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화
수차례 격돌이 끝난 뒤 잠시 숨을 고르고 있던 길가메시는 의아했다.
싸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속도.
아무리 강한 힘을 가지고 있더라도 상대에게 명중시키지 못한다면 그건 아무런 의미 없는 헛손질일 뿐이었다.
‘분명 속도는 내가 우위에 있다. 그런데 왜 내 공격이 제대로 통하지 않는 거지?’
빛에 가까운 속도로 가속을 해 봤을 때 분명 거구의 사내는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
대응하지 못하고 공격을 허용하는 상대의 모습을 봤을 때 속도전에서는 그가 확실히 우위라는 방증이었다.
하지만, 이내 자기 생각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눈앞의 상대를 쓰러트려야 한다는 것만 생각했을 때는 제대로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이기 시작했던 것.
완벽하게 먹혔다고 생각했던 공격은 사내에게 아무런 타격을 주지 못한 것 같은 모습이었다.
아니, 타격을 주지 못했다고 보는 것이 맞았다.
자신을 도발하듯 하품을 내쉬며 손을 휘휘 저어 대는 모습을 본 길가메시는 기가 찰 노릇이었다.
‘설마, 공격이 닿기 전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공격을 피한 것인가? 저런 실력자가 왜 아직도 알려지지 않은 거지?’
자신도 모르게 마른 침을 삼키며 길가메시가 재차 숨을 고르고 있을 때였다.
거구의 사내가 머리를 긁적이며 길가메시에게 능청스럽게 말을 건넸다.
“그러고 보니 너 이름이 뭐냐?”
“…본좌의 이름을 모른단 말이더냐?”
“뭐, 내가 꼭 알아야 하는 건 아니었으니까?”
“……오만하구나.”
“어? 그건 강한 놈이 약한데 자기가 강한 줄 착각하고 있는 놈한테 할 수 있는 말 아닌가?”
“…….”
그의 말에 길가메시는 반박하고 싶었지만 하지 않았다.
아니, 할 수 없었다.
실제로 그는 온 힘을 다한 자신의 공격에 버텨 낸 정도가 아니라 우습게 흘려보냈을 정도의 실력자였으니까.
쉴 새 없이 떠드는 거구의 사내를 바라보던 길가메시는 생각했다.
저 오만한 입을 찢어 버리지 않으면 자신의 성을 갈겠다고…….
더욱더 깊어진 냉혹한 눈으로 거구의 사내를 바라보던 길가메시는 그에게 되물었다.
“네 이름은 무엇이냐.”
“나? 나는 로니라고 해.”
“로니… 묘비는 필요 없겠지?”
“응, 나 말고 네 이름이 적힌 묘비가 필요하겠지?”
“……재밌군.”
“근데, 네 이름이 뭐냐… 헉?!”
화들짝 놀란 거구의 사내 로니는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본 것처럼 화들짝 놀랐다.
- 나… 나는 제국 제일의 검사 지크문도… 정, 정의는……
- 내 마… 마법의 힘에 쓰… 쓰러져라.
- 용살… 살자의 힘… 힘을 똑똑히 보아…….
넘실거리는 검은 기운과 함께 길가메시의 몸에서는 수많은 인간의 얼굴이 튀어나왔다.
초점을 잃은 동공과 쇳소리에 가까운 목소리로 계속 같은 말을 반복하고 있는 모습은 혐오스러울 정도였다.
길가메시는 빙의자.
남의 육체에 빙의해 꿈을 이루는 자.
그렇다면 빙의를 당한 자는 어떻게 될까?
보통은 사고를 당하거나 영혼이 빠져나간 육체에 빙의하기에 당연히, 그들의 영혼은 저승으로 인도된다.
하지만, 살아 있는 육체에 빙의했다면?
그리고 빙의를 한 자가 그 영혼의 힘을 조종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자라면…….
지금 길가메시의 몸에서 튀어나온 얼굴들은 모두 길가메시가 거쳐 간 인간들의 영혼이었다.
“하아, 이것들을 모은다고 얼마나 고생했는지 몰라.”
“너, 살아 있는 육신에 빙의한 거냐?”
“설마~ 그러면 저 위에서 날 지켜보고 있을 진짜 신 나리께서 날 가만히 내버려 두셨겠어?”
“그렇다면 그 불쌍한 영혼들은 뭐라고 설명할 수 있지?”
“킥, 죽은 육신에 들어가서 강령술을 쓰면 안 된다는 법은 없잖아?”
“이거 완전히 미친놈이었네?”
길가메시의 방법은 잔혹하면서도 끔찍했다.
꿈을 이루지 못하고 죽은 자의 육신에 빙의한 뒤 강령술을 이용해 그들과 계약을 했다.
네 몸으로 네 꿈을 대신 이뤄 줄 테니까 네 영혼과 함께하고 싶다.
그 말을 들은 육체의 주인은 당연히 그 거래를 받아들였다.
꿈을 이루지 못하고 죽은 자신의 한을 달래 줄 신의 대리인이라고 소개하는 자와 함께 그 꿈의 끝을 보고 싶었다.
그대로 저승에 가기에는 너무나 아쉬웠기에 그 계약을 승낙했고. 그 처참한 결과가 바로 이 모습이었다.
계약은 계약.
문젯거리가 될 것은 없었다.
길가메시의 소원은 그들의 영혼과 함께하고 싶다고 말한 것이었고 그 형태가 어떠한지 궁금해하는 자는 없었으니까.
길가메시는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몸에서 꿈틀거리고 있는 얼굴들을 가리키고는 입을 열었다.
“인사해. 네놈도 곧 여기에 있는 이 녀석들이랑 같이 지내야 할 테니까.”
“재밌군, 가져갈 수 있다면, 가져가 봐라.”
“그래, 나도 재밌어… 왜냐면! 네놈은 끝까지 오만방자하니까!”
쾅-!
사악한 기운이 넘실거리는 길가메시의 공격은 조금 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흉포했다.
* * *
아르카디아에서 벌어지고 있는 비현실적인 상황에 머리가 멍해졌다.
일개 빙의자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강한 길가메시의 비정상적인 힘의 원천.
그건 빙의했던 육신의 원주인들에게 그들의 몸으로 얻었던 힘을 가지게 하고 자신의 영혼에 속박시킨 것이었다.
비인도적이고 비상식적이지만 실제로 그 비정상적인 일이 일어났다.
이제는 회귀자와 빙의자의 싸움 같은 것이 아니었다.
불사의 능력을 가지고 있는 회귀자와 빙의했던 육신의 영혼을 가지고 있는 빙의자 따위는 없었으니까.
이건, 내가 컨트롤 할 수 있는 영역을 아득히 넘어 버렸다.
일단 카르나 님에게 보고하자.
정말로 계약에 문제가 없었는지 아니면, 이 사실을 알면서도 방관할 수밖에 없는 것인지.
서둘러 뒤에 있을 안젤라에게 말을 건넸다.
“안젤라, 일단 카르나 님에게 보고를…….”
아니, 건네려고 했다.
안젤라가 서 있던 자리에는 너무나 익숙한 신성한 푸른색 검을 내게 겨누고 있는 그녀가 있었으니까.
“에루실라…….”
“그 저주받은 입으로 함부로 놀릴 이름이 아닐 텐데?”
“안젤라는?”
“여전히 가증스럽군. 지금 걔를 걱정하는 척하는 거야?”
“그래.”
“역겨운 놈.”
여전히 가시가 돋친 그녀의 말은 내 가슴 한구석이 진 응어리를 아프게 후벼 파내었다.
“이젠 본인을 부정하지 않네?”
“오늘이 네 꿈이 무너지는 날이 될 테니까. 어때? 우리가 준비한 선물이?”
“깜작 선물은 잘 받았는데, 그 선물이 설마, 길가메시 하나로 끝이야?”
“설마, 쟤 하나로 끝이겠어?”
“그치?”
애써 태연한 척 그녀의 말을 받아쳤지만, 등골이 오싹해졌다.
이곳은 내 공간.
내 공간에서 안젤라와 마리가 사라지는 동안 눈치를 채지 못했다.
아무리 로니와 길가메시의 싸움을 지켜보고 있었다고 해도 이것은 말이 안 되는 일.
역시, 길가메시에게 신을 추방하는 힘을 가르쳐 준 게 에루실라와 그 의문의 남자란 말인가?
수많은 고민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충분히 이길 수 있다.
싸워야 한다.
아니, 지금 안젤라와 마리가 어디로 사라졌는지 모르는 이상 싸움을 거는 것은 멍청한 행동이다.
고민은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아니, 정확하게는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내 곁으로 다가온 에루실라가 회귀자들을 비추고 있는 화면 중 헤라클레스가 있는 곳을 가리키며 말했다.
“멍청한 헤라클레스는 꿈을 이루지 못하고 저곳에서 망자가 될 것이고.”
화면 속 헤라클레스는 예상보다 더 빨리 출현한 불의 거인 수르트와 맞서 싸우고 있었다.
하지만, 이미 펜리르는 처리했다.
과거를 바꾸어 이미 사망했어야 할 오딘과 함께 헤라클레스가 수르트를 몰아붙이고 있을 때.
갑자기 하늘에서 벼락이 그에게 떨어져 내렸다.
[크아아아악!]
벼락?
토르가 헤라클레스를 공격할 리가 없는데?
다급하게 화면을 살펴보니, 역시 토르는 요르문간드와 정신없이 일기토를 벌이고 있었다.
헤라클레스의 시선을 따라 움직이는 화면을 바라보자 전혀 예상하지 못한 존재가 그곳에 서 있었다.
바로 제우스.
그것도 그 시대의 제우스가 아닌 현시대의 제우스가 나타난 것.
그는 바닥에 떨어진 헤라클레스를 보며 비웃으며 외쳤다.
[감히! 아비에게 대항하는 멍청한 녀석!]
빌어먹을… 제우스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게다가 더욱 절망적인 것은 포세이돈과 하데스 등 제우스의 형제들이 뒤이어 나타났다는 것.
지원 요청은 한 상태지만, 지금 지원이 간다고 해도 고작 한 명.
그 한 명의 힘이 더해진다고 해서 신계의 한 축을 담당하는 올림포스를 상대로 뭔가를 해 볼 수는 없을 것이다.
아찔하다.
제우스라면 하데스의 힘을 이용해 헤라클레스의 정신이 완전히 망가질 때까지 저곳에서 녀석을 회귀시키고 죽이는 방법을 사용할 것이다.
“로니는 결국 죽지도 살지도 못한 채 길가메시에게 잡아먹힐 거야.”
“…….”
“물론, 저기 멍청한 유다, 요한, 그리고 돼지까지 함께 말이야.”
“돼지가 아니라 아르한이다.”
“흐음~뭐 상관없잖아? 어차피 사라질 이름 내가 알 필요가 있을까?”
묘한 콧소리를 내며 내 볼에 검을 겨누고 있는 에루실라를 보니 씁쓸한 마음이 들었다.
“에루실라… 왜 이렇게 변한 거니.”
핏-!
볼을 만져 보자 뜨거운 피가 흘러내렸다.
갑작스럽게 변한 그녀의 살기에 서둘러 몸을 뒤로 빼지 않았다면 꼼짝없이 베였을 것이다.
검 끝에 묻어 있는 피를 잠시 바라본 에루실라는 고개를 돌려 차디찬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는 입을 열었다.
“역겨운 놈.”
“나도 알아.”
“알아? 네가 뭘 안다는 거지? 내 가족을! 내 동족을! 그리고 우리의 보금자리를 모두 앗아 간 네놈이! 뭘 안다고 지껄이는 거야!”
“그래, 난 그런 역겨운 놈이지. 그래서 신이 되려는 거야. 내가 저지른 죄를 모두 돌려놓기 위해서.”
“죄를 돌려놔? 끝까지 역겹네. 그럼 네 덕분에 목숨을 잃은 아버지는! 나는! 그리고 너 같은 역겨운 놈에게 붙어 있을 수밖에 없었던 불쌍한 내 동생은!”
감정을 쏟아낸 그녀는 곧 어두운 기운을 끌어 올렸다.
그 이질적이고 사이한 기운은 본성이 선한 수호자의 혈통인 달빛 엘프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힘.
그녀의 울분이 섞인 말을 듣고 어떠한 말을 해야 할까 고민했지만, 차마 할 말이 없었다.
그때 무림계에서 봤던 사내가 나타났다.
연기처럼 나타난 회색 머리에 안대를 착용한 사내를 물끄러미 바라보자 어딘가 낯이 익었다.
저자를 어디서 봤더라?
무림계에서 본 게 처음은 아닌 것 같다는 말이지.
“안젤라와 마리는?”
“오, 설마 내가 인질을 잡았을 거로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능청스럽게 대답한 사내는 품에서 거울을 꺼내 들고는 내게 보여 줬다.
그 안에는 곤히 잠든 것처럼 보이는 안젤라와 마리가 있었고 어떠한 위해를 가한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숙녀들은 이 안에서 쉬고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하긴 그 아이가 에루실라의 동생인 걸 알고 있을 테니 허튼짓은 하지 않겠지.”
“여전히 역겹군. 이르카시우스. 이제 와서 그 아이를 아끼는 척? 살려 달라고 애원하던 아이의 목을 잔인하게 꺾어 버린 네놈이?”
애원하던 안젤라의 목을 꺾어 버려?
아니, 생각하지 말자. 이런 심리전에 휘말리면 이길 수 있는 싸움에 패한다.
잠깐 시간을 끌어 볼까?
“놀랍네, 근데 어떻게 이곳에 올 수 있었지? 분명 이곳은 창조신의 영역. 파괴신의 힘을 가지고 있는 너는 이곳에 올 수 없었을 텐데?”
“호오? 내가 파괴신이라?”
“부정하지 못할 텐데? 무림계에서 만났던 네 녀석은 분명 파괴신의 힘을 사용했어.”
“글쎄? 내가 파괴신이라면 내가 어떻게 이곳에 들어왔으며, 또 관리자들이 왜 가만히 있을까?”
태연자약하게 대답하는 녀석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이거, 계속 대화하다가는 내가 말리겠군.
복잡한 생각이 계속 머리를 채워 나가면 안 된다.
머릿속을 비워야 한다.
왼손에 차고 있던 마고신의 신물 천부령을 한 번 흔들었다.
우웅-!
곧 심장을 감싸고 있던 룬과 공명하며 힘을 방출할 준비를 끝낸 천부령의 힘을 받아들이며 말했다.
“일단 붙어 보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