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화
뜬금없는 말이었다.
뱀 새끼라니?
이곳에 있는 그 누구도 뱀과는 관련이 없었다.
뱀파이어를 상징하는 박쥐
늑대인간을 상징하는 늑대
둘 다 뱀과는 관련이 없는 동물들 아니던가?
그때 길가메시의 손가락이 향하는 방향을 바라보던 아르한이 자신을 가리키며 말을 건넸다.
“나?”
“…….”
“…….”
무거운 분위기를 풍기는 상황과 어울리지 않는 어딘지 모를 순박한 말투에 얼어붙은 것일까?
요한과 길가메시는 침묵으로 할 말을 아꼈다.
아르한의 종족은 오크의 친척격인 트리오스.
들창코와 입 밖으로 튀어나온 커다란 송곳니는 누가 봐도 멧돼지와 닮았지 뱀과는 닮은 구석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그때 길가메시가 한숨을 푹 내쉬며 말을 꺼냈다.
“후우- 너 말고 네 뒤에 있는 놈이다.”
“아무래도 저를 지칭하신 것 같군요. 아르한 님.”
동시에 터져 나온 요한의 말에 아르한이 조금은 뻘쭘한 표정을 짓더니 다시 망치를 고쳐잡고 요한의 옆으로 비켜섰다.
일련의 촌극을 살펴본 길가메시는 맥이 빠졌는지 표정을 조금 풀며 재차 요한에게 말을 건넸다.
“뭐, 이제 본론을 말해 볼까?”
“그러시죠.”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한 요한의 말을 들은 길가메시는 너무나 차가워서 오히려 무덤덤해 보이는 눈빛으로 요한을 뚫어져라 쳐다보더니 말을 꺼냈다.
“네 놈을 몇천 년이나 쫓아다녔다.”
“제가 세상에 나온 것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내가 갈 수 없는 곳에 처박혀 있으면서 나를 기만했지.”
“이상하군요. 저는 당신과 원한을 맺은 일이 없습니다.”
“여전히 비겁하고 더러운 녀석이로군. 내 모든 야망을 한순간에 물거품으로 만들어 버리고 꼭꼭 숨어 있으면 내가 못 찾아낼 줄 알았더냐?”
“저는 세상에 나오고 싶었습니다만?”
“네놈을 찾기 위해 허울뿐인 반신의 자리에 오르는 것도 거부했다. 환생도 거부했으며 과거로 돌아가도 결코 내 운명을 바꿀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네 놈이 나오기만을 기다리며 이런 더러운 육신에 빙의해가며 나를 단련해 왔다.”
“……?”
어딘가 모르게 이상한 대화였다.
아니, 대화가 아닌 일방적으로 말을 내뱉는 것에 불과했다.
게다가 요한의 나이를 생각했을 때, 몇천 년이라는 시간은 큰 오류가 있었다.
동문서답과도 같은 이상한 대화를 듣고 있던 아르한이 요한의 귓가에 손을 대고는 조심스럽게 속삭였다.
“말이 통하는 것 같지 않습니다.”
“사실 저도 뭔가 이상하다고 느끼는 중입니다.”
“마치 요한님에게 하는 말이 아닌 것 같습……?”
아르한이 말을 채 마치기도 전 씨익 웃은 길가메시가 요한을 바라보며 말을 건넸다.
“당연히 네놈들에게 하는 말은 아니지.”
“……!”
“나와 나눌 대화가 있지 않으냐? 언제까지 듣고만 있을 거냐?”
그때였다.
[이르카: 제 말을 전해 주시겠습니까?]
[요한: 설마 관리자님에게 말한 것이었습니까?]
[이르카: 사실, 저도 그건 정확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정황상 저와 대화를 나누고 싶다는 뜻인 것 같습니다.]
요한은 이르카의 말을 듣고 이내 조심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요한이 아닌 이르카에게 말을 건넨 것이라면 대화의 초점이 어긋나 보이던 게 완벽하게 맞아떨어지기 때문.
‘그런데 그분을 왜 뱀 새끼라고 부르지?’
여전히 풀리지 않은 의문이 있었지만, 지금은 이르카의 말을 따라야 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길가메시가 뭘 원하는지 알아내는 것이었다.
[이르카: 좋아, 거래하지.]
[요한: 네?]
[이르카: 이 말을 저 녀석에게 그대로 전해주시면 됩니다.]
[요한: 그대로 말입니까?]
[이르카: 네, 그대로 전해 주시면 됩니다.]
[요한: ……너무 건방져 보이지 않습니까?]
[이르카: 뭐, 어떻습니까? 저놈이 저보다 어려요.]
[요한: ……일단 알겠습니다.]
요한은 떨떠름한 기분을 애써 감추며, 이르카가 전한 말을 그대로 읊기 시작했다.
“좋아, 거래하지.”
“네놈이 무슨 수로?”
“꼬우면 말든가…….”
“허세를 부리는군.”
“허세는 네가 부리고 있는 거 아닌가?”
“감히! 본좌가 허세를 부리고 있다고 생각하느냐?!”
쾅-!
연이은 도발적인 말투에 화가 머리끝까지 차오른 듯 길가메시는 땅을 발로 내리쳤다.
쩌적-!
곧 지진이라도 난 듯 땅이 흔들렸고, 길가메시가 찍은 땅에서 커다란 균열이 일어났다.
가공할 힘이었다.
길가메시의 표정은 잔뜩 일그러졌지만, 전심전력으로 내려친 힘이 아닌 것이 분명했기에 그가 가진 힘의 한계가 어느 정도인지 감도 오지 않던 그때.
이르카의 메시지를 받은 요한이 침착하게 말을 건넸다.
“넌 나를 죽일 수 없어.”
“……!”
“만약 나를 죽여서 가져갈 수 있는 것이라면 지금 한 발길질이 애꿎은 땅이 아니라 나를 향해야 하겠지.”
“이놈이!”
“내가 틀렸나? 계약자가 관리자의 시선을 막을 수 있다는 건 나도 처음 안 사실이지만, 그런 힘을 가지고 있으면서 몇천 년을 떠돌아다니면서 찾아다니며 기회를 노렸던 자가 이렇게 대화를 시도한다?”
길가메시의 표정은 가설이 사실이라는 것을 방증하듯 똥을 씹은 것처럼 변했다.
주도권을 잡았다고 생각한 이르카는 마침표를 찍었다.
“바로 강제로 빼앗을 방법이 없다는 것.”
“…….”
정곡을 찔렸을까?
길가메시는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그 모습을 본 이르카는 승리했다는 확신을 하고 이 설전을 마무리를 지으려고 했고, 이르카의 말을 대신 전하고 있기에 그 둘의 대화를 한발 물러서 볼 수 있었던 요한은 어딘가 모르게 불안했다.
패배감? 아니면 모욕감? 그런 표정이 아닌 마치 비웃음이 섞인 듯한 오묘한 표정을 지은 길가메시를 바라보고 있을 때.
갑작스레 고개를 치켜들더니 희번덕거리는 눈으로 요한과 그 주변에 쭈뼛거리며 서 있는 인물들을 바라본 길가메시가 조소를 날리며 말했다.
“큭, 그래 모두를 살려 둘 필요는 없지.”
“……!”
“네놈의 관리자가 아까 말하지 않았던가? 내겐 네놈만 필요하다.”
“설마?”
“그래, 네놈을 제외하고 이 세상을 멸망시켜도 상관이 없다는 뜻이지.”
그의 말을 들은 요한은 자신의 불안감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파즈즈-!
작은 빛이었다.
하지만 그 작은 빛은 곧 세상을 감쌀 기세로 순식간에 부풀어 올랐다.
쿠우웅-!
길가메시의 손아귀에서 순식간에 퍼져나오는 가공할 힘의 파동에 휩싸인 공기가 마치 폭죽이 터져나가듯 한 소리를 거칠게 내뿜자 주변은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세… 세상에…….”
“오, 신이시여!”
요한을 둘러싸고 있던 늑대인간들은 압도적인 힘의 파동에 경악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천 년을 넘게 땅에 뿌리를 내리고 살아가던 거목이 지푸라기처럼 뽑혀 나가고 거대한 산이 휘청거리는 가공할 힘은 요한이 그동안 보여 준 기적과도 같은 일들이 마치 한여름 밤의 꿈처럼 아니, 반딧불의 등불처럼 보일 정도였으니까.
대적 불가라는 말이 이렇게 잘 어울릴 수 있을까?
그때였다.
“원죄는 내가 갚아야겠지.”
뚝-!
요한의 입에서 원죄라는 말이 나오자 조금 전까지 거칠게 휘몰아치던 힘의 파동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고개를 숙이고 있는 요한과 그런 요한을 미묘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는 길가메시를 모두가 숨을 죽이며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오랜만이구려 인류 태초의 왕이여.”
“그래, 빌어먹게 오랜만이다. 뱀 새끼야.”
* * *
저건 요한이 아니다.
아마도 요한의 안에 잠들어 있던 유다의 영혼이 깨어난 것이겠지.
그런데 왜?
유다와 길가메시 사이에 접점은 없을 텐데?
또, 왜 유다를 뱀이라고 부르는 거지?
수많은 의문이 머릿속을 감싸 왔고 그 의문을 풀 방법은 내가 말하지 않아도 되는구나.
“길가메시와 뱀! 찾았어요! 먼 옛날 불로초를 찾은 길가메시가 잠깐 쉬고 있을 때 뱀 한 마리가 그 불로초를 먹었다고 나오는데… 이거 맞겠죠?”
“그러면 그 뱀이 유다라는 건가?”
“그게 아니면 지금 이 상황은 설명이 안 되는 상황이잖아요?”
“그렇지…….”
머리가 터질 것 같다.
안 그래도 죽은 줄 알고 있다가 갑작스레 나타나서 복수를 외치는 에루실라에 또 조용히 있던 길가메시가 갑자기 우리를 방해하기 위해 빙의부와…….
어? 빙의부?
내가 왜 이 생각을 미처 하지 못했을까?
다급하게 요한의 정신을 장악한 채 오묘한 표정으로 길가메시를 바라보고 있는 유다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이르카: 유다님! 저 이르카입니다! 제 말 들리십니까?]
[유다: 이거 오랜만입니다. 이르카 님. 제가 세상 밖으로 나오면 이런 일이 생길 줄 알았건만… 미리 말씀드리지 않은 제 잘못이 크군요.]
[이르카: 지나간 일은 지나간 일입니다! 지금 급한 불부터 꺼야죠!]
[유다: 과연 그 불이 꺼질까요?]
응? 이게 또 무슨 소리일까?
그때 경악하는 안젤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 이르카님! 관, 관리 신이 나타났어요!”
빌어먹을 지금 타이밍에 왜 갑자기 관리 신이 나타났다는 거야?
길가메시가 나타날 때도 가만히 있던 작자가 왜 나서는 건지 이해가 안 되는데?
이젠 내가 컨트롤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섰다.
관리신이 직접 나타난 이상 신들의 유희는 끝났다고 봐야겠지.
[최초의 버림받은 자가 관리 신의 개입에 언짢은 기분을 표합니다.]
[지옥의 명판관이 관리 신의 개입에 불만을 표출합니다.]
[천계의…….]
셀 수 없이 밀려드는 메시지를 바라보자 헛웃음이 절로 났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회의감이 아닐까?
신의 힘이라는 건 절대적이다.
아무리 강한 회귀자나 빙의자라고 해도 감히 신의 뜻에는 거를 수 없는 법.
반신인 나조차도 신의 힘에는 거역하지 못한다.
그 정도로 힘의 격차는 명확하니까.
그때였다.
거대한 몸을 형상화한 관리 신이 길가메시와 요한 일행들을 내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나는 이 행성의 관리 신 크리샨…….]
[꺼져라.]
[……?]
[꺼지라고 했다.]
어찌 저렇게 오만할 수 있다는 말일까?
길가메시의 힘이 아무리 강해도 자신이 관리하고 있는 구역에서 관리 신의 힘은 상상을 초월한다.
몇천 년간 유다를 찾기 위해 빙의를 해 온 녀석이 영구적인 소멸을 원하지는 않을 텐데 의도가 뭐지?
[네놈이 감히……!]
[사라져라.]
쾅-!
거대한 폭발음이 들림과 동시에 수많은 메시지가 쏟아져 내렸다.
[명계의 파수꾼이 화면이 끊겼다면서 불같이 화를 냅니다.]
[아칸다의 수호자가 흥미진진한 전개에 이게 무슨 사고냐며 길길이 날뜁니다.]
[검은 바다의 신이 의도적으로 끊은 거면 빨리 내보내라고 재촉합니다.]
읽을 시간도 없이 미친 듯이 올라가는 메시지들.
하지만, 메시지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눈 앞에 펼쳐진 비현실적인 광경에 나도 모르게 입에서 얼빠진 소리가 절로 나왔다.
“어?”
길가메시와 요한이 나오고 있는 화면에서 관리 신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때 화면에서 길가메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거기 너, 네놈의 이름이 이르카… 아니, 이르카시우스 맞나? 내가 기억하고 있는 놈이 맞는지 모르겠군.]
[……!]
어떻게 내 이름을 알았을까?
아니, 그건 지금 중요한 게 아니다.
잠자코 녀석의 말을 기다렸다.
[네놈은 신을 믿나?]
[신을 믿냐니… 그게 무슨 헛소리지?]
[하긴, 방금 사라진 놈도 신이라고 떠들어 대는 인간들이 이렇게 널려 있는데 네놈이 믿지 않을 리가 없겠지.]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냐?]
길가메시는 마치 숨을 고르듯 하늘을 조용히 응시하더니 충격적인 말을 건넸다.
[난 신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봤다.]
[……!]
[너도 잘 알 텐데? 저런 가짜 신은 결국 인간의 피조물일 뿐이라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