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화
인간이 신의 피조물이 아닌 신이 인간의 피조물?
길가메시의 황당한 말은 내 머릿속을 사정없이 흔들어 놓기 시작했다.
이건 거짓말이다.
신이 어떻게 인간의 피조물이라는 말인가?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는 무의미한 질문에서 달걀이 먼저라는 말과 똑같지 않은가?
아니, 그런 사소한 것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일지도…….
그런데, 이렇게 압도적인 힘의 차이를 보여 준 이곳에서 그가 내게 거짓말을 할 필요가 있을까?
또한, 왜 다른 신들에게 길가메시의 말은 들리지 않는 것일까?
설마?! 카르나 님도 지금 이 상황을 모르는 건 아니겠지?
아니지, 내가 보는 화면은 무조건 공유받는 카르나 님이라면 이 충격적인 모습을 보고 있을 것이다.
그녀에게 물어본다면 어떤 해답이 나오겠지,
서둘러 카르나 님에게 메시지를 보내려 할 때였다.
[지금 이 모든 것이 궁금하지? 그리고 저 간악한 뱀 새끼가 왜 자기가 하지도 않은 일을 꾸며서 벌을 받고 있었는지도?]
천천히 걸어가 근처 바위에 걸터앉은 그는 오만한 표정을 지은 뒤 재차 질문을 던졌다.
궁금한 것이 많지만, 일단은 해결해야 할 문제가 산더미다.
대답은 나중에 천천히 듣기로 하고 일단 시간을 끌어야겠군.
[하지 않은 일을 꾸며? 그게 무슨 소리지?]
[큭, 이 녀석의 주특기를 몰라?]
[뜸 들이지 말고 그만 말하지, 그래?]
[배신.]
배신이라…….
그래, 확실히 유다는 배신자의 상징과도 같은 인물이지.
그런데 길가메시는 자신의 실수가 겹쳐져서 뱀이 불로초를 먹은 거잖아?
그때였다.
조용히 길가메시와 내 대화를 듣고 있던 요한 아니, 유다가 길가메시에게 말을 건넸다.
[당신은 신이 되기엔 너무 잔혹하고 사악했습니다.]
[네놈이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있을까?]
[없지요.]
[그래… 네놈은 나와 똑같은 놈이었다. 별반 다를 바 없었기에 네놈을 믿은 것이고.]
[그 당시에는 그랬지요.]
[그 당시에는? 하! 웃기지도 않는군. 불로불사의 힘을 얻은 뒤 가장 먼저 한 짓이 고작 네놈 안에 있는 잔혹함을 떼어 내서 네 피조물로 늑대인간을 만들고 사악함을 떼어 내서 흡혈귀를 만들어 내는 데 힘을 써?]
[덕분에 저는 그분을 만나지 않았습니까?]
[그 자리는 원래 내 자리였다! 내 것이어야만 했다고!]
[아직도 변치 않으셨군요. 왕이시여.]
길가메시를 향해 갑작스레 무릎을 꿇은 유다가 마치 경배하듯 그를 올려다보더니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그래서 네가 신이 되면 안 되는 거야. 이 병신아.]
[……?]
[……?!]
경배와는 거리가 먼, 전혀 다른 말이었지만….
하지만, 유다의 도발에 길가메시는 크게 동요하지 않았다.
오히려 턱을 괴고는 조소를 날리며 그를 조용히 쳐다봤다.
이거 아무래도 화만 돋운 모양인데…….
잠깐? 길가메시의 말을 종합해 보자면 결국 녀석이 원하는 건 불로불사를 원한다는 것이고 그 힘을 이용해서 신이 되는 것 아닌가?
그렇다면…….
이 방법이 통할지 모르겠지만 도박 수는 던져봐야겠지.
[이르카: 길가메시! 네게 할 말이 있다.]
[길가메시: 닥치거라.]
[이르카: 네가 원하는 건 불로불사의 힘이지? 그 힘을 얻게 해 줄까?]
[길가메시: 내 눈앞에 저 가증스러운 놈이 있는데 이렇게 시간을 주는 것만으로도 황송해야 하는 건 네 녀석일 텐데?]
[이르카: 어? 방금 네 입으로 말했잖아. 그 힘을 유다가 반으로 나눠서 뱀파이어와 늑대인간에게 나눠 줬다고. 그래서 불완전하지만, 어찌 되었든 둘 다 영생을 누릴 수 있고.]
길가메시의 눈썹이 위쪽으로 살짝 꿈틀거렸다.
녀석은 계속 몸을 바꿔 오면서 수많은 세상을 경험해 봤다.
당연히 뱀파이어와 늑대인간의 불멸성에 관하여 모르지는 않을 터.
유다의 안에 불로불사의 힘이 있는지 모르지만,
그는 예전에 자신의 몸을 버리지 않았던가?
이 말을 듣는다면, 길가메시도 거래에 응하지 않을까?
나도 모르게 마른침이 목 뒤로 넘어갔다.
[이르카: 이렇게까지 말해 줬는데 감이 안 와? 유다가 왜 네 앞에서 당당히 있을 수 있는 건지 감이 안 오는 거야?]
[길가메시: 이유는?]
[이르카: 모든 뱀파이어와 늑대인간에게 그 불로불사의 힘을 다 나눠 준 거야. 자고로, 잃을 게 없는 놈이 가장 무서운 법이지.]
[길가메시: 네 놈은… 그 힘을 나눠 줄 수 있다고 생각하나?]
[이르카: 의심이 가면 이 자리에서 당장 유다를 어떻게 해 보든가.]
말을 마치자마자 식은땀이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렸다.
이건 진짜 도박이다.
아주 위험한 도박.
길가메시가 확신하고 있다면 내 말에도 아랑곳없이 유다를 어떻게 하겠지.
하지만, 조금이라도 흔들린다면?
그 틈을 비집고 들어가야 한다.
[이르카: 근데 말이야. 네가 그러면 나도 못 도와줘 아니? 오히려 더 피곤해지겠지. 관리 신을 어떻게 했는지 모르지만, 네 힘을 파악한 내 윗선에서 움직이지 않을까?]
[길가메시: 웃기는군. 그깟 거짓 신 따위 두렵지 않다.]
[이르카: 네가 생각하는 진짜 신이 나선다면? 예를 들어… 유다가 섬기는 그분이라든가?]
[길가메시: …….]
먹혔다.
으드득하며 이가 살벌하게 갈리는 소리만 들릴 뿐 길가메시는 당장이라도 나를 잡으러 올 것처럼 하늘을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이제 슬슬 패를 던져 볼까?
이거 잘하면 쉽게 해결되겠는걸?
헤라클레스 녀석에겐 미안하지만…….
* * *
폭풍과도 같은 눈이 휘날리는 아스가르드의 어느 산에서 두 명의 거한이 살이 에일 듯한 추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한가로이 고기를 뜯고 있었다.
황금색 사자 갈기로 된 모자를 쓴 거한, 그리스의 대영웅 헤라클레스가 고기에 붙어 있던 뼈로 이를 쑤시고 앉아 있던 거대한 근육질의 거한에게 말을 건넸다.
“그런데 계속 궁금했던 건데, 너 같은 경우에 엄밀히 말하자면 이건 회귀가 아니지 않아?”
“쯔읍-응? 아아, 회귀? 과거로 돌아왔으니 회귀가 맞지 않나? 이미 이렇게 과거의 육체로 다른 세계로 간 녀석들이 둘이나 있잖아?”
로니의 반문에 요한과 아르한을 떠올린 헤라클레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과거의 육체로 돌아갔으니 회귀가 맞는 게 건가’라며 중얼거리고 있을 때였다.
“얼마 안 남았네.”
“응? 아, 라그나로크 말이야?”
“그래.”
로니의 중얼거림과 같은 말에 대답한 헤라클레스는 이곳에 온 뒤에 벌어졌던 일을 다시금 떠올리고는 갑작스레 이를 바드득 갈았다.
“생각할수록 열 받네? 이르카 이 빌어먹을 놈은… 어떻게 한 번을 도와주질 않냐? 돌아가면 이놈을 당장……!”
“그만큼 너를 믿는다는 거 아닐까?”
“응?”
“자신이 인정하는 상대가 미래를 바꾸기 위해 신의 육체를 버리고 인간의 육체로 돌아온 거잖아.”
“어? 난 이때도 반은…….”
“알지, 그런데 그 반쪽짜리의 육체는 완벽한 불로불사의 육체가 아니잖아.”
“…….”
어찌 보면 로니의 말이 정답이었다.
사실, 그동안 크게 도움을 바라야 할 일이 많지도 않았거니와 도움이 필요한 일조차 식사와 같은 귀찮음을 해결하기 위해 찾으려고 했던 것.
괜스레 투정 같은 걸 부렸다며 헛웃음을 친 헤라클레스는 어느새 앉아 있던 자리에 누워 있는 로니에게 말을 건넸다.
“예전부터 궁금했는데 너 불로불사라면서? 그런데 왜 회귀를 하는 거냐?”
“불사는 맞는데 불로는 아냐.”
“뭐?”
“뭐, 평범한 인간들 기준에서는 불로불사가 맞아.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아주 천~천히 나이를 먹어 가니까, 결국엔 이 강철 같은 육체도 늙고 병든다.”
헤라클레스는 골똘히 고민했다.
불사의 축복은 받았지만, 불로의 저주를 피해 가지 못해 과거로 돌아가 강인한 육체로 다시 돌아가는 것일까?
그와 같이 지내 온 나날 동안 인정하기는 싫지만, 자신과 최소한 동급에 가까운 강력한 힘을 경험한 헤라클레스는 그에 대해 다시 고민하기 시작했다.
‘하긴, 그 긴 세월 동안 이루지 못한 소원이 없을 리가 없을 테고, 삶이 너무 지루해져서 불사의 몸을 버리고 죽음을 바라는 것일까? 생각보다 단순한 놈이군…….’
그때였다.
등을 돌리고 누워 있던 거한 로니가 벌떡 일어나더니 머리를 긁으며 헤라클레스에게 말을 건넸다.
“난 신이 되고 싶지 않아서 죽고 싶을 뿐이야.”
“뭐……?”
“너는 왜 신이 되고 싶은 거지?”
반문할 틈도 없이 이어진 로니의 질문에 헤라클레스는 골똘히 고민하기 시작했다.
자신이 신이 되고 싶은 이유.
아버지의 폭정을 벗어나기 위해서?
아니면, 자신만의 세계를 가꾸고 싶어서?
여러 가지 의문과 질문이 스쳐 지나갔지만,
명확한 해답은 나오지 않았다.
로니는 그런 헤라클레스를 멀뚱멀뚱하게 바라보더니 말을 건넸다.
“왜 관리자는 반신만 될 수 있는지 알아?”
“어? 글쎄? 아무래도 진정한 신이 되겠다는 열망이 있는 자들을 관리자로 뽑아야 신들의 유희를 도와줄 수 있어서 아닐까? 또, 신의 힘을 아는 자들이니까.”
“그것도 맞겠지.”
그것도라는 대답은 참으로 모호한 대답이었다.
맞거나 혹은 틀렸다고 정답을 내려 준 것이 아니라 다른 사족이 붙을 여지를 남긴 대답에 헤라클레스의 의문은 더욱 증폭되었다.
그때 활활 타오르던 모닥불을 조용히 응시하던 로니는 불 속에 손을 뻗었다.
그리고는 손에서 넘실거리는 불꽃을 자유자재로 가지고 놀더니 헤라클레스를 똑바로 응시하며 조용히 말을 건넸다.
“나는, 내가 원하던 미래와 그 결말을 이미 다 봤거든.”
“뭐?”
“과거로 돌아가 사랑하던 가족을 다시 만나고, 그들이 늙고 병들어 죽는 모습을 보고, 또 보고 세계를 정복한 정복자가 되어 보기도 하고…….”
어딘가 마모되어 있는 것 같은 목소리였다.
그 목소리에 헤라클레스는 깨달았다.
목표가 없는 삶.
그것은 얼마나 공허할지 상상조차 하기 싫은 삶이 아니던가.
그때, 로니가 독백처럼 이어지던 말을 끝마쳤다.
“절대 죽지 않는다는 건 말이야. 병들고 약해진 육체로 내가 사랑하던 것이 모두 사라진 멸망한 세상 혼자 덩그러니 남아도 죽을 수 없다는 얘기야.”
공허해진 로니의 눈동자를 조용히 바라본 헤라클레스는 아무런 말을 하지 못했다.
불사(不死)의 저주
누군가는 축복이라 생각하고, 그 힘을 얻기 위해 극독을 영약으로 착각하고 먹어서 죽을 정도로 탐내지만, 그 축복을 가장한 저주를 한 몸에 받은 사내는 오히려 죽음을 바라고 있었다.
헤라클레스가 씁쓸한 표정으로 로니를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로니는 빙긋 웃으며 헤라클레스에게 말을 건넸다.
“너는 진짜 신이 되어라.”
“그래. 욕망으로 얼룩진 올림포스를 재건하려면 내가 어떻게든…….”
“아니, 제우스처럼 거짓된 신이 아니라 진짜 신이 되라는 말이야.”
“뭐?”
제우스가 거짓된 신이라는 로니의 말에 헤라클레스의 동공은 마치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정도로 확장되었다.
경악한 헤라클레스를 똑바로 바라본 로니는 무덤덤하게 말을 이었다.
“결국, 똑같아. 올림포스, 아스가르드 이 둘을 서로 다르다고 생각하지 마. 이건 인간들이 만들어 낸 재밌는 상상이잖아?”
“…….”
“여기서 재밌는 건 결국, 상상이라고 해도 이렇게 널리 알려진 상상 속 이야기에서 멸망의 역사를 바꾼 존재가 신이 아닌 인간에 가까운 존재라면? 너는 이곳에서 진정한 신으로 거듭날 수 있어.”
충격적인 얘기를 들은 헤라클레스는 어떤 질문을 던져야 할지 몰라 입을 떼지 못했다.
로니는 그런 헤라클레스를 바라보더니 빙긋 웃으며 말을 내뱉었다.
“관리자라는 건 진짜 신이 될 수 있는 존재들에게 세상의 진실에 한 발짝 더 나아갈 기회를 주는 거야.”
“너… 아니 당신은?”
“말했잖아 인간이라고. 다만, 사소한 문제가 있다면, 알려지지 않은 최초의 인간이라는 게 문제지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