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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 어사, 조선을 뒤흔들다!-31화 (31/298)
  • 31화. 꽃과 나비

    그렇게 풍경을 마저 구경하고 돌아오는 길, 아이들의 얼굴에는 단풍잎이 한 장씩 얹혀있었다.

    특히 요안의 투명한 피부에 내려앉은 홍조는 아이의 푸른 눈동자와 더 대비되어 지나치던 기생들의 다홍치마 색을 연상케 했다.

    ‘그렇게 멀리 바깥구경한 것이 즐거웠던 건가. 아니면 단풍이 예뻐서? 어쨌건 앞으로는 자주 데리고 나가야겠네.’

    요운이 물심부름을 하고 돌아올 때까지 내 소매를 꼭 붙들고 있었던 녀석이었다.

    어쩌면 그 모습을 보고 잔뜩 화를 내던 오라비와 싸웠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밖에서만이라도 몸가짐을 조신하게 하라며 혼내는 오라비에게 하나하나 맞서며 대들던 모습은 귀엽기만 했지만.

    ‘아니면 호랑이가 그렇게 무서웠던 건가……. 타이거 마스크 구경이라도 시켜주려고 했는데 트라우마가 자극될 것이 무서우니 다음으로 미뤄야겠네.’

    오라비와의 싸움이 길어져서 지쳤던 것인지, 박연의 집 대문까지 바래다주는 길 내내 요안은 말 한마디가 없었다. 결국 혼내던 요운 역시 제풀에 지쳐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좋은 대처였다.

    ‘요운이 녀석도 적당히 혼냈어야지. 대문이 닫힐 때까지 지 동생이 말이 없는 것을 봤으면 정도를 넘었다고 생각도 할 줄 알아야 할 텐데.’

    이런 잡생각이 드는 이유는 간단했다. 육조거리에서 어느 골목을 지나 몇 번을 꺾으면 도착할 수 있다며 선진이 부른 장소가 정신이 빠질 정도로 터무니없는 곳이었기 때문이었다.

    ‘밤새 술이나 마시자기에 술맛 좋은 주막으로 오라고 할 줄 알았는데.’

    벌써부터 코에 분 냄새가 풀풀 풍기는 듯했다. 화려한 옷들과 교태 실린 웃음소리들이 내 주변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선진이 몇 번 스치듯 언급했던, 한양에서 잘 나간다는 기루(妓樓)였다.

    “이거…… 저희 주머니로는 계산이 부족할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성근도, 저도.”

    익숙하다는 듯이 기루의 빈 손님방으로 우리를 안내한 선진이었다. 그 방에 엉덩이를 붙이자마자 화려하다 못해 상다리가 부러질 것처럼 묵직하게 차려진 술상이 연달아 들어오고 있었다.

    좌명이 말을 더듬을 만했다. 나도 어안이 벙벙했으니.

    조선시대로 떨어지고 나서 이런 상을 받아본 적은 처음이었다. 심지어 방방의가 끝나고 임금이 입격자에게 베풀어준 연회에서 나온 상보다도 더해 보일 지경이었다.

    “걱정 마라. 내가 성균관에서 몸은 제일 가벼울지 몰라도 주머니는 제일 무겁지 않겠냐. 마음껏 먹어라. 기념이다!”

    얼마 만에 보는 기름진 음식인가.

    성 영감 댁 소박한 밥이나 성균관의 단체 급식과 비할 바가 아니었다. 음식에서 풍겨오는 화려한 색과 자극적인 냄새가 침샘을 자극했다.

    매번 급식이나 학식만 먹다가 호텔 뷔페 먹는 기분이 이것과 비슷할 것이었다. 설하멱이라고 했나, 선진이 권해준 고기안주는 기가 막히게 맛있어 현대로 가져와도 잘 팔릴 것 같았다.

    “야, 한수. 걸신들렸냐? 그러다 체한다?”

    “성근이 저럴 정도로 음식이 맛있긴 합니다. 선진님.”

    “그러냐? 돈 쓴 보람이 있구만? 핫핫핫.”

    생긴 대로 기분파인 것을 풀풀 티 내며 박장대소하는 선진이었다. 그가 따라준 술잔에서 목구멍으로 넘어간 술 역시 향기롭기 이를 데 없었다. 담글 때 솔잎이라도 띄운 건가.

    “그런데 좌명이 너, 손톱자국 둘을 각오한다고 하지 않았냐? 왜 보이는 것은 하나냐?”

    “그게…… 솔직히 말씀드려야 할지 조금 죄송스럽습니다만.”

    “말해라, 말해! 재밌어 보이는 냄새가 코에 풀풀 풍긴다!”

    안 그래도 기루 앞에서 합류할 적에 다리도 살짝 저는 것 같았던 좌명이었다. 가까이서 보니 목에 가느다란 손톱자국 하나가 나 있었다.

    “제 누이에게 두 분을 팔았습니다.”

    “뭐?”

    익숙하게 손톱자국을 긁적거리는 좌명의 얼굴은 편안해 보였다.

    그러니까, 빠진 손톱자국 하나는 우리를 팔아서 누이에게 용서받은 결과란 뜻이었다.

    “야, 이 새끼야. 누구 맘대로 나를 팔아?”

    “그게, 비복청에서 약을 탄 이야기를 했더니 궁금하다고 하여… 그 이상은 없을 겁니다. 약속합니다.”

    “좌명이 인마, 내가 한수 저놈을 팔랬지, 나까지 도매금으로 팔라고 했냐? 니가 술상 값 낼래?”

    마음에 드는 사내가 아니면 홀로 늙겠다던 그 누이 이야기이지 싶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선진에게 ‘처리’를 일임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었다. 나도 어차피 요안이에게 기밀을 누설한 것은 사실이었으니까.

    그때, 조용히 입 다물고 술이나 마시며 빠져나가려던 내 귓불을 억센 손아귀가 낚아챘다.

    “아… 아얏!”

    “어딜 조용히 빠져나가려고, 확. 나는 지금 생활 포기할 생각 없다. 한수 놈한테 처리시켜라.”

    “어차피 누이 마음에 들기가 소과 입격보다 어려우니 너무 심려치 마십시오. 선진님.”

    “뭔 정신 나간 소리냐? 여기 소과 입격 못 한 자가 어딨다고? 그 드문 쌍장원 놈까지 있는 마당인데.”

    좌명이 저놈, 얼버무리다가 딱 걸렸다.

    변명하지 못하고 우물쭈물하던 놈에게 물그릇이 하나 건네졌다. 방금 비워진 물그릇 안에는 사 분의 일쯤 술이 가득 채워져 있었다.

    “이 새끼, 마음 같아서는 꽉 채워주고 싶지만 술이 약한 것 같으니 이정도로 봐준다. 마셔!”

    “소생의 죄를 인정하고 마시겠습니다…….”

    냉면사발보다 훨씬 작은 사이즈였으니 큰 부담은 없었을 것이다. 그리 적은 양은 아니었으나 훌쩍 원샷해낸 좌명의 얼굴에도 취한 기운은 없었다.

    “넌 어딜 빠져? 너도 가만히 넘어가려 한 죄다. 마셔라!”

    얼핏 봐도 좌명의 배는 될 것 같은 술이 콸콸콸 내 사발에 부어졌다. 이 양반, 술값 비쌀 텐데 아깝지도 않나.

    그 생각에 답하듯이 팔을 올려 술을 붓느라 드러난 선진의 허리춤에 달린 묵직한 주머니가 눈에 들어왔다. 무언가의 형태가 주머니 표면에 울룩불룩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었다. 내용물이 터질 듯 채워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설마 저게 다 은자(銀子)라고?’

    너무나 큰 금액이 다가오자 머리가 굳었다. 저 정도의 은자라면 이 기루 전체에 골든벨을 울리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박연의 일 년 연봉 정도는 가볍게 댈 수 있을지도 몰랐다.

    다행히 선진은 술을 따르는데 골몰했는지 내 시선을 눈치채지 못했다. 그랬다가는 한 사발의 벌주가 두 사발로 변했을 것이었다. 다행이었다.

    “한수 네놈도 마셔라! 그날 신방례 자리에는 내가 없었으니 간소하게나마 신방례를 치러야 하지 않겠냐! 핫핫핫.”

    그날의 신방례는 기분이 더럽게 나빴으나 오늘은 그렇지 않았다. 사발에 채워진 술의 양에도 미묘하게 배려가 담겨있었기 때문일지도. 즐거이 목구멍을 넘어가는 술은 기분 좋은 취기를 남기고 있었다.

    “아, 그래서 성명은 언제 알려주시는 것입니까.”

    “내 이름자는 비싸다고 했을 텐데?”

    “오늘 술잔을 나누면서 알려주겠다는 말을 하신 건 선진님이 아닙니까?”

    내게 술을 따라주고는 본인도 그만큼의 양을 들이부은 선진이었다. 가볍게 트림을 하고는 안주를 손가락으로 집어 우적우적 씹는 모습이 꽤나 익숙해 보였다.

    “어차피 오늘 밤은 길 텐데, 왜 이렇게 안달이 나 있냐? 인내심이 짧으면 밤일도 짧다더라.”

    “그게 무슨 상관입니까. 실은 알려주실 생각이 없으셨던 건 아닙니까?”

    “그럴 리가 있겠냐. 발끈하는 거 보니 켕기는 거라도 있냐?”

    이 양반이…….

    사실 고작 이름 몇 자 알자고 나온 술자리도 아니었다. 시간이 없어서 길거리에서 중국어 만주어 회화를 외우고 다니는 마당에 술 마실 시간이 어디 있겠는가.

    하지만 선진은 앞으로 내게 도움이 될 사람임이 분명했다.

    구닥다리 양반답지 않은 시선부터 시작해서 뛰어난 운동능력에 재력까지.

    투전판이나 기방까지 빠삭한 것을 보면 행동반경도 넓지 싶었다.

    “참, 혹시 성균관에 우리가 한 짓 때문에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다면 털어버려라. 우리가 밥에 탄 망초의 출처는 오늘 찾아온 내의원 의관 놈이니까.”

    “그 무슨……. 아, 설마 의관이 환자를 몇 명 살펴보기도 전에 전염병이라 단언한 것도 미리 입단속을 한 결과입니까?”

    “역시 한수 네놈은 그쪽으로 눈치가 빠르구만? 양시 값을 하는 거냐?”

    일 처리도 뒤끝이 없이 깔끔했다. 보통은 신경 쓰지 않을 부분까지 살피는 모습은 그의 거친 말투와는 정반대인 섬세한 성격을 드러내고 있었다.

    물론, 가장 중요한 것은 계산적으로 재보기 이전부터 이 사람이 묘하게 마음에 들었다는 사실이었지만.

    다만 마음에 걸리는 것이 하나 있었다. 이런 사람이 성균관에서 홀로 살아가야 했을 이유였다. 고작 반골 기질과 개방적인 성격이 벗을 사귀는 데 걸림돌이 되진 않을 것이었다.

    딱.

    갑자기 난 손가락 튕기는 소리가 나를 생각에서 빠져나오게 만들었다. 선진의 말에 켕기는 것은 전혀 없었지만 잠시 생각에 깊이 빠져있던 모양이었다.

    소리가 난 방향을 바라보니 선진이 입가에 묘한 웃음을 띠고 있었다. 무슨 일인지 물어보려는데, 곧이어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벌어진 사건은 그럴 필요도 없게 만들고 있었다.

    “유생님들~ 오래 기다리셨사와요.”

    그 순간, 닫혀있던 장지문 사이로 스며들어온 것은 꽃향기들이었다. 지금까지 정신없이 먹느라 잊고 있었는데, 이 장소는 기방(妓房)이었다. 술기운이 얼굴로 확 몰려들었다.

    기생들을 불러들인 기억은 없었다. 어리둥절해 주위를 둘러보는데 좌명의 얼굴 역시 당혹감이 스며들어있는 것이 보았다.

    “강 유생님, 요새 오래 안 보이시더니 무슨 일이 있으셨나요?”

    “핫핫. 너희의 매력이 모자라 잠깐 사내놈들에게 빠졌었다. 장안 제일의 기생들로도 모자라는 것이 있더구나.”

    읍읍… 당신 누구야?

    분 바른 기생들이 방으로 몰려들자마자 유생다운 말투로 싹 바뀌는 선진을 보고 소름이 돋았다. 눈이 마주친 좌명도 같은 생각인 듯했다. 당황이 눈동자에 스쳐 갔다.

    “농담도 참~ 발길을 며칠이나 끊으셨다고 저희가 유생님의 다부진 몸을 어찌 잊겠어요. 호호호.”

    “우리 유생님, 정말이지 이 적당히 그을린 피부만 보면…….”

    선진의 몸을 요사스럽게 훑는 두 기생의 입가엔 미소가 피어나 있었다. 기방을 한두 번 들락거린 것이 아닌 듯했다.

    “어머, 이 유생님은 아녀자처럼 곱게도 생기셨지. 목에 난 자국을 보아하니 이미 성혼하신 모양이신데, 오늘 무서운 마님 대신 소녀의 수청을 받으시오리까?”

    “어험… 어험! 그럴 생각 없다!”

    “귀여우셔라. 기분도 싱숭생숭하실 것 같으신데, 거절하지 마시어요. 제가 천국을 보여드리겠어요.”

    좌명이놈, 나보고 기방을 먼저 권하더니 면역이 없는 것은 마찬가지였나? 그 모습에 속에서 웃음보가 슬며시 터지려는데 내 뺨에도 무언가가 슬며시 와 닿았다.

    서늘한 손가락이었다.

    “우리 유생님은 존함이 어떻게 되시려나?”

    화장을 짙게 한 미모의 기생이 내 턱을 강제로 제 쪽으로 돌려놓는 중이었다. 그 손목에서 짙은 향이 뿜어져 나와 나를 잡아먹을 듯했다. 헉.

    “몸도 크시고 사내답게 강직하게 생기신 것이 딱 제 취향이신데. 소녀의 순정, 받아주시겠어요?”

    “강… 강직이라니…? 그 무슨…!”

    “쉿. 사실인걸요. 유생님. 저 같은 여자들은 곱게 얼굴이 피어난 사내보단 위험할 때 제 앞을 지켜줄 것 같은 믿음직한 사내를 원한답니다?”

    그녀는 야릇한 눈길을 보내며 숫제 내 입술에 검지를 올려놓고 있었다.

    으… 으악! 덫에 걸려든 것은 좌명뿐이 아닌 것이 분명했다. 등 뒤로 식은땀이 주르르 흘러내리는 것이 느껴졌다.

    양팔에 기생 하나씩을 능숙하게 낀 선진은 느물느물한 시선을 이쪽에 던지는 중이었다. 어느새 풀어헤쳐진 옷깃 사이, 그의 단단해 보이는 가슴근육 위로 기생들의 손길이 오가고 있었다.

    얼굴이 술기운 아닌 것으로 시뻘게져서 올라오고 있었다. 당했다.

    “유생님, 이쪽도 봐주시어요. 소녀, 섭섭해지려 하옵니다.”

    어느새 내 옆에는 초승달처럼 휜 눈꼬리를 한 기생 한 명이 더 앉아있었다.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이미 세 명이 마음대로 달라붙어 얼굴을 쓰다듬어대는 탓에 좌명 역시 정신이 나간 듯했다.

    이미 방 안은 교태를 부리는 기생들의 콧소리와 선진의 호탕한 웃음소리로 가득 차 있었다. 이 일을 어찌해야 하나.

    ‘야, 인마! 그렇게 허세부릴 땐 언제고? 좌명, 너마저!’

    기다려, 당황하지 마라. 이건 선진의 함정이다.

    머릿속에서는 겨우 정신을 차린 이성이 계속해서 부르짖고 있었으나 그 대답은 공허했다.

    ※ 작가의 말

    이 시기보다 약간 뒤, 은자 한 냥의 공식 환율은 동전 400문(文)이며 쌀 10두(斗)였습니다.

    사행을 가는 사신들에게 주어진 인삼의 단위인 팔포를 기준으로 계산한 것인데, 공식 환율이었으니 시장바닥 환율은 달랐겠죠.

    아무튼 주머니 가득한 은자면 적어도 쌀 몇 섬어치를 허리춤에 매달고 다녔다고 생각하면 편할 것입니다.

    여기가 조선이었기 망정이지 고려천자 만력제가 군림하던 시절의 명나라였으면 은자 한 냥에 쌀 2석, 즉 188.8킬로를 살 수 있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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