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화
머릿속이 터질 것같이 아팠다.
아냐, 이건 거짓말이다.
과거의 일… 그래 과거의 일을 떠올려 보자.
한없이 평화로운 세상이 눈에 들어왔다.
내가 살아가던 세상.
그리고 내게 가장 평화로운 기억이 마치 주마등처럼 다가왔다.
풀밭에 누워 있는 나와 그 모습을 지켜보며 잔소리를 하는 루데린의 모습까지 내 기억 속의 모습과 똑같았다.
하지만… 그곳에 있는 자는 내가 아니라 렌델로스였다.
그 뒤로 내가 기억하고 있던 과거는 마치 거울처럼 깨져 나가며 진실이 드러났다.
렌델로스를 만나기 위해 인간계로 내려갔을 때.
가족을 잃은 아주 자그마한 아이를 만났다.
딱한 사정을 듣고 난 뒤.
세상을 둘러보고 싶다는 그 아이의 소원을 이뤄 주기 위해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내 실수였다.
그 아이가 죽은 것은…….
렌델로스를 만나기 전.
그 아이를 돌봐 줄 자를 찾았고, 평화에 찌든 나머지 아무런 의심 없이 그들에게 아이를 부탁했다.
그리고 그 끔찍한 일이 벌어졌다.
공양이라고 했다.
이 부조리한 세상에 악마를 강림시켜 세상을 멸망시키겠다는 허무맹랑한 소리를 지껄이는 인간들은 그 작고 여린 생명을 무참하게 앗아 갔다.
같은 인간들에 의해 무참하게 살해당한 그 아이를 발견하고 분노했고, 그곳에 있던 인간은 모두 불타 사라졌다.
서둘러 아이의 영혼을 불러왔다.
악마들에게 넘어간 영혼을 그에 합당한 대가를 지불하고 구해 왔지만, 육신을 잃은 영혼이 갈 곳은 이승이 아니었다.
서둘러 용신을 보필하는 달빛 요정의 몸을 만들어 그 아이에게 선사해 주고는 가장 성실하고 용맹했던 달빛 요정의 수장 루데린에게 보냈다.
딸처럼 잘 보살펴 달라는 부탁과 함께.
신계로 돌아온 뒤.
수많은 인간계를 들여다봤다.
인간의 추악한 본성은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추악함은 도를 넘었다.
평화로운 세상으로 포장했지만, 그 가득한 악의는 지독한 악취를 풍겼다.
인간은 사라져야 한다.
그 생각은 점점 머릿속을 잠식해 갔다.
그래, 모두 죽이자.
그리고 다시 세상을 창조하자.
인간이 없는 세상으로! 추악한 욕망 따위는 없는 세상으로 다시 창조하자.
그리고 시작된 대파괴.
살육의 향연에 신의 영혼은 점차 타락해 갔다.
‘인간을 모두 죽여라.’
‘안 됩니다! 아버지!’
‘크큭, 그러면 네놈이 죽을 테냐?’
‘아버지! 이러시면 안 됩니다! 제발 정신을….’
‘내가 미쳤다는 게냐? 미친 것은 인간이다! 나는… 인간을 모두 죽여야 한다!’
‘아버지…….’
그리고 완전히 이지를 상실했을 때.
렌델로스와 루데린 그리고 에루실라는 그런 나를 막고 세상을 지키기 위해 싸웠을 뿐이었다.
창조자에서 파괴자가 된 이후.
파괴의 발걸음은 수많은 희생을 치른 우리엘과 카르나티우스에게 저지당했다.
정신을 차리고 난 뒤.
한 가지 부탁을 했다.
내 영혼을 소멸시켜도 좋으니 파괴한 세상을 모두 되돌릴 수 있게 해 달라고.
그리고 이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
물론, 전혀 다른 기억으로 바뀌었지만…….
미안하다는 말조차 꺼낼 수 없었다.
상처를 입은 렌델로스의 영혼은 오로지 복수만을 생각하며 달려왔을 터.
복수를 위해 자신의 영혼을 찢어 준 에루실라의 심정 또한 이해할 수 있었다.
이렇게 슬플 수 있을까?
냉기가 풀풀 풍기는 차가운 눈빛으로 노려보고 있는 렌델로스에게 말을 건넸다.
“미안하구나.”
“미안해할 필요는 없어. 당신의 소원은 여기서 깨질 테니까.”
“내 소원은…….”
“아아, 당신이 파괴한 세상을 복구시키는 거라면서? 근데, 그 상처를 기억하고 있는 자는 그걸 원치 않거든.”
“미안하다는 말밖에…….”
“그러니까, 당신의 소원은 이뤄질 수 없어. 같이 소멸하자고.”
말을 마친 렌델로스는 거울을 땅에 떨어트렸다.
잠깐, 거울?
“서, 설마……?”
떨리는 손으로 깨진 유리 조각을 집어 들었다.
그 안에는… 영혼이 찢어진 안젤리카와 마리의 모습이 형체를 잃어 가고 있었다.
그 가녀린 아이가 사라져 간다.
비참하게 죽어 상처받은 영혼을 꿰매고,
상처를 봉합한 손으로 다시 영혼을 찢어내고,
그리고… 내 죄로 인해 다시 영혼이 사라지고 있는 그녀의 모습을 보자 참을 수 없는 감정이 솟아올랐다.
깨진 거울의 조각을 들고 천천히 일어나 렌델로스에게 걸어갔다.
씩씩거리는 렌델로스를 물끄러미 바라보자 마음 한편이 너무 쓰라렸다.
내가 세상에 남긴 상처가 너무나 커다랗게 다가왔다.
이제는 정말 끝을 맺어야겠지.
깨진 거울의 파편을 쥔 채.
심장을 둘러싸고 있는 룬을 발동시켰다.
우우웅-!
거대한 마력이 폭주하기 시작했다.
원 형태를 띤 룬이 허공을 수놓자 렌델로스는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말했다.
“결국, 당신은 아직도 분노에 잡아먹혀 있어.”
“그래.”
말을 마친 후.
공간도약 룬 마법을 발동시켰다.
목표는 심장.
대상은 깨진 거울 조각.
죗값을 받으려면, 이게 가장 합당한 죽음이겠지.
생각을 마친 후.
거울 조각들을 전이시켰다.
허공에 떠오른 깨진 거울 조각들이 사라짐과 동시에…….
푹-!
심장을 꿰뚫는 소리가 천둥처럼 울려 퍼졌다.
“쿨럭!”
“뭐, 뭐 하는 짓이야!”
심장의 움직임이 천천히 멎어 가는 것이 느껴졌다.
점차 흐릿해져 가는 시야와는 달리 이상하게 정신은 또렷해졌다.
심장과 룬의 힘을 흡수한 거울은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다시 원상태로 돌아갈 것이다.
안젤라와 마리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지 못하는 건 아쉽지만, 이렇게 끝내는 것도 좋은 방법이겠지.
이젠 안젤라를 볼 용기가 없다.
내가 모든 기억을 찾았으니, 그녀 역시 모든 기억을 찾았을 것이다.
“이런다고 누가 용서할 줄 알아? 당신은 죽어서도 용서받지 못해!”
절규에 가까운 렌델로스의 외침이 귓가에서 점차 흐릿해져 갔다.
얼마나 지났을까?
다시 눈을 뜨려 했을 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어둠만이 가득한 세상이었다.
이게 죽음이구나.
회귀자들에게 죽음에 관하여 많은 얘기를 들었지만, 직접 겪어 보니 신기하네.
그런데, 분명 영혼을 바쳐서 안젤라와 마리의 찢어진 영혼을 복원했는데… 어째서 영멸하지 않은 거지?
설마, 실패한 건가?
“실패한 게 아니다.”
누구지?
나를 데리러 온 명계의 차사인가….
“영혼이 찢겨 먼지처럼 사라진 너를 차사들이 어찌 볼 수 있겠느냐?”
지금, 내 생각을 읽은 거로군.
설마? 저분은?
“그동안 업을 많이 쌓았구나. 길을 찾는 아이들을 인도하는 일을 성실히 수행했어.”
카르마를 말하는 것인가…….
결국, 요한과 헤라클레스가 이겼구나.
그래서 관리자로서 얻을 수 있는 카르마를 모두 모은 거고, 하긴 이제는 상관없는 일이다.
제일 아쉬운 건 녀석들에게 축하한다는 말 한마디도 못 해 주고 떠나는 것뿐.
“원한다면, 그 말은 네가 직접 할 수 있다.”
저… 그냥 로니처럼 이대로 사라지면 안 될까요?
“원한다면 그것도 가능하지만 네게는 두 가지 선택을 할 기회를 주마.”
선택?
아니, 지금 내가 세상에 있어 봤자 도움이 될 리가 없다.
그러니 이대로 사라지는 게….
“너를 기억하는 모든 이의 기억을 완벽히 지우고 신이 되거나, 네가 가진 모든 것을 사용하여 네가 파괴한 세상을 다시 돌려놓거나.”
관리자가 꼭 신이 될 필요는 없었나 보다.
다행이네요… 제 선택은 당연히!
* * *
이르카가 사라진 이후 중간계는 수많은 소동이 벌어졌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조용한 나날이 이어졌다.
물론, 조용하지 않은 곳도 있었다.
여러 가지 사건 사고 탓이었을까?
빙의부와 환생부의 관리신들은 모두 변경되었다.
수장부터 관리자까지 모두 변경된 초유의 사태에 모두 쉬쉬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요한과 헤라클레스가 회귀자의 신분으로 신의 지위를 얻은 것이 더욱 큰 영향을 끼쳐 영혼들이 대부분 회귀를 희망하였기에 카르나티우스의 회귀부는 더욱 바쁜 나날을 보냈지만 말이다.
요한은 신의 위치에 올랐음에도 그 지위는 자신에게 과분하다며 내려놓았다.
물론, 이제는 병자들을 치료할 때 피를 토하지 않아 피의 성직자라는 별명은 사라졌다.
물론, 신의 지위를 버리고 묵묵히 봉사하는 그를 향한 찬양은 오히려 그를 더욱 신에 가깝게 만들고 있었지만 말이다.
아르한은 요한을 도와 그를 신의 지위에 올려놓음으로써 홀가분하게 떠나 동족을 더욱 번영하게 할 수 있었지만, 요한의 곁에 남는 것을 선택했다.
올림포스와 아스가르드의 지배자로 우뚝 올라선 헤라클레스는 새로운 질서를 만들었다.
더 이상 인간들의 세상에 피해를 끼치지 말 것.
그것이 그가 내린 명령이었다.
수 없는 사고를 치고 다니던 올림포스의 신들은 불만을 표했지만, 최고신 제우스마저 이긴 그에게 대들 용기 있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평화로운 중간계에 정적을 깨는 대화 소리가 도란도란 울렸다.
“아, 그런데 로니 님은 어떻게 된 거야?”
“로니? 환생했잖아.”
“에? 그분은 죽는 게 목적 아니었어?”
“뭐, 가족들이랑 영원히 만날 수 없다고 생각했을 때는 그랬지… 근데 특별히 가족들을 다시 만나 같이 환생할 수 있게 해 주셨다는데?”
“결국 죽지 않는 로니라는 별명은 사라지지 않겠네.”
“뭐, 그래도 이번엔 평범한 인간으로 환생했으니까 괜찮겠지.”
“하긴…….”
말끝을 흐린 여인.
안젤라는 오랜만에 중간계에 발을 들이자 예전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이르카시우스와 함께 지내던 세월의 흔적이 남아 있는 장소를 지나친 뒤.
카르나티우스의 집무실에 들어선 안젤라와 마리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온갖 금은보화로 치장한 그녀의 집무실에는 생전 처음 보는 물건이 가득했고, 식탁에는 천상의 맛을 느낄 수 있다고 알려졌지만, 천문학적인 포인트를 자랑하는 음식들이 즐비했다.
“이, 이게 다 뭐예요?”
“오호호홋! 놀랍지 않니? 이게 다…….”
말끝을 흐린 카르나는 안젤라의 눈치를 살폈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그녀는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요한님이랑 헤라클레스님 덕분이잖아요! 이런 귀한 걸 저희한테 주셔도 돼요?”
“그럼! 내가 제일 예뻐하는 애들한테 이런 건 아무것도 아니란다 어서 먹으렴!”
“그러면 잘 먹겠습니다!”
식탁에 있던 음식들을 모조리 먹어 치운 그녀들은 담소를 나누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얼마나 지났을까?
밖을 보니 이미 태양이 저물고 어두운 하늘에 별이 떠오른 중간계였고, 안젤라와 마리는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 모습을 바라본 카르나티우스는 그녀들에게 말을 건넸다.
“어머, 지금 가려고? 전송해 줄까?”
“아뇨! 괜찮아요. 오랜만에 왔는데 구경하면서 천천히 걸어가면 돼요.”
말을 마친 안젤라와 마리가 허리를 숙여 인사를 건넬 때 카르나티우스가 다급히 그녀들에게 다가가 두 손을 꼭 쥐며 작별 인사를 건넸다.
“어디 가서 굶지 말고. 이걸로 맛있는 것도 좀 사 먹으렴, 그리고 포인트 떨어지면 언제든 연락하고.”
“아이고, 이렇게 챙겨 주실 필요 없으시다니까요. 저희 괜찮아요.”
“집에 안 보내 주기 전에 그냥 넣어 두렴.”
“넵.”
카르나티우스에게 인사를 마친 그녀들이 발걸음을 옮긴 지 얼마나 지났을까?
하늘의 별을 바라보며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던 안젤라의 귓가에 어떤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호갱님 아, 아니! 고객님 왜 회귀부로 가시겠다는 거예요? 저희가 모든 조건을 맞춰 드린다니까요?”
“지금 환생부에 누가 발을 들이겠습니까? 그리고 내 몸으로도 이루지 못한 한이 있소.”
걸음을 멈춰선 안젤라는 옛 기억이 떠오르는지 그 광경을 물끄러미 지켜보기 시작했다.
검은 머리에 선이 굵은 얼굴을 가진 환생부의 관리자는 회귀부로 보내 달라는 영혼의 요청을 듣고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의아하다는 목소리로 질문을 건넸다.
“음? 고객님 몸으로 회귀해서 뭐 하시게요?”
“당연히 세상을 구원해야 하지 않겠소?”
“하아, 고객님… 어떻게 돌아가셨죠?”
“그것도 모르시오? 그야 당연히 마왕의 비겁한 수에 억울하게 목숨을 잃은 거 아니오.”
“흠… 비겁한 수에 억울하게 목숨을 잃으신 게 맞나요?”
“그렇소.”
당당하게 말하는 영혼의 답변을 들은 환생부의 관리자는 한참을 서류를 들고는 계속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또다른 질문을 건넸다.
“이상하다? 전투 데이터를 봤을 때 고객님께서는 방심 같은 건 하지 않으셨는데요? 그리고 그냥 칼질 한방에 목이 날아가셨는데 이게 어떻게 비겁한 수죠?”
“보이지 않는 검에 당했으니 비겁한 수가 아니겠소!”
“그래서 특별히 준비했잖습니까? 보이지 않는 검을 볼 수 있는 신안 능력자의 육체를 말입니다.”
“내 몸으로도 실력을 더욱 키우고 방심하지 않으면 충분히 이길 수 있소!”
“에이, 지금 회귀부가 잘나간다고 그래서 가고 싶으신 거죠? 뭔가 더 지원이 빵빵할 거 같으니까요.”
“…난 그런 속물이 아니오.”
“아이고, 당연히 알죠! 천하의 대영웅을 누가 속물이라고 하겠어요! 그런데 그거 아세요? 원래 회귀부는 환생부 아래였어요. 그리고 고객님도 제자들이 있을 거 아니에요.”
“그렇소…….”
“그러면 잘 아시겠네! 제자들이 한 명 두 명일 때는 막 열심히 가르쳐 줘도 시간이 남잖아요? 그런데 이게 제자들이 많이 늘어나 봐요 어떻게 되나요? 모든 제자들에게 신경을 쓰실 수 있나요?”
“흐음…….”
“그렇다니까요, 회귀부 애들 지금 당장 아주 살~짝 잘나간다고 회귀자들을 엄청나게 받아요. 그러면 지원이 제대로 되겠어요? 당연히 회귀한 지 좀 된 소위 잘나가는 애들 위주로 지원이 가는 거죠.”
일리있는 말이었다.
그런데, 어디서 많이 보던 방식이었다.
아주 그리워지는…….
사무치는 그리움에 눈물을 흘린 안젤라가 자리를 벗어날 때.
환생부의 관리자는 선택할 시간을 주지 않겠다는 듯 더욱 몰아붙였다.
“지금 기회를 놓치면 안 됩니다? 따끈따끈할 때 들어가셔야 해요.”
“흠, 계약하겠소. 대신 지원은 확실하게 약속한 거요?”
“당연하죠! 어서 싸인하시고 좋은 몸에 잘 들어가셔서 꼭 복수하세요!”
“크흠, 그럼 이만…….”
회귀부로 가겠다고 고집을 부리던 환생자가 떠나간 이후 사내는 안젤라와 마리가 자신을 바라보던 자리를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혼잣말을 내뱉었다.
“잘 지내고 있네…….”
똑똑-!
이내 노크를 하자 그는 살짝 어두웠던 표정을 풀고는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로 다음 영혼을 맞이했다.
“환생부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고객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