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화
시작하자는 말이 끝나기 무섭게 달려든 에루실라의 검 끝은 꽤 날카로웠다.
먹잇감을 사냥하는 뱀의 움직임을 본뜬 것 같은 현란한 횡 베기를 몸을 숙여 피하자 곧바로 이어지는 연속 찌르기 공격에 재빨리 뒷걸음질을 쳤다.
푸른 섬광과 함께 다시금 앞으로 내지르며 추격해 오는 성검 명월을 바라보며 천부령을 발동시켰다.
우웅-!
작은 떨림과 함께 왼손에 폭풍의 기운을 담은 뒤.
쩌엉-!
추격해오는 검을 폭풍의 힘이 담긴 손날로 쳐내자 그녀는 반동을 이기지 못한 듯 두세 걸음가량 뒷걸음질 쳤다.
지이잉--!
사정없이 떨리는 검날을 바라보던 그녀는 이내 검을 위에서 아래로 휘둘러 떨림을 잡아냈다.
이내, 기묘한 대치 상황이 이어졌다.
스산한 눈빛으로 쳐다보는 그녀의 눈동자를 물끄러미 쳐다보자 뭔가 이상했다.
공격이 확실히 날카롭다.
속에 품고 있는 강력한 원한이 실린 만큼 하나하나가 치명적인 공격뿐.
하지만, 치명적인 공격이라 할지라도 결국 닿지 않는다면 의미는 없다.
안젤라와 마리가 왜 그렇게 쉽게 당했을까?
그 아이들이 그렇게 기척도 없이 당했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다.
그녀들은 약하지 않다.
더군다나 마리는 성배의 힘을 이용할 수 있는데…….
아니, 성배가 그녀 자체니까 더더욱 이상한 일이었다.
분명 파괴신의 힘은 강하다.
전쟁의 신이라 불리는 신들 역시 파괴를 관장하지만, 그들의 힘은 결국 파괴를 통해 세상을 정화하고 균형을 이루게 하는 것에 의의를 둔다.
반면 파괴신의 힘은 말 그대로 파괴 그 자체.
대상을 소멸시키는 데 최적화된 힘.
창조 따위는 신경 쓰지 않는 절대적인 파괴와 소멸만을 위해 힘을 쓰는 파괴신의 힘은 그 정도로 위협적이다.
물론, 정화 자체가 불가능해진 세상을 완전히 소멸시키기 위해선 파괴신이 필요하다.
멀리서 찾을 것도 없었다.
우리엘 역시 심판의 천사이자 파괴의 천사가 아니던가?
하지만, 이곳은 관리자들이 머무는 중간계.
다른 신들의 눈길이 닿는 곳이다.
중간계에 그들이 쳐들어온 것을 천계나 마계의 신들 그리고 관리자들의 관리자인 카르나 님이 모를 리가 없다.
가만? 그러고 보니 왜 카르나 님은 이곳에 나타나지 않는 것일까?
그때였다.
파앙-!
공기를 가르는 날카로운 파공성과 함께.
다른 생각에 잠겨 있던 몸을 다급하게 뒤로 날렸다.
핏-!
완벽하게 피하지는 못한 듯, 볼에서 칼에 베인 듯한 화끈거리는 통증이 느껴졌다.
아, 칼에 베인 게 맞구나?
이거 꼴이 우습네.
잠깐 다른 생각을 하느라 이 싸움에 온전히 집중하지 못했다.
볼에서 흐르는 붉은 피를 손으로 훔치며 정면을 똑바로 바라봤다.
어느새 역수로 검을 쥔 에루실라의 모습을 보자 조금 씁쓸해졌다.
언제나 내 적수를 향해 있던 명월의 검날이 나를 향해 있었고, 푸른 검날에 묻어 있는 피는 적의 피가 아닌 바로 내 피였다.
“많이 늘었네.”
“네게 들을 소리는 아닌 것 같은데?”
“뭐, 그래도 실력이 는 건 는 거니까 칭찬은 받아 줄래?”
“…….”
입을 꾹 다문 에루실라는 검을 등 뒤로 돌려 쥐더니 마치 안개에 휩싸인 것처럼 몸이 점차 흐릿해져 갔다.
이내, 마치 그곳에 그녀가 처음부터 없었다는 것처럼 사라지고 난 뒤.
자연스레 한숨이 새어 나왔다.
그녀의 대답을 확실히 들었다.
문답 무용이라는 것이냐…….
그래. 일단, 너를 제압해야 네 뒤에 있는 저자에게 무슨 말을 들을 수 있겠지.
제대로 된 힘을 쓰기 위해 심장을 둘러싸고 있는 룬을 개방하기 시작했다.
파즈즈-!
하나.
치지직-!
둘.
시간 그리고 공간을 지배하는 룬의 힘을 발동시킨 뒤.
촤자작-!
천부령을 발동시켜 혹한의 한기를 더했다.
나중에 마고 신에게는 정말 고맙다고 말해 줘야겠군.
그녀가 건네준 천부령 덕분에 여러 가지 응용 방법이 생겼으니까.
주변의 시공간을 장악해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봉인하는 절대영도(絶對零度)의 술을 발동시켰다.
쩌엉-!
영혼마저 얼려 버리는 시공간 제약의 술법이 발동되는 찰나, 회색 머리 사내의 외침이 같이 크게 울려 퍼졌다.
“그만! 더는 다가가지 마!”
“……읔!”
눈치가 상당히 빠른 녀석이네.
이 힘을 눈치챈 건가?
그래도 절반의 성공이라고 봐야겠지.
에루실라는 사실상 전투 불능 상태에 가까워졌으니까.
그녀는 열심히 팔을 움직이려 했지만 검을 쥔 팔이 완벽하게 얼어붙어 전혀 움직이지 않아 보였다.
아니, 움직일 수 없을 것이다.
그녀 주변의 공간을 완전히 제약하고 주변을 휘감는 냉기로 움직일 때마다 고통을 주는 술법이니까.
“이… 개자식이 어디서 더러운 술법을!”
“신의 힘이 조금 섞였으니까 더러운 술법은 아닐걸?”
“이익!”
“움직이지 마! 팔을 영영 못 쓰게 될 수 있으니까.”
움직이지 말라는 충고에도 억지로 팔을 움직이려고 할 때마다 고통스러워하고 있는 에루실라의 잔뜩 찡그린 표정이 마음 한구석을 무겁게 했다.
착하디착했던 아이가…….
아니, 일단 상념은 넣어 두자.
나중에 추궁해도 되는 문제니까.
일단 남은 건 회색 머리 사내 하나뿐인가?
사내는 에루실라를 지긋이 쳐다보더니 고개를 좌우로 저으며 중얼거렸다.
“역시, 복제품은 어쩔 수 없군.”
“……뭐?!”
놀랄 틈새도 없이 사내는 에루실라 아니, 그녀의 복제품을 향해 손을 뻗었다.
아아악-!
사내의 손에서는 흉포한 파괴의 힘이 나오고 있었고 그 힘에 직격으로 얻어맞은 고통에 찬 에루실라의 비명이 사방에 메아리쳤다.
정말로 그녀가 복제품이라 해도 영혼의 일부.
찢겨 나간 영혼의 조각이 소멸하면 다시는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오지 못한다.
즉, 복제품이 죽은 영혼은… 환생조차 할 수 없다.
다급하게 녀석을 만류했지만…….
“그만둬!”
“나… 나는 네놈에게 복수를……!”
파스스-
쩔그렁-!
재조차 남기지 못하고 사라진 에루실라가 있던 자리에 남겨진 명월이 주인을 잃은 슬픔에 처량하게 떨어져 내렸다.
에루실라가 사라진 자리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회색 머리 사내는 고개를 돌리고는 빙긋 웃으며 말을 건넸다.
“이봐, 화낼 필요는 없잖아?”
“네놈……!”
“어? 이상하네… 분명 네 손으로 죽인 아이잖아?”
“넌, 오늘 내 손에 소멸한다.”
“응? 날 소멸시켜? 네가?”
“그래.”
“재밌네, 뭐 운이 아주 좋다면 소멸시킬 수 있겠지.”
자만심에 가득 찬 녀석의 말을 들으니 겨우겨우 붙잡고 있었던 이성의 끈이 끊어졌다.
“나 이르카시우스 엔카나시온이 명하노니…….”
“근데 너는 여자애들이 어디 있는지 궁금하지도 않은가 봐?”
“…….”
개자식.
서둘러 마력을 회수한 후 녀석을 노려보았다.
까드득-!
얼마나 세게 이를 갈았는지 이가 바스러지는 소리가 먼 곳까지 울려 퍼져 나가는 것 같았다.
참아야 한다.
지금 주도권을 잡은 것은 저자.
조금 전 상황을 봤을 때.
자신에게 위급한 상황이 온다면 인질로 잡은 안젤라와 마리의 목숨이 위험할지 모른다.
잠잠해진 내 모습을 보고 그제야 만족했는지
사내는 능청스럽게 웃으며 말을 건넸다.
“차 한잔할까?”
“최고급으로 주지.”
집무실에 있는 테이블을 손으로 툭툭 털어낸 사내는 의자에 다리를 꼬고 앉았다.
사내의 맞은편에 앉은 뒤 마법 진을 그려 차를 소환했다.
뜨거운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차를 그자에게 건넨 뒤 흥분된 마음을 가라앉히며 그자를 똑바로 노려봤다.
어디서 본 것 같은데……
도무지 기억이 안 난다.
분명 내게 원한을 가진 인물이 분명한데…….
에루실라를 이용할 정도였으니 그 과거의 망령이 분명했다.
사내는 차를 다 마시고는 남아있는 향을 음미하듯 눈을 감더니 이내 기분 좋은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좋은 차로군.”
“넌 누구지?”
“네 죄가 만든 과거의 망령이라고만 말해 주지.”
“내가 지은 죄가 좀 많아서.”
끝까지 말을 빙빙 돌린 사내와 기묘한 대치가 이어졌다.
고작, 나와 대화를 하자고 이렇게 난장판을 쳐놓았을 리는 없다.
무슨 꿍꿍이가 있다는 소리인데…….
그때 사내가 환하게 웃으며 말을 건넸다.
“나는 널 소멸시키기 위해서 온 게 아니야.”
“웃기는군. 대화하자고 이런 난장판을 만들 리는 없잖아? 그리고 다른 신들의 눈은 어떻게 가린 거지?”
“응? 난 가린 적 없어, 그들은 다 보고 있다고.”
“…뭐?”
뒤통수가 얼얼했다.
그러면 카르나 님 역시 지금 이 상황을 모두 보고 있다는 말인가?
그런데 나서지 않는다는 것은 결국 이 사내의 행동에 동조했다는 소리?
무림계에서 녀석을 만났을 때 했던 말이 사실이라는 건가?
아냐, 이것도 날 흔들려는 수작일 것이다.
흔들리는 마음을 붙잡고 녀석을 똑바로 노려봤다.
그러자 놀랍다는 표정을 지은 녀석은 휘파람을 불었다.
“휘유~ 그런 무서운 표정 짓지 말라고. 너무 무서워서 오줌 지릴 뻔했잖아?”
“그래, 그러면 네가 온 목적은?”
순순히 말해 줄 리는 없지.
일단 안젤라와 마리가 휘말리는 건 막아야 한다.
또다시 나 때문에 희생하는 자가 나와서는 안 된다.
특히, 그게 안젤라라면 더더욱.
얼마나 지났을까?
질문을 받은 사내는 빙긋 웃으며 말을 건넸다.
“인간이 언제 무너지는지 알아?”
“죽음.”
“땡! 틀렸어! 어? 아닌가? 뭐, 완전히 틀린 건 아니니까 세모라고 하지.”
사내는 살짝 뜸을 들이더니 회귀자들을 보여 주는 화면을 가리키며 말했다.
“꿈이 무너질 때 가장 처참하게 무너지더라고.”
“…….”
“나는 그걸 네게 선물해 주려고 온 거야.”
사내가 가리키는 화면에는 대적하기 힘들 정도로 강대한 적이 맞이해 고군분투하는 헤라클레스와 로니의 모습이 나와 있었다.
나도 모르게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모두 녀석이 꾸민 일이었구나.
길가메시가 내 이름을 아는 것과 신을 추방하는 힘을 가르쳐 준 것도 녀석의 짓이었다.
심지어 라그나로크에 올림포스의 신들을 끌어들인 것도 녀석의 짓.
당장이라도 이놈을 쳐 죽이고 싶지만, 섣불리 움직일 수 없다.
분노가 정신을 지배하려던 찰나
혀를 적시는 비릿한 맛에 정신이 들었다.
나도 참 웃기네, 피가 배어 나오는 것도 모를 정도로 깨물고 있었다니…….
녀석은 자신만만하게 자신이 준비해 놓은 패를 꺼냈다.
녀석이 준비한 패는 두 가지.
길가메시를 이용해 로니의 영혼을 구속하여 불사의 힘을 빼앗고 로니는 영원히 길가메시 안에서 살아가게 만드는 것.
그리고, 라그나로크의 운명을 크게 바꿔 놓아 아스가르드의 힘까지 제우스가 손에 넣어 세력의 균형을 깨고 헤라클레스가 올림포스의 왕좌를 얻지 못하게 하는 것.
이 두 가지가 이뤄진다면 나는 관리자의 자격을 박탈당할 수 있다.
아니, 박탈당하지 않더라도 나는 무의미한 관리자 생활을 이어 나가게 되겠지.
그것이 얼마나 큰 고통이 될지는 당연한 일.
물론, 이것으로 확실해진 것은 하나 있었다.
녀석은 회귀자들에게 직접적으로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
아니, 끼칠 수 없다는 게 맞겠지.
저자의 힘이라면 로니는 몰라도 과거로 돌아가 현저히 약해진 헤라클레스는 충분히 소멸시킬 수 있었을 것이다.
그는 그러지 않았다.
하긴, 처음 모습을 드러낸 무림계에서도 이철웅을 소멸시키지 않았으니까.
입술이 바짝 말라 왔다.
이건 이제 시간 싸움이다.
녀석이 간과한 사실이 하나가 얼마만큼 큰 틈을 만들 수 있을지 모르지만, 내가 선택한 자들이니 내가 믿어야지.
그때 아스가르드에 핏빛보다 붉은 포탈이 열리면서 등장한 존재가 히죽 웃으며 말하는 모습이 화면에 비쳤다.
[이야, 너만 보냈으면 큰일 날 뻔했다. 저 양반이 여긴 왜 나타난 거야?]
[구경하러 오신 거 아니었습니까?]
[원래는 그랬는데, 이런 재미는 놓칠 수 없지! 이거 원래 벌어졌던 라그나로크의 아담한 스케일은 가뿐히 뛰어넘겠어.]
[사부님… 저희 놀러 나온 거 아닙니다.]
회색 머리 사내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는지 화면에 비친 정겨운(?) 사제간의 모습을 보고 이맛살을 잔뜩 찌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