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족보만 남은 흙수저
한참 동안 속을 게워냈지만 멀건 액체 말고는 아무것도 나오질 않았다. 이 인간, 시묘살이를 FM으로 하는 모양인지 정말 최소한의 음식만 먹고 사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조선이라니! 여기가 조선이라니! 이거 실화냐?’
구토 기운이 멈추고 처음으로 든 생각이었다. 마치 패스트볼이 헬멧을 직격한 것 같은 불쾌감은 시간이 흐를수록 천천히 걷혀갔다. 처음에 비하면 점점 견딜 만할 정도로 잦아들었으니.
버릇처럼 입에 헬조선을 달고 다닌 벌일지도 모르겠다. 현대 한국이 아무리 먹고 살기 어렵다지만 조선시대보다 살기가 X같았겠어. 과거의, 아니 미래인가? 아무튼 그때의 언행을 반성하던 찰나였다.
기억의 조각들이 머릿속에서 떠올라 정리되어가고 있었다. 그 파편들은 마치 책꽂이에 책들이 차례로 꽂혀가듯 제자리를 찾아가면서 기억들을 되새기게 해주었다. 내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일이었지만 꽤 흥미로운 현상이었다.
조각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책을 읽고 있는 기억.
유교 경전이었다. 신기하게도 순한문으로만 되어있는 서적이었지만 읽고 내용을 이해하는 데는 문제가 없었다. 아마 머릿속에 들어온 것은 경험이 전부가 아닌 것 같았다. 하긴, 지식도 경험으로 쌓이는 거니까.
이 몸의 신상과 집안의 이력.
유교 경전 공부가 일과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것에서 이미 짐작할 수 있겠지만 나는, 아니 이 사람은 양반의 신분이었다. 기억에 따르면 이곳은 전라도 어딘가의 산골, 이 근방에서 꽤 세를 떨치는 성씨.
평소에 생활하던 모습.
전공 때문이어서 그런가, 스쳐 지나가는 것이 아쉬울 정도로 조선 시대의 미시사는 생생했다. 헌데 일반적인 양반이라기에는 행색도 생활도 초라한 것이 이상했다. 상에 촛불 대신 관솔불이 올라가 있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잔반이란 것이 생겨나던 시기였나…… 양반으로 태어날 거면 권력과 돈이 있는 집안에 태어나게 해 줄 것이지.’
형편이 쪼들렸던 터라 눈치를 살피고 약삭빠르게 살아가는 것이 익숙하던 터였다. 송충이는 솔잎을 먹어야 산다던가. 조선 땅에 떨어져서도 이 꼴이라니 나도 모르게 한숨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뭐, 그래도 귀한 신분을 타고 태어난 것은 다행인가. 일반적으로 유교에 대한 인식이 막장인 것과 더불어 선비 역시 X선비나 꼰대의 이미지로 여겨지는 것과 달리 내 안에 새겨진 선비의 이미지는 동경하는 대상에 가까웠다.
그들이 받드는 사상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었으니까.
후대로 갈수록 점점 변질되어가긴 했지만 기본적으로 선비는 문무를 겸비하고 공직에 나아가 자신의 뼛골을 갈아가며 애민정신을 실천하려 하던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세계사를 뒤져봐도 한 왕조가 오백 년을 이어가는 일은 흔한 일이 아니었다. 조선 왕조가 오백 년 동안 지속될 수 있었던 원동력은 이 지배계층에 있었다. 물론, 선비들 전부가 저런 이상적인 사람들은 아니었지만.
비록 왕조의 말년은 좋지 않았지만, 그 지경이 될 때까지 버틸 시스템을 마련한 것들도 선비들이었다. 나라에 위기가 찾아오면 재산을 팔고 의병을 일으킨 것도 선비들이었다.
그 때였다. 갑자기 눈가가 간질간질해져오기 시작한 것은.
“이 친구도 부모님을 여의었구만.”
이게 뭔 틀딱…… 아니 고리타분한 말투야? 내 의지와 다르게 움직이는 혀의 움직임에 살짝 소름이 돋았다. 방금 입 밖으로 뱉은 말은 내가 말한 것일까, 몸에 남아있던 기억이 말한 것일까.
아직은 몸이 기억하는 것이 있다고 주장하는 듯이, 부모님이라는 단어가 나오자마자 나도 모르는 사이 눈가가 젖어들고 있었다. 그는 효자였다. 그리고, 이 친구 역시…….
“정인(情人)을 병으로 잃은 것도 나와 처지가 똑 닮았네그려. 그래서 난 자네에게 깃든 것인가.”
눈가를 적시던 눈물이 이제는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울고 있는 건 나일까, 이 사내의 기억일까. 아무려면 좋았다. 혼란스러운 생각을 잊기엔 한참 울고 후련해지는 방법도 괜찮았다. 몇 달간의 방구석 생활에서 얻은 교훈이었다.
얼마나 울었을까. 웬 메아리가 날아오더니 움집을 슬쩍 뒤흔들었다. 천장에서 떨어지는 지푸라기에서 먼지 냄새가 확 풍겨왔다. 그 사이로 슬며시 비집고 들어오는 불쾌한 무언가가 있었다.
‘짐승의 노린내?’
이 시대의 사람은 후각도 더 예민한 것일까. 한 줄기 비릿한 냄새가 매캐한 먼지 냄새 사이로 흘러들고 있었다. 생존 본능일까. 나도 모르게 무기로 쓸 만한 것을 찾아 두리번거리다 움집 한구석에 시선이 꽂혔다.
이미 몇 번 사용한 흔적이 있는, 끄트머리에 송진이 잔뜩 뭉쳐있는 막대였다. 횃불로 쓰던 것이 분명했다. 단단한 나무로 만들었는지, 손에 와 닿는 무게감이 묵직했다.
나도 모르게 버릇처럼 그것을 휘둘러보자마자 어떤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이 몸은 내 원래 몸보다 훨씬 튼튼했다. 막대를 귀 위로 올렸다가 크게 휘두르자 공기를 찢는 날카로운 소리만 뒤에 남았다.
지금껏 상대해본 어떤 타자에게서도 느껴보지 못한 배트 스피드였다. 이 정도면 적당한 크기의 짐승은 때려잡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으르렁.
그 알량한 자신감은 바로 깨져버렸다.
훨씬 많은 양의 먼지가 천장에서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더 진해진 노린내는 맹수가 이쪽으로 접근하고 있다는 사실을 경고하고 있었다. 내가 그놈의 냄새를 맡았듯이 그놈도 내 냄새를 맡은 것이 분명했다.
“설마…… 호랑이?”
타이거즈도 싫어하는 마당에 진짜 호랑이라니.
조선시대면 산에 호랑이 한둘쯤 있는 것이 정상일 터였다. 놈이 이쪽을 향해 온다면 빨리 튀지 않으면 한 끼 식사가 될 마당이었다. 호랑이가 냥냥펀치 한 대만 날려도 이 허술한 움집은 박살 날 것이었으니까.
‘낯선 세상에서 깨어나자마자 말 그대로 호구(虎口)에 밀어 넣어지다니, 교수의 추노에 쫓기고, 혜성에 정면으로 맞고, 깨어나 보니 조선 땅에서 호랑이한테 쫓기고 이 무슨 개 같은 하루야.’
헬조선 타령을 해댄 것이 초월적인 존재의 심기를 건드리기라도 한 것은 아닐까.
그런 쓸데없는 생각을 하며 횃불에 불을 붙이자마자 거적을 박차고 움막을 튀어나갔다. 호랑이에게서 최대한 멀리 떨어져야 했다.
그 와중에도 불이 꺼진 횃불은 용케도 손아귀에 잘 붙잡혀 있었다. 송진이 손잡이 부분까지 흘러내려서 그런가, 로진을 바른 배트처럼 손에 착 감겼다. 그게 한 줄기 위안이자 마지막 희망이었다.
‘씨X, 씨X…… 살 많고 토실토실한 멧돼지 노루 고라니 토끼, 먹을 건 지천에 널린 조선의 산에서 왜 하필 나를 노리는 건데?’
그렇게 폴대에서 폴대를 왕복할 만한 거리를 몇 차례나 거듭 뛰었을까, 그토록 바라는 민가의 불빛이나 사람의 기척은 소식도 없었고, 울음소리는 점점 가까운 곳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점점 지쳐가는 몸은 불길한 생각을 머릿속에 가득 부어 넣고 있었다.
분명 튼튼한 몸이었지만 오랜 시간 산길을 달리자 점점 물이라도 먹은 솜 마냥 무거워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땀이 차오른 손바닥에서 자꾸 횃불이 미끄러지려 하고 있었다. 차라리 이게 날붙이였으면 좀 나았으려나.
그러나 궁하면 살 길이 통한다 했던가.
한창 달려 내려간 산자락 아래 사람이 지나가는 길이 드디어 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근처 조금 평탄한 땅에 위치한 봉분 하나 외에는 주위엔 민가고 사람이고 아무 것도 눈에 띄지 않았다.
‘X발…… 진짜 망했다, 이거.’
슬슬 다리에 힘이 떨어지고 있던 차였다.
흘러내린 땀이 눈꺼풀을 넘어와 눈이 질끈 감겼다. 반대쪽 손으로 땀방울을 닦아내고 눈을 다시 뜨는 동안 이 상황에 대한 비관적인 생각 한 트럭 분량이 머릿속을 왔다 갔다 하고 있었다.
“헉…… 헉…… 얼레?”
분명 아무 것도 없던 장소였다. 눈을 깜빡거린 사이 무언가가 달라져 있었다. 방금까지 아무 것도 없던 자리에 희끄무레한 무언가가 서 있는 것이 보였다.
그토록 찾아 헤메던 사람이다! 환희에 가득 차 빨라지는 발걸음을 또 다시 울부짖는 포효가 잡아챈다. X발.
욕지거리를 뱉으며 뒤돌아선 것으로 보이는 사람의 형체를 향해 뛰어들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소복을 차려입은 여인네의 모습이었다. 왜 이 밤중에 여자 혼자 위험한 산길을?
“거기 서 있는 낭자! 말 좀 묻겠소!”
이번에도 내 입에서 튀어나간 말투는 낯설었다.
하지만 그것에 놀라기도 전, 여인이 품고 있는 몽환적인 분위기가 내 이성을 마비시켰다. 땋아 내린 머리끝에 달린 흰 댕기가 희미한 반딧불 빛을 따라 흔들리고 있었다.
마치 시간이 멈춘 듯 그녀는 천천히 돌아섰다. 비현실적인 분위기에 취한 탓에 혹여나 얼굴이 달걀귀신처럼 이목구비가 없이 텅 비어 있을까봐 가슴이 내려앉았지만, 그런 일은 없었다.
달빛이 푸르게 비치는 소복을 차려입은 여인은 흰 피부에 붉은 입술, 푸른 기운을 띤 긴 초승달 같은 눈썹이 짙은 미인이었다. 나도 모르게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을 느끼면서도 어딘가 모를 찝찝함이 몰려와 고개를 몇 번이고 흔들었다.
귀신일까, 아니면 내외라도 하는 것일까.
뒤에서 호랑이가 쫓아오고 있는 것도 잊은 채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데, 여인의 고개가 질문을 허락한다는 듯 짧게 끄덕여졌다. 문득 가슴께에 달린 나비 노리개가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초면부터 내외하지 못해서 미안하지만 급한 일이오. 범이 근처에 있소. 가까운 고을 방향은 어디요?”
급한 마음에 말이 속사포처럼 튀어나갔지만, 여인의 얼굴에서는 급한 기색이 떠오르지 않았다. 고운 입술을 약간 치켜 올려 아무 일 아니라는 듯이 미소 짓던 그녀는 한 손을 들어 자신의 오른쪽을 가리켰다.
홀린 듯이 그녀의 길고 가는 손가락 끝을 따라간 시선 끝에 반짝이는 불빛 몇 개가 보였다.
살 수 있다!
“고맙소. 낭자도 나와 함께 몸을 피합시다. 이곳에 있다가는 범의 밥이…….”
여인은 그 말을 듣고는 희고 가지런한 이를 드러내며 활짝 웃더니 자신의 발밑을 가리켰다. 횃불과 보름달이 수풀 사이 난 한 줄기 오솔길을 비추는 이 공간, 사람은 둘이 서 있었으나 그림자는 하나뿐이었다.
“아…….”
이번엔 귀신인가. 꿈을 꾸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교수, 혜성, 조선, 호랑이, 귀신. 이게 꿈이라면 깨어나라.
하지만 횃불을 들고 있지 않은 반대쪽 손으로 꼬집은 볼에서는 아픔만 느껴졌다. 그걸 보고 있는 여인의 표정은 미소를 잃고 침울해져 있었다.
그 표정은 ‘마치 너도 그러는구나.’ 라고 말하는 듯, 길고 아름다운 속눈썹이 잔뜩 가라앉아있는 모습이 보였다.
아름다운 얼굴에 스며든 수심 때문인지, 아니면 어차피 호랑이 밥이 되면 나도 같은 처지가 될 것인지라 공포마저 날아간 것인지, 이런 비현실적인 상황에서도 머리는 굴러가고 있었다.
에라, 모르겠다. 어차피 이 사람, 아니 이 귀신, 뭔들 무슨 상관이야, 아무튼 나를 해치려는 거라 해도 어차피 이대로 가다가는 호환을 당할 마당이다. 믿어보는 수밖에.
“아니오!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오. 낭자 말을 믿겠소.”
혹시 방금 신에게 빌어서 기적이라도 일어난 것은 아닐까? 무신론자의 신념이 근본부터 흔들리는 발상을 하고나니 오히려 머릿속은 맑게 가라앉아 있었다.
“낭자의 정체가 무엇이든 상관 안 하오. 살아나면 나중에 꼭 보답하겠소. 나는 안한수라 하오. 잊지 마시오!”
내 이름이 아니었다. ‘이 몸’의 이름이었다. 미래에서 온 알지도 못하는 사람의 이름보다는 그래도 써먹을 수 있는 이름을 대는 것이 백 번 나은 일이었다.
그녀 역시 알았다는 듯이 가느다란 목을 끄덕이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고맙소! 나도 잊지 않으리다.”
지긋지긋한 호랑이의 울음소리가 가까이에서 다시 들려오기 시작했다. 황급히 고개를 숙여 예를 표하고는 땅을 박찼다.
고개를 들며 마지막으로 눈에 들어온 여인의 입가에는 아까처럼 다시 미소가 맺혀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