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화
라그나로크가 한창 진행 중인 아스가르드.
신들의 황혼이라는 이명에 걸맞게 치열한 사투가 벌어지고 있었지만…….
전황은 아스가르드의 신들에게 매우 불리했다.
수많은 거인족과 괴물들에 힘겹게 맞서 싸우고 있던 아스가르드의 신들은 갑작스레 나타난 올림포스 신들의 방해로 하릴없이 밀리고 밀려났다.
과거, 올림포스의 영웅이었던 헤라클레스는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온몸에 피 칠갑을 한 채 번개에 지져지고 불에 그을린 육체와 그 여파로 산발이 된 머리를 휘날리며 곤봉을 열심히 휘둘렀지만, 그의 공격은 제우스에게 닿지 않았다.
상황을 유심히 지켜보던 칠흑같이 어두운 검은 머리의 여성이 이맛살을 찌푸리며 옆에 있는 사내에게 말을 건넸다.
“이건 규정 위반 아닌가요?”
“흠… 엄연히 말하자면 규정 위반이지만, 빠져나갈 꼼수는 차고 넘치지.”
“엄연히 별개의 세계잖아요? 그곳을 다른 세계의 신들이 개입해서 과거를 바꾸는 건데 어떻게 빠져나갈 수 있죠?”
“빠져나갈 수 있지, 원래라면 오딘은 이미 죽었어야 했어. 그런데 살아 있잖아? 펜리르는 보이지 않고.”
“아……?”
사내의 말대로 애꾸눈의 현자 오딘은 궁니르를 날리며 거센 저항을 이어 나가고 있었다.
그는 재차 다른 곳을 가리키며 설명을 이어 나갔다.
“헤라클레스 녀석이 엄청 바쁘게 돌아다니긴 했나 보군, 저길 보아라. 프레이르는 승리의 검을 가지고 있잖아?”
사내의 말처럼 프레이르는 스스로 자아를 가지고 움직이는 검을 이용해 거인들을 학살하고 있었다.
확실히 올림포스의 신들이 아니었다면 결과가 어떻게 바뀌었을지 모르는 상황.
모든 상황을 인지한 여인은 그래도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조심스레 사내에게 말을 건넸다.
“그래도 여전히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이건 헤라클레스 님이 바꾼 역사잖아요? 그거랑 올림포스의 신들이 등장하는 거는 전혀 다른 얘기 아닌가요? 신화 자체가 다르잖아요.”
“너도 아직 멀었구나. 과거가 바뀌었으니 미래도 바뀔 수 있는 법 아니겠니? 그리고 모든 신화라는 건 원래 한 갈래였으니까 저들이 충분히 개입할 수 있지.”
“네?”
“어이쿠, 이러다가 늦겠다. 어서 가자 진아야.”
“네, 사부님.”
검은 머리의 여인 성진아는 사탄의 말에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그가 했던 말을 다시 곱씹어 생각했다.
‘하긴, 원래라면 다른 곳에 있어야 했을 헤라클레스 님이 이곳에 왔으니 올림포스 신들이 이곳에 오지 말라는 법은 없지, 그런데 모든 신화가 원래 한 갈래라는 건 무슨 뜻일까?’
여전히 풀리지 않은 의문을 가진 채 사탄의 뒤를 따라나선 성진아는 이내 오만하게 하늘을 밟고 서 있는 올림포스의 신들을 노려봤다.
회귀를 끝마치기 전.
그들이 얼마나 악랄하게 괴롭혔는지 기억하고 있던 성진아는 끓어오르는 화를 겨우 삭이며 속으로 되뇌었다.
헤라클레스에게 당한 것도 있었다며…….
물론, 이르카에게 받은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서는 위기에 처한 헤라클레스를 도와줘야 하기에 사소한 원한은 생각하지 않기로 했지만.
커허어엉-!
태초의 짐승이 내지르는 포효가 이러했을까?
헤라클레스는 상처 입은 야수처럼 괴성을 내지르며 곤봉을 정신없이 휘두르고 있었다.
머리가 터진 거인의 비산하는 뇌수와 피가 하늘을 뒤덮을 때.
콰광-!
하늘에서 또 지긋지긋한 벼락이 떨어져 내렸다.
“이런 우라질!”
일대일의 상황이었다면 충분히 피했을 것이다.
하지만, 압도적인 물량을 자랑하는 거인족들이 계속해서 덤벼들었고 그들을 처리하는 사이 교묘하게 떨어지는 벼락은 강인한 육체로 받아 낼 수밖에 없었다.
‘이거 조금 위험한데…….’
곧 떨어지는 충격과 그 사이에 육체를 물어뜯을 거인의 공격에 대비하려던 찰나였다.
쾅-!
투둑.
폭죽이 터지는 소리와 동시에 무언가 땅으로 떨어져 내리는 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몸을 관통하는 커다란 충격이 느껴지지 않자 헤라클레스는 다급히 곤봉을 휘둘러 앞을 가로막은 거인들을 처리하고는 주위를 살펴봤다.
땅에 떨어진 것은 거대한 거인의 육체였고, 마치 타 버린 고깃덩이처럼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뭉개진 상태였다.
헤라클레스는 혹시 비다르가 도와준 것인가 하고 재차 그를 찾기 위해 주변을 둘러봤고,
그의 눈에는 생각지도 못한 인물이 서 있었다.
“성진아…….”
“오랜만입니다. 헤라클레스 님.”
“인사는 나중에 하고! 흐압!”
재차 몰려드는 거인족들을 향해 흉포한 기세를 담아 곤봉을 휘두르자 그들은 그 기세에 놀라 움츠러들었다.
혼자서도 거의 무적에 가까운 힘을 보여 준 헤라클레스였기에 지원군이 온 이상 펜리르나 요르문간드급 괴물이 나와야 상대할 수 있다고 생각한 거인족들이 뒤로 물러났다.
그제야 조금 여유가 생긴 헤라클레스는 숨을 고르며 성진아에게 질문을 건넸다.
“로니의 대타로 온 것이더냐?”
“네, 이르카 님의 부탁을 받았으니까요. 싫어도 어쩔 수 없지요. 제가 그분의 부탁을 어떻게 거절하겠어요.”
“말에 뼈가 있군…….”
“예전에 저를 괴롭히신 일은 아직 똑똑히 기억하고 있답니다.”
“뭐, 나도 내가 해야 할 일을 해야 했을 뿐이니 사과는 하지 않겠다만… 어쨌든 지금 상황은 눈에 보이는 그대로다.”
“확실히 좋은 상황은 아니네요.”
“후우- 그래, 아버지가 이렇게 나올 줄 몰랐어.”
“괜찮아요. 저 혼자 온 건 아니거든요.”
“뭐?”
성진아는 올림포스의 신들이 있는 곳을 손가락으로 가리켰고 헤라클레스의 시선은 자연스레 그곳을 향했다.
놀랍게도 그곳에는 제우스와 기묘한 대치를 하는 한 사내의 모습이 있었고 이내 사내의 정체를 한눈에 알아본 헤라클레스의 동공이 동그랗게 떠졌다.
지옥의 절대자 사탄.
그 이름의 무게를 아는 자는 모두 똑같이 반응했을 것이다.
헤라클레스 역시 살짝 떨리는 목소리로 성진아에게 질문을 건넸다.
“사… 사탄님이 이곳에 오셨다고?”
“원래는 구경만 하러 오셨는데 어쩌다 보니 상황이 이렇게 되었네요.”
“그래, 그렇게 되었군. 좋아. 잘하면 해 볼 만하겠는걸? 사탄님 밑에서 수련은 많이 했느냐?”
“이제 제가 헤라클레스 님보다 강할지도 몰라요.”
무덤덤한 표정으로 말하는 성진아를 힐끔 바라본 헤라클레스는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그런 말을 하는 걸 보니 아직 멀었군.”
“응? 그게 지금 도와주러 온 사람한테 할 말이에요?”
“이르카도 똑같이 말했을걸?”
“그, 그건.”
성진아의 약점이 이르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는 헤라클레스는 히죽 웃으며 그녀를 바라보고는 앞쪽에서 불타는 검을 휘두르며 아스가르드의 신들을 도륙을 내고 있던 수르트를 향해 외쳤다.
“수르트!! 한 명의 인간! 헤라클레스가 간다!”
헤라클레스의 상처 입은 등을 보던 성진아는 생각에 빠졌다.
한없이 나약해진 인간의 육신으로 돌아온 그의 모습이 오히려 강대한 반신의 힘을 뽐내던 과거보다 더욱 위대해 보인 것은 착각이었을까?
지금은 그를 도와 움직여야 할 시간.
서둘러 걸음을 옮긴 성진아는 무서운 속도로 헤라클레스를 따라가기 시작했다.
헤라클레스와 성진아가 수르트에게 돌진하는 모습을 힐끔 지켜보던 사탄은 여전히 오만한 표정을 짓고 있던 번개의 신 제우스에게 말을 건넸다.
“이봐, 제우스 인제 그만 내려놓지 그래?”
“허, 남의 집안사에 껴들어 놓고 이게 무슨 행패지?”
“자꾸 이렇게 나오면 실력행사를 해야 하잖아. 우리가 여기서 싸움이라도 벌여 볼까?”
“호오, 나와 내 형제들을 이길 자신은 있고?”
“내가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혼자서는 무리겠지?”
“그러면 집안일을 마무리 지어야 하니 비키시게. 자네를 해치면 곤란하니 말이야.”
“누굴 해치워? 나를?”
“못 할 것 같나?”
“노망났어?”
절대자에 가까운 신과 악마의 대화라고 하기에는 굉장히 유치한 말싸움이 이어지자 뒤에서 인상을 찌푸리고 있던 근육이 튀어나올 것 같은 거구의 신 아레스가 불같은 성질을 못 이기고는 크게 외쳤다.
“감히! 아버지에게 그게 무슨 말버릇이냐!”
“근육 돼지는 빠져.”
“네 이놈!”
쾅-!
눈을 깜박할 새도 없었다.
굉음과 사라진 아레스는 처참한 몰골로 땅바닥에 나뒹굴고 있었다.
놀란 올림포스의 신들의 시선을 받은 사탄은 위에서 아래로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거참, 시끄럽게 쫑알대네.”
“……!!”
짜증이 잔뜩 담긴 말투로 중얼거리듯 말한 사탄은 이내 자신의 손에 묻어 있는 광혈이 더러운지 툭툭 털어냈다.
흩날리는 하얀 광혈과 함께 손에서 툭 하고 떨어진 선 분홍빛의 혓바닥을 발로 짓이긴 사탄은 다시 제우스에게 시선을 맞추고는 능청스럽게 말했다.
“이거 미안하네, 집안일은 집안사람에게 맡겨야 하는데 내가 벌레 한 마리는 먼저 잡았어, 괜찮지?”
“……지금 이게 무슨 뜻인지 알고 있겠지?”
“당연히 알고 있지.”
태연자약한 사탄의 모습을 바라보던 제우스가 눈썹을 꿈틀거리며 구름 의자에서 몸을 일으킬 때.
사탄은 붉은 보석을 꺼내 들며 말했다.
“재밌어. 지금 시간대의 너희들은 그 당시의 힘밖에 못 쓰지?”
“네놈 하나를 처리하는 건 문제도 아니다.”
“그래, 나 혼자라면 가능하겠지.”
“그래, 네놈 하나쯤은…….”
사탄의 말에서 느껴지는 꺼림칙한 기운을 알아챈 제우스가 말을 끊자 사탄은 히죽 웃으며 말을 이어받았다.
“이거 어쩌나? 악이라는 건 말이다… 언제 어디서나 존재했고.”
말꼬리를 흐린 사탄은 씨익 웃으며 손을 위로 들었다.
딱-!
그의 손가락 튕김과 동시에 붉은색 문이 하늘에서 열리더니 수많은 악마가 쏟아져 내렸다.
하나의 장관과도 같은 모습을 바라보던 올림포스의 신들은 뒤이어 나타나는 수많은 악마 대공들을 바라보며 똥 씹은 표정으로 변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사탄은 히죽 웃으며 말을 마저이었다.
“언제나 너희보다 강했거든.”
“흠, 이해할 수 없군, 왜 이 일에 이렇게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거지?”
제우스의 질문에 사탄은 온몸에 화상을 입으며 수르트와 맞서 싸우고 있던 성진아를 가리키고는 말했다.
“쟤를 진짜 악마로 만들어야 하니까.”
“고작?”
“크큭, 인간의 몸으로 신의 경지에 올라서려는 자를 보고 고작이라니, 이러니 네가 진짜 신이 될 수 없는 거야.”
사탄은 성진아를 처음 봤을 때를 떠올리자 재차 황홀함에 떨었다.
그 아름다운 순수한 악으로 변할 수 있는 영혼을 최대한 빨리 취하고 싶었다.
‘아아… 빨리, 더 빨리 강해지렴.’
차오르는 흥분을 겨우 가라앉힌 사탄은 희생양이 되는지도 모르고 오만한 표정을 짓고 있는 제우스와 올림포스의 신들을 바라봤다.
세상에 진리로 받아들여지는 사실이 하나 있다.
인간은 결코 신을 이길 수 없다.
실제로 인간의 육신으로 신을 이긴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아니, 불가능했다.
인간들이 상상한 신이라는 존재는 절대적인 힘을 지닌 존재들이었으니까.
하지만, 인간의 몸으로 그 불가능한 일을 이뤄내 말로 표현이 불가능한 경외를 받을 때.
그들은 신이 될 수 있다.
그것도 창조된 신이 아닌 자신의 힘으로 이뤄 낸 진짜 신의 경지에 말이다.
‘너무 오래 걸렸어.’
악은 언제나 강하다.
하지만, 자신보다 강자에게 도전하는 악은 거의 없다.
아니, 현재 지옥을 다스리는 삼군주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없다.
배신, 모략 등으로 삼군주들을 절대자의 위치에서 끌어내려고 한 악마들은 간혹 있었지만, 모두 처단당했고, 그러한 방법으로는 다른 인간들과 악마들에게 경외심을 얻어 낼 수 없다.
이제 그 불가능에 도전하는 악이 있다.
그리고, 그 악은 더욱 거대해져 마계의 힘을 더욱 융성하게 할 것이다.
사탄은 히죽 웃으며 제우스에게 말을 건넸다.
“집안일은 집안사람에게 맡겨야지. 그러니 여기서 나랑 놀고 있자고. 제우스와… 떨거지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