    “이름자도 예쁘지 않은가? 여름 하 자에 연꽃 연 자를 써서 하연이라네. 그 아이가 태어난 계절에서 따왔지.”

    이 동생바보 놈. 왜 내 근처에는 이렇게 가족이면 사족을 못 쓰는 바보들이 많은지. 이마에 손이 절로 올라갔다.

    숙취와 생각으로 가뜩이나 복잡한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열을 가라앉히려면 이놈의 누이 운운하는 입부터 틀어막아야겠지 싶었다.

    “누이 이야기는 그쯤이면 됐네. 어제 나눈 이야기에 대해서 생각은 조금 해 보았나, 일정?”

    “마다할 이유가 있겠는가. 어차피 헤쳐 나가야 하는 일이었는데, 자네와 함께라면 더할 나위가 없지.”

    즉석에서 승낙한 충신과 달리 좌명은 조금 생각을 해 보아야겠다며 시간을 달라 요청한 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나를 독대하러 찾아온 것은 결심이 섰기 때문이지 싶었다.

    “고맙네. 이렇게 흔쾌히 함께해 주어서.”

    “어차피 동장의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자네나 나나 마찬가지가 아닌가. 그리고 ‘그 계획’도 꽤나 재미있어 보이니 말일세.”

    ‘그 계획’ 때문에 충신과 여러 번 말싸움을 나눴어야 했는데, 지켜보는 사람 입장에서는 꽤 재미있는 모습으로 비쳤을지도.

    술 마시면서 나온 성균관 뒷담화중에 구미가 당기는 정보가 하나 있었다. 충신의 기루에서 행패를 부리던 동장의 김식의 패거리를 씹다 나온 이야기였다.

    왜 김자점을 비롯한 안동 김씨 집안에서 성균관에 그토록 지원을 아끼지 않는가?

    화제로 오른 의문을 풀고자 이것저것 가설들을 세워보고 있는데 충신이 의미심장한 미소와 함께 뱉은 정보.

    대성전 앞 높은 은행나무에 올라갔다가 목격한 것이라 했는데, 성균관에서 겉도는 충신 정도가 아니면 알 수가 없었을 정보였다. 다만 심증을 확증으로 굳히기에는 조금 부족했다.

    망초 사건에서 미루어보았을 때 내가 잘 써먹을 수 있는 정보니 알려준다고 했다. 그 정보를 토대삼아 즉흥적으로 짜 올린 발상은 지금의 성균관 구도를 흔들어놓을지도 몰랐다.

    “아직 뒷받침할 정보도 부족하고, 생각만큼 재미있는 계획은 아닐지도 모르네. 오히려 적들 사이의 관계를 돈독하게 만들어줄지도 모르지.”

    “하지만 우리같이 잃을 것 없는 세력이 쓰기에 좋지 않은가. 후한서에 그러한 이야기가 실려 있던 것은 기억하고 있으나, 이렇게 써먹을 생각을 할 줄은 몰랐네.”

    “잘만 하면 그 패거리 한가운데에 쐐기를 제대로 박아 넣을 수도 있지 않겠는가.”

    정치 역시 전쟁이었다. 괜히 암투(暗鬪)라는 말에 싸울 투 자가 들어가는 것이 아니었다.

    성 영감에게 병서를 요청한 이유도 그것이었다.

    위무주손자, 손자병법.

    춘추전국시대의 명장과 그것에 주석을 단 삼국시대의 간웅이 내 스승이었다.

    적보다 적은 병력이면 도망쳐야 하고, 소수의 병력으로 무리하게 싸우면 강대한 적의 포로가 될 따름이라 했다. 그런 상황이면 써먹을 수는 하나뿐.

    ‘이이제이(以夷制夷)’

    적은 적으로 제압한다. 가을밤, 어스름한 호롱불 아래에서 내린 결론은 그것이었다. 방법이 그것밖에 없기도 했고.

    물론 병법에 이르기를 계책을 시작함에 있어 피아의 상황을 정확히 탐색해야 한다고 했으니, 정보를 모으는 것은 여기서 그칠 일이 아니었다.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적합한 사람도 있었고.

    “그래도 성근, 그건 좀 심했네. 선진보고 다짜고짜 군자금부터 내놓으라고 하다니.”

    “반쯤은 농이었네, 그 정도 재물은 나도 마련할 수 있고.”

    “어쨌건 허리에 찬 은자를 쓰자고 한 것은 자네 아닌가?”

    충신의 허리에 달렸던 주머니 정도면 군자금으로 충분할 줄 알았지.

    하급관리의 일 년치 녹봉이면 웬만한 일을 꾸미기에는 넉넉할 것 같아 쉽게 뱉은 말이었는데, 충신의 입장에서는 그렇지도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뭘 하려는지는 알겠는데, 재물 관련한 일은 완전 맹탕이구만? 그렇게 손이 작아서 쓰겠냐?’

    ‘제 손이 작다니, 은자 한 주머니로는 성에 안 찰 정도로 통이 크십니까? 그럼 사형의 통 크기를 보여주시지요?’

    술이 오른 상태여서 그랬나, 그런 핀잔을 듣자 괜히 밸이 꼬여서 핏대를 올려 쏘아붙인 것이 잘못일지도 몰랐다.

    충신 역시 그 말을 듣고는 자존심이 상했는지 원하는 대로 해주겠다며 맞불을 놓고는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시작부터 이렇게 되었으니, 거참.

    “일정, 조금 자존심을 굽힐 걸 그랬을까?”

    “어차피 사소한 문제 아닌가. 계획이 틀어질 일은 없을 걸세.”

    하긴 좌명이 심각하게 여기지 않을 정도면 큰 문제는 없을 것이었다. 큰소리를 친 만큼 충신이 어떻게 나올지 궁금하기도 했고.

    ***

    오늘 나눌 이야기는 그 정도면 충분했다.

    이제 익숙해진 건넌방과 묘한 향기를 뒤로 하고 장지문을 나서자 눈부신 태양 빛이 내리쬐었다. 남의 방을 오래 차지하고 앉아 있는 것도 실례일 텐데, 숙취에 꽤 오래 뻗어있었지 싶었다.

    이 집에서 더 뭉그적거렸다가는 좌명이 또 무슨 일을 꾸밀지 몰랐다. 밥이나 한 끼 하고 가라며 종알거리는 녀석을 애써 뿌리치고 성 영감 댁 익숙한 하숙방으로 돌아와 책상 앞에 앉았을 때였다.

    편한 옷으로 갈아입으려 심의와 유건을 벗는데 갑자기 코끝에 피가 쏠리는 것이 느껴졌다. 이제 와서 생각해보니 본인은 농담으로 들으라 했으나 나를 대하는 태도를 보면 좌명의 누이가 직접 옷을 갈아입힌 것이 분명했다.

    ‘왜 이래, 진짜. 그냥 친구 동생일 뿐인데.’

    별일 아닐 것이었다. 그러니 외간 남자 옷을 갈아입히고도 그렇게 당당했겠지.

    그러나 달아오르기 시작한 얼굴은 쉽게 식지 않고 있었다. 그녀의 손길이 스쳐 갔음이 분명한 피부 어딘가에서 소름이 돋는 것이 느껴졌다.

    ‘야, 미쳤냐. 진짜?’

    괜히 원래 몸 주인에게 성을 내 봐도, 양손에 얼굴을 묻어 봐도 소용이 없었다. 간신히 화끈거리는 얼굴을 가라앉힐 수 있었던 것은 한참 후였다.

    벼루에 먹을 갈고 붓을 들었다. 마음을 다스릴 거리가 필요했다.

    이런 난잡한 생각을 가라앉히려면 해야 할 일을 떠올리는 것이 제일이었다.

    유 서리의 협조를 받을 일도 있었으니 서찰도 써야 했고, 중대한 일이 얽혀있으니 임금에게 이번에 세운 계획을 형식적으로나마 보고할 필요도 있었다.

    허나 흰 종이를 펼치자마자 머릿속을 가득 채우는 것은 하연의 단아한 목소리뿐이었다.

    미소를 가득 품은 그녀의 입술에서 나왔던 대화가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고 있었다.

    쾅.

    나무로 된 서안을 이마가 들이받아 낸 소리.

    기껏 먹을 정성껏 갈아놓은 벼루에서 먹물이 튀어 종이 한 구석을 물들였다. 그래도 임금에게 올릴 보고서인데 이런 종이에는 쓸 수 없었다. 유 서리에게 보낼 편지부터 먼저 써야 하나.

    “아…… 진짜!”

    짜증 가득한 목소리가 하숙방을 가득 울렸다. 내 손이 먹물이 망친 종이 위에 논어의 구절을 나도 모르게 적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배우길 바라던 책이었다.

    살아오면서 지금까지 이래본 적이 거의 없었다. 한 번을 제외하면.

    그 사람을 잃고 방황하다가 조선시대에 떨어진 이후로 숨 돌릴 틈도 없어 이런 감정은 다 까먹은 줄 알았는데.

    ‘정신 차리자, 진짜.’

    마음을 다잡기 위해 다시 한번 차갑기 그지없던 능양군 놈의 시선을 떠올렸다.

    하긴, 나는 곧 심양으로 가야하는 처지. 몇 년이 될지 모르는 유배 아닌 유배생활을 기다려달라고 하는 것은 너무 염치없는 일이었다.

    그 생각이 요동치던 마음을 진정하는데 큰 도움이 되고 있었다.

    다시 새하얀 종이를 꺼내들고, 보고서를 쓰기 시작했다. 그러나 금방 끝날 줄 알았던 서계와 서찰 작성은 중천에 떠 있던 해가 뉘엿뉘엿 넘어갈 때쯤에야 마무리되고야 말았다.

    그 이유는…… 원래 쓸 생각이 없었던 편지 한 통을 더 썼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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