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화
길가메시 아니, 이제 더는 사람이라고 부를 수 없을 정도로 기이한 형태로 변한 존재를 바라보던 로니는 짧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후… 최악이로군.”
그만큼 상대가 좋지 않다는 뜻일까?
체념과도 같은 말에 잠시나마 희망을 품었던 늑대인간들은 다시금 절망에 빠져들었다.
길가메시를 상대로 믿기지 않는 강함을 뽐내던 그였지만, 검은 기운과 함께 변한 그의 몸 안에는 세상을 구했던 영웅들의 힘이 그 압도적인 존재감을 드러냈다.
로니를 응원하던 늑대인간들은 생각했다.
이건 그 누가 오더라도 해낼 수 없는 일이다.
아니, 그가 이 세계에 온 순간 이 세계의 구원은 이미 끝난 것과 다름없었다.
그들의 마음 한편에서 희망이라는 불씨가 꺼져가고 암흑만이 가득한 미래가 그려질 때였다.
좌절에 빠진 늑대 인간들을 훑어본 로니가 뭉친 근육을 풀 듯 고개를 좌우로 꺾기 시작했다.
우두둑-!
잔뜩 수축한 근육이 이완되는 소리가 이러할까?
온몸에 쌓인 긴장감을 풀 듯 몸을 푼 로니는 이내 숨을 크게 들이켰다.
후우-하.
후우우—하.
지켜보던 다른 이들은 그 모습을 바라보며 자신도 모르게 따라 하기 시작했다.
긴장을 풀기 위해 숨을 들이켜는 것은 누구나 하는 일이다.
그런데, 조금 다른 것이 있었다.
숨을 들이켜는 시간과 내쉬는 시간의 간격이 점점 벌어지기 시작했다.
처음은 누구나 따라 할 수 있을 정도의 간격이었다면, 나중에는 그 누구도 따라 할 수 없었다.
크헉!
허억!
여기저기서 숨이 터져 나오는 소리에도 마치 석상처럼 꼼짝도 하지 않은 로니는 시간이 멈춘다면 모를까, 심장이 뛰고 있는 동물이라면 그 어떤 존재도 참을 수 없는 시간이 흐른 뒤.
얼마나 지났을까?
숨을 참고 있던 시간만큼이나 기나긴 날숨을 내쉬기 시작했다.
아주 천천히.
끊어지지 않고 나오는 숨결은 그 많은 공기가 어디에 저장되어 있었는지 의문이 들 정도로.
그 상황을 기묘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던 길가메시가 뜻 모를 기이한 미소를 지으며 비웃었다.
시간을 끌어 봤자 소용없는 일.
지금 도와주러 올 자는 아무도 없다.
회색 머리 사내의 계획이 제대로 통했다면 이곳을 신경 쓰고 있는 자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 정도로 큰 사건이 다른 세계에서 벌어지고 있을 테니까.
생각을 마친 길가메시는 점차 흥분되는 기분을 느꼈다.
너무나 오랜 기나긴 기다림이었다.
불사의 풀을 훔쳐 간 유다와의 질긴 악연도 끝이었고, 인간들에 의해 창조된 거짓된 신이 아닌 진정한 힘을 얻어 진짜 신이 되는 일에 단 한걸음이 남았을 뿐이었다.
그는 지금, 이 순간을 충분히 음미하고 싶었다.
황홀경에 빠지기 전 그 짜릿함이 온몸을 감쌀 때의 기분을 오랫동안 즐기고 싶기에 이상한 행동을 하는 로니를 그저 지켜보기만 했다.
힘의 차이는 그 정도로 압도적이었으니까.
얼마나 지났을까?
숨 고르기를 마친 로니는 마치 복싱 선수가 자세를 잡듯 두 주먹을 위로 올렸다.
여인의 허리춤만 한 팔뚝 두 개가 얼굴을 가로막자 마치 견고한 성벽과도 같은 방어벽이 생겨난 것과 같은 착각을 줬다.
그 모습을 유심히 지켜보던 길가메시는 활짝 웃으며 박수를 쳤다.
짝 짝-!
느린 두 번의 박수.
끝까지 저항하는 상대에 대한 칭찬이었다.
일생을 기다려 온 신이 되기 전 마지막 싸움인데 지레 겁먹은 상대가 그대로 포기했으면 가지고 노는 재미가 없었을 테니까.
“그 투지만큼은 칭찬해 주고 싶군! 좋아! 어서 덤비거라! 내가 진정한 신의 힘을……?!”
그때.
어딘가 모르게 서늘한 감각이 길가메시의 몸을 뒷걸음치게 했다.
툭.
착각이었을까?
무언가 볼에 닿는 느낌을 받은 길가메시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로니를 바라봤다.
‘분명… 닿았다.’
그는 등줄기가 오싹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등을 타고 흐르는 식은땀은 로니의 공격이 그에게 닿았다는 것을 방증했다.
분명,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로니는 처음 그 모습 그대로 주먹을 위로 올려 방어 자세를 취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어, 어떻게 된 거지? 아무도 저걸 못 봤다는 건가?’
길가메시가 흡수한 영혼들은 모두 최강자의 반열에 오른 자들이었다.
제대로 마음먹는다면 세상을 멸망시킬 힘 따위는 우습게 가지고 있던 자들이 단순한 주먹 공격을 못 봤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
하지만, 그 말도 안 되는 일은…….
퍽-!
또다시 일어났다.
소리는 단 한 번이었지만 길가메시의 몸은 마치 바람에 날리는 허수아비처럼 사정없이 휘청거렸다.
단순한 착각이 아니었다.
보이지 않는 주먹에 여섯 번의 공격을 허용한 길가메시는 경악했다.
“네, 네 놈이! 감히!”
“보이지 않았나?”
“닥쳐라!”
“어? 진짜 이 정도 속도가 안 보였단 말이야? 빛보다는 느렸는데… 너, 약하구나?”
“네놈을 찢어 죽여 주마!”
이성을 잃은 길가메시는 몸을 날려 헤라클레스에게 수많은 주먹을 내리꽂기 시작했다.
퍽퍽퍽퍽-!
쉴 새 없이 울리는 가죽 북 터지는 소리는 일방적인 폭력 아니, 폭행에 가까웠다.
견고한 성벽과도 같았던 로니의 방어는 오래 버티지 못했다.
굳건하게 올려 들었던 방어는 금세 깨져 나갔고 수많은 공격을 허용한 그의 입에서는 피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왔다.
과연 어떤 공격이었을까?
길가메시는 궁금했지만, 어차피 로니의 혼을 강제로 흡수하면 모든 궁금증이 풀릴 터.
이제 강제로 굴복시키는 일만 남았었다.
그때,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무차별 폭격을 하듯 공격을 퍼붓던 길가메시가 갑자기 피 분수를 뿜어내며 뒤로 물러났다.
또, 보이지 않는 주먹이었다.
이성을 잃고 공격할 때는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던 공격이 계속 몸을 두들기고 있던 것.
흐르는 피를 훔친 길가메시는 붉게 물든 이가 보이도록 웃으며 말했다.
“그래! 이 정도는 해야 재밌지!”
“쿨럭! 야…….”
“흐흐, 말할 힘도 없더냐.”
“…코피나 닦고 말해 병신아.”
로니는 다 죽어 가면서 끝까지 도발을 이어 나갔다.
웃음을 멈춘 길가메시는 주먹에 파괴의 힘을 응축시키고는 비틀거리며 간신히 서 있는 로니에게 다가갔다.
“크큭, 그래 짐이 너무 기분을 냈구나.”
“그, 그랬어? 나도 놀아 준 건데?”
“크하하하! 서 있을 힘은 있고?”
“…당연히.”
힘겹게 말을 내뱉은 로니는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다.
하지만, 방심은 금물 만약 보이지 않는 주먹이 급소를 공격한다면 당하는 것은 길가메시 본인일 수 있었다.
상대의 능력은 불로불사.
회색 머리 사내에게 들은 것이니 틀림없는 정보일 것이다.
불로불사라는 것은 어떠한 공격을 당하더라도 죽지 않는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렇다면 이런 무의미한 공격보다는.
상대를 완전히 제압하고 영혼을 빼내 오는 것이 최우선이었다.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로니를 쳐다보는 유다와 다른 일행들을 힐끔 바라본 길가메시는 기왕 공격하는 김에 모두 치워 버려야겠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그 누구도 살려 둘 생각 따위는 없었다.
세상을 지워 버릴 힘을 주먹에 응축시킨 길가메시는 비틀거리며 서 있는 로니에게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힘겹게 겨우 버티고 있는 로니를 차가운 눈으로 바라보던 길가메시는 마지막 말을 건넸다.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은?”
차가운 목소리는 마치, 사형 집행관이 형을 집행하기 전, 죄수에게 유언을 듣는 것과 같은 모습이었다.
힘겹게 고개를 들어 올려 그 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던 로니는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잘 가라.”
“…뭐?”
분명 사형을 집행하는 것은 길가메시였다.
하지만 잘 가라는 말은 집행관이 죄수에게나 할 수 있는 말인 법.
로니의 말에 황당해하던 길가메시에게 아주 자그마한 틈이 생겼고, 그 틈을 타 유다와 아르한이 쏜살같이 그에게 다가갔다.
뒤에서 길가메시를 덮친 아르한이 마치 거머리처럼 달라붙어 그를 움직이지 못하게 하고 유다 역시 봉인의 술을 써 길가메시를 일순간 완벽하게 침묵시켰다.
이내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피 흘리는 로니를 바라본 유다가 말을 건넸다.
“괜찮으십니까? 이거… 얼마 못 버팁니다.”
“흐흐… 이 정도로 안 죽어.”
유다는 마음이 쓰렸다.
웃으며 농을 건넸지만, 그의 상태는 당장 관짝에 들어가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심각했기 때문.
그리고 천금과 같은 기회를 잡기 위해 그가 희생했기에 마음이 편할 수 없었다.
그때 부드러운 미소를 지은 로니가 유다에게 말을 건넸다.
“그럼 시작해 볼까? 요한.”
“…….”
요한의 몸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유다가 아닌 요한이었다.
길가메시와 싸움을 시작하기 전 로니가 했던 행동은 자신의 힘을 끌어 올린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요한과 아르한의 육체에 힘을 나눠 주고 있었던 것.
그러기에 길가메시를 잠깐이라도 제압할 수 있었고 이 기회를 놓치면 두 번 다시 기회가 오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요한의 마음은 편치 않았다.
마땅히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다른 이에게 떠넘긴 기분을 지울 수 없었다.
상념에 빠진 요한을 물끄러미 바라본 로니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난 죽고 싶어서 이곳에 온 거라니까? 그러니 슬퍼할 필요 없어. 오히려 난 지금 기분이 너무 좋아.”
“…….”
요한은 침통한 심정에 아무런 말을 하지 못했다.
할 수 없었다.
자신의 영혼을 희생하여 길가메시와 함께 사라지겠다는 말은 그 누구보다 숭고해 보였으니까.
그런 요한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는 커다란 손으로 요한의 어깨를 격려하듯 툭 쳐 주고는 잠시 봉인이 된 길가메시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럼, 가 볼까.”
마치 산책하러 나가는 것처럼 말한 로니는 갑작스레 자신의 가슴을 향해 손날을 찔러 넣었다.
푹-!
솟구치는 피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오고 난 뒤.
그의 손에 들려 있는 것은 놀랍게도 세차게 뛰고 있는 붉고 뜨거운 심장이었다.
자신의 심장을 꺼내 들고는 하늘을 물끄러미 바라본 로니는 중얼거리듯 이제 곧 갈게라는 말을 내뱉은 뒤 길가메시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축하한다. 소원을 이뤄서.”
이게 무슨 소리일까?
다른 일행들이 당혹스러운 감정을 감추지 못하는 사이.
로니는 길가메시를 붙잡고 있던 아르한을 바라보며 비키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요한과 마찬가지로 씁쓸한 표정을 지은 아르한이 멈춰 있는 길가메시에게 떨어지자 그는 아주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봉인의 힘만으로는 완벽하게 멈출 수 없기에 아르한이 계속 붙잡고 있었던 것.
이제 조금 있으면 봉인이 풀리고 길가메시가 다시 움직일 것이다.
자신의 심장을 바라보던 로니는 놀랍게도 심장을 길가메시의 심장이 있던 위치에 찔러 넣었다.
푹-!
길가메시의 안에서 뜨겁게 뛰고 있는 자신의 심장을 바라본 로니는 고개를 돌려 요한과 아르한을 바라보며 활짝 웃으며 외쳤다.
“봉인 해제!”
길가메시의 봉인이 해제됨과 동시에 로니의 몸이 앞으로 천천히 고꾸라졌다.
누구보다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는 로니의 얼굴을 바라본 요한은 봉인이 풀린 길가메시를 바라봤다.
놀랍게도 길길이 날뛸 줄 알았던 그는 초점이 없는 공허한 눈으로 하늘을 올려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본 요한은 로니와의 대화를 다시금 떠올렸다.
‘녀석이 원하는 건 불로불사의 힘이야. 나는 녀석과 강제로 융합을 시도해서 이 힘을 줄 거야.’
‘…그게 무슨 소리십니까?’
‘당연히, 계약을 통한 융합이 아니니, 불안정한 융합이 될 거고, 녀석은 내 기억을 선택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모든 시간을 볼 수밖에 없어. 그 긴 시간 동안 녀석은 움직이지 못할 거다.’
‘그러면 당신은 죽지도 살지도 못한 채로 남게 되는 거 아닙니까?! 그런 위험한 일을 떠넘길 수 없습니다!’
‘녀석의 정신은 무조건 붕괴할 거다. 이건 사람이라면 견딜 수 없는 거라서 말이야. 그러면 펑-! 내 영혼도 같이 소멸하는 거야.’
‘그럴 수는 없습니다.’
‘내 소원은 죽음을 맞이하는 거야.’
‘…….’
‘그러니 부탁한다.’
로니의 각오는 단호했고.
요한은 그가 과거의 육신으로 돌아오면서까지 이루고자 했던 목표를 차마 방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가 다시금 영원에 가까운 고통에 빠지게 할 수는 없었다.
그러려면 그가 쓸 방법은 단 한 가지.
‘이르카 님 죄송합니다.’
바로 희생.
결심을 마친 요한의 몸에서 피가 솟구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