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금준미주 천인혈
사또 놈의 생일잔치는 휘황찬란했다.
그동안 수수한 색에 익숙해져 있던 눈이 갑자기 노출되는 화려한 색들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온갖 색깔로 물들인 도포의 바다 사이에서 흰옷을 입고 있는 것은 나와 양 별감 둘 뿐이었다.
“이게 다 백성들의 피땀일세.”
“알고 있습니다. 별감 어른.”
각오를 다지라는 뜻 같았다. 깊게 찔러드는 양 별감의 말이 무겁게 전해져왔다. 낮게 속삭이는 목소리에는 일종의 비장함까지 실려 있었으니.
‘하긴, 일이 잘못되면 다 죽는 거야.’
장시에서 느껴지던 낯선 시선은 양 별감의 수하였던 모양이었다. 그럴 만도 했다. 그때 이미 어사와 교감 중이던 양 별감이었다. 스물도 안 된 애송이에게 어사의 명으로 모든 것을 맡겨야 하는 양 별감은 도대체 무슨 심정일까.
애초에 임무 생각보다 본능이 앞서고 있던 나였다. 나도 나를 못 믿을 지경인데.
조선 시대에 떨어진 이래로 소박한 밥상을 받아왔던 터라, 코로 풍겨오는 온갖 지짐들의 기름 냄새에 눈이 훼까닥 돌아가고 있었으니까. 기름 냄새가 치킨에 대한 그리움까지 파내고 있었다.
짝!
조그맣게 터진 파열음에 놀란 양 별감이 앞서 걸어가다 나를 돌아봤다. 양손으로 힘껏 후려친 뺨이 얼얼했다.
“정신을 다잡고 있었습니다.”
“심정은 이해가 되니 이상한 눈으로 보지는 않겠네. 힘내게. 자네만 믿고 있으니.”
양 별감이 그 약조를 어긴 것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이번에는 주위의 이목을 끌 정도로 크게 짝 소리가 울려 퍼졌다.
주위에 지나가는 기생들이 흘려대는 육향(肉香)과 분 냄새, 그리고 야릇하게 그려진 입꼬리가 또다시 시선을 빼앗아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고작해야 열여섯의 나이에 춘향을 꼬셨던 어사의 심정이 이해가 가기 시작했다.
그가 나를 돌아보는 눈이 심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분명 똥을 밟은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 뻔했다. 그런 눈빛을 애써 무시하며 고개를 숙이고 양 별감의 뒤를 따랐다.
내 탓이 아니다. 경험이 없는 것도 아니고.
깃든 몸이 여자 경험이 없는 탓이기 때문이 분명하다.
벌을 홀리는 향기를 뿜어내는 남원의 꽃들 사이에서 어려 보이는 기생을 찾으려 애를 쓰며 생각했다. 내가 변태여서가 아니었다.
사또에게 범해지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던 이름도 얼굴도 모를 처녀를 어린 기생에 겹쳐보면 제정신이 돌아올 거라 생각해서였다.
꽤 효과가 있었다.
***
‘이게 뭐야. 장난하자는 건가?’
공적인 일로 온 자리라지만 솔직히 조금 기대는 하고 있었다.
그런데 내가 안내받은 구석, 낡아빠진 멍석이 깔려있는 자리에 놓인 다 주저앉아가는 개다리소반 위에는 시큼한 냄새가 흘러나오는 호리병 하나와 군 냄새를 풀풀 풍기는 김치 한 종지만이 덜렁 놓여있었다.
‘손님 대접이 말이 아니구만.’
주위를 둘러보니 그렇게 초라한 상을 받은 것은 나뿐이었다.
나와 비슷한 나이대의 화려한 도포를 걸친 선비들은 온갖 지짐이 모둠으로 올라간 상에 맑은 술을 각자의 잔에 기울이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심지어 열 살도 안 되어 보이는 꼬맹이의 상에 올라간 것도 나보다 형편이 나았다.
‘X발…… 먹는 걸로 사람 차별하면 지옥 간댔는데.’
담근 지 오래되어 묵은지 냄새를 풀풀 풍기는 김치를 씹으며 생각했다.
호남음식이라 그런지 묵은지 맛도 나쁘진 않았지만 기분이 더럽긴 마찬가지였다. 병에 담긴 술은 시큼털털한 막걸리였다. 아니 농주(農酒)라고 하나? 정말로 새참 대신 마시려고 막 빚은 술 그 자체였다.
잔칫집에서 거지가 구걸해도 받을 수 있는 술상이었다. 이렇게 푸대접을 받을 이유는 딱 하나밖에 없었다. 내 동행자인 양 별감이 사또놈의 미움을 어지간히 받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저놈이네. 참 생긴 것답게 논다. 진짜.’
멀리 보이는 동헌 위, 높으신 양반들이 모여있을 만한 자리가 있었다.
그곳에서 양 별감의 위치를 눈으로 좇다 딱 봐도 남원 부사일 것처럼 생긴 남자를 발견했다. 몸에 기름이 뒤룩뒤룩 오른 놈이 익숙한 흰 도포의 남자에게 잔뜩 뭐라고 쏘아붙이는 중이었다.
얼굴에도 욕심이 붙었는지 우툴두툴한 것이 두꺼비를 닮아 있었다. 부사는 계속해서 양 별감에게 무안을 주는 것을 멈추지 않고 있었다. 저 두꺼비를 닮은 놈이 그런 짓거리를 했단 말이지. 뒷목으로 피가 확 쏠렸다.
더 배알을 뒤틀리게 하는 것은 그 모습을 지켜보며 웃고 떠드는 다른 높으신 양반들의 모습이었다. 저들은 남원이 이 모양이 되는 동안에도 저렇게 웃고 떠들기만 했을 것이었다. 비명에 간 처녀의 억울함 따위 그들에겐 아무 의미도 없었다.
“허허, 배에 심지를 박으면 수십 일은 족히 갈 양반일세.”
아차. 마음속에만 담아두었어야 할 말이 밖으로 튀어 나갔다. 그런데 어쩌란 말이냐. 내 머릿속 동탁의 모습과 저 사또 놈이 너무나 닮아 있었던 것을.
“자네, 지금 누구를 향해 그런 망발을 한 것인가?”
조금 떨어진 자리에서 시끄럽게 떠들며 술을 마시던 젊은 양반 한 무리가 그 말을 들었는지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우두머리인 듯한 조그만 사내가 시비를 걸어왔다. 애비 위상을 빌어 어깨에 힘주고 다니는 금수저 놈들이 분명했다.
“술에 취하면 나랏님 욕도 봐준다는데, 이 남원 땅에는 그 정도 풍류도 없는가?”
“뭐가 어째? 거지 같은 놈에게 잔칫상을 봐줬더니 이제 못 하는 말도 없구나!”
“아아, 하긴 좋은 술만 입에 적셔지는 분들은 농주로도 취할 수 있다는 사실을 모르시겠지. 암, 암.”
거지라…….
솔직히 말해서 그 단어만 안 꺼냈으면 조용히 술만 마시다가 계획을 실행했을 텐데.
현대를 아등바등하며 살아갈 때도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놈들이 아니꼽게 보이던 터였다. 그런데 이런 자리에서 푸대접을 해 놓고 시비를 걸어?
눈이 뒤집혔다.
“게다가, 거지라? 그렇다면 이 고을 사또는 거지에게도 초대장을 보내고 술상을 베풀어주는 청백리가 분명하시구만. 그럼 겨와 모래를 섞어 모자란 환곡 탓에 빌어먹으며 떠돌아다니는 남원 백성들은 왜 이 자리에 초대하지 않으셨는가?”
“이놈이! 차림새를 보니 잔반(殘班)이 분명한데 집안이 기울어졌다고 이제 상놈들 편을 드는가!”
먹는 걸로 차별하더니 이젠 옷으로 차별하는 건가. 그놈들이 옷에 걸친 비단옷들은 보기에도 올이 촘촘하고 부드러워 보였지만 스스로의 돈으로 산 것은 아닐 것이었다.
‘내가 니놈들 나이에는 옷은커녕 생활비 전부를 내 손으로 직접 벌었어야 했는데.’
“내 옷차림이 잔반의 차림새라? 관직에 나아가 녹을 받는 것도 아닐 것이고, 선비 된 자가 스스로 버는 재물이 아니라 아비의 재물로 사치하는 것이 자랑이라는 것인가! 부끄러운 줄 알아야지!”
“보아하니 양 별감과 같이 온 사람인 것 같은데, 이쯤에서 험한 꼴 당하지 말고 물러나시오. 부사 나리께서 이쪽을 보고 있소.”
점점 목소리가 커지고 이목이 집중되자 무리 사이에서 어쩔 줄 몰라 하고 있던 사람이 화해를 권했지만 물러설 생각은 들지 않았다.
일침을 맞은 놈은 불쾌한 얼굴로 입을 다물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고, 우연히 걸린 시비가 생각지도 않게 사태를 계획대로 끌어가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시비를 걸라고 하셨습니까?’
‘그렇네. 사람이 많은 자리에서 출두해야 할 때 가장 상책은 그 자리에 있는 이목 모두를 자네에게 집중시키는 것일세.’
‘저, 그런 것을 해본 경험이 전혀 없습니다.’
전혀 없다는 것은 거짓말이었지만 교생 때 해봤던 수업이나 팀플 발표 따위와는 차원이 다를 부담감일 것임이 틀림없었다. 고개를 젓는 내게 어사는 예상했다는 듯이 미소 지으며 말을 이었다.
‘괜찮네. 실패해도.’
‘예?’
‘이목을 모으는 데 실패하더라도 그 자리에서 자네와 시비 붙었던 사람이 출두 자리에서 자네가 누군지 기억해낼 수 있게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일세.’
즐거운 얼굴로 옛일을 되새기는 듯한 어사의 얼굴을 보니 출두했던 기억을 더듬고 있음이 분명했다. 그렇다 해도 속은 평범한 대학생인 내게는 너무 큰 짐이었다.
‘석성 현감을 혼내주던 자리였던가. 그때도 생일잔치였지. 나는 그 자리에서 향반 하나에게 시비를 걸었다가 잔치에서 금방 쫓겨날 뻔했었다네.’
‘그래서 쫓겨나셨습니까?’
‘아니, 오히려 무슨 놈팽이인가 궁금했는지 현감이 상석으로 불러 선비면 선비답게 문장으로 말하라고 호통치는 게 아닌가. 금방 시 한 수 지어내 어사출두를 외치고 마패를 치켜드는데 나를 알아본 그놈의 얼굴이 새하얘지는 것을 보고 있자니 얼마나 통쾌하던지.’
아, 그 금동이에 담긴 향기로운 술은 백성의 피요, 로 시작되는 그 시? 이 양반, 지금으로 치면 일종의 ‘관종’이었다. 나랏일 할 때야 진중하고 최선을 다해 본성을 숨기고 있었지만 이팔청춘에 풍류를 즐기던 그 모습이 어디 갔을 리가 없었다.
‘자네는 힘들다 하지만 결코 나쁜 방법은 아니라네. 군중 사이에서 퍼져나가는 당혹과 경악의 감정은 도망가려는 생각을 잊게 하고 다리를 땅에 붙잡아 놓기 마련이거든.’
‘두 번이나 암행을 나오신 어사님의 경험을 어떻게 부정하겠습니까.’
‘그러니 내일은 꼭 일러준 대로 하길 바라네. 기대하고 있겠네.’
기대에 가득 차 싱글거리고 있던 어사의 얼굴이 손에 잡힐 듯했다. 그 양반, 덩치의 지게에 실려서 관아의 담장 밖에서 이 모습을 훔쳐보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말도 안 되는 생각이 떠올랐지만 금방 흩어졌다.
‘성 어사, 그 양반 말대로 되어버렸어.’
두꺼비처럼 생긴 부사는 이쪽을 한참이나 바라보고 있다가 아래에서 대기 중이던 사람을 동헌 위로 불러올렸다.
불러올려진 사람은 양 별감의 집에서 한번 봤던 뻐드렁니였다. 그놈은 사또놈에게 다가가 뭐라 잔뜩 아양을 부리더니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저기,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는디 적당히 하시지유?”
이틀 전 양 별감의 집에서 만났을 때보다는 나았지만 여전히 싸가지를 밥 말아 먹은 놈이었다. 그때야 얼떨결에 지나쳤다 해도 저놈은 중인이고 나는 양반일진대. 당장이라도 한 대 후려치고 싶은 심정이었으나 꾹 참았다.
“적당히? 자네가 지금 아래위를 잠시 못 보는 모양인데…….”
“아, 글씨 오늘 사또 나으리 생신이신디 자꾸 귀찮게 할 셈이유?”
이놈이 끄나풀의 대장이라고 했었나. 어깨에 잔뜩 들어간 힘이 그제서야 보였다. 건방진 새끼. 생각해보니 장시에 간 날 들었던 패악질 소문의 대다수는 이놈의 짓이었다. 이마에 핏줄이 불뚝 서는 것이 느껴졌다.
“누가 일부러 이러고 싶어서 그랬겠는가. 이 술상을 보게. 멀리서 온 손님을 이렇게 박대하는 고을이 어디 있단 말인가.”
겨우 화를 눌러냈다. 그 때문인지 뭐라 대답하려던 뻐드렁니의 입이 조물거리다가 멈췄다. 자신이 보기에도 술상의 상태가 심했다 싶었을까?
단순히 불만 사항을 접수받으러 온 것이었는지 형방은 조금만 기다리라는 말만 남기고 다시 부사의 옆을 향해 질주했다. 미래로 이 장면을 찍어갈 수 있다면 수업 시간에 간신배의 표본이라고 보여주고 싶은 광경이었다.
‘그럼 그렇지.’
두꺼비에게 한참 보고를 하던 뻐드렁니는 짧은 지시를 받고 어디론가 달려갔다. 잠시 후 그놈이 잔치자리로 달려왔을 때는 뒤에 꽤 푸짐한 술상을 든 여종을 동반한 채였다.
“사또 나으리께서 자비를 베풀어 좋은 술과 안주를 내려주실티니 일루 올라와 마음 편히 드시고 가시라는데유”
자비는 무슨, 먹고 떨어지라는 말을 이 시대에도 돌려 말했다는 사실을 알아낸 것은 작은 수확이었다. 평범한 손님이었으면 사또와 같은 자리에서 술안주를 어떻게 마음 편히 먹겠는가. 체하지 않으면 다행이지.
하지만 나는 평범한 손님이 아니었다. 여름밤 내내 어사에게 주입식 교육으로 세뇌당한 후로는 겁날 것이 하나 없었다. 다만…….
‘그런데 어사 나리.’
‘왜 그러는가. 또 졸려서 그러는가? 허벅지를 이리로 대게.’
‘아니, 그 바늘은 잠시 치워놓으시고…… 만약에 어떤 사람이 제 얼굴을 기억하고 있다가 나중에 그걸 문제 삼으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건 문제 될 것이 없네.’
어사의 대답은 명쾌했다.
‘자네, 아직 수염 자국도 제대로 없는 보송보송한 얼굴이 아닌가. 나이를 더 먹고 수염이 하관을 가리게 되면 알아볼 사람이 없을 걸세.’
‘하지만 나리, 그래도 알아보는 사람이 생길지 모릅니다.’
자신도 그러했다며 풍성한 수염을 쓰다듬는 어사의 말은 자신만만했지만 그 말에 납득은 가지 않았다.
내 얼굴을 기억하는 자가 수염이 얼굴을 덮기 전에 대리 어사 건을 까발리면? 아니, 내 수염이 그렇게 풍성하게 안 나면? 이 시대에 프로페시아가 있었나?
‘어차피 닮은 사람은 세상에 얼마든지 있기 마련이네. 잡아떼면 될 일이지. 내가 그 정도도 생각 못 했을 것이라 생각하는가? 정 자네가 불안하다면 얼굴을 가릴 것을 준비해 두겠네. 기대하고 있으라고.’
동헌으로 오르는 계단 위로 술상을 나르는 여종 뒤를 따르면서도 한 가닥 미심쩍음은 지워지지 않고 있었다. 소매에 넣어둔 부채 따위로 얼굴을 완전히 가릴 수 있으려나?
그 생각에서 벗어나게 한 것은 눈앞에서 들려온 걸걸한 목소리였다.
※ 작가의 말
성이성의 5대손이 기록한 필원산어(筆苑散語)에는 실제로 성이성이 어사출두 자리에서 금준미주시를 읊었다 적혀 있습니다.
조경남이 저술한 속잡록에 따르면 이 시의 원전은 1622년 명나라 장수 조도사(趙都司)가 읊은 한시라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