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화
요한의 희생으로 길가메시의 야망은 시간의 굴레에 멈췄다.
예상치 못한 전개지만, 오히려 요한이기에 납득되는 일이기도 했다.
평소 보여 주었던 요한의 성품이라면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그는 자신을 희생하는 일이 있더라도 다른 이를 구하려 들었을 것이고 그 어려운 일을 너무 당연하다는 듯이 행했던 사내였으니까.
요한은 끝까지 자신의 신념을 지켰다.
멍청한 태양교의 사제들이 불러온 대재앙을 막아 내고 희망이라는 씨앗을 심어 놨으니.
그는 자신의 몫을 차고 넘치게 했다.
이제 남은 것은 단 하나.
헤라클레스가 제우스를 꺾는 것.
사탄은 움직이지 않을 것이다.
전혀 아쉬워할 필요는 없다.
그의 도움이 없었다면 진즉 제우스의 일방적인 승리로 끝이 났을 테지만 지금, 이 상황까지 끌고 온 것은 오롯이 사탄의 힘 덕분이었으니까.
물론, 이 일을 빌미로 나중에 무슨 부탁을 할지 심히 걱정스럽지만, 지금은 그걸 생각하기엔 너무 이르다.
그런데… 저자는 이런 상황에서 왜 이렇게 침착한 것일까?
회색 머리 사내의 표정을 아무리 살펴봐도 아무런 감정이 느껴지지 않았다.
열심히 꾸민 계획이 엉망이 되었다는 것을 보면서 보통 놀라거나 분노할 것이다.
아니, 그런 상황에서 냉정함을 유지한다고 해도 표정에 미묘한 변화는 있어야 정상.
그러나, 사내는 달랐다.
처음 앉았을 때처럼 평온한 표정으로 고고하게 찻잔만 들이켤 뿐.
나라면 오랜 시간을 공을 들여 꾸민 계략 중 첫 번째가 박살이 난 상황에서 이렇게 침착할 수 있을까?
최대한 냉정한 상태를 유지해 태연한 척은 할 수 있겠지만 결코 태연할 수는 없을 것이다.
과연 저자는 태연한 척을 하는 것일까?
아니면, 믿는 구석이 있다는 것일까?
머릿속이 복잡해진다.
내가 놓치고 있는 게 뭘까?
잠깐… 현시대의 제우스가 과거로 갔다면, 과거의 제우스는 어디로 간 거지?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같은 시간대에 같은 존재는 함께 할 수 없다.
빌어먹을, 내가 이걸 왜 놓쳤을까?
너무나 당연한 사실을 왜…….
아니, 인제 와서 자책할 필요는 없다.
최악의 수를 가정해 보자.
현시대의 올림포스 신들은 과거로 갔다.
회귀나 다른 방법을 쓴 것은 아니다.
신을 회귀시키는 방법은 없으니까.
그렇다면, 가장 가능성이 큰 방법은 자기 자신에게 빙의하는 것이지만 그럴 가능성은 지극히 낮다.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고 보는 게 맞겠지.
그렇다면 남은 것은 단 하나.
설마, 길가메시는 버리는 패였던 거냐?
불길한 예감은 항상 현실이 된다고 하던가.
아르카니아의 하늘이 갈라지면서 상상도 하기 싫었던 최악의 상황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아폴론을 필두로 한 올림포스의 신들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것.
아르카니아의 인간들이 숭배하는 태양신의 정체는 아폴론.
그가 신격을 박탈당하고 다른 세계로 잠시 떠났을 때 발견한 세계이기에 올림포스의 영향력이 끼치는 세상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움직일 수 있었던 것일 테고, 무언가 모종의 거래가 있었던 것이 틀림없다.
쉽지 않으리라 생각했지만, 이건 너무 최악인데?
속으로 미소짓고 있을 사내에게 말을 건넸다.
“이걸 꾸민 것이었군.”
“이래야 재밌지 안 그래?”
“올림포스는 왜 이렇게까지 움직이는 거지?”
“당연히, 움직여야지. 자신들의 정체를 알았으니까.”
“정체?”
“뭐, 너도 이미 네가 관리하던 불사자와 길가메시의 대화를 들어서 알겠지만, 그들은 신이 아니거든.”
“창조된 신 말인가?”
“그래, 창조된 신의 가장 큰 문제가 뭔지 알아?”
사내의 질문에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당연히 모른다는 답이 나올 수밖에 없었고, 그 대답은 하기 싫었으니까.
사내는 피식 웃으며 말을 건넸다.
“창조된 신들은 말이야. 인간의 의지에 휘둘려.”
“의지에 휘둘린다라…….”
“생각해 봐. 전지전능한 존재라는 신이 왜 인간의 말에 현혹이 되며, 인간들이나 할 법한 짓을 저지르고 다니겠어? 인간들은 자신의 모습을 투영해서 생각했지, 신은 자신들의 모습을 본 따 인간을 창조했고, 인간은 신을 닮았으니 결국 우리는 신의 거울이다.”
꽤 충격적인 말이었다.
아니, 어찌 보면 당연한 말이겠지.
사내는 이내 찻잔을 내려놓으며 말을 이어나갔다.
“그런데, 아스가르드에 올림포스의 신들이 있던가? 아니, 그곳의 사람들에게 있어서 라그나로크에서 멸망한다고 생각했던 아스가르드의 신이 신일까? 아니면 그들을 모두 죽이고 새로운 신의 자리에 오른 자신들이 생각하지도 못했던 새로운 존재들인 올림포스의 신이 신일까?”
“결국… 저들도 진짜 신이 되기 위한 도박을 둔 것이라는 소리로군.”
“정답.”
“그런데, 도박이라는 건 항상 실패를 염두에 둬야 하는 법 아니겠어?”
“……?”
“넌, 처음부터 신으로 존재했었구나?”
“아아, 나도 창조된 존재 중 하나였지, 지금은 그 굴레를 벗어났지만.”
“그래, 그래서 인간을 너무 우습게 보는군.”
“뭐?”
처음으로 녀석의 표정에 변화가 생겼다.
소름이 끼칠 정도로 완벽한 계획이었다.
너무도 완벽해서 사탄의 개입과 같은 큰 변수조차 대세에 엄청난 영향을 끼칠 수는 없었다.
예정된 결말을 통해 걸어가는 시간을 조금 늘렸을 뿐이니까.
올림포스의 야망을 이용해서 계획한 녀석의 계획은 소름이 끼치도록 완벽했다.
단, 한 가지 인간의 의지를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만 제외하고는 말이다.
오랜 시간 수많은 회귀자들을 만나고 그들의 얘기를 들으며 느낀 것이 있었다.
인간은 예정된 운명을 바꾸기 위해 치열하게 도전하고 실패하더라도 다시 일어나 도전한다.
너무나 힘든 시련에 수없이 쓰러져도, 다시 도전하는 이는 계속해서 나타났다.
그들에게 질문을 건넨 적이 있다.
어째서 터무니없이 실패하더라도 계속해서 도전하는 거지? 뭐, 나야 계약을 충실히 이행해주니 고맙긴 하다만, 조금 다른 방법을 써 보는 게 좋지 않겠어?
대답은 조금씩 달랐지만, 그들이 궁극적으로 하고자 하는 말의 결은 항상 같았다.
이루고자 하는 의지를 꺾지 않으면 언젠가는 길이 보일 것이다.
녀석은 몰랐다.
인간의 의지는 자신이 만든 것을 지키고자 할 때 가장 빛나는 자들이 있다는 것을 말이다.
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지켜보는 것뿐.
저항을 선택한 인간의 의지가 강할지 아니면 그 의지를 꺾을 정도로 강한 힘에 무릎을 꿇을지 알 수 없었다.
그때, 이변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첫 번째 이변은 아르카니아에서였다.
태양교의 첫 번째 배교자.
프란시스는 거짓 된 태양교의 정체를 밝히며 요한과 아르한 그리고 로니가 이 세상을 지키기 위해 싸운 사실을 자신의 목숨과 바꿔 가면서 전했다.
탈진해 죽을 때까지 신성력을 모두 소모하여 사람들의 머리에 그들의 싸움을 보여 준 것.
자신의 의지를 관철하기 위해 목숨을 버린 그의 숭고한 희생은 모습을 드러낸 태양신이 거짓된 신이라는 것을 방증했다.
그리고 그때.
길가메시의 몸 안에서 새하얀 날개를 지닌 존재가 모습을 드러냈다.
흡혈귀의 굴레를 벗어던진 요한은 그 누구보다 신성한 모습으로 올림포스의 신들을 막아섰다.
그 모습을 똑똑히 지켜보던 사내는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어, 어떻게 한낱 흡혈귀 따위가…….”
어찌나 놀랐는지 말까지 더듬는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저주받은 존재라는 이유로 세상에 핍박을 받던 존재가 자신이 아끼던 세상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쳤다. 어디서 많이 들어 본 얘기 아냐?”
“…….”
“세상을 구하고 신으로 거듭난 이와 거짓과 날조 그리고 세상을 파괴하려고 했던 신 둘 중에 누가 더 많은 자에게 숭배를 얻을 수 있을까?”
물론, 올림포스의 신들이 세상을 파괴하려고 했던 것은 아니다.
이건 잘 포장하면 되는 일.
어차피 8할의 거짓에 2할의 진실을 섞으면 모든 것이 진실로 보인다.
예상하지 못했던 결과지만, 이럴 때 이용하지 않으면 안 된다.
흔들리는 사내를 더욱 압박해야 그가 안젤라와 마리에게 신경을 쓰지 못할 테니까.
요한 아니, 이제는 요한님이라고 불러야 하나?
나도 모르게 헛웃음이 나왔다.
훌륭했다.
그는 정말 세상을 구원하는 자가 되었다.
그때, 아스가르드에서도 이변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두 번째 이변.
거칠게 몰아붙이는 제우스의 벼락을 묠니르의 힘을 이용해 힘겹게 저항하던 헤라클레스는 만신창이가 된 채 겨우 두 발을 땅에 붙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비틀거리는 헤라클레스를 보고 입꼬리를 올리며 비웃은 제우스가 녀석에게 그 어느 때보다 강렬한 뇌전의 기운을 쏟아 내었다.
그때, 제우스의 손에 쏜살같이 날아간 번개가 갑자기 요동치기 시작했다.
거친 북부의 번개는 제우스가 평소에 다루던 번개와는 조금 달랐고 그 힘은 헤라클레스를 지나쳐 아스가르드를 뚫고 인간들이 사는 중간계를 향해 뻗어 나갔다.
생전 처음 보는 거대한 벼락은 인간들의 그들이 생각한 신들과 인간의 최후인 라그나로크보다 더 큰 충격을 선사했고, 이제 모두가 끝이라고 생각한 순간이었다.
비틀거리던 몸으로 겨우 버티던 헤라클레스가 어디서 그런 힘을 얻었는지 인간들이 사는 세상을 향해 떨어져 내렸고.
묠니르를 하늘로 들어 올리며 거대한 벼락을 혼자 힘으로 받아 내기 시작했다.
역부족이었을까?
북부의 거친 번개를 제어하는 힘을 지닌 묠니르였지만, 너무 거대한 힘에 서서히 헤라클레스의 무릎이 땅으로 내려앉기 시작했다.
피를 토하는 비명과 함께.
번개를 모조리 몸으로 받아 낸 헤라클레스는 그대로 숨이 끊어졌고.
라그나로크의 최종 승자는 결국, 제우스가 되는 듯싶었다.
그때, 헤라클레스의 주위에 몰려든 인간들은 토르의 신물인 묠니르를 손에 꼭 쥐고 쓰러진 헤라클레스를 향해 눈물을 흘리며 경배하기 시작했다.
처음 있는 일이었다.
신들이 자신들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내건 일은 이제껏 단 한 번도 없었기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희생한 그를 위해 눈물을 흘렸다.
그 눈물이 강을 이룰 정도로 땅을 적시자.
헤라클레스의 몸이 하얗게 빛나기 시작했다.
이윽고 몸을 일으킨 녀석의 모습은 사뭇 달라져 있었다.
제우스와 토르의 모습을 섞으면 저렇게 될까?
올림포스에서 태어났지만, 아스가르드에서 신이 된 존재.
두 세계의 교집합이 생겨난 순간이었다.
올림포스에서는 아직도 헤라클레스를 떠받드는 이들이 많다.
아니, 인간의 몸이 섞인 반신의 몸으로 당시 인간들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던 과제들을 모조리 달성해냈던 헤라클레스는 최고신 제우스만큼 존경받던 존재였다.
그런 헤라클레스가 이제는 아스가르드에서 인간들을 구원해 준 최초의 신으로 추앙을 받는다.
같은 공간에 존재했지만, 너무나 다른 세계에서 살아가던 아스가르드와 올림포스.
그 두 세계의 역사가 헤라클레스라는 한 존재로 인해 합쳐졌다.
헤라클레스 녀석 결국, 나보다 먼저 진정한 신이 되어 버렸네.
이런 일이 과거에도 있었을까?
아니, 아마 최초겠지.
회귀자가 임무를 수행하던 중 신이 되는 일은 없었으니까.
그 모습을 지켜보던 사내의 표정이 차갑게 굳었다.
“…운이 좋았군.”
“그래. 준비는 네가 더 철저했어.”
“조금 재미없군.”
“이런 게 재미 아니겠어?”
모든 패를 다 내보였던 사내는 이내 모든 것을 체념한 듯 허탈한 표정으로 찻잔을 바라만 봤다.
이제, 녀석의 정체를 알아야 할 시간.
비어있는 찻잔에 따듯한 차를 따라 주며 질문을 건넸다.
“너는 누구지?”
“네놈의 손에 가장 사랑하는 것을 빼앗긴 자라고 해 두지.”
“그래, 복수는 정당한 권리니까. 하지만, 그 아이를 이용한 것은 선을 좀 세게 넘은 거 같은데?”
“내가 그 아이를 이용했다?”
“그래, 그 아이의 아픈 과거를 네놈이 알기나 하는 것인지 모르겠지만…그 아이는 그렇게 이용당하고 버림받을 존재가 아니야. 구원을 받아야 하는 아이지!”
참아왔던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에루실라가 그렇게 된 첫 번째 원흉은 바로 나.
그 사실은 변치 않는 진실이었고, 그 아이에게 제대로 된 사과를 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녀의 영혼은 일부가 찢겨 나갔고 비참하게 배신당했다.
철저하게 이용당하다 버려진 것.
위선으로 보일 수 있겠지만, 진심으로 그녀를 구원해 주고 싶었다.
내 얼굴을 물끄러미 지켜보던 사내의 표정이 변했다.
터져 나오는 웃음을 겨우겨우 참아 내듯 몸을 들썩이던 사내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더니 질문을 건네왔다.
“구원? 푸흐흡, 구원이라고? 푸흡, 네가 무슨 자격으로 그녀를 구원해 준다는 거지? 이르카시우스? 아, 미안 너무 웃겨서 말이야.”
“이 사실이 웃기나? 그래, 웃길 수 있지. 과거로 돌아갈 수 있는 회귀자를 관리한다는 놈이 내 실수로 망가트린 세상으로는 돌아갈 수 없으니.”
과오를 잊지 않아야 한다.
아무리 실수라고 해도 실수는 실수.
돌아갈 수 없는 과거는 언제나 나를 옥죄는 원죄의 사슬이었다.
그때 별안간 사내는 웃음을 멈추더니 서늘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설마, 그 저주받은 기억을 잃은 건가?”
“기억을 잃는 반신을 본 적이 있나?”
“이거 재밌네. 카르나티우스가 왜 나를 순순히 보내 줬나 했더니… 거짓 기억을 심어 놨군.”
“뭐?”
갑작스레 나온 카르나 님의 이름에 당혹스러웠다.
순순히 보내 줘?
설마, 카르나 님까지 이 일과 연관이 있다는 뜻일까?
아냐, 나를 흔들기 위한 마지막 발악일 거야.
그때 사내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마저 이었다.
“하긴… 그래, 미쳐 날뛴 용신이 세상을 멸망시킨 일은 어디서 쉽사리 떠들어 댈 수 있는 건 아니니까.”
“…뭐?”
“미쳐버린 용신, 그게 바로 네 정체다.”
말을 마친 사내는 안대를 풀었다.
안대의 안쪽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은 검붉은 색 눈이었다.
적금안.
바로, 용족의 후예라는 것을 똑똑히 알려 주는 너무 선명한 증거였다.
이내 사내의 회색의 머리칼은 나와 똑같은 금발로 변했고, 그 모습은 기억 속에 있던 모습과 너무도 닮아 있었다.
“렌, 렌델로스?”
“난 이미 그 이름을 버렸어. 미쳐 버린 용신 이르카시우스 그 빌어먹을 도마뱀의 피가 내게 섞여 있다는 사실조차 수치스러웠거든.”
“아, 아냐! 그건 네가 세상을 차지하기 위해 날 배신했기에……!”
“내가? 아! 새로 끼워 맞춰진 기억은 그렇게 기억하고 있는 건가?”
“…….”
아무런 말을 할 수 없었다.
내 기억이 조작된 것이라고?
그렇다면 왜?
카르나 님은 왜 나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