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화
이르카가 복잡미묘한 감정을 추스르고 서둘러 중간계로 복귀하고 있을 시각.
길가메시라는 강대한 적을 맞이해 요한과 아르한이 고군분투를 벌이고 있는 7 아르카니아.
이곳에 드리운 암울한 현실을 방증하려 하는 것일까?
하늘에는 밝은 보름달이 떠올라 있었지만, 땅에는 어두운 구름에 가려져 힘겹게 새어 나오는 희미해진 빛만 차분히 내려앉아 있었다.
뚝-
풀벌레마저 그 두려움에 숨을 죽이고 있는지 고요한 적막만이 가득하던 평원의 침묵을 깬 것은 자그마한 나뭇가지가 부러지며 내는 작디작은 비명과 같은 소리였다.
귀뚤- 귀뚤- 찌르르르-
사방에서 울려 퍼지는 귀뚜라미 소리에 그보다 더 어두운 동굴의 흙을 살피던 잿빛 머리에 달빛을 그대로 반사하는 황금색 갑주를 걸친 사내가 몸을 일으켜 조용히 입을 열었다.
“떠난 지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았군.”
“…….”
그가 뿜어내는 공포스러운 분위기에 압도당한 것일까?
마치 그를 호위하듯 서 있던 똑같은 복장을 한 자들은 쭈뼛쭈뼛하며 침묵만을 지키고 있었다.
그 분위기를 느낀 것일까?
이내 그들을 한번 쭉 둘러본 사내는 미간을 구기며 답답함을 토로하듯 말하기 시작했다.
“한심한 녀석들, 네놈들은 내가 이런 걸 일일이 찾아 줘야 하는 것이냐?”
“…아닙니다. 단장님.”
“쯧, 얼마 가지 못했을 것이다. 그 쓸모없는 콧구멍을 다 잘라 버리기 전에 어서 찾아라!”
“넵!”
황금색 갑주를 입은 자들이 도망치듯 자리를 뜨려고 할 때 명령을 내린 사내는 재차 미간을 찌푸리며 말을 툭 하니 내뱉었다.
“네놈들, 방향은 알고 찾아가는 거냐?”
“……!”
화들짝 놀란 황금색 갑주를 입은 자들을 한심한 표정으로 바라보던 사내는 귀찮다는 듯 손을 휘휘 내저으며 꼴 보기 싫다는 듯 재차 명령을 내렸다.
“쓸모없는 것들.”
“…죄, 죄송합니다!”
“애초에 죄송할 짓을 왜 하느냐?”
“…….”
“왜 대답이 없느냐? 지금 내게 반기를 드는 것이냐?”
“아닙니다!”
“무능한 잡종 놈들.”
“…….”
사내의 연이은 갈굼에 황금색 갑주를 입은 자들의 넋이 서서히 몸에서 탈출하고 있을 때.
그들을 구원해 주는 목소리가 있었다.
“저희가 무능해서 죄송합니다. 태양신의 구원자시여, 아직 깨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미숙함이 많으니 아량을 베풀어 주시길 바랍니다.”
다른 이들을 대표해 앞에 나선 눈처럼 하얀 장발의 머리를 가진 여인을 흥미로운 눈빛으로 잠시 쳐다본 사내는 이내 귀찮다는 듯 손을 휘휘 저으며 말했다.
“네년의 말을 들어 이번에는 특별히 내 아량을 베풀어 주마.”
“감사합니다. 구원자시여.”
“흔적을 쫓아 서쪽으로 가거라. 나는 태양신에게 이 일을 보고해야 하니 곧 뒤따라가겠다.”
“알겠습니다! 태양의 가호가 있으시길!”
“태양의 가호가 있으시길!”
마치 복명복창을 하듯 단체로 태양의 가호를 외치고 사라진 태양 기사단을 바라본 사내 길가메시는 가소롭다는 듯이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태양은 개뿔, 내가 제우스와 아폴론 놈의 농간에 놀아나 줄 수는 없지.”
이내 고개를 돌린 길가메시는 묘한 흥분감을 얼굴에서 감추지 못한 채 북쪽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 * *
길가메시가 요한과 아르한 일행을 찾아 걸음을 옮기던 시각.
중간계에 서둘러 돌아온 뒤 가장 먼저 찾은 곳은 카르나티우스 님의 신전이었다.
어딘가 모르게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카르나 님의 표정을 살피다 조심스레 말을 건넸다.
“카르나 님.”
“말하렴.”
“어떻게 된 일일까요?”
“이르카야…….”
“에루실라 맞죠?”
“그건… 말해 줄 수 없단다. 내 대답은 네가 찾아야 한단다.”
복잡미묘한 표정을 지으며 처음으로 내 질문에 회피하는 카르나 님을 바라보자 어딘가 모르게 울화가 치밀어 올랐다.
분명 그때 말하지 않았던가?
사망한 루데린의 영혼을 찾을 수 없었고, 에루실라는 명목상 행방불명이지만 심각한 타격을 입은 행성이 생명체가 살 수 없는 행성으로 변모하면서 사실상 사망한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그때 영혼을 찾을 수 없다는 것에 의아함을 느꼈지만, 영혼이 소멸하는 경우는 빈번히 있었고 루데린과 에루실라 또한 그렇게 소멸당했다고 생각하고 살아왔다.
하지만, 신적인 존재라 할지라도 제 주인의 손에만 들리던 명월(明月)을 들고 있는 여인을 보았을 때.
직감적으로 느꼈다.
그녀는 에루실라가 맞다고.
또, 내 원죄가 아직 지워지지 않았다고 말이다.
후우-
답답한 마음을 조금이라도 해소하기 위함일까?
자연스레 한숨이 흘러나왔다.
하지만, 무엇인가 속에서 꽉 막힌 것 같은 기분은 전혀 나아지질 않았다.
여기서 더 물어보는 것은 무의미하다.
카르나 님 역시 답하기 어려운 상황이 분명하다.
하지만, 답답함은 무의미한 질문을 무의미하게 반복하게 만든다.
“그 아이와 같이 왔던 남자는… 루데린인가요?”
“…그것 또한 네가 찾아야 하는 문제다.”
“제가 할 말은 아니지만, 신께서는 정말 잔인하시네요.”
나도 모르게 모순이 가득한 말을 내뱉고 뒤돌아서려고 할 때였다.
“이르카야, 너도 누군가에겐 신이란다.”
“…….”
카르나 님의 말에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아니, 할 수가 없었다.
자연스럽게 얼굴이 엉망진창으로 일그러지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거울로 바라보지 않더라도 내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하나도 궁금하지 않을 표정을 짓고 있을 것이 뻔했다.
그때 카르나 님의 말이 비수가 되어 날아왔다.
“우리는 그걸 잊으면 안 된단다. 우리는 모두 누군가에겐 신이라는 사실을 말이야.”
“전 아직 신이 된 적은 없습니다.”
아주 자그마한 반항의 표출이었다.
머리로는 이해가 갔지만, 아직 가슴이 받아들이지 못하는 상황에서 표출할 수 있는 최소한의 반항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이어진 말은 내 마지막 반항을 아주 가볍게 제압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니?”
“…….”
그렇다.
아니다.
그 어떠한 대답을 내릴 수 없었다.
남들에게 추앙받고 이름이 알려진 신인가?
누군가 물어본다면 아니라고 당당하게 대답할 수 있다.
하지만, 남들에게 저항할 수 없는 초월적인 힘을 행사한 적이 있는가?
누군가 재차 물어본다면 그렇다고 대답해야 하는 것이 옳다.
신은 잔인하다.
그것은 나에게도 해당하는 말이었다.
내 일은 회귀자들을 관리해서 포인트와 카르마를 얻는 일이지만, 그들이 일으킨 사고로 다른 신들에게 여흥 거리를 제공하고 그들이 뿌리는 포인트를 확인할 때 즐거워했던 것은 바로 나다.
과거의 안 좋았던 기억을 떠올리게 했다는 이유만으로 누군가를 죽이고 손해를 끼친 것도 바로 나다.
회귀자들의 기행과 좌절을 보며 즐거워하는 신들의 모습을 보며 왜 저게 재밌을까? 라고 생각하던 시절도 있었다.
결국, 그들과 똑같이 즐거워하며 포인트와 카르마의 노예가 되어 버린 내 모습을 망각했다.
다른 생명을 가진 생명체들의 슬픔에는 별다른 신경을 쓰지 않던 자들이 바로 신이다.
그들 가운데 내가 있었다.
“잠시 소중한 것을 망각하고 살아왔네요.”
“이르카야. 누구나 주어진 시련을 극복해야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는 법이란다.”
“오늘, 건방진 모습을 보여서 죄송합니다.”
“괜찮단다. 그런데 너 지금 여기서 이럴 시간이 없는 것 같은데?”
“네?”
“너에게 주어진 시련은 아직 네 일이 아니잖니.”
“……?”
카르나 님이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걸까?
급한 일은 다 처리해 놓고 왔는데 또 무슨 일이 있다는 것이지?
그때였다.
통신 창이 열리더니 안젤라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젤라: 이르카 님! 지, 지금 어디 계신 거예욧!]
[이르카: 응? 나 잠깐 카르나 님 만나 뵈러 간다고 말하고 왔잖아.]
[안젤라: 아, 아무튼 지금 길, 길가메시……!]
[이르카: 어? 길가메시?]
[안젤라: 기, 길가메시가 요한 님 계신 곳에 찾아왔다고요!]
[이르카: 뭐?!]
이런 젠장.
녀석이 벌써 찾아왔다고?
이쪽은 아직 길가메시를 상대할 방법이 없다.
정확하게는 방법보다 준비가 안 되어 있다고 봐야 맞는 거겠지.
이거 큰일 났는데?
* * *
이르카가 눈썹이 휘날려라. 자신의 사무실로 뛰어가던 시각.
나른한 표정을 지은 잿빛 머리의 사내 길가메시는 바위에 걸터앉은 채 경계하는 요한과 아르한 일행을 쭉 둘러보며 말을 건넸다.
“오늘은 싸우러 온 거 아니라니까? 그렇게 무서워할 필요는 없어.”
“…….”
길가메시의 싸울 생각이 없다는 말에도 무겁게 가라앉은 공기가 요한 일행을 옥죄어 왔다.
길가메시가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요한을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아버지의 원수! 죽고 싶어서 온 것이냐!”
“아, 아가씨!”
뒤쪽에 있던 베아트리체가 날카로운 손톱을 꺼내 들고 길가메시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고, 파히르는 그녀를 필사적으로 만류했다.
힘에서 그녀를 이기지 못한 파히르가 질질 끌려갈 때.
그녀의 모습을 보고 골똘히 무엇인가를 생각하던 길가메시는 손뼉을 치며 새로운 사실을 알았다는 듯한 재밌는 표정을 짓고는 그녀에게 말을 건넸다.
“너, 나한테 덤빈 그 늑대 놈의 딸이구나?”
“네놈!”
“쯧, 본좌는 네년에게 네놈 소리 들을 정도로 어리지 않단다.”
“이익……!”
다급하게 달려온 아르한이 베아트리체를 제압하고 난 뒤.
화를 참지 못하고 씩씩거리고 있는 베아트리체를 물끄러미 바라본 길가메시가 말을 툭 꺼냈다.
“나는 모든 이들의 왕이다. 내가 여기 와서 왜 쓸데없이 늑대랑 박쥐들을 죽이고 다니겠어? 귀찮게 말이야.”
“……!”
오만한 말이었다.
하지만, 그에게선 말도 안 되는 오만함이 용서될 수 있을 정도의 강한 힘이 느껴졌다.
요한은 생각했다.
지금 그와 맞서 싸운다면 승률이 어떻게 될까?
그러나 이내 생각을 정리했다.
천만분의 일 확률로 승리를 거둔다고 해도 많은 이들이 죽을 것이다.
또한, 강자의 여유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가 이곳에 왔다는 것은 대화를 나누고 싶다는 뜻이 담겨 있었다고 생각했다.
이미 이르카에게 그가 누군지 들은 상황.
요한이 세상에 태어나기도 전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왕의 위치에 올라섰던 그였다.
요한은 다른 이들의 걱정스러운 눈빛을 한 몸에 받으며 앞으로 나서 말을 건넸다.
“위대한 서사왕 길가메시 님께서는 이곳엔 어찌해서 오신 겁니까?”
“호오? 관리자에게 들었나 보군.”
“그렇습니다.”
그제야 흡족한 표정을 지은 길가메시는 하늘을 바라보더니 손가락을 튕겼다.
딱-
의문스러운 행동에 모두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그를 바라보고 있을 때.
쩌적-!
요한과 아르한을 제외한 모든 이들이 마치 시간이 얼어붙은 듯 꼼짝도 하지 않고 멈춰 섰다.
“이, 이게 무슨!”
“요한 님! 물러나십시오!”
요한의 신변에 이상이 생길 수도 있다는 생각에 아르한은 황급히 그의 앞에 달려와 망치와 방패를 들고는 경계 자세를 취했다.
서늘한 공기가 아르한의 볼을 감싼 지 얼마나 되었을까?
무언가를 기다렸다는 듯 한참 동안 손가락을 접으며 시간을 세고 있던 길가메시가 땅으로 내려오더니 하늘을 바라보며 말을 건넸다.
“어이! 거기 관리자도 듣고 있지? 이 정도 기다려 줬는데 듣고 있지 않으면 직무 태만이야!”
자신을 지켜보고 있을 이르카한테 말을 건넨 길가메시는 재차 말을 마저 이었다.
“아, 걱정하지 말라고 나를 이곳에 보낸 멍청이들은 못 보는 장면이니까.”
충격적인 말이었다.
관리자가 못 보는 빙의자라는 말은 곧 그가 관리자의 힘을 앞선다는 소리였다.
요한과 아르한이 경악을 금치 못하고 있을 때.
길가메시는 요한을 똑바로 바라보며 빙긋 웃더니 말을 건넸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정말 반갑다, 뱀 새끼야.”
“……?”