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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 어사, 조선을 뒤흔들다!-19화 (19/298)
  • 19화. 일등제일인입격자(一等第一人入格者)

    앵삼자락에 스치는 가을바람이 제법 서늘했다. 얼마 전의 땡볕이 마치 거짓말 같았다. 하지만 성균관 자수원 마당에서 진사시를 치르던 그 날보다 내 등짝은 더 축축이 젖어있었다.

    ‘아니, 왜 맨 앞인 건데? 혹시 키순으로 세우는 건가?’

    아마 내 뒤에 서 있는 입격자는 나 덕분에 쾌재를 부르고 있을지도 몰랐다. 내 큰 몸뚱이 덕에 앞에 앉아계신 지엄한 분의 시선에서 피할 수 있음이 분명했다.

    “안한수, 앞으로 나와 내 앞에 서시오.”

    승지(承旨)에게서 입격자 명단을 전달받은 방방관(放榜官)이 처음으로 호명한 이름은 내 이름이었다. 생각도 못 한 지목에 얼이 빠져 있는데, 다시 한번 호통이 따라왔다.

    “안한수! 자리에 없소? 썩 나오시오!”

    그제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 맞다. 나였지. 재빨리 꽁지가 빠지게 방방관 앞으로 가 섰다. 평소였으면 주위에서 웃음이 새어 나올 순간이었으나 자리가 자리인지라 다들 긴장으로 얼어있는 것이 다행이었다.

    창덕궁 인정전, 몇 번을 와 본 자리였으나 이번엔 적응이 안 됐다. 마지막 방문으로부터 수백 년을 거슬러오른 방문이었다. 그것도 나라의 지존을 앞에 둔 자리였다. 긴장이 안 되면 사람이 아니었다.

    어느새 각각 백 명 가까이 되는 사람들이 줄 두 개로 나뉘어 인정전 전정(殿庭)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그들의 맨 앞에서 시신, 관원, 그리고 왕의 시선을 몰아받는 동안 살아있는 것 같지 않는 기분이었다.

    “국궁(鞠躬)!”

    무릎을 꿇으라는 지시가 방방관의 입에서 떨어졌다. 얼어있는 것은 입격자 뿐만이 아니었다. 왕에게 입격자가 무릎을 꿇으라는 말이었으나 지켜보던 입격자의 가족친지 몇몇도 함께 무릎을 꿇고 있었다.

    “사배(四拜)!”

    이마를 깊숙이 돌바닥에 대기를 네 번을 거듭했다. 얼굴을 가릴 수 있어 다행이라 생각했으나 뒤통수로 시선이 꽂히는 것이 여전히 따가웠다.

    “흥(興)!”

    방방관의 우렁찬 외침에 입격자들이 떼를 지어 일어났다. 몇몇이 비틀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다리라도 풀린 모양인가.

    “평신(平身)!”

    굳어있던 몸을 기지개를 펴듯 죽 폈다. 참고 있었던 숨을 들이켜려는데, 앞에 앉아 있는 자와 눈이 마주쳐 사레가 들리고 말았다. 붉은 비단옷 가운데 금실로 수놓은 용이 그의 가슴에서 헤엄치고 있었다.

    ‘죽겠다…… 왜 나만 보고 있는 건데? 사배를 올릴 때 뭔가 실수라도 했나?’

    연두색 유건(儒巾)이 올라앉은 상투 안은 잔뜩 흐른 식은땀으로 근질근질하다 못해 터질 것 같았다. 푸른 관복을 입은 관리가 동쪽 계단으로 올라가 자리를 찾아 섰다. 예조 정랑이었다.

    왕 옆을 바싹 호종하고 있던 승지와 붉은 철릭을 입은 무사 한 명이 왕이 올라앉은 자리에서 정갈한 함 하나를 들고 내려와 예조 정랑에게 그것을 건네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그 함은 곧바로 나를 향해 다가오고 있는 중이었고.

    “입격자는 전하께서 내리시는 백패를 받들라.”

    나도 모르게 내밀어진 종이들을 양손으로 부여잡고 허리를 꾸벅 숙였다.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이미 예조 정랑은 내 앞을 지나쳐 남은 수많은 입격자들에게 백패를 한 장 한 장 전하고 있었다.

    “어?”

    잘못 건네받은 것일까. 내 손에 들려있는 합격증은 두 장이었다.

    ‘저 아저씨, 손에 땀이라도 묻었나. 이런 자리에서 실수하면 갈굼으로 안 끝날 텐데.’

    학교에서 나눠주는 프린트물을 두 장 뿌린 것과는 전혀 다른 결과를 가져올 것이었다.

    하지만 예조 정랑이 급하게 나를 향해 달려오는 발걸음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혹시 누구의 합격증이 잘못 전해졌나 싶어 백패에 쓰여진 글자를 천천히 눈으로 훑었다.

    「교지 유학안한수생원일등제일인입격자 숭정십이년팔월이십이일」

    「교지 유학안한수진사일등제일인입격자 숭정십이년팔월이십이일」

    선명히 붉은 색으로 박혀있는 어보(御寶)는 그 문서들이 잘못되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대략 정신이 멍해졌다.

    ***

    “안 양시(兩試)는 고개를 들라!”

    그제서야 내게 시선이 계속 꽂히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아니, 다른 선비 놈들은 뭘 했길래 날 이렇게 눈에 띄게 만든 건가.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숨고 싶었으나 넓디넓은 창덕궁 앞마당에는 그늘 하나 없었다.

    “어허! 여기가 어느 안전(案前)이라고 자꾸 고개를 내리는가? 어서 그 낯을 상감마마께 보이지 못할까!”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대과도 아니고 소과 입격자를 왕이 앞으로 따로 불러?

    성 어사 그 양반도 주상 전하를 뵙게 될 것이라 했지 이 정도로 가까이서 이야기를 하게 될 것이라는 말은 하지 않았었다.

    아, 이제 성 대사간이라 불러야 하나? 그 양반, 암행 나갔다 온 공을 높이 사 복귀하고는 한 단계 높은 정3품의 관직에 봉해졌다. 사간원의 수장이 된 것이다.

    관직을 인수인계 받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서 북촌 집에도 들어오지 못 한 것이 벌써 며칠 째였다.

    지옥 같은 벌서를 시키던 양반이 고생하는 것은 꿀맛 그 자체였으나 덕분에 오늘까지 아무 정보도 얻지 못했다. 역시 마음은 곱게 쓰고 볼 일이었다.

    “입격자는 떨지 말고 고개를 들라. 어명이다.”

    마흔이 좀 넘었을까. 중후한 목소리가 내 귀에 꽂혔다. 무언지 모를 강제력이 허리를 펴게 만들었다. 이게 왕의 위엄이란 건가, 중년의 남성이 몸을 곤룡포로 감싸고 내게 말을 걸고 있었다.

    얼굴을 가릴 타이거 마스크가 너무나 그리웠다. 대리로 어사출두를 할 때도 이렇게 심장이 졸아들진 않았었다.

    “네가 대사간이 말한 그 인재로구나. 장계에서 읽은 적이 있다. 염병을 다스리는 약을 고안했다고?”

    “성……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역사책으로 인조를 배울 때나 능양군이라고 마음껏 낮춰 부를 수 있었지. 정작 실제로 왕의 위엄 앞에 서고 나니 그런 생각은 털끝만큼도 들지 않았다.

    “상중(喪中)임에도 내 뜻을 받든 어사의 업무를 성실히 보조했다더니, 그 이상의 인재였구나. 대사간도 소과에 입격했을 때는 생진사를 동시에 달았으나 동시에 장원을 하진 못했다.”

    “운이…… 운이 좋았사옵니다…… 전하.”

    “겸손하기까지 하구나. 네 덕분에 함경도 백성들이 염병의 마수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 상을 내리려 너를 부르려 했는데 오늘 줄 맨 앞에서 장원을 받은 백패를 두 장이나 받아 가는 모습을 보니 이를 어쩐다.”

    어사가 장계를 제출하자마자 역병이 돈다고 보고가 올라온 함경도로 파발을 달리게 해 보수탕을 시험하게 했다고 했다. 지금 왕이 내 앞에서 한껏 부드러운 얼굴을 하고 있는 것을 보면 성공적으로 병을 진압했다는 소리겠지.

    “대사간은 자신이 아래에 두고 키우겠다고 했으나 어쩌면 좋겠느냐. 내가 아는 양시 장원은 근 백 년간 율곡뿐이다. 네가 나의 율곡이 되어줄 수 있을 것이냐.”

    이 위엄 있는 아저씨, 책에서 배우기로는 지금쯤 호란때 당한 치욕과 쪼그라든 왕권 때문에 제정신이 아니었다고 들었는데 전혀 아니었다. 왕은 왕이었다.

    뭐, 다른 곳에서는 내가 알고 있는 능양군의 모습을 하고 있을 수 있겠으나 지금 당장은 그랬다.

    “소신을 어찌 감히 율곡 선생에 비할 수 있겠습니까. 천신(賤臣)이 평소에 생각하던 것이 시제로 나온 덕분에 과분한 결과를 얻은 것뿐이옵니다.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이럴 줄 알았으면 진사시 때 정약용의 한시를 고쳐 나머지 시권을 채우지 말고 과장을 뛰쳐나왔어야 했다.

    주목을 더 받으면 곤란하다는 어사의 말이 이제 이해가 가기 시작했다. 아마 지금 입고 있는 앵삼을 쥐어짜면 땀이 흘러나와 바닥에 고일 것이었다.

    “게다가 열아홉, 열아홉이란 말이지. 낯을 보았을 때는 더 들었다 생각했는데 목소리를 들으니 제 나이가 맞는 것을 알겠다. 호남에서 고생을 많이 했다고 들었는데 그 탓인 모양이구나. 도승지!”

    “예, 전하.”

    “내리기로 정해놓았던 물품을 안 양시에게 내리라. 이러한 인재가 몸을 상해가며 생활하는 것은 이 조선의 손해이다.”

    이제는 왕까지 나를 삭았다 하고 있었으나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목소리들이 한 쪽 귀로 들어와 다른 쪽 귀로 빠져나가는 것 같았으니.

    내전별감이라 불린 무사가 들고 온 궤짝을 내려놓았다. 조심히 내려놓았음에도 불구하고 묵직하게 울리는 소리가 안에 든 것이 심상치 않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지금 내리는 상은 이 정도이지만 어서 학문을 더 닦아 이 나라를 위해 헌신하라. 이 재물은 함경도 백성들의 목숨을 구한 값이지만 그 이후로 받아야 할 것은 나라의 녹일 것이다. 명을 내리니 성심성의껏 따르라.”

    “성은이 망극하옵나이다. 전하!”

    머릿속이 얼얼했다. 임금의 눈에 들기 어려울 것 같아 고민하던 때가 있었는데 그 고민이 쓸데없었을 정도로 기회는 실감하지 못할 정도로 빨리 찾아왔다. 볼을 꼬집어서라도 현실임을 느끼고 싶었으나 어전(御前)이었다.

    “아, 두 가지로 나를 기쁘게 하였으니 상을 한 가지만 내리는 것은 옳지 못하다. 안 양시, 소원이 있다면 한 가지 더 말할 기회를 주겠다.”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임금의 눈에 들고, 재물까지 하사받았는데 무슨 욕심이 더 있을까. 그동안 가졌던 소시민적인 마인드가 원망스럽게도, 내 좁아터진 그릇은 이 정도면 만족했다고 계속해서 외치고 있었다.

    ‘집? 솔직히 성이성 영감댁 별채 하숙방이 훨씬 편하지. 밥 나오지, 옷 나오지. 돈을 더 달라 하기엔 청빈을 주제로 진사시 장원한 놈이랑 안 어울리는 말인데…….’

    갖고 싶은 것은 셀 수 없이 많았다. 예를 들면 앞에 놓인 옥좌라든가. 물론 그렇게 말했다간 이 자리에서 목이 뎅겅 날아가겠지만 말이다. 앞에 서 있는 내전별감이 차고 있는 환도의 날은 시퍼럴 것이었다.

    아.

    “없느냐? 그럴 수 있지. 아직 얼떨떨한 기분일 테니 이해는 가노라.”

    “……소신과 관련된 소원은 아니오나 한 가지 드릴 말씀이 있사옵니다.”

    “말하라.”

    소과를 치며 겪었던 고생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갔기 때문에 생각난 건이었다. 솔직히 대리 어사로 흥한 내가 이런 말을 할 자격이 있을까 조금 양심이 찔렸지만 배알이 꼴렸던 건 사실이었다.

    ‘꼬우면 지들도 임금을 등에 업고 대리질을 했어야지.’

    “전하, 소신이 전라도 두메산골에서 갓 상경해 한성시에 응시하려 과장(科場)인 예조로 들어섰을 때, 충격적인 사태를 목격했었나이다.”

    “그 충격적인 사태라는 것이 무엇을 가리키느냐.”

    과장으로 입장하던 도중에 그 망할 놈들에게 당한 파워 태클 탓에 쓰라렸던 갈비뼈가 떠올랐다. 물론 지금은 다 나았지만.

    “소과 초시라 하여도 이 나라의 옥석을 가리는 엄중한 자리일진대, 과장이 아니라 마치 시장을 보는 것 같았사옵니다.”

    “시장이라니, 그것이 무슨 소리인고?”

    “본디 시험이란 본인의 능력으로 치러야 하는 법인데, 선접꾼이라 불리는 자들이 좋은 자리를 미리 맡아 놓고 그들이 수종(隨從)하는 거자가 시험을 편히 볼 수 있도록 다투는 꼴이 차마 눈을 뜰 수 없는 지경이었나이다.”

    전혀 뜻밖의 말이었는지 그 자리에 있는 자 모두의 표정이 굳어지는 것이 보였다. 그럼 그렇지. 높으신 분들은 현장을 잘 모르신다니까.

    “허어…… 도승지는 들은 바 있는가?”

    “소신도 처음 듣는 바이옵니다…….”

    “현제판(懸題板, 문제를 적은 판)이 잘 보이는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숫제 주먹질이 오갈 지경이었사옵니다. 더구나 거벽(巨擘)과 사수(寫手)로 불리는 자들이 무리를 지어, 과장에서 과유들 대신 글을 지어주고 글씨를 써 주고 있는 판국이옵니다.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그제서야 도승지 쪽으로 시선이 돌아간 임금이었다. 익선관 아래 얼굴이 차갑다.

    ‘꼴좋다. 롤 대리도 처음 걸리면 30일 정지겠지만 상습으로 걸리면 천 년 정지라더라.’

    분노한 임금은 예조 정랑에게 명해 이 자리에 있는 입격자 전원의 시권을 전부 가져오라 벼락을 내렸다.

    옥좌 아래 서 있는 생진사 백여 명 중 수십 명이 자신의 시권 내용을 대답하지 못해 그 자리에서 금군에 끌려 나갔다. 역린을 건드렸다는 표현이 어떤 것인지 생생하게 알 수 있을 지경이었다.

    ‘감정이 저렇게 요동치는 것을 보면 역사책에서의 평가가 맞는 것 같기도 하고…… 소현세자가 저래서 괜히 미움을 받았나?’

    분명 속 시원한 일이었으나 화를 낼 때는 왕의 체통이 벗겨지는 임금을 보고 방금까지 쌓였던 호감에 살짝 스크래치가 났을 때였다.

    “안 되겠다. 나는 마음을 정했느니.”

    “무엇을 말씀이시옵니까, 전하.”

    방금까지 나라의 기강을 흔든 역적들에게 분노를 토해내던 왕의 눈은 이제 가라앉아 있었으나 그 잔불은 여전히 타오르고 있었다. 조금 쉰 목소리가 옆에 선 도승지를 향했다.

    “방금 안 양시가 고한 것은 소원으로 쳐 줄 수 없는 것이다. 당연히 다른 상을 내려야 옳겠지. 그렇지 않은가? 도승지.”

    “전하의 말씀이 옳으신 줄로 사료되옵니다.”

    “소원을 들어주겠다는 말에 나라를 위한 일을 고하는 선비를 어찌 가만히 놔 둘 수 있겠는가? 도승지는 승정원에 일러 속히 반궁에 궐원이 있는지 살피고 내게 서계를 올리라. 없으면 자리를 만들어서라도 궐석을 보고하라.”

    “예! 전하!”

    반궁? 처음 듣는 단어에 어리둥절해 있던 차였다. 궁에 넣겠단 소리인가?

    “양시 안한수! 성균관에서 수학할 것을 명하노라!”

    ※ 작가의 말

    1. 실제로 조선 중기부터는 과거에 부정이 슬슬 개입되기 시작합니다. 김홍도의 공원춘효도 (貢院春曉圖)를 보면 거의 대리시험을 쳐 주는 모습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습니다.

    2. 한 사람이 같은 해 생원시와 진사시에 모두 응시할 수 있었는데, 그렇게 해서 양시(兩試)에 다 합격한 사람을 역시 양시라고 불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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