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김좌명(金佐明)
“성근! 같이 가세!”
“아, 그렇게 부르지 말라 하지 않았는가!”
“부끄러운 것인가? 자네도 나를 일정이라 부르면 되지 않겠는가. 금방 익숙해질 것일세.”
밥 먹고 오후 수업을 듣는 사이 서로 존대를 내릴 정도로 김좌명과 빠르게 친해졌으나 저놈의 별호는 절대 익숙해질 일이 없을 것이었다.
왜 하필 그 양반 존함을? 앞뒤를 바꿔놓는다는 저렴한 발상을 한 김좌명이 원망스러웠으나 이놈도 선비답게 똥고집이어서 뜻을 꺾을 수 없었다.
“그나저나 나보다 네 살 연상인데, 정말로 이렇게 말을 놓아도 되는가?”
“무슨 소리인가, 자네? 오성 부원군 대감과 한음 선생도 나이 차이로 치면 우리보다 더하지 않았는가? 선비들 사이에서 여덟 살 차이는 일도 아니라네.”
마음이 통하는 자를 찾아서 퍽 즐거운 모양이었다. 수업을 마치고 신삼문을 향해 나가는 동안 김좌명의 발걸음은 가벼워 보였다.
“수업도 끝났으니 오늘의 만남을 기념하고 친교를 다지러 한잔하지 않겠는가?”
“그날 소주를 그렇게 들이붓고도 또 마시고 싶은가? 난 아직도 그 사발만 생각하면 고개가 절레절레 흔들리는데.”
“술고래처럼 사발을 비운 자의 말 치고는 너무 약하지 않은가. 그 날은 그 날이고, 자 가세. 자네와 술 한 잔 하면서 묻고 싶은 이야기가 많네.”
수업 시간에 바로 옆에 앉아 교관의 강의를 들었으나 주위에는 눈도 돌리지 않고 강의에만 집중하던 좌명이었다. 긴 잡담은커녕 점심 이후로 짧은 대화도 나누지 못해 몸이 달아오른 듯했다.
“그렇게 술고래처럼 사발을 비워야 했던 이유가 누구 때문이었는지는 아는가? 염치가 있어야지.”
“자네가 내 벌주를 대신 마셨다는 이야기는 들었네. 그런데, 저번에 보아하니 그 패거리에게 봉변이라도 당한 것 같은데, 혹시 그것 탓인가?”
권신(權臣)의 자제들에게 둘러싸여서 정강이를 얻어맞은 그 일을 가리키는 것 같았다. 좌명도 꽤 오랫동안 멀리서 나를 지켜보고 있던 듯했다.
“그 탓은 아니라…… 주상 전하께 개인적으로 고했던 일이 있었는데, 그것에 말려 들어 간 자의 친인척들이 패악질을 부렸다네.”
“생진사시에 부정으로 통과했던 자들이 철퇴를 맞았다던 그 이야기 말인가? 청금록(靑衿錄, 선비의 명부)에서 마땅히 영삭(永削)당해야 하는 자들이 아닌가? 허허.”
그래, 계정 대리 했으면 영구 밴 맞는 게 세상의 도리일 텐데. 지금 조선 땅은 그 기본적인 상식도 돌아가지 않으니 문제지. 한숨이 푹 새어 나왔다.
“괜히 자네가 봉변을 당했구만. 그런 까마귀들은 잊어버리세. 그래서 요새 그렇게 표정이 안 좋았구만.”
“지켜보고 있었던 것인가? 부끄럽네.”
“내 별로 끌리진 않으나 자네가 괜찮다면 기방(妓房)정도는 소개시켜 줄 수는 있다네. 성균관 유생이라면 기생들이 껌뻑 죽는다던데. 가서 기분을 풀어도 좋지 않겠는가.”
“나 역시 기방은 됐네. 여색을 그리 즐기는 편도 아니고…….”
나나 이 몸이나 정인을 잃어버린 지 얼마 되지 않았던 터라 그런 자리에는 가고 싶은 생각은 별로 들지 않았다. 과외 하는 애들 교육에도 좋지 않았고. 그래도 염려해주는 마음만은 고마웠다.
“에이, 누가 들으면 내가 여색을 즐기는 쪽인 줄 알겠네. 표정이 하도 안 좋아 보여서 그런 것이니 오해하지 말게나.”
“자네의 성품은 대략 짐작하고 있네. 이렇게 조금씩 알아가면 되는 것이지.”
“그럼 여색을 즐기지 않는다 하였으니 자네는 남색을 즐기는 파인가? 어쩐지 아직 미취하였다 하더니.”
이 뭔 개소리야?
“어허! 혼인 못 한 것과는 무슨 상관인가?”
“허허. 강직한 줄만 알았는데 발끈할 줄도 아는구만. 내 따로 기억해두겠네.”
“농담이 지나치지 않은가?”
“도를 넘었다면 미안하네. 그렇지만 발끈하기 싫으면 자네도 나처럼 처자식을 거느리면 될 것 아닌가? 내 꼭 자네도 혼인을 해 그 참된 의미를 알았으면 해서 하는 말은 결코 아니네.”
“자네 안사람 때문에 여색을 즐기지 못해 아쉽다는 뜻으로 알아듣겠네.”
한 방 역으로 쏘아붙였으나 좌명의 얼굴에는 여전히 웃음이 가득해 있었다. 찝찝함이 가득하던 기분을 풀어주려 던진 농담 같았다. 그냥 늘 진지하기만 한 선비는 아닌가.
“허나 이상하긴 하구만. 소과 쌍장원까지 한 인재가 나이가 꽉 찼는데 혼담 하나 오가지 않는다는 것은 정말로 이상하지 않은가. 아, 혹시 그 일 때문에 다른 양반들에게 찍히기라도 한 것인가?”
김 갑사가 복시 시험날 길거리에서 한 말과 반대로 혼담은 들어오지 않았다. 아니 들어는 왔으나 만족스럽지 않은 혼처뿐이라 성이성 영감 측에서 애써 거절할 뿐이었다.
한양에서 거의 내 대부 역할을 해주는 대사간이 내린 추측도 좌명의 추측과 같았다. 독수공방하는 것은 하나도 억울하지 않았으나 이런 식으로 하는 것은 원하는 바가 아니었다. 푹 숙여진 고개가 땅을 향해 아래로 내려갔다.
“말이 없는 것을 보니 내 추측이 맞구만. 에잉…… 그 까마귀 놈들. 그놈들이 조선을 좀먹고 있는 것일세.”
“좀먹는다라…… 그 말 다시 한번 해 봐라!”
뜻밖의 목소리에 땅에 박혀있던 시선이 앞을 향했다. 마지막 기억에는 토사물에 얼굴이 노랗게 물들어있던 동장의와 그 무리들이 앞길을 막고 서 있었다.
***
“아아…… 동장의 선진님 아니십니까? 그날은 신세를 빌어먹게 많이 졌지요.”
뭐라 입을 열려고 시동을 걸고 있는데 나보다 먼저 발걸음을 하나 앞으로 한 것은 옆에 서 있던 좌명이었다.
동장의를 향하고 있던 눈이 옆에 선 좌명에게 돌아갔다. 그날, 참고 있었던 것은 나뿐만이 아닌 모양이었다. 하긴, 나랑 비슷한 놈이니 나한테 끌렸겠지.
“빌어먹어? 신진 놈들이 아직 덜 혼나서 오만방자하구나!”
“소생, 신진이지만 성현들께서 선후진 간의 예의보다 사람의 도리가 더 중요하다 하셨음은 잘 알고 있습니다. 그것이 무슨 문제라도 되는지요?”
좌명 역시 쌓인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닌 모양이었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대신해주는 그의 입이 참으로 시원하고 믿음직했다.
“네놈 부친이 대동미 업자에게 뇌물을 받아먹었다더니 네놈 입에서도 구린내가 나는 모양이로구나?”
“소생도 소생의 부친을 딱히 마음에 들어 하지는 않습니다. 아무 힘도 써 주지 않으신 덕분에 성균관도 사마시 통과 후 육 년이 흐르고 나서야 들어올 수 있었지요.”
“그것이 자랑이더냐? 핫. 어디 충청 관찰사 나부랭이가 뒤로 힘을 쓰겠다고.”
동장의가 코웃음을 치자 그 비웃음은 패거리 전체로 퍼져나갔다. 저 쌍놈보다 못한 새끼들, 패드립이 아주 일상이었다.
“허나 소생의 부친이 마음에 안 드는 점은 그저 아비 자식 사이에서의 사소한 관계일 뿐. 백성들을 편안하게 하고 상감마마의 짐을 덜어드리기 위해 외관직도 마다하지 않는 충신으로의 부친이라면 충분히 존경하고 있습니다. 제 앞에 선 누구의 부친과는 다르게 말이지요.”
좌명의 눈이 매섭게 빛났다. 이 사람, 신방례 때는 정말로 이빨을 숨기고 있었다.
“대동미 업자에게 뇌물을 받았다고요? 조정에서도 그런 헛소문이 떠도는 모양이던데 그 썩은 물이 학문을 닦는 데 열중해도 모자란 이 반궁에까지 물들다니 참으로 개탄스러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뭐…… 뭣이? 그리고 네놈, 내 부친을 모욕한 것이냐?”
“설마요. 선진의 부친께서 적어도 호란 때 다른 마음이라도 품었는지 근왕군을 이끄는 도원수의 중책을 지고도 남하하지 않아 성상을 그 치욕에 빠뜨린 자는 아닐 것 아니겠습니까?”
의문의 형식을 취하고 있었으나 다 알고 말하는 것이 분명했다. 앞에 선 동장의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소생의 부친은 그래도 나라의 녹을 먹고 나랏일에 힘쓰는 자입니다. 적어도 문외출송(門外出送) 중인 자가 공신들과의 인맥을 이용해 권세를 부리는 것보단 낫지요.”
“네놈! 말 다했느냐!”
이제야 알았다. 역사책에서 쉽게 접할 수 없는 낯선 이름들이라 이들이 누구인지 모르고 있었으나. 방금의 대화에서 이들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동장의 놈의 첫인상부터 마음에 들지 않는다 싶더니, 이유가 있었다. 정치질 잘하는 것도 아비를 쏙 빼닮았구만.
그래, 그 김자점의 아들 정도면 저럴 만도 했다.
“감히 이 김식(金鉽)을 모욕해? 그러고도 무사하길 바라느냐?”
“일정의 부친을 먼저 모욕한 것은 선진님이 아니십니까. 성균관 입관 첫날부터 제게도 그러셨던 것 같습니다만.”
동장의의 정체도 알아냈으니 이젠 가만히 있을 필요가 없었다. 옆에 선 자에게서 콧김을 내뿜는 소리가 살짝 들려오는 것으로 보아 좌명 역시 비슷한 말을 하려고 했던 것이 분명했다.
“지금 동장의님은 좋은 벗을 만난 소생의 즐거움을 방해하시고 계십니다. 그쯤은 감수하셔야 하는 것 아닌지요.”
“선진인 나와 후진인 네놈이 같다고 생각하느냐? 어디 건방지게…….”
말투만 들으면 심드렁한 표정으로 귀지라도 파내며 말하는 것 같은 좌명이었다. 그 말을 하는 사람의 얼굴은 정갈하기 이를 데 없었지만.
배우고 싶을 정도로 대단한 스킬이었다.
그 말을 듣고 부들거리는 동장의의 얼굴은 내가 얼굴에 분수를 쐈던 날을 보는 듯했다. 인신공격 외에는 레파토리가 떨어진 모양이었다.
“이상하군요. 부위자강, 군위신강, 부위부강. 유학의 근본인 삼강 역시도 윗사람이 아랫사람의 본보기가 되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선진께서 흐린 물을 내려보내시는데 신진인 저희가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이 건방진 시골 촌놈을 보게? 어디 촌구석에서 태어난 놈이 감히……!”
“성근이 태어난 곳이 한양이면 어떠하고 시골이면 어떻습니까. 태어난 장소가 사람의 본질을 결정한다면 한양에서 태어난 거지가 시골에서 태어난 선비보다 더 고귀하다는 말씀이십니까?”
죽이 척척 맞았다. 이 사람이 정말로 오늘 처음으로 말을 튼 사람이 맞지 싶었다. 마치 전장에서 그와 등을 맞대고 싸우는 기분이었으니.
동장의의 구겨진 얼굴을 보는 맛에 좌명이 또다시 망할 별호로 나를 부르고 있다는 사실조차 잊을 지경이었다. 나이스 어시스트였다.
“일정의 말이 맞습니다. 하물며 우리 조선의 태조대왕께서도 함경도에서 태어나셨는데, 선진께선 이 나라 종묘사직에 먹칠이라도 하시겠다는 말씀이십니까?”
불리하면 임금과 종묘사직을 팔라고 했던 어사특강은 아직도 유효했다. 아무리 지금 임금의 힘이 약하다지만, 잘못해서 동장의가 사직을 모욕했다는 꼬투리라도 잡혔다간 나중에 큰일이 날 수도 있을 것이었다.
동장의 뒤에 몰려선 똘마니들이 웅성거리는 것이 들렸다. 효과가 있었을까.
“아…… 이 새끼들이 진심으로 나오게 하네.”
동장의의 얼굴이 급변했다. 지금까지는 호구 그 자체로 보였으나 지금 흘러나오는 말투부터는 마치 다른 사람을 보는 것 같았다.
똘마니들이 웅성거린 것은 내가 임금의 권위를 빌려와서가 아니었다.
당황스러움에 고개를 돌리자 좌명과 눈이 마주쳤다.
“종묘사직? 종묘사직을 네놈들이 운운할 수준이라 생각하느냐? 가져다 붙이는 솜씨는 용하구나.”
유건 사이로 식은땀이 흘렀다.
“안한수, 또 주상전하께 쪼르르 달려가 고하기라도 할 테냐? 네놈에게만 연줄이 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마치 칼로 찌르는 것 같은 말투가 가슴을 후비고 들어왔다. 놈의 간사한 눈초리는 어느새 양옆으로 쭉 찢어져 있었다.
“신방례 때 가락이나 맞춰주며 놀고 있었더니. 하…… 나. 신진 새끼들이 선진 무서운 줄을 모르고. 새끼들아, 네 놈들 동재나 서재에서 기숙했으면 내일 아침 해, 못 봤을 것이다! 알고 있느냐?”
과거공부로 인한 과로로 시체가 되어 성균관을 나간 유생이 몇 있다는 말은 들은 기억이 있었다. 실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안한수 네 놈, 대사간 영감 똘마니인 것 같던데 그 영감이 조정에서 처한 상황이나 알고 덤비는 것이냐? 소과 쌍장원이라고 정말로 교만이 하늘로 뻗쳤구나.”
생각해보면 저자들도 전부 소과 정도는 통과했을 사람들이니 이 자리에 있을 것이었다. 신방례 자리에서도 온갖 궤변을 늘어놓는 것을 보니 머리 회전도 빠를 것이겠지.
그런 놈들이 고작 신입생 몇 명의 혀에 놀아날 리가 없었다. 뒤에 온갖 대신들이 즐비한 놈들이었다. 누구나 누울 자리를 보고 다리를 뻗는 법이었다.
“지금이라도 사죄하고 무릎이라도 꿇으면 성균관에 다닐 수는 있게는 해 주마. 신방례 이후로 조용히 다녔으면 강가(家) 놈처럼 구경거리로 삼아는 주려고 했는데, 너희는 선을 넘어 버렸다. 아무리 신진이라지만 그러면 쓰나.”
놈의 목소리는 차갑게 식어 있었다.
멍청한 남원 부사를 조질 때와는 차원이 달랐다. 온몸에 힘이 쭉 빠지려고 했다.
“김좌명, 자네 애비도 어떤 작자인지 잘 알고 있지. 지금 조정에서 쏟아지는 공격에 고생이 말이 아닐 텐데? 네놈이 하는 행동이 네 애비의 발목을 잡을 수도 있음이야.”
“지금 저로도 모자라 일정을 협박하시는 겁니까, 선비 된 자가?”
“선비? 그것이 밥 먹여주나? 그것이 권력을 가져다주나? 너희같이 책만 읽어본 젖비린내 나는 백면서생들이 입에 발린 소리를 하는 게 얼마나 역겨운 줄 아느냐? 마지막 경고다.”
백면서생인 건 본인도 마찬가지 아닌가?
마치 목에 칼을 겨누기라도 하는 것 같은 말투의 김식이었으나 몸의 어느 한 구석에서 용기가 샘솟고 있었다.
놈의 아비가 역사에서 한 짓거리가 생각나서일지도 몰랐다.
어쩌면 금수저에 대한 뼛속 깊은 반감 때문일지도 몰랐다.
“하하. 구상유취라, 차라리 도리에 맞는 소리를 하는 백면서생의 젖비린내가 권력을 탐하는 간신의 입에서 나는 악취보단 향기롭지 않겠습니까.”
“이 허우대만 큰 놈이…… 네 놈이 드디어 미쳤구나?”
“성근의 말이 옳습니다. 동장의님.”
왕의 시험 과제는 이것이었구나.
아직은 추측에 불과했으나 조각이 머릿속에서 맞춰지고 있었다. 옆에서 힘을 보태오는 좌명 덕에 조금 떨리던 다리의 부들거림도 어느새 멎은 상태였다.
“아무리 아비의 권세를 빌린다 해도 자식은 자식에 불과합니다. 저도 그렇고, 동장의님도 마찬가지지요. 그저 건방진 신진의 태도를 가르치시려는 목적이었다고 생각하겠습니다.”
“뭣이?”
“소생이 홧김에 무례한 말을 한 것은 인정하고 사과를 드리오나, 이러한 겁박을 당할 이유는 없을 것입니다. 사과면 충분하지, 사죄를 할 필요도 무릎을 꿇을 필요도 없을 것이고요.”
“그렇게 나오겠다 이 말이지…….”
동장의가 휙 돌아섰다. 그늘진 날카로운 눈초리가 보이지 않게 된 것만으로도 숨통이 트여왔다. 그제서야 손바닥이 땀으로 척척한 것이 느껴졌다.
“후회할 것이다. 오늘 일을 두고두고 후회하게 만들어 주겠다. 안한수, 김좌명, 네놈 둘은 꼭 기억하겠다.”
“후회할 일이 무어 있겠습니까. 같은 성균관 유생 아닙니까? 살펴 가십시오. 동장의님.”
좌명이 과장되게 허리를 숙여 멀어져가는 동장의에게 인사를 건넸다. 패거리들은 그를 따라 우르르 사라졌고 그제서야 긴 한숨을 몰아쉴 수 있었다.
“동장의의 애비가 조정의 배후 실세라더니 사실인 모양이었구만.”
“고맙네, 일정. 헌데 자네까지 저 자들에게 찍힐 필요가 있었는가?”
“어차피 아버님을 입에 담는 태도를 보면 좋게 보일 수가 없었을 것이야. 그리고 마음에 안 드는 아버님께서 항상 강조하셨던 것이 간신들에겐 고개를 숙이지 말라는 것이었지. 배운 대로 했을 뿐일세.”
감사를 표하는 내 말에 좌명은 그저 씩 웃으며 내 마음을 가볍게 해 줄 뿐이었다. 술은 여전히 한 잔도 땡기지 않았으나, 이 형과 함께라면 지금 당장 술집에 가도 좋을 심정이었다.
내가 생각하던 멋진 선비란 이런 사람이었다.
“귀형(貴兄)의 아버님 이야기가 나와서 그러는데, 혹시 현 충청도 관찰사 나리시라면…….”
“그래. 외자로 육 자를 함자로 쓰시는 어르신이 내 부친일세.”
“아아…….”
“아버님도 성균관을 중간에 때려치우고 낙향해 농사까지 지으셨던 양반이라 이번 일로 성균관을 나와도 내게 뭐라고 하지는 못할 걸세. 하하.”
이 시대를 공부하면서 제일 마음에 들었던 대신의 아들이 내 눈앞에 있었다.
나라는 돌멩이 하나가 조선이라는 호수에 던져졌을 때, 그 파문은 크지 않을 줄 알았다. 그러나 지금 이 자리에서, 내 영향으로 역사가 조금씩 움직이고 있다는 걸 본능적으로 느꼈다.
그리고 무엇보다, 새로 만난 친우를 놓치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우정을 걸어볼 만한 사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