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화
조금 전까지 세상을 부숴 버릴 것 같은 흉포한 기운이 폭주하던 흔적을 찾기 어려울 정도로 평온해진 아르카디아.
갈색으로 보일 정도로 짙은 금발의 사내는 무언가 맘에 들지 않는다는 듯, 바위에 걸터앉아 턱을 괸 채 앞에 있던 검은 머리의 사내에게 질문을 건넸다.
“지루하군, 이 몸이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는 거지?”
“금방 온다고 했으니 조금만 기다리시지요.”
“갑자기 또 존댓말을 한다? 왜? 뭔가 희망이 생긴 거 같아서 이제는 죽기 싫어졌냐?”
“이미 버린 육신을 돌릴 이유도 없지 않겠습니까?”
“허, 네 영혼을 흡수하면? 그 힘이 내게 넘어오지 않겠어?”
“한번 해 보시지요.”
“…….”
검은 머리의 사내 요한.
아니, 요한의 몸을 잠식하고 있는 유다는 나긋나긋한 말투로 그를 도발했다.
길가메시는 건방진 그의 도발을 들었지만 차마 움직이지 못했다.
그는 확신이 서지 않았다.
요한이 가져간 힘을 빼앗기 위해 얼마나 오랜 시간 공을 들였던가?
억겁의 세월을 기다려 온 불로불사의 힘을 회수하는 것이 얼마 남지 않은 지금, 이렇게 기다릴 수밖에 없는 것은 확신이 서지 않아서였다.
이르카의 말을 곰곰이 생각해봤을 때.
그의 말은 다시 한번 재고해 볼 필요가 있었다.
뱀파이어와 늑대인간은 특정 조건이 성립된다면 불사의 존재들이 아니던가?
그들이 유다의 자손이며 그 힘을 나눠 줬다.
또한, 유다는 자신이 노리는 것을 알고 있었을 텐데도 감옥이라는 보호소를 떠나 세상으로 나왔다.
그것도 불사의 육체를 버리면서 말이다.
백 퍼센트가 아니면 영 퍼센트다.
일에 확신이 서지 않는다는 것은 그 일말의 불안 요소가 있기에 그걸 끌어안고 가고 싶지 않았다.
물론, 길가메시는 호락호락한 존재가 아니었다.
오만함 혹은 자만심에 가득 차 이렇게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었다.
‘뭐, 진짜 신은 이런 일에 오지 않을 테니까.’
진짜 신은 이런 일에 개입하지 않는다는 것을 이미 몇 번이나 본 그였기에 당당할 수 있었다.
가짜 신을 추방하는 힘과 빙의부에 오래 있으면서 육체를 갈아타는 방법을 터득한 그였기에 이미 틀어져 버린 빙의부와의 관계는 그리 신경이 쓰이지 않았다.
다만, 온 세상에 퍼져 있는 흡혈귀와 늑대인간을 모두 처단하고 그 힘을 빼앗아야 하는 일이 얼마나 오래 걸릴지 모르기에 그것이 조금 걸릴 뿐.
그때였다.
[이르카: 오래 기다렸다.]
[길가메시: 기다린 보람이 있으면 좋겠군.]
[이르카: 걱정하지 마. 대신 널 조금 시험해 봤으면 좋겠다던데?]
[길가메시: …감히 나를 시험해?]
[이르카: 본인의 힘을 주고 후련하게 떠나도 되는지 시험하고 싶다는데 그건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잖아?]
[길가메시: 웃기는군. 당장 대령해라!]
[이르카: 뭐, 원한다면.]
길가메시는 다시금 생각했다.
어느 날 찾아온 눈이 뭉개진 사내에게 들었던 한 광룡(狂龍)의 과거 이야기와 도망친 뱀 유다에 관한 이야기를…….
‘재밌군,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도 모르고 저리 떠들어 대는 꼴이라니.’
걸터앉아 있던 바위에서 길가메시가 몸을 일으키고 있을 때.
파앗-!
허공에서 눈이 시릴 정도로 빛나는 하얀 문이 열렸다.
쿠웅-!
이어지는 거대한 폭죽이 터지는 것과 같은 소리와 함께 버섯구름처럼 피어오른 뒤 비산하는 먼지가 가라앉을 때까지 얼마나 지났을까?
몸에 묻은 먼지를 털어 낸 근육질의 거한이 투덜거리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에이, 기왕 온 거 폼나게 계단까지 만들어 주면 어디 덧나나?”
이 상황에서 폼을 찾다니?
한없이 태평한 소리에 어이가 없어진 길가메시는 찌푸린 눈으로 사내를 바라보며 말했다.
“내게 불사의 힘을 바칠 놈이 네놈이더냐?”
“……??”
“뭘 그리 멍청한 표정을 짓고 있느냐? 본좌가 두 번 물어보게 하지 말라.”
“뭐야? 이 병신은?”
길가메시를 향해 사내가 툭 내뱉은 한 마디에 길가메시는 화가 나는 것을 넘어 어안이 벙벙해진 표정으로 사내를 멍하니 바라보았고.
“크하하하! 뭐? 불사의 힘을 바쳐? 아주 날로 먹으려고 하네?”
거침없는 사내의 비웃음이 어두운 숲에 메아리쳤다.
“어? 들어 봐라? 내 목소리가 다시 울려 퍼진다?”
“……네 이놈!”
사내의 계속된 조롱에 참지 못한 길가메시가 힘을 모아 주먹을 휘둘렀고.
그의 힘을 똑똑히 봤던 아르한과 나머지 일행들은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그저 신에게 기도할 뿐.
퍼억-!
가죽 북 터지는 소리가 크게 울려 퍼지고 참혹한 현장을 차마 바라볼 수 없었던 이들이 고개를 돌렸을 때.
그 장면을 바라보던 아르한이 떨리는 목소리로 그 장소를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저… 저게 뭐야.”
아르한의 손끝을 향해 시선을 돌린 이들은 곧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목도했다.
“커억-!”
“너, 약하구나?”
“다… 닥쳐라! 이건 짐이 방심해서!”
“응, 그래 빨리 들어와.”
가볍게 내지른 거한의 주먹에 얻어맞아 입에서 피를 흘리고 있는 길가메시와 거한을 번갈아 보던 일행은 너무 큰 기쁨에 환호성이 나올 뻔했지만, 겨우겨우 참아 냈다.
그리고 이어진 일방적인 폭력에 가까운 구타가 나오자 일행은 환호하기 시작했다.
단, 한 명만 제외하고 말이다…….
* * *
길가메시가 비 오는 날 먼지 나게 얻어맞고 있는 모습을 보자 어딘가 모르게 불안감이 엄습했다.
로니가 길가메시보다 압도적으로 강한가?
아니, 로니가 그동안 아스가르드에서 보여 준 전투데이터를 봤을 때 의도적으로 힘을 숨기고 있던 것이 아니라면 길가메시의 힘과 거의 대등하다.
오히려 아직 모든 힘을 드러내지 않은 것 같은 길가메시가 앞서는 부분이 있을 정도였으니 지금, 이 현상은 뭔가 비현실적이었다.
설마 함정?
아니, 함정을 저렇게 리얼하게 연기할 수 있다고?
아니야. 길가메시의 성향을 봤을 때는 전혀 그런 인물이 아니었는데…….
옆에서 환호하고 있는 안젤라와 마리를 보니 더욱 의구심만 켜졌다.
“와! 이거 잘하면 길가메시를 다시 돌려보낼 수 있겠는데요?”
“호오~ 로니라는 아저씨 생각보다 꽤 하네?”
“이르카 님은 안 기쁘세요?”
“어? 어, 그치 로니가 저렇게 강할 줄은 몰랐네.”
“에? 아무런 계획도 없이 저분을 모셔 온 거예요?”
“그건 아니지만…….”
그때였다.
쾅-! 쿠웅!
거대한 폭발음과 함께 무언가 커다란 물체가 날아가 숲속에 처박히는 소리가 울렸다.
역시… 힘을 숨기고 있었나?
길게 뻗은 길가메시의 주먹과 일직선으로 이어진 구덩이에 피를 흘리며 쓰러진 로니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동시에 환호하던 사람들 아니, 늑대인간들도 쥐 죽은 듯이 조용해졌다.
“감히! 본좌를 조롱해?”
“…….”
그가 두려움에 떨고 있는 늑대인간들을 향해 걸음을 옮기려 할 때.
“급한 성질머리는 여전하십니다?”
“뭐……?!”
킁!
유다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울리는 코를 푸는 소리에 길가메시는 자신의 주먹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그 앞에는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져 있었다.
바로 로니가 한쪽 코에서 흘러나오는 피를 바닥에 거칠게 풀어내고는 마치 이제야 몸이 풀렸다는 듯, 목을 좌우로 꺾고 있던 것.
분명 길가메시의 주먹에는 아까 관리신을 처리할 때 사용했던 힘이 담겨 있었다.
그 힘에 직격으로 맞았는데 저렇게 멀쩡하게 일어날 수 있다고?
로니는 분명 길가메시가 자신의 불사를 가져갈 자격이 있는지 시험해 본다고 했다.
길가메시와 로니 둘의 소원은 결국 같다.
불사의 힘을 얻기 원하는 길가메시.
불사의 힘을 버리고 죽음을 바라는 로니.
이건 좀 큰일인데?
로니가 진심으로 싸우지 않을 거로 생각했거늘…….
세 가지 일을 한 번에 끝낼 기회였다.
길가메시의 소원이 이뤄진다면 그의 계약은 종료되며 당분간 현세에는 아무런 영향력을 끼칠 수 없다.
그러면 자연적으로 유다와 요한을 모두 구하게 되면서 조금 해프닝이 있었지만, 결국에는 그들의 소원을 이뤄줄 수 있다.
또한, 로니가 수르트와 같이 소멸할지 안 할지 모르는 불확실한 도박이 아닌, 백 퍼센트의 확률로 그의 소원을 이뤄 줄 수 있다.
갑자기 죽기 싫어진 것일까?
로니의 어디로 튈지 모르는 성격을 계산하지 않은 내 실수일까?
내 상념을 깨기 위해서일까?
호탕한 웃음소리가 화면 너머로 들려왔다.
바로 로니였다.
[크하하하! 너 좀 재밌는 놈이구나?]
[네놈이… 감히 본좌에게 너라고 하였느냐?]
[아? 너무 웃었나? 근데 본좌는 그래도 된다. 어린놈아.]
로니의 도발에 길가메시의 눈동자는 그 어느 때보다 차가워졌다.
그의 살기가 서늘한 한기가 되어 마치 주변을 얼리는 것 같은 착각을 받을 정도였으니.
그때 로니를 노려보던 길가메시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관리자 놈의 말이 사실인 것 같군. 신을 멸하는 힘을 버텨 내는 걸 보니 불사의 힘을 가지고…….]
[얼레? 우리 관리자만 사기를 치는 줄 알았더니 이놈도 사기를 치네? 그게 어떻게 멸하는 힘이냐? 추방하는 힘이지.]
[……!]
[아, 뭐 보통 인간이라면 어차피 맞으면 죽는 건 매한가지라 똑같이 느껴지긴 하겠다. 그치?]
저게 추방하는 힘이었어?
그러면 관리 신이 소멸하지 않았다는 거네?
그래서 다른 분들이 나서지 않은 거였고…….
엉켜 있던 실타래 하나가 풀렸다.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은 엄연히 인간계에서 벌어진 일.
관리 신의 개입은 세계의 파멸을 막기 위해서였지 길가메시를 소멸시키기 위함이 아니었다.
길가메시 역시 관리신을 추방했을 뿐.
그에게 어떠한 위협을 가하지 않았다.
즉, 내가 과거에 행했던 일과는 전혀 다른 결과였기에 카르나 님이나 우리엘 같은 존재가 개입하지 않았다.
아니, 할 명분이 없었다고 보는 게 맞겠지.
어찌 보면 빙의자와 회귀자 간의 싸움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근데 로니는 저런 힘을 어떻게 알고 있는 거야?
의문이 채 가시기 전, 로니는 길가메시에게 말을 건넸다.
[걱정하지마. 난 진짜 신이 아니니까.]
[……!]
[하긴, 내가 너라고 해도 의심할 거 같긴 해 그렇지?]
[…….]
[안심해. 난 과거로 돌아가는 일을 반복하는 불쌍한 회귀자일 뿐이야. 단지…….]
로니는 빙긋 웃으며 말을 마저 이었다.
[세상의 진실을 너보다 빨리 알게 된 인간일 뿐이란다.]
능글맞게 웃고 있는 로니를 화면 너머로 바라보던 안젤라가 갑작스레 질문을 건네왔다.
“이르카 님, 아까부터 궁금했던 건데… 아까부터 말하는 진짜 신이 뭘까요?”
“글쎄…….”
그걸 알면 나도 이렇게 답답하지는 않겠지라는 말이 목 끝까지 치솟아 올라왔다가 다시 가라앉았다.
과연 내가 알고 있던 세상은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까지가 거짓일까?
어지러운 상념은 이런 급박한 상황에도 온전히 집중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녀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리기 전까지는…….
“걱정하지 마, 금방 알게 될 거야.”
“마리? 네가 그걸 어떻게……?”
“얼마 안 남았어. 일단, 네 일에 집중해. 저들의 싸움을 지켜보고 조처하는 게 네 일이잖아?”
그래, 마리의 말처럼 일단 의문은 넣어 두자.
속 시원하게 이 모든 해답을 들을 날이 오겠지.
상념에서 빠져나옴과 동시에 역사에 기록되지 않은 최초의 왕과 기록된 최초의 왕의 싸움이 다시 불붙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